1196. 2학년2학기-11-
* * *
"알겠지? 넌 그렇게만 해주면 돼."
"잠시만요···. 근데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비밀리에 작전을 하달한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위험해?"
"아, 아니···. 만약 들키게 되면 박 실장한테 저 진짜 죽는다고요. 그 사람 10원짜리 한 개도 빠짐없이 계산하는 사람이거든요. 아저씬, 사채업자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죠?"
가까이서 그들을 관찰해 온 김양은 그들이 얼마나 비정한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놈들은 한번 물면 놔주지 않는 독종이에요. 사람을 자살할 때까지 괴롭히고선, 나중엔 장례식장에 따라가 조의 금까지 뺏어 오는 놈들이라니까요?"
"하여간 쓰레기 같은 놈들."
"사람 협박하는 건 놈들한텐 일도 아니에요. 그놈들 때문에 신세 망친 여자들도 여럿 봤고요."
"넌 왜 그럼 그런 걸 알면서도 거기서 계속 일하는 건데?"
도훈이 정곡을 찌르자 김양도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푹숙였다.
"그건···."
"넌 동참하지 않았으니까 아무 관련 없다고 말하지 마.
불의를 방관하는 자도 결국엔 똑같은 죄를 짓는 셈이니까.
안 그래?"
"······."
"아까 내 목적이 뭐냐고 물었지? 내가 이 일을 하려는 건 박차돈 그 개새끼를 엿 먹이고 싶어서야. 그래, 그 정도 금전적 피해를 본들 녀석에게 큰 타격까진 아닐지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열 받게 만들 순 있잖아?"
"그렇죠."
"너도 이제껏 피해 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어차피 나쁜 놈을 골탕 먹이는 건데 뭐 어때서?"
도훈의 교묘한 설득에 김양도 공감하고 말았다.
"아, 알았어요. 해볼게요."
"잘 생각했어. 내가 너 왜 마음에 들었는 줄 알아?"
"예뻐서 그랬다면서요, 아니었어요?"
"눈빛이 선해 보였거든."
"아···."
"진흙탕 속에 한 떨기 꽃이 보이더라고. 딱 봐도 넌 그런 쓰레기들 사이에 있기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니 너도 이번 일만 잘 끝나면 한 몫 두둑이 챙겨서 다른일 알아보도록 해."
"···칫. 아저씨 은근히 멋진 말도 할 줄 아네?"
"아저씨는 무슨. 오빠라고 불럼마!"
비밀 지령을 하달한 도훈이 그녀와 헤어지고 다시 차에 올랐다. 로시가 감탄한 듯 말했다.
[이야, 주인님은 정말 심리전의 대가십니다.]
‘뭔 소리야?’
[김양 말입니다. 어떻게 생판 처음 본 여자를 주인님 편으로 완벽하게 끌어들이실 수 있던 겁니까?]
‘뭐, 근본 바탕은 색계라고 봐야지.’
[색계요?]
‘나를 사랑한 스파이 알지?’
[모릅니다.]
‘내부자를 꼬셔서 이중간첩 임무를 주는 거야. 그 바탕엔 이성적인 매력으로 꼬시는 작업이 깔려있고.’
[주인님이 대물로 김양을 꼬셨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그것 만으론 부족하지. 실질적인 이유야 어쨌든 사람은 명분이 있어야 움직이는 거니까.’
[명분요?]
‘김양도 자신이 하는 일이 조직을 배신하는 일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잖아. 그 이유를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 때문이라고 해버리면 내적 갈등이 심할 거란 말이지.’
[오.]
‘하지만 정의를 위해서다. 너는 알고 보면 선한 사람이다. 그러니 나와 함께하자. 라는 식으로 명분을 제공해 주는 거야. 그러면 확실한 동기유발이 될 테니까.’
[캬! 역시 주인님은 선동과 날조의 대가십니다. 교묘한 술책과 언동으로 사람을 정말 들었다 놨다 하시는 군요.]
‘아니야. 결국 김양을 배신하게 만드는 밑바탕은 결국 색 욕 때문이거든. 그 정도로 시원하게 뚫려봤으니 일이 끝나면 다음에도 내가 보상을 줄 거라는 기대심리가 있을 거야.
’[아주 사람을 가지고 노시는 군요.]
‘어쨌든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거 아냐?’
[근데 좀 어색합니다. 주인님께서 정의를 부르짖으시다니.]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건 민주시민의 본분이랄까. 나도 좋은 놈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나보다 더 쓰레기를 보면 참을 수가 없더라고.’ 다시 차에 오른 도훈은 유유히 박차돈의 사업장을 둘러보다 빠져나갔다. 코앞에서 타겟이 활개 치는 데도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놈들을 놀리듯.
* * *
다음날.
도훈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제 연락처를 준 김양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찾았어요.
"진짜?"
-네, 컴퓨터 비번을 모니터 밑에 포스트잇으로 붙여 놨더라니까요?
무더위 덕분에 차가운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도훈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비번 관리가 허술한 것은 대부분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자료는? 확보했어?"
-뭐가 뭔지 몰라서 일단 장부처럼 보이는 파일은 죄다 U SB에 담았어요. 점심 시간에 배 아프다고 밖에 안 나가고 사무실에서 파일 빼내는데 들키는 줄 알고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수고했어. 그럼 지금은 밖이야?"
-네. 간식이라도 좀 사먹 겠다고 밖에 혼자 나왔어요.
"회사 분위기는 어때?"
-쑥대밭이에요. 어제 아저씨 왔다 간 뒤로 수시로 정부 장이 찾아와서 애들 갈구고 난리도 아니에요.
"웃기고 있네. 그래 가지고 날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김양은 조금 걱정된 다는 투로 말했다.
-근데 아저씨 싸움 잘하는 건 알지만 몸 조심하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부장이란 사람은 진짜 조폭 출신이거든요. 젊어서 사람 죽이고 빵에도 다녀왔다는 소문도 있어요.
"알았다. 알아서 몸 조심할게. 넌 당분간 조용히 잠수타고 있어. 박회장 돌아오기 전까지 나머진 내가 할 테니까."
-네. 이거 USB 는 그럼 어떻게 해요?
"어제 말했던 장소에 놔두면 누가 알아서 챙겨 갈 거야.
걱정마."
-네.
김양과 통화를 마친 도훈은 최번개에게 전화했다. 잔심부름을 처리하는 일에는 그만한 녀석이 없었다.
"번개야."
-네, 행님.
"애 한 명만 보내서 물건 좀 챙겨놔라."
-말씀 하십쇼 행님.
"길음역 4번 출구 락커 보면 USB 하나 있을 거야. 내가 사물함 번호랑 비번 알려줄 테니 챙겨만 놔. 혹시나 안에 든 파일 열어볼 생각은 말고. 보안이 걸린 USB라서 일반컴퓨터에 꽂았다간 안에 든 파일 싹 날아가 버리니까."
-에이, 행님. 제가 행님 물건에 왜 손을 대겠습니까요.
믿어 주십쇼, 행님.
"알았다. 고맙다. 챙겨놓으면 나중에 내가 받으러 갈게."
-네, 행님.
지시를 하달한 도훈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계획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흐아아암!"
방학이 끝나는 마당이라 이렇게 늦잠을 자는 것도 몇 번 안 남았다고 생각하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젠장. 방학 때가 좋았는데.’
[학생의 본분은 공부 아닙니까? 주인님이 대학생이란 걸 잊지 마십시오.]
‘알지. 그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잖아.’
[주인님은 지난 학기 수석까지 하셨잖습니까?]
‘원래 탈환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 거야.’
[네?]
‘1등 타이틀을 지키려면 2학기 때도 죽어라고 공부해야 한다고. 내가 머리가 좋아서 시험 잘 본거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그렇죠. 주인님 말마따나 엉덩이가 묵직해서 얻어낸 결과죠.]
‘그나저나 저번에 먹은 머리 좋아지는 열매는 언제쯤 효과가 나타나? 상당히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여전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능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도 조금은 좋아 졌을 텐데요?]
‘그래? 그럼 이제 100은 넘나?’
[그럴지도···.]
‘호오. 100만 넘어도 중간은 가니까, 뭐.’
방바닥을 뒹굴며 로시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문자가 하나 왔다.
"조소연?"
[그때 그 김변의 내연녀 아닙니까?]
‘내연녀는 아니고, 그냥 비즈니스 관계지.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조소연 : 오빠, 요새 통 연락도 없네? 나만 보고 싶은거? 집을 구해 줬으면 집들이 한 번은 와줘야 예의 아님?
도훈은 김변을 처리하는데 일조한 그녀에게 나중에 집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전망 좋은 집 업적도 해치우는 일석이조의 미션이었다.
-이도훈 : 어, 오랜만. 뭐하고 사냐?
-조소연 : 뭐하긴. 오빠가 건전하게 일하라고 해서 매일 알바중이지.
-이도훈 : 알바? 무슨 알바 구했다고 했지?
-조소연 : 봐봐, 나에 대해선 아무것도 기억 못 하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도훈이 기억을 떠올리더니 곧바로 다시 답장을 보냈다.
-이도훈 : 피씨방! 맞지?
-조소연 : 쳇. 까먹었으면 서운할 뻔?
-이도훈 : 요새도 잘 하고 있냐?
-조소연 : 당연하지. 오빠랑 약속한 게 있는데.
도훈은 무슨 약속을 했는지 까먹었지만, 대충 알겠다고 했다.
-조소연 : 오빠. 저녁에 알바 끝나는데 오늘 맛있는 거 사 줌 안 돼? 집들이겸 해서.
-이도훈 : 저녁에? 그럼 지금 일하는 중이야?
-조소연 : 어. 주간 알바야. 오늘 사장님이 일 생겼다고 갑자기 땜방 부탁했거든. 원래는 저녁 알바 였고.
-이도훈 : 아하.
-조소연 : 맞다. 한 번 놀러와. 우리 가게 이번에 컴퓨터업그레이드 했는데 완전 빨라.
도훈은 자기 알바 하는 곳으로 놀러 오라는 소연의 말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아이고, 내 나이에 무슨 피씨방이냐.’
[왜요? 남자 대학생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1위일텐데요.]
‘난 게임에 재능도 없고, 흥미도 없어.’
[그렇다면 여자 프로게이머를 공략하시면 되겠네요.]
‘재능모방 스킬? 근데 그건 운동재능에 국한되는 거 아니었어?’
[어허. 게임도 엄연히 스포츱니다. E스포츠 모릅니까?]
‘지랄. 무슨 게임이 스포츠야? 그냥 게임이지.’
[예로부터 마우스 볼도 둥근 법이라고···.]
‘됐고. 피방까지 들르는 건 좀 그렇네. 그래도 간만에 소연이 얼굴이나 봐야겠다. 개학하면 시간 맞추기 힘드니까.’
-이도훈 : 오후에 일 좀 보고 갈게. 끝나고 연락해.
-조소연 : 치···. 심심한데, 좀 놀러와주지.
-이도훈 : 내가 피씨방이나 갈 나이냐?
-조소연 : 됐거든? 암튼 오늘 안 보기만 해. 나 진짜 오빠 말 듣고 착실하게 살았는데 진짜 확 삐뚤어져 버릴 테니까.
-이도훈 : 알았어. 집 주소나 남겨놔.
문자를 마친 도훈은 슬슬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소연과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김양이 빼돌린 USB를 받기 위해선 결국 한번은 나가야 했다.
* * *
"여기 아아 하나요."
좌석에 앉아있던 뚱뚱한 손님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도훈과 문자를 마친 소연은 순간 짜증이 났지만, 이내 화사한 미소를 품고 대답했다.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소연이 알바를 시작 한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처음엔 몸을 팔며 쉽게 돈 벌다가 푼돈 받으며 알바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건전한 일로 정당히 돈을 벌다보니 어느새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안해져 있었다.
‘씨뎅, 다른 손님들은 다 카운터와서 받아가는데 저 돼지 새낀 꼭 사람을 불러대?’
물론 까칠했던 성격이 금방 고쳐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영업적인 미소를 지을 줄도 알게된 그녀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혹시 만원 짜리 밖에 없는데 거스름 돈 남겨 주실 수 있나요?"
게임에 몰입 중인 뚱뚱한 손님이 만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소연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으며 돈을 받아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어우씨, 진짜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소연은 금고에서 거스름돈을 챙기다가 텅빈 금전통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휴, 그래. 불쌍한 사장님 한 푼이라도 더 벌게 해줘야지.’
피씨방 사장인 대근은 옆에서 지켜보기 불쌍한 정도로 열심히 일 만했다. 알바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혼자서 2인분 이상을 하는 그였다.
‘근데 한 번씩 주간에 외출을 하신단 말이지?’
일 년 365일 쉬지 않고 일만 하는 대근이었지만, 가끔 그녀에게 주간 대타를 맡기곤 했다. 오늘도 마침 그런 날이었다.
어젯밤 알바를 마치고 집에 가있는데 불쑥 전화가 와서는, 친한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발인이 내일이라 오늘 급히 가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방이라서 밤늦게 출발하면 돌아올 차편이 없다면서.
‘설마 가정도 있는 양반이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닐 테고.’
소연은 이따금 가게를 찾아오는 대근의 지인들을 떠올렸다. 창범이라는 청년은 하도 자주 봐서 이제는 같은 알바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격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정체 불명의 여인.
‘미호라던가? 그 언니 진짜 소름 돋게 예쁘게 생겼던데.’
소연은 대근의 사촌 동생이라고 밝힌 여자를 떠올렸다.
머리가 훤히 벗겨진 대근과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친척이라고 했다.
‘아니야. 남자는 다 똑같아. 친척이라고 구라치는 걸지도 모르잖아?’
물론 소연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림없는 일이라고 씁쓸히 웃었다. 미호라는 여자가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40대 영세 자영업자인 대근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아-. 그나저나 진짜 오늘은 참기 힘드네.’
돈을 예전보다 못 버는 것은 참을만 했지만, 성욕을 채울 수 없게 된 것에 소연은 점점 갈증을 느끼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그녀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 보다, 넘치는 성욕을 풀어내기 위해서 오피일을 해왔던 것 같았다.
‘나를 이렇게 건전한 일을 하게 만들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하여간 두고 봐. 오늘은 아주 작정하고 빨아먹어 버릴 테니까.’
소연은 알바가 끝나고 만나 게 될 도훈을 고대하며 다시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