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 2학년 2학기-7-
‘하긴,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더니···.’
도훈은 전생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전생의 이정우는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났다. 심지어 현대의학으로도 시술할 수 없을 만큼 양물마저 무척 작았다.
그랬던 그가 이도훈으로 몇 달 살았다고 이제는 본인의 본 모습이 이도훈이라 여기는 것이었다. 현실은 역용 마스크로 험상궂게 변한 성난 이도훈마저도 전생보다 훨씬 나은데도.
그렇게 수긍하고 다시 거울을 보자 나름 봐줄만 했다.
대학생 이도훈이 훈남에 교회 오빠같은 이미지의 부드러운 미남이라면, 타짜 이도훈은 거친 스타일의 씹상남자 컨셉이었다.
눈빛만 부라려도 사람을 쫄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나름 본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얼굴형도 갸름한 미남형에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못생겼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음,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게다가 사람에 따라 상남자 컨셉이 더러 먹히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흥신소 직원으로 위장한 채 만났던 부잣집 사모 정원이라던가, 혹은 자신을 여전히 사채업자 쯤으로 알고 있는 김변의 비밀 애인 조소연의 경우도 상남자 이도훈을 무척 좋아했다. 결국 진입장벽을 넘기고 나면 얼굴의 생김새보단 밤일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왜 그렇게 히죽거리십니까?]
‘아니. 이 얼굴도 자주 보니 정드는 것 같아서.’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았습니까? 뭣같이 생겼다고요.]
‘어. 좆같이 생겼다고 싫어하긴 했지. 잘생긴 이도훈에서 갑자기 얼굴이 망가지니까 성에 안 차더라고. 근데 이것도 나름 장점이 있는 것 같아.’
[장점이라뇨?]
‘가령 사람들이 얼굴만 봐도 무서워서 슬금슬금 피해간다던가?’
[그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데요. 공포 분위기 연출이잖습니까.]
‘또 여자 중에서도 곱상하게 잘생긴 애들보다 이런 거친 느낌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되게 소수취향 같던데.]
‘암튼,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아. 이번 일할 동안에는 이 얼굴로 다녀야겠어.’
[그거야 주인님 맘이죠.]
‘별칭도 하나 붙였어.’
[뭐라고요?]
‘상남자 도훈. 앞으로 이 버전은 특별히 상남자 도훈이라고 하자.’
[알겠습니다. 기억해 놓겠습니다.]
로시와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도훈은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상가가 밀집한 상업지대였는데, 인도와 차도가 잘 구분되지 않아 차와 사람이 마구잡이로 엉켜 있었다.
"엉망진창이구만."
도훈은 답답한 도로 사정에 짜증이 났는지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차에서 흡연하시게요?]
‘어. 중고찬데 뭐 어때?’ 마침 햇볕을 정면으로 마주한 방향이라 눈이 부셨던 도훈은 선바이저를 내렸다. 그러나 선바이저는 시야를 가려 불편했다. 도훈은 마침 좋은 생각이 났는지 로시에게 말했다.
‘맞다. 나 선글라스 있지 않아?’
[선글라스요?]
‘쓰리싸이즈 스카우터 말이야. 그거 모양 바꿀 수 있다며.’
[네, 맞습니다.]
‘선글라스로 바꿔서 줘봐. 좀 쓰고 있게.’
[알겠습니다.]
로시가 아이템을 전송하자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도훈은 선글라스까지 썼다. 그나마 험악했던 눈매가 감춰지자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 되었다.
"아씨, 누가 냄새나게 담배를···."
그때 밖을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도훈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보고 불평했다. 사람과 차가 동시에 다니는 길이었기 때문에 도훈의 차 옆으로 지나가다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도훈이 아차 싶은 생각에 고개를 내밀어 사과하려는데 선글라스 쓴 도훈을 본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 먼저 사과하는 것이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그는 몹시 당황하더니 골목길로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도훈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갑자기 사과하지?’
[주인님 얼굴 보고 쫀 것 아닐까요?]
‘그래? 내 얼굴이 그렇게 좆같이 생겼어?’
[선글라스까지 쓰시니 무섭긴 합니다. 흡사 조폭 같아 보인 달까요?]
‘그래? 강력계 형사 컨셉인데? 하긴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소린가?’
강력계 형사와 조폭은 겉모습으론 잘 구분 안 된다는 말을 떠올리던 도훈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털어 내더니 로시에게 말했다.
‘가만. 이거 생각 보다 먹어주는 얼굴 이잖아?’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박차돈의 사업소 말이야. 단순히 정찰만 하려고 했는데 한 번 직접 탐문해 볼까 하고.’
[얼굴을 드러내시겠다고요?]
‘뭔 상관이야? 역용마스크만 있으면 천의 얼굴도 가능한데. 들켜도 상관없어.’
역용마스크는 무협소설에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인피면구와 흡사했다. 대단히 정교한 면구는, 실제 사람의 피부로 만든다고 하는데 도훈의 역용마스크 또한 실제와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실제로 안면 윤곽을 변형 시키고 피부를 조절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의 얼굴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린 도훈은 곧바로 박차돈의 사무실로 향했다.
<햇빛론>
2층에 있는 사무실의 간판을 본 도훈이 실소했다.
‘지랄하고 있네. 이름 한 번 유치한 거 봐라.’
[여성우대라고 써있군요.]
‘여성우대가 아니라, 미쓰리처럼 집창촌에 팔아먹으려고 유인하는 거지.’
도훈은 당당히 박회장의 사업장으로 들어갔다. 최번개에 따르면 박차돈은 건물주로 변신한 현재도 바지사장을 내세운 사금융 업체 너덧 개를 여전히 운영중이라고 했다. 햇빛론도 그 중 한 사업소였다.
"어서오세요."
사무실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있던 여직원이 도훈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무척이나 불량한 태도였는데, 진한 화장이나 옷차림만 봐도 얌전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 같았다.
‘뭐야? 저 걸레같은 년은.’
[주, 주인님. 말투가 좀···.]
‘미안. 컨셉 잡느라.’
도훈은 여직원 앞에 서서 위아래로 몸매를 훑었다.
잠시 후 렌즈 안 디스플레이에 여직원의 몸매가 표시되었다.
<32-25-33>
‘몸매는 봐줄만 하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어, 돈 빌리러."
도훈이 옆에 있던 간이의자를 잡아당기더니 다리를 쩍벌려 앉았다. 시건방지게 굴던 여직원은 도훈의 생김새를 보더니 움찔 놀라 옆에 있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시,실장님 불러드릴게요."
도훈이 손을 뻗어 전화를 막았다.
"뭔 실장?"
"아···. 대출 상담받으시려는 거 아니셨어요?"
"니가 하면 되지."
도훈이 처음부터 반말을 툭툭 던지는데도 겁을 먹은 여직원은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실제로 나이도 들어보였고, 인상이 너무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그냥 사무직이라···."
"그래. 사무직이니까 사무 보라고. 너 근데···. 디게 이쁘게 생겼다? 몇 살이니?"
"예?"
도훈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이죽거렸다. 눈매가 드러나자 더 사나워 보이는 인상에 급기야 여직원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저, 저한테 왜 그러세요···."
"뭐가? 나이도 못 물어봐?"
"스, 스물 셋요."
"박기 딱 좋은 나이네?"
"···예, 예?"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설마 행패 부리러 오신 겁니까?]
‘기다려봐.’
도훈의 희롱에도 겁먹은 여직원은 반항도 못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때 안쪽 사무실에서 문이 열리더니 노랗게 염색한 젊은 청년이 걸어 나왔다. 귀에는 피어싱을 하고목 위로 문신이 진하게 새겨진 전형적인 양아치 차림이었다.
"어떻게 오셨을까요?"
"누구요?"
"아, 햇빛론 최실장이라고 합니다. 대출 상담 받으러 오셨나요?"
최실장이라 소개한 사내가 재빨리 명함을 꺼내 도훈에게 건넸다. 그때 도훈에게 붙잡혀 있던 여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커피를 타오겠다고 도망치듯 물러났다.
도훈은 여직원의 씰룩이는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고년 맛깔나게도 생겼네."
"네?"
"아니요. 돈 좀 빌립시다."
도훈이 대뜸 말을 놓자 직원도 슬슬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얼마나요?"
"큰 거 한 장."
"천만원이요?"
"큰 거라고."
"억이요?"
"왜? 안 돼나?"
"저, 손님. 그만한 돈은 저희도 융통하기가 곤란해서···."
"거 존나 쩨쩨하게 구네. 누가 안 갚는대?"
최실장이라는 청년도 도훈이 도가 넘는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굳히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시비 걸러 오신 거면 그만 나가주시죠."
"아니 씨발, 여자들은 무담보로 펑펑 빌려준다더니 나는 왜 안 돼? 남자라고 차별이야?"
"손님.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곤란하면 니가 어쩔 건데?"
최실장은 제법 성깔이 있는 편이었지만, 도훈의 범상치 않은 얼굴과 체구에 살짝 기가 눌려있었다.
‘대체 뭐지 이 새끼? 돈 빌리러 온 것 같진 않아 보이는 데···.’
최실장은 테이블 밑으로 폰을 내려 몰래 문자를 보냈다.
그 사이 도훈은 발광했다.
"씨발, 남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야 사무직. 너 커피 안 가져오냐?"
"예, 예?"
"커피 타러 간다면서 거기서 뭐 하는데?"
"그, 금방 타갈게요."
도훈의 패악질에 최실장도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 나가 주시죠."
"뭐?"
"이만 나가주시라고요."
동료를 부른 최실장이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는지 도훈을 똑바로 쳐다 보며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쫄 도훈이 아니었다. 이젠 대놓고 어깃장을 놓겠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갈 땐 가더라도, 커피 한 잔 얻어 먹을 순 있잖아?"
"이런 씹쌔끼가, 장난하나!"
방심하며 의자에 앉아있던 도훈을 향해 최실장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도훈이 번개같은 속도로 다리를 뻗어 최실 장의 정강이를 찍어 버렸다.
퍽!
"흑!"
최실장은 그대로 앞으로 몸이 무너지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크흑!"
"좆만한 새끼가 어디 어른 앞에서 주먹을 함부로 놀려?
뒤지고 싶냐?"
"으윽, 다, 다리가."
도훈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최실장을 외면하고는 겁먹은 채 쫄아있는 여직원을 재촉했다.
"넌 얼른 커피 타오라니까?"
"네, 네!"
김양은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3류 건달패들이 운영하는 사채업소를 다니니 만큼 험한 꼴을 볼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지만, 도훈처럼 대놓고 사무실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특히 선글라스를 벗어 자신을 노려보던 뱀 같은 눈매를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미, 미친놈한테 하필···.’
김양도 고교 중퇴에 한 때 오봉순이를 했을 만큼 날라리긴 했지만, 그래도 도훈 앞에선 감히 저항할 엄두도 못 냈다. 이곳 업소에서 일하는 사내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가, 강간당할지도 몰라···.’
김양이 덜덜 떨면서 커피를 타고 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떡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최실장을 보고는 어이없어했다.
"왔냐?"
"넌 뭐야 새끼야?"
"최실장, 괜찮아?"
의자에 앉아있던 도훈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떡대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하-. 씨발. 커피 한 잔 얻어 먹고 갈라고 했더니만 존나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야, 여직원."
"네, 네?"
"너 이름 뭐냐."
"이, 이름이요?"
"맘에 들었으니까 이름 말하라고."
"기, 김봉순이요."
"봉순이? 귀엽네."
자신들이 도착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직원을 희롱하는 도훈의 모습에 떡대들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저런 미친 새끼가!"
"야, 일단 조져!"
그러나 언제나 조져지는 건 떡대들이었다.
* * *
"···누, 누구냐 넌. 누가 보냈어?"
"누구긴 누구야? 돈 꾸러 온 사람이지."
"너 이 새끼 어느 조직에서 보냈어?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실컷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운 최실장의 협박에 도훈이 어이없어 웃었다.
"너 아직 덜 맞았냐?"
도훈이 발을 쳐들자 박 실장이 두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놀랍게도 나머지 떡대들은 다들 기절해 있었는데, 용케 최실장만 맨 정신이었다.
"히, 히익!"
"쫄지마 새끼야. 안 때리니까. 너네 사장 언제 한국 들어오냐? 아니 회장이라고 해야 하나?"
"박회장님?"
"그래. 내가 박회장한테 빚을 받을 게 있거든. 한국 들어오면 내가 찾아간다고 전해라. 뒤지기 싫으면 꼼짝말고 있으라고."
"미, 미친 새끼!"
빡!
도훈은 싸커킥으로 최실장마저 기절 시켰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사채업소 구석에는 울먹이느라 화장이 눈가에 번진 김양만이 덜덜 떨고 있었다. 도훈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이쁜이. 넌 내가 따로 연락할게."
"사, 살려주세요."
"안 잡아 먹어 이년아. 나 간다. 괜히 경찰 불러서 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지?"
도훈은 바닥에 널부러져 신음하는 떡대들을 즈려밟더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와 다시 선글라스를 쓴 도훈이 개운함에 기지개를 켰다.
"이야, 오랜만에 운동 하고 좋네."
[주인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무슨 생각이라니? 봤잖아. 시비 걸러 온 거.’
[아니, 박회장에게 타짜로 복수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또 이렇게 대놓고 설쳤다간 그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후후. 알게 뭐야? 상남자 이도훈은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인데.’
[네?]
‘그렇잖아. 놈들이 본 얼굴은 역용마스크로 변신한 이도 훈이지 대학생 이도훈이 아니니까. 마스크를 안 쓰면 찾을 수도 없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뜻이야.’
[아···.]
‘일단 존재감을 알렸으니까 뭔가 반응이 오겠지.’
[그럼 도박은요?]
‘미쓰리가 나에게 부탁한 건 복수였잖아. 그리고 박회장 같은 수전노에게 최고의 복수는 바로 돈을 잃는 거고.’
[그렇죠.]
‘미쓰리는 박회장이 도박을 좋아하는 데다 나를 타짜라고 생각해 그런 의뢰를 한 것뿐이야.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박회장이 돈을 잃는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건 미쓰리의 복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지.’
[그런 해석도 가능하군요. 그렇지만 오늘 일은 좀 너무하셨습니다. 얻어맞은 사람들은 박회장이 아니잖습니까?]
‘응, 정당방위.’
[네?]
‘최실장이란 놈이 날 먼저 때리려고 했다고. 나머지도 마찬가지고.’
[아니, 그런 억지가···.]
‘그리고. 여자들을 사창가에 팔아먹는 일에 저놈들도 일조한 건 마찬가지잖아. 얻어 맞아도 싼 놈들이야, 그렇고말고.’
도훈이 어울리지 않게 정의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