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3. 2학년2학기-8-
[왠지 주인님답지 않는데요.]
‘내가? 나다운 게 뭔데?’
[원래 주인님은 살짝 혼돈 악 성향 아닙니까?]
‘뭔 소리야? 내가 빌런이라는 소리야, 그럼?’
[아무리 봐도 정의의 사도는 절대 아니죠.]
‘내가 내로남불 경향이 심하고 다소 개인주의자적인 면이 있지만 최소한 악 성향은 아니지. 중립 기어 박으라고.’
[흐음···. 알겠습니다. 아무튼 일을 크게 벌이셨으니 이제 곧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겠군요.]
‘다시 말하지만, 민간인들을 상대하는 건 아무 문제가 안돼. 사채업자 나부랭이 따위가 대체 뭐라고? PK단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더 말리지 않겠습니다.]
차로 되돌아가는 중 도훈은 뒤따르는 사람이 없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얼굴은 언제든 변형 가능하지만, 만에 하나 소유 차량을 들켰다간 번호판 조회 등으로 꼬리를 잡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시. 혹시 차 번호판은 못 바꾸나?’
[갑자기 번호판은 왜요?]
‘생각해보니 요샌 CCTV 같은 게 사방에 깔려 있잖아.
얼굴이야 역용 마스크로 바꾸면 그만이지만, 차 번호는 쉽지 않거든. 저번에 최번개가 차량 조회 해서 사람 찾아내는거 보니까 자칫하면 꼬리를 밟힐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으음. 가능합니다. 착각의 문패 아이템 아시죠?]
‘알지. 방 번호 바꿔주는 거? 요긴하게 써먹고 있잖아.’
[자매품으로 착각의 번호판 시리즈도 존재합니다.]
‘오!’
[1분마다 차량 번호가 자체 갱신되는 시스템으로 절대 차량을 추척할 수 없도록 만들어 줍니다.]
‘갱신되다니? 은행 보안 카드처럼 OTP 시스템 같은 건가?’
[네. 맞습니다. 참고로 OTP 자체가 해당 아이템을 토대로 만들어 진겁니다.]
‘오잉?’
[헤에, 아시면서.]
‘암튼 있다는 거지?’
[네. 번호판 사이즈와 딱 맞는 스티커 형태인데 붙여두시면 시간 지날 때마다 알아서 바뀔 겁니다.]
‘좋아. 구매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켓에서 구매한 ‘착각의 번호판’이 잠시 후 도착했다.
도훈은 주차된 차량 뒤에서 스티커 작업을 끝내고는 잠시 성능을 테스트했다.
처음에는 분명 자신의 본래 번호판이었는데, 1분이 지나자 갑자기 번호판에 적히는 글자와 숫자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변화가 컴퓨터 그래픽처럼 너무 자연스러워 얼핏보면 바뀐 지도 모를 정도였다.
‘엇? 진짜로 바뀌었잖아? 근데 이 번호판은 그럼 누구 거야?’
[현재 시점으로 국내에 등록 되있는 번호판 중 아무거나 랜덤으로 갱신합니다.]
‘대박이네. 진작부터 쓸 걸. 왜 이런 게 있다고 말 안 했어?’
[주인님이 요청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암튼 이것만 있으면 차량 때문에 뒷덜미 잡힐 일은 없겠군.’
도훈은 안심하고 차에 오르더니 갑자기 운전석 의자를 뒤로 끝까지 젖혀두고 벌렁 드러누웠다.
[뭐하십니까?]
‘어. 잠복.’
[네?]
‘벌집을 들쑤셔 놓고 왔으니, 놈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려는 거야. 이 자리에선 햇빛론 출입구가 잘 보이잖아.’
[박회장의 사업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근거리에서 감시 관찰하시려는 거군요. 과연 대담한 전략입니다.]
‘그렇지. 마침 기다릴 사람도 있고.’
[기다릴 사람이라뇨?]
‘지켜 봐. 그리고 잠깐 눈 붙이고 있을 테니까 놈들 움직이면 깨워주고.’
[주인님은 낮잠 주무시고 저는 계속 감시하라는 말씀인가요?]
‘왜? 인공지능도 잠이 필요해?’
[···안녕히 주무시길.]
‘그래, 수고.’ 도훈은 적진 한가운데서 한가롭게 낮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 * *
"워메, 씨벌. 큰 실수 할 뻔했고만."
주차장에서 도훈과 투닥거린 후 최번개의 흥신소 사무실로 돌아온 흑곰은 무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댔다.
"아야, 시원한 물 한 잔 줘 봐라."
"네, 넵!"
번개의 부하가 잽싸게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오는 사이 번개가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야. 아씨, 난 또 사칭하는 줄 알고."
"네?"
흑곰은 자신의 실수를 밝히기 창피했기 때문에 일부러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못 들은 척 했다.
"끄헉. 좀 살 것 같네. 아참, 근데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아, 넵. 조사해 봤는데 치정 문제 쪽은 전혀 아닙니다."
"그래? 확실해?"
"행님. 제가 누굽니까? 이쪽으로 또 빠삭하지 않습니까?
최근 3년간 모든 기록을 샅샅이 뒤져봤는데 여자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서지웅 행님이 은근 공처가 였더라고요."
"아씨, 그럼 뭐지?"
기대하고 있던 흑곰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는 보스의 특별한 명을 받고 형사처럼 일종의 뒷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이는 몇 달 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지웅은 어렸을 때부터 현 석산파 행동대장 태주와 막 역한 사이였다. 어린 시절 한동네에 살았던 그들은 죽마고 우로 자랐고, 후에 태주가 조폭으로 성공하여 조직의 2인자로 올라섰을 때도 여전히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싸움만 잘하던 태주와 달리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지웅은 후에 IT벤쳐 기업의 대표가 되었는데, 몇 년 전 배달앱 서비스로 대박이 나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호사다마였을까.
최근 지웅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절친의 죽은에 슬퍼하던 태주는 그의 죽음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을 찾았고, 이것이 사고를 가장한 살인 사건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아무래도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만큼 주변에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정적들도 많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하여 태주는 개인적으로 사립탐정을 고용하기도 하기도 하고 심복들 몇을 풀어 뒷조사를 시작했는데, 거기 뽑힌 사람이 바로 흑곰이었다.
흑곰은 싸움도 잘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편이라 곰같은 여우로 불리웠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그의 근성을 높이 산 태주는 흑곰을 따로 불러 친구의 죽음을 캐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흑곰은 벌써 몇 달째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했던 치정 관계조차 최번개에 따르면 너무나 깨끗했던 것이다.
"아씨, 뭐지. 혹시 큰형님이 잘못 짚은 거 아닌가?"
"태주 행님께서 말입니까?"
"아무래도 두분이 워낙에 절친한 사이셨으니까. 성공하신 뒤로도 계속 연을 이어가기도 했고."
보통 어렸을 때 절친이라도 나이가 들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면 관계가 멀어지기 마련.
특히 양지에서 성공을 거둔 지웅과, 음지에서 성공한 태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명망이 올라간 지웅의 입장에선 거대 조직을 이끄는 태주와의 관계를 껄끄러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웅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늘 태주에게 똑같이 잘했고, 태주 역시 친구의 성공을 뒤에서나마 응원했다.
"그럴지도요…. 근데 조사를 해보니 서지웅 행님 이분좀 이력이 특이하긴 하더라고요."
"특이하다니? 뭐가?"
흑곰은 뭔가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했다.
"본래 충남 서산 출신이잖습니까."
"그렇지. 큰형님과 부랄 친구니까."
"어렸을 땐 시골에서 난 천재 정도로 불렸고, 후에는 국내 벤처 기업중 독보적인 성공을 일궈냈고요."
"그게 뭐가 특이한데?"
"알아보니 전공이 소프트 웨어 개발 쪽이 아니더라고요."
"엉?"
"대학 시절도 조사해봤는데, 본래는 법학도 였더군요."
"그랬어? 근데 그런 양반이 왜…."
"고시 공부를 오래했다고 합니다. 번번히 낙방해서 한때는 크게 좌절하기도 했고요."
"어쩐지. 큰형님이 가끔 지웅 형님에게 법적인 자문을 물을 때가 있더라고."
"그러다 서른 넘어서 어느날 갑자기 IT 벤처 회사를 차렸고요."
"거기서부터는 나도 알지."
고시를 실패한 지웅은 어느날 갑자기 벤처 기업을 시작한다.
말이 기업이지, 직원도 없이 혼자서 어플을 개발하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웅은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연달아 개발한 어플을 히트 시켰고, 끝내 배달 앱을 선점하면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저도 조사하다보니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특이한 경우더라고요. 고시 낭인으로 전전하시던 분이 갑자기 앱 개발자로 변신했으니 말이죠."
"단순 경영자 같은 거 아니었어?"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사장이 직접 다 개발해야 할 필요는 없고 인재를 뽑아서 경영만 잘해도 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도 초창기 개발된 앱들은 대부분 서 지웅 형님이 직접 만드신 거였습니다. 혼자서 독학으로요."
"으음…."
흑곰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쨌든 그의 죽음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경찰서 쪽 부검결과도 단순 교통 사고로 나왔는데 다소 특이한 점이 있더군요."
"뭔데?"
"본래 사망자 유류품 중에 시계가 있어야 하는데, 나중에 유족들 말에 따르면 그게 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늘 차고 다니던 거라면서."
"시계? 설마 명품이라고 빼돌린 건가? 범인이?"
"아뇨. 단순한 스마트워치라고 했습니다. 메이커를 알수 없는."
"음…."
흑곰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인적 드문 곳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전신 골절로 인한 현장 즉사.
그것이 서지웅의 사망 사유였다.
CCTV도 없었고, 목격자도 없었다. 지웅은 제발로 갔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경찰은 원한관계를 찾을 수 없다며 단순 뺑소니로 처리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시 지갑에는 현금도 잔뜩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시계만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가요."
"이상하긴 해. 그래서 태주형님이 날 보낸 거 아녀. 단순뺑소니처럼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면서."
"근데 아무리 봐도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아본 치정 관계는 깔끔했고요. 부인 말고는 여자가 아예 없더라고요."
"그래. 암튼 수고했다."
흑곰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번개에게 건넸다.
번개가 곧바로 거절했다.
"아유, 왜이러십니까, 행님. 저희 사이에. 저도 비록 말단으로 전전하다 조직을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석산파 출신입니다. 큰 형님 부탁으로 조사한건데 돈을 받을 순 없습니다."
"받어 인마. 애들 배에 가끔씩 기름칠은 해줘야 할 거 아녀?"
최번개는 이미 앞서 도훈에게 큰 돈을 받았기에 욕심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봉투를 받았다.
두께를 보니 대충 100만원쯤 되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혹시라도 뭔가 알아내면 언제든 연락 주고."
"넵."
소득이 없던 흑금이 번개의 사무실을 나왔다.
‘말도 안 돼. 진짜로 우연한 사고란 말이여? 근디 경찰이 아예 손도 못 댄다고?’
우리나라의 CCTV망은 거미줄처럼 연동되어 있다.
사고 현장이 찍히지 않았더라도 사망추정시간을 기점으로 사방의 CCTV를 확인하면 분명 사고차량의 단서가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이 아무리 찾아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조차 없었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사고낸 차량이 사라져버린 것.
‘만약에 이게 청부살인이면, 놈들은 프로 중의 프로일 것이여. 사람 하나 죽이는데 이렇게 감쪽같은 순 없으니께.’
흑금은 풀리지 않는 단서를 찾아 또 다시 거리를 해멨다.
* * *
[주인님]
[주인님, 깨어나십시오.]
로시의 알람에 눈을 떴다. 피곤했는지 나도 모르게 차에서 푹 자버린 것 같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가량 지나있었다.
‘뭔데?’
[놈들이 움직입니다.]
눈을 비비고 박회장의 사업소 입구를 살폈다. 그곳에선 날도 더운데 정장을 빼입은 사내가 우락부락한 덩치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뭔가 지시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나를 놓친 걸 문책하는 모습이다.
‘뭐지? 아까 최실장이란 놈보다 윗급인건가?’
[그래 보이는 군요. 박회장의 오른팔 쯤 될까요?]
‘생긴 것 봐서는 조폭 같아 보이는데.’
나는 길거리에 나와 있는 무리의 수를 눈으로 헤어렸다.
대략 20여명.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순 있지만 대략적인 조직의 규모가 예상이 됐다.
‘박차돈이 지금도 사채업 한다고 했지?’
[네. 서너개 정도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저 사무실에서 깽판 쳤을 때 달려온 놈들이 다섯이었잖아. 최실장 포함해서.’
[네 그렇죠.]
‘어쩌면 저 숫자가 조직의 전부일지도 모르겠군.’
최실장 같은 바지사장을 앉힌 사업소가 3~4개.
그리고 한 사업소당 4~5명.
대충 계산 때려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중간 보스급과 더불어 이게 조직 전체의 규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이 이쪽으로 모이는데 한 시간쯤 걸렸나?’
[네. 주무신 시간으로 보면요.]
‘그럼 사업소 위치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몰려 있다는 거군. 오케이. 여기까진 파악했고.’
내가 무턱대고 깽판을 친 이유는 박차돈 조직의 규모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벌집을 건드리니 정말로 벌들이 튀어나왔다.
[근데 어쩌시려고요? 정말로 저들을 다 때려 눕히시려고요?]
‘아니. 그럴 필요가 있나. 박회장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돈을 잃는 거지 조직원 같은 건 몇 명이 사라져도 눈하나 깜짝 안 할 양반일텐데.’
[그럼 왜?]
‘일단 견적을 내려면 조직 규모는 알아 두는 게 좋으니까.’ 중간보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인원들이 흩어지는 중에 건물 입구에서 젊은 여자가 한 명이 가방을 메고 나왔다. 맨 처음 나를 맞이했던 김양이었다.
그녀는 정장 입은 사내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또각거리는 구두를 신고 이동했다.
‘오케이. 나 찾느라고 오늘 장사 접었나 보구나. 잘 됐다.
늦게까지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나는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