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0. 질투는 나의것-35-
술자리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첫째, 술자리는 눈치 게임이다.
서로 간을 보며 누가 누구에게 호감이 있는지, 알아맞히는 게임이다. 대부분 본심을 숨기고 위장하기 때문에 자신과 작대기가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 게 관건이다.
둘째, 술자리는 예열의 시간이다.
룸살롱이나 보도 뛰는 노래방이 아닌 이상, 술자리에서 뭔가를 시도하려 들면 안 된다. 적당한 음담패설과 경험담정도로 기대감을 충족시킨 뒤 본 게임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사람과 자고 싶다는 느낌을 들게 하면 그걸로 족하다.
셋째, 술자리의 피날레는 단둘이 함께 짝을 지어 나가면서 완성된다. 만나면 헤어지는 법이라고 몇 명이 모인 술자리도 결국 파하게 되면 뿔뿔이 흩어진다. 이때 누가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그날의 승부를 결정 짓는다고 보면 된다.
만약 눈치 게임에서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았고, 사전에 예열을 충분히 해두었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결국 섹스로 귀결된다.
영철은 위의 규칙을 되새기며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
‘도훈이 형은 짝을 제대로 찾았어. 암흑 까페에서 이미 후끈 달궈놨으니 아마 택시는 집이 아닌 인근 모텔로 향하고 있겠지. 결국 오늘 지희랑 자느냐 마느냐는 내 손에 달린 거야.’
어찌 됐건 둘둘로 나뉜 순간 파트너 결정은 끝난 것이다.
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희를 설득해야 한다.
다만 영철은 겉으론 쉬워 보이던 지희가 의외로 디펜스(?)가 강력하다는 점에서 우려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여자들은 참 신기한게 함께 있을 때랑 단 둘이 있을 때랑 전혀 다른 성격이 된단 말이지.’
여자 경험이 많은 영철은 예전에도 그런 사례를 여럿 보았다. 친구들 앞에선 요조 숙녀인냥 내숭에 내숭을 떨던 여자가, 단둘이 은밀한 공간에 남게 되자 발정난 창년처럼 미쳐 날뛴 것이었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희도 단둘이 남게 된 지금 어떻게 변할 지는 예측불허였다. 설사 도훈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고 한들, 시엘이 재빠르게 채간 상황에서 마음을 접지 않고선 못 베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저···. 지희야."
"왜?"
창문을 응시하던 지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살짝 흐트러진 모습이 놀랍도록 뇌쇄적이었다. 도훈에게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라는 걸 조금도 모르는 영철은, 그녀가 피곤하면 색기가 넘쳐 흐른다고 착각했다.
‘오호, 졸리는 모양인데.’
"많이 피곤하니? 어째 가게에서 나온 뒤론 말수가 별로 없네."
"별로···. 할 말 없어서."
지희가 딱 잘라 말했지만, 영철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벼랑 끝에 선 몸이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었다.
"나 사실 제사 아니야."
"응?"
"제사 지낸다고 나온 거 거짓말이라고."
택시에 오른 뒤 무반응이던 지희가 처음으로 영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그녀의 눈이 멍하니 영철을 응시했다.
"왜 거짓말 했어?"
"너랑 단둘이 나오고 싶어서."
"······."
"지희야. 나 솔직히 너한테 반했어. 아까도 말했지만, 넌 ···."
"미안해 영철아. 난 너한테 별로 흥미 없어."
명백한 거절에 영철은 충격을 받았다. 단 둘이 있으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지희는 정말로 그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이, 이게 아닌데.’
하지만 영철은 포기를 모르는 사나이.
한번 찍어 넘어가지 않으면 열 번, 백번도 찍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음. 그래. 뭐, 아직 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계속 지내다 보면···."
"나는 너랑 계속 지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안 들어. 왜 그래, 아마추어처럼?"
‘으읏!’ 영철이 재차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보통 이 정도로 사정하면 인정상 들어주기 마련이거늘 지희는 보기보다 칼같았다.
지희가 계속 말했다.
"김영철. 너는 네가 싫은 여자가 너 좋아한다고 조르면 만나주는 타입이야?"
"···그, 그건. 가끔 그럴수도."
"미안하지만 난 전혀 아니야. 솔직히 말할게. 내가 남자를 밝히는 건 맞는데, 넌 내 타입이 아냐."
"뭐가 아닌데?"
"뭐?"
"아니, 거절 당하는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영철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힐끔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영철에게 있어 이름도 모르고 다시 볼 것도 아닌 택시 기사에게 쪽팔리는 것은 아무일도 아니었다.
자존심을 내려놓은 영철의 태도에 지희가 진지하게 말했다.
"진짜로 듣고 싶어?"
"어."
"상처받아도 난 몰라."
"그딴 거 신경 안 써. 적어도 내가 부족한 점은 알 수 있잖아. 다음에 그런 실수 하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말해줘."
"······."
지희는 피곤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는 영철을 바라보았다. 생긴 것과 달리 의외로 근성이 끈질긴 아이였다. 그래서 더 질리는 것일지도.
‘···남자가 쿨하지 못하게.’
오히려 지희의 입장에선 영철이 쿨하게 물러섰으면 일말의 여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쓸데없는 근성을 보임으로써 그나마 남은 정도 뚝 떨어져 버렸다. 지희는 그런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니까 나도 솔직하게 말해줄게."
"응. 들을 준비 돼 있어."
"너랑 있으면, 안 꼴려."
"······."
"조금도 안 젖는다고."
"그, 그게 무슨···."
"난 말이야, 남자를 고를 때 기준이 하나야. 이 남자랑 자고 싶다.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을 찾아."
"내, 내가 그렇게 별로야? 내가 혹시 못 생겼···."
"아니. 잘생겼어. 근데 잘 생긴게 뭐? 섹스를 얼굴 보고 하니? 다른 여자들은 몰라도 난 아니야."
아무리 멘탈이 강한 영철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몰래 엿듣던 택시기사는 내용이 심각해 지자 아예 신경을 꺼버리고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다. 과연 베테랑다웠다.
"그, 그럼 왜 물어본 건데!"
"뭘?"
영철이 평정심을 잃고 소리쳤다.
"나보고 그랬잖아. 아까, 까페에서. 아니 술집에서. 아무튼 그랬잖아!"
흥분한 영철은 동어반복에 말까지 더듬으며 정갈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그니까 뭐?"
반면 지희의 눈동자는 어느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일말의 동정도 없는 싸늘한 눈빛이었다.
"나보고! 섹스! 잘하냐고! 왜 물어봤냐고!"
"큼큼!"
이쯤에서 택시 기사도 참을 수 없었는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자꾸 섹스섹스거리는 걸 듣고 있자니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지희도 마찬가지로 쪽팔렸다.
아니다 싶더니, 하는 짓이 역시 사람을 창피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게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어? 난 원래 남자들한테 가끔 물어봐. 꼭 네가 아니라 도훈 오빠가 내 옆에 앉았어도 물어봤을 걸?"
"아, 아니···."
영철은 이제 자포자기 상태였다. 누군가 옆에 친한 친구가 있었으면 취했다고 뜯어 말리고 싶을 정도로 추한 모습이었다.
"설마 도훈이 형 때문이야?"
"···뭐라고?"
정곡을 찔린 지희가 움찔 놀랐다. 영철은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맞네. 도훈이 형이네. 여전히 도훈이 형을 마음에 두고 있어. 그래서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영철은 지희가 자신의 마음을 안 받아주는 이유를 도훈에게서 찾았다. 스스로가 차마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는 대답을 납득 할 수 없었기에 다른 이유를 찾아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지희와 잘 되긴 글렀으니 차라리 지희에게 상처를 주고 소금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도훈이 형 이미 시엘 누나랑 모텔 입성했어."
"뭐?"
"아까 화장실가서 다 얘기했다고. 나는 너랑 헤어지고, 도훈이 형은 시엘 누나랑 같이 찢어지기로. 둘이서 지금 뭐하고 있을 것 같아? 꿈 깨라고 진짜."
"와···. 너 진짜."
지희는 영철이 너무 쪼잔하게 느껴졌다.
정말이지 방금 보여준 태도는 그녀가 만났던 모든 남자 통틀어서도 찌질 원탑이었다.
‘어후, 저 멍청이. 그래도 도훈 오빠는 자기 후배랍시고 어떻게든 상처 안 받게 배려해 주는데···.’
도훈과 몰래 깨톡을 주고받았던 지희는 영철의 말이 홧김에 터진 음해라고 확신했다. 결정적으로 도훈은 암흑 까페에 있는 내내 자신을 위로해 줬는데, 그 사이에 무슨 조화를 부려 시엘을 꼬셨다는 말인가.
더구나 시엘은 평소에도 남자를 무서워하고 보수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처음 본 날, 남자랑 모텔로 자러간다는 영철이 말이 웃기지도 않았다.
"너 진짜 저질이구나? 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내가 지금 거짓말한다는 거야?"
"저, 학생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참다 못 한 택시 기사가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미안한데, 목적지 거의 다 왔는데 나가서 다투면 안 될까. 불안해서 운전을 할 수가 없구만."
"아, 죄송합니다."
예의 바른 영철이 곧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보자 지희는 더 기가 막혔다.
‘아니 뭐 저런 병신같은 새끼가 다 있어?’
필요 없는 데선 예의를 차리고, 정작 선배 등에는 비수를 꽂는 모습에서 지희는 영철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남지 않았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않고 있던 지희는 서둘러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미타기에 나온 요금보다 많은 돈을 택시기사에 전달하며 말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알았어?"
"지희야. 나 진짜 거짓말 하는 거 아니···."
쾅-!
거칠게 문을 닫아버린 지희가 씩씩거리며 골목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다툼을 보고 있던 기사가 차량을 대기 시킨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여자친구 붙잡아야 되는 거 아녀?"
"예?"
"아니···. 저렇게 가면 다신 못 볼 것 같은디? 내가 껴들라고 하는게 아니고 나중에 학생 후회할까봐서···."
영철은 택시 기사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으나, 이미 지희는 멀찌감치 가버린 뒤였다. 그는 택시를 뛰쳐나갈까 말까 갈등하다가 이내 포기해 버렸다.
"에이, 몰라요. 어차피 두 번 안 볼 사이였어요. 그냥 저희 집으로 가주세요."
"음···. 그래 뭐."
기사가 차량을 출발시키자 혼자 남은 영철은 뒤늦게 스스로의 발언을 후회했다.
‘아씹···. 괜히 말했나? 나중에 도훈이 형이 시엘 누나랑 잘 되면 지희가 싹 다 일러바칠 텐데. 괜히 나 때문에 형만 곤란해지는 거 아니야? 아흑, 모르겠다 진짜. 술 처먹고 말실수 해버렸다고 해야지.’
그날 영철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먼 거리를 다시 돌아와야 했다.
패배감만 가득한 밤이었다.
* * *
"집으로 바로 갈 거야?"
"집에 부모님 같이 살아."
"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진짜?"
"···부끄러우니까 얼른."
쑥스러움에 고개를 떨군 시엘을 보며 피식 웃은 도훈이 기사에게 목적지를 전달했다.
"죄송합니다. 가까운 모텔로 부탁드려요."
"넵."
둘의 분위기를 눈치챈 기사는 군소리 없이 모텔로 직행했다. 택시를 타고 떠나던 시엘은 고개를 돌려 아직 택시를 기다리는 지희와 영철을 보며 말했다.
"쟤들은 근데 어딜 가려나?"
"누구, 영철이?"
"응···. 아까 가게에서···."
시엘은 여전히 그 신음을 영철과 지희가 음란한 짓을 하면서 낸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도 별짓 다했지만, 지희도 못지 않게 문란했을 거라고.
"모르지. 우리처럼 바로 모텔로 향할지도."
"하···. 나 근데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풉-. 누군 원래부터 이런 사람인가?"
"저기면 되겠죠?"
어느새 모텔에 도착했는지 기사가 번쩍거리는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훈은 기본료 밖에 나오지 않은 미타기를 보며 미안해하며 만원짜리를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죄송해요. 손님 많이 받으실 시간인데. 잔돈은 괜찮습니다."
"아유, 뭘 그런 걸로!"
기사가 서둘러 잔돈을 챙겼지만, 도훈은 끝내 사양하며 택시를 돌려보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시엘이 도훈을 향해 말했다.
"내 앞에서 멋진 척 안해도 되는데?"
"응?"
"왜 잔돈 안 받았어?
"어···. 그냥."
"어쭈, 도훈이 너 돈 많은가 보다?"
"필요한 만큼은 있지."
"대학생이 까부네? 모텔비는 내가 낼 거야. 택시비는 네가 냈으니까."
"안 그래도 돼."
"됐어. 학생한테 신세 질 정도는 아니라고."
기사가 안내한 모텔은 무인 시스템이었다.
자판기를 통해 룸 키를 뽑아야 했는데, 모텔 경험이 많지 않은 시엘은 기계를 다룰 줄 몰라 허둥댔다.
"이, 이건 어떻게···."
"돈 넣고, 키 뽑아서 올라가면 돼."
답답했던 도훈이 대신 처리하자 시엘은 민망해하면서도 질투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너, 이런데 많이 와봤구나?"
"당연히 처음은 아니지."
"흥, 아깐 바람둥이 아니라면서?"
"꼭 바람둥이여야 모텔을 오는 건 아닌데?"
"그럼?"
"궁금하면 들어가서 대답해 줄게. 괜히 여기 오래 서 있다가 팬들한테 들키지 말고."
"앗!"
시엘은 그제야 자신이 남자와 함께 모텔에 와있다는 걸 실감했다. 혹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야구팬이라도 맞닥뜨린다면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입성했다.
시엘은 몹시 민망해하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게 된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희에게 연락을 남겼다.
-이도훈 : 시엘씨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갈게. 어디로 가면 돼?
그 무렵은 지희가 영철과 한창 말다툼을 하고 있던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