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 2학년 2학기-2-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었을까? 성수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잠시만···. 나가는 중···.
전화기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모습이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후 성수가 평소의 우렁찬 음성으로 돌아왔다.
-어, 도훈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니 이제는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회장님은 무슨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이제 시험 100일도 안 남았잖아.
그가 말하는 시험은 중등고사 임용시험이다. 매년 11월쯤 보는데 이제 8월 말이니 D-100일이 깨진 시점이긴 하다.
"아니 형은 올해 시험도 안치면서 무슨 D-DAY를 세는 건데요?"
성수는 현재 3학년이다. 임용시험은 4학년 졸업 예정자부터 자격이 주어진다.
-인마. 올해 시험 끝나면 바로 다음 타자잖아. 요샌 D데 이를 365일 이전부터 잡는다고.
"그래도 아직 1년 넘게 남은 거잖아요."
-하-. 자식, 임용이 애들 장난인 줄 아나. 1년 공부해가지고 붙을 시험이었으면 날도 더운데 엉덩이 땀띠 나게 도서관에 앉아 있겠냐? 너 형식이형 알지?
당연히 모른다.
아니 원주인과 과거에 인연이 있었다는 정도밖엔.
"알죠, 형식 선배."
-그 양반 우리 1학년 들어왔을 때 임용 재수하고 있었잖아. 졸업했는데 가끔 과 행사 얼굴 비추고. 체육과 남자들끼리 축구 하면 꼭 골키퍼 장갑 들고 와서 껴달라던.
"안다니까요."
-그 형 아직도 공부해 인마.
"아···. 임용 안됐어요?"
-말도 마라. 저번에 우연히 사도에서 만났는데 나한테 그러더라. 넌 지금부터 눈 딱 감고 학과랑 쌩까라고. 괜히 전임 회장했답시고 행사 도와주고 깝치다간 자기 꼴 난다면서. 형식이 형이 삼수해서 우리 과 들어온 것도 아냐?
나는 잘 모르지만 무조건 안다고 했다.
"네."
-우리 과 들어왔을 때가 22살이었고, 중간에 군대 가다고 앞뒤로 휴학하느라 첫 임용 칠 때 이미 28이었잖아. 그리고 우리 1학년 끝나고 군대 갔을 때 임용 재수하고 있었으니까···. 와 지금 그럼 임용만 사수 짼가? 암튼 그 형 나이가 올해로 서른둘이야 인마. 임용 안치고 회사 취업했으면, 진작 결혼해서 애도 봤을 사람이 여태껏 공부하고 있다고. 믿어지냐?
성수는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곧 공개했다.
-그 형도 과 활동 되게 열심히 했었잖아. 회장까지 하면서···.
‘아···. 성수에겐 형식 선배란 사람이 일종의 반면교사로구나.’
[그렇군요. 이제 겨우 3학년이면서 왜 저렇게 벌벌 떠나 했더니···.]
‘하긴 나는 이미 다 겪어 봤으니 덤덤한 거지, 보통의 대학 3,4학년 쯤이면 상당히 위기의식을 느끼는 게 정상이지.’
이제 낭만의 캠퍼스라는 말은 사치다.
아니, 낭만이 살짝 있긴 있다.
새내기부터 대학 2학년 정도까지?
하지만 그 이후론 대부분 동아리건 학과활동이건 담 쌓고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린다. 스펙을 쌓고, 봉사실적도 쌓고, 해외 연수까지 필수코스가 되는 시대다. 토익점수를 올리고 각종 자격증에 6개월짜리 인턴쉽에만 수십 대 일의 경쟁이 몰린다.
하지만 사범대의 경우 일반적인 대학생들과 달리 스펙을 쌓을게 없다. 끽해야 졸업 기준인 토익점수를 채우거나, 한 국사 능력 검정시험 3급을 미리 따놓는 정도?
그리곤 대부분 죽어라 임용에만 올인한다. 평균 경쟁률이 10:1을 넘어가 3대 고시와 더불어 ‘임용고시’라고 불릴 정도로 빡빡한 시험이다.
-맞다. 근데 너 왜 전화했냐?
성수가 뒤늦게 목적을 물었다. 갑자기 진지한 얘기를 꺼내는 통에 그에게 2학기 개강총회에 관련해 묻기가 미안해졌다. 오지랖 넓은 저 성격에 혹시나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준다고 하면, 오히려 내가 말려야 할 판이다. 그에겐 너무 많은 신세를 졌다.
"…그냥 잘 사시나 궁금해서요. 안부 차."
-아침부터 뭐 잘못 먹었냐? 괜히 안 하던 짓을···. 아 밥얘기 하니까 또 배고프네. 밥이나 먹을래? 곧 점심시간인데.
지희의 집에서 나온 게 정오가 다 되었기 때문에 식사시간이긴 하다. 아침은 안 먹고 대신 모닝섹으로 지희를 먹었더니 성욕을 채웠는데 허기는 여태 못 채웠다.
"에이, 형 공부하느라 바쁘신데, 괜찮아요."
-인마. 아무리 빡공은 해도 밥은 먹고 살아야지. 학교냐? 얼른 튀어 와. 학식 사줄게.
성수는 부회장을 은퇴하고도 후배들 챙기는 모습은 늘 한결 같다. 나보다 실제 나이는 어리지만 진정한 의리파에 큰 형님 같은 느낌이 있다. 그에게는 늘 한수 배우는 것 같다.
"형, 그러지 말고 제가 사드릴게요. 맛있는 걸로."
-됐어 인마. 괜히 학교 밖으로 나갔다가 마음 들뜬다. 밖에 나가면 PC방에 당구장에…. 어휴, 그냥 학식이나 먹게.
듣고보니 오히려 외식은 성수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형, 그럼 저 집인데 바로 학교로 갈게요. 20분 뒤에 구내식당 앞에서 봐요."
-그저라.
전화를 끊고, 곧바로 대학으로 달렸다. 개학이 코앞이라 그런지 컴퍼스엔 학생들이 제법 북적거렸다. 급히 차를 주차하고 약속장소로 나가자 성수가 나를 불렀다.
"여어, 왔냐. 아니 오셨습니까 회장님."
"에이씨, 하지 말라니까."
"담배나 한 대 때리자. 너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흡연구역으로 가 성수와 오랜만에 담배를 피웠다.
생각해보니 그와 부쩍 친해진 계기는 오랫동안 나의 담배 메이트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방학은 잘 보냈냐? 얼굴 보니 신수가 훤하구시만?"
"뭐, 그렇죠. 늘."
"놀 수 있을 때 놀아 인마. 솔직히 맘 편히 대학생활 즐길 수 있는 것도 2학년까지가 마지막이야."
"형은 3학년 1학기까지 부회장 했잖아요."
"그러니까. 솔직히 다른 동기들 진작 임용공부 시작했는 데, 과활동하느라 늦게 시작한 거잖아. 나 요새 발등에 불떨어진 기분이다. D데이 하루씩 사라져 갈 때마다 심장이 조마조마하다고."
"거참, 쫄기는. 형 답지 않게."
핀잔을 하면서도 괜히 안타까웠다. 학과에 열성을 다해 충성한 대가가, 다가올 임용에 대한 불안뿐이라니…. 이러니 회장부회장 하겠다는 나선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밥이나 먹자."
다행이 2학기 개장 전이라 구내식당은 한산했다. 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밥을 타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여느 남자들처럼 말없이 우걱우걱 밥을 먹고 있는데 성수가 뜬금없이 물었다.
"낼 모래면 개강이네. 개강총회는 준비하고 있냐?"
성수가 왠지 내 마음을 읽은 느낌이었다.
[오, 성수군에게 독심술 능력이 있는 걸까요?]
‘그냥 지례짐작한 거지. 내가 연락하는 거 보고.’
[참으로 배려심이 깊은 선배군요.]
‘그래서 더 미안해.’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알아서 할게요."
"뭘 알아서 해 인마. 조교 선생님한테 말해서 교수님 스케줄부터 잡아야지. 너 아무것도 안했지?"
"하려고 했어요."
"도훈아."
"네?"
"부담없이 물어봐. 내가 참여는 못해도 알려는 줄 수 있잖아."
"아니에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형 그렇게 공부하시는 줄도 모르고."
"뭘, 잠깐 얘기만 하는건데."
성수는 밥먹는 동안 개강총회로 준비해야 할 주요 포인 트를 알려주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충분히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알겠지? 회장 맡고 첫 공식 행사니 대충하지 말고 제대로 해. 괜히 구관이 명관이니 하는 소리 듣지 말고. 하기야, 우리과 애들이 워낙에 널 잘 따르니 걱정은 안 된다만."
"고마워요, 형."
"고마우면 커피 쏴 인마."
밥은 성수가 내고, 커피는 내가 샀다.
식사를 마치고 담배와 커피를 마시며 내가 불평했다.
"기껏 얻어먹는다는 게 자판기 커피에요?"
"왜? 맛만 좋구만. 난 이거면 충분해."
"이는 잘 닦는 거죠? 커담 후 양치를 안 하면 입 냄새 쩔어요."
"걱정마라. 도서관 라커에 아예 세면도구 세트까지 넣어 뒀다. 졸리면 세수하고 와야 해서."
"거참…. 뭘 그렇게가지."
"암튼 조교선생님이랑 먼저 상의해봐. 학과 행사는 대부 분 조교선생님이랑 합의 맞춰야 해. 교수님이랑 연결고리니까. 넌 뭐 친하게 지내니까 잘 하겠지."
"네."
친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내 밥인데.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성수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맞다. 연애사업은 잘 하고 있냐?"
"여자친구가 있는지부터 물어보시는 게 예의 아닙니까?"
"푸하핫. 니가 뭐 없어서 못 사귀냐. 눈이 높아서 안 사귀는 거지."
"누가 눈이 높다 그래요?"
"학과 애들이 그러더라. 인기는 많은데 눈이 높아서 아무도 안 사귀는 것 같다고. 그러지 말고 너 좋다는 애들 중에서 참한애로 하나 골라잡아 인마. 전역한지가 언젠데 여태껏 솔로야. 그거 쓰긴 하냐?"
성수가 대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제 새벽부터 오늘 아침까지 쉼 없이 쓰고 왔다는 사실을 밝히면 그가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그런건 알아서 할게요. 무슨 바가지 긁는 마누라도 아니고…."
"알아서 못하니까 걱정되서 그렇지. 나도 여친 있는데 넌 사지 멀쩡한 놈이 아직도…."
"뭐, 때되면 생기겠죠."
"노력 안하면 안 생겨요, 이 사람아."
"아 맞다. 영철이 2학기 복학하는 건 아시죠?"
"영철이? 김영철이? 그 바람둥이?"
"어? 아시네."
"나야 알지. 근데 넌 모를 건데? 너 군대 있을 때 신입생으로 들어왔잖아. 난 중간에 의병제대해서 잠깐 봤지만. 걔좀 소문 안좋던데."
"엊그제 잠깐 만났어요."
"벌써 전역했어? 와, 시간 겁나 빠르네."
"그게 아니고 휴가가 꼬여서 말년을 한 달 붙여 나왔더라고요."
"아 그래?"
"저도 대충 듣긴했는데, 생각보단 괜찮던데요. 얼굴도 반반하고."
"얼굴값 하고 다녀서 문제지. 뭐, 근데 남자 선배들 한테는 깎듯 하더라. 과에서 분란만 안 일으키면 좋겠다만."
"무슨 분란이요?"
"걔가 사범대 헌터였어. 다른 과 여자애들 돌아가면서 사귀고. 다행히 우리과는 안 건드렸지만."
"아…. 그래도 군대 다녀왔으니 정신 차렸겠죠."
"원래 남자 아랫도리는 믿는 거 아니다. 잘 컨트롤 해봐.
애가 그래도 나쁜애는 아닌 것 같더라."
"넵."
안 그래도 하는 중이다.
"이런, 너무 놀았네. 나 이제 그만 돌아가 볼게."
"네, 형. 고마워요, 오늘."
"됐어 짜식아. 우리 사이에 무슨."
성수는 그렇게 말하더니 쿨하게 돌아섰다.
역시 언제나 믿음직한 나의 편이다.
내가 여전히 순진하다고 믿는다는 게 웃기지만.
[민주양을 만나러 가봐야 겠군요.]
‘그래야 겠네. 잘 있으려나?’ 마침 학교에 온 김에 강민주나 보고 가야겠다.
* * *
"네, 들어오세요."
체육교육과 학과 사무실은 개강준비로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2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재학생들의 휴학과 복학, 그리고 수강신청 등으로 무척 바빴다.
수업을 준비하는 교수들도 자꾸 들락거리는 통에 민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 도훈 학생왔네?"
보조인 한솔의 말에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민주가 반색하며 그를 반겼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는 생각에 표정 관리를 했다.
"응, 무슨 일이니?"
"아…. 많이 바쁘신가 봐요. 다음에 올까요?"
"아냐, 아냐. 괜찮아."
민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모니터를 꺼버렸다. 도훈이 보조인 한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2학기 개강총회 때문에 상의 드릴게 있어서…."
"아, 그렇지. 도훈이 이제 학회장이구나?"
"네.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하려던 참인데, 잘 됐다."
민주는 한솔이 옆에 있다간 대화가 힘들 것 같아 불쑥 잊고 있던 일을 시켰다.
"맞다. 한솔 샘. 본부에서 우편물 수령해 가라던데, 그것 좀 가져다줄래?"
"이거 마무리는요?"
한솔은 뜬금없이 자신을 심부름 보내는 민주에게 따졌다.
"교수님이 급하게 받아야할 자료가 왔나보더라고. 세미나 참석 자료라고. 그건 퇴근할 때가지만 하면 되니까, 우편물부터 가져와야 할 것 같아."
"네, 알겠어요."
한솔이 학과 사무실을 나서자 민주가 대번에 태도를 바뀌었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주인님. 오신다는 기별이나 해주시지."
"에이, 뭘 또. 엄청 바빠보이는데."
민주가 더듬더듬 책상위의 서류를 치워버렸다.
"아니에요. 다 끝났어요. 학기 시작할 때면 늘 상 하던 일이라."
"방문 타이밍이 안 좋은 것 같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내드릴게요."
민주는 간만에 본 도훈을 상전 모시듯 대접했다. 그에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면 절로 지아비를 보시는 열녀처럼 변신하는 것이었다.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자, 민주가 이내 차를 내었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취향 잘 아네."
"어디 그쪽 취향 뿐이겠어요?"
민주가 맞은편에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바쁜 와중에도 도훈이 온 것이 무척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도훈은 자판기 커피로 텁텁해진 입맛을 아메리카노로 바꿔 마시며 희석시켰다.
"방학은 잘 보내셨어요? 깨톡으로만 연락하셔서."
‘깨톡? 아, 자동응답으로 되고 있었구나.’
[넵. 어장관리 어플의 인맥관리 기능 대상자입니다. 저번에 지속 관리 인원을 대폭 늘리시면서 포함시켰습니다.]
‘그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깨톡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뭔가 실수한 건 없겠지?’
[인맥관리 어플의 인공지능을 모르시는군요.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평소 말투를 99%이상 흡수해서 적절하게 답변을 하니까요. 만약 중요한 대화가 있었으면 리포팅이 되었을 겁니다.]
‘그래? 내가 꼭 알아야할 사항은 없다는 말이지?’
[넵. 민주양이 설사 만나자고 했어도 적당한 핑계로 넘어 갔을 테니까요.]
‘오케이.’
"응. 이제 2학기 되면 자주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