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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93화 (1,160/2,000)

1176. 질투는 나의것-31-

"근데 오늘이 처음 만나는 날인데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인다니···."

시엘은 여전히 불안한 목소리였다. 처음 불을 끌 때도 혼자 놀라서 소릴 지른 걸 보면 은근히 겁이 많은 타입 같다.

"외모는 껍데기에 불과해. 난 진심이 더 중요한 거라고 봐."

시엘이 앉은 방향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똑같은 멘트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맞는 말이 되기도 하고 쳐맞는 말이 되기도 한다.

만약 이런 말을 못생긴 이정우가 했더라면, 외모 콤플렉스와 열등감에서 비롯된 반발심 정도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잘생긴 이도훈의 얼굴로 하니 뭔가 있어 보이는 말처럼 들렸다.

"···하긴. 겉만 보고 혹하는 사람은 진심이 잘 느껴지질 않더라."

시엘이 내 말을 받았다. 어쩌다 보니 바로 앞사람하고만 1:1로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어둠 속에선 그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 사람을 만나 봤나 봐?"

"···응?"

시엘은 정곡을 찔린 듯 움찔 놀라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으, 으음. 뭘 그런 걸 물어보니?"

시엘이 새침하게 대답하더니 물러섰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인지 내숭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모에 비해선 남자 경험이 많지 않아 보인다.

‘황시엘 말이야, 처녀는 아니었지?

[정보창에 따르면 스무살 때 처녀를 잃은 것으로 나옵니다.]

‘근데 아무리 봐도 맹탕 같단 말이지.’

[외모만 보면 최상급 아닙니까? 어째서 그런 걸까요?]

‘해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거야. 물론 외모가 월등히 뛰어나면 주변의 유혹이 끊이질 않겠지. 하지만 본인이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하면 의외로 순진할 수도 있거든.’

[정보에 따르면 평소 스트레스를 춤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남자 친구의 여부를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음, 애초에 성욕도 높지 않은 편인데다, 보수적인 성격이다보니 쉽게 누굴 만나지도 않아서 그런 것 같아. 거미줄 잔뜩 쳐있겠네.’

[흐흐, 주인님이 걷어 주셔야죠.]

‘있어 보자, 근데 스킨십이 가능하려나?’

"궁금하니까 그렇지. 호감이 있으니까."

"야, ···조용히 말해."

시엘은 혹시나 옆에 들릴까 봐 조마조마한 목소리였다.

"지들끼리 떠드느라 잘 안 들릴 거야."

다행히 영철과 지희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누가 보면 서로 안지 몇 년은 된 친구처럼 찰떡 궁합이었다.

"그래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다."

나는 시엘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서로 허벅지가 닿을 정도의 밀착이었다. 시엘이 놀라서 물러나려고 하는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우리끼리 귓속말하면 되잖아.

들릴 듯 말 듯.

뜨거운 입김을 담아 속삭이는 소리에 시엘이 어쩔 줄 몰라했다. 어둠속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아, 아··· 이건 좀.

-왜? 너가 민망할까 봐 귓속말로 물어보는 건데.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데 그녀의 피부에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살냄새와 섞인 그것은, 남성의 음욕을 자극하는 최음제 같았다.

-그, 그래.

시엘은 겨우 납득한 것 같았다.

밝은 곳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실내를 감싼 완벽한 어둠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는 듯했다. 물론 거기다 나에 대한 호감도 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만약 정말 싫었다면 귓속말을 받아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지금 사귀는 사람 없는 건 맞지?

-뭐, 뭐?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것부터 물어보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없어.

-정말? 인기 엄청 많지 않아?

-그 인기가 그 인기랑 같니?

-아하.

이번엔 시엘이 물었다.

-도훈이 넌? 넌 만나는 사람 없어?

-나도 없어.

-거짓말 같은데?

-왜?

-왠지 바람둥일 것 같아.

시엘이 정곡을 찔렀다. 여자의 직감이든, 아니면 단순한 찔러보기건 당황해선 안된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딜 봐서.

-나한테 싸인해 달라고 했을 때. 그거 일부러 그런 거지?

-뭘?

-핸드폰 번호 받아 갔었잖아. 그땐 몰랐는데 어제부터 집에서 계속 생각해보니까 좀 이상하더라고. 야구장 와서 자리에 폰을 두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오, 예리한데요?]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지. 오늘 내가 호감을 고백하는 바람에 확신을 가졌을 거고.’

[바람둥이로 의심받으면 공략이 어려워 지는 것 아닙니까? 아무한테나 작업거는 남자로 보이면요.]

‘의심하는 게 아니야.’

[아니라고요?]

‘일종의 답정너 게임이야. 시엘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는.

’[시엘양이 원하는 답이 뭔데요.]

‘이게 정답이 아닐까?’ -음···. 그래. 솔직히 번호 받아간 건 고의였어.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시엘은 살짝 실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무한테나 들이대진 않아.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

-믿지 않겠지만, 네가 처음이었어.

-말도 안 돼.

-진짜라니까 그래? 왜 나를 못 믿어?

-어떻게 믿어? 널 몇 번이나 봤다고?

-마음 같아선 내가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주고 싶네.

-웃기지 마.

-진짜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심장이 빨리 뛸거 아니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나는 시엘이 있는 곳을 더듬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내 심장에 일부러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뭐, 뭐하는···.

-만져봐. 내 진심을.

-어우, 진짜.

시엘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넓고 두터운 가슴 근육을 싫어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다.

만지는 것이라면 더 환영이겠지.

-아, 알았어. 그만해.

-이젠 믿는 거?

-몰라. 아직은 반반이야.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거 있어.

-뭔데?

-지희한테 왜 날 소개시켜 준 거야?

-말했잖아. 지희가 너랑 같이 찍은 사진보고 만나보고 싶어 했다고.

-그럼 정말 나랑 지희랑 엮어 주려고 했어?

-···응.

-진짜?

-대답했잖아.

-조금도 아쉽지 않았고?

-아닌데?

-나도 확인한다?

-뭘 확인해?

-심장 빨리 뛰는 지.

-뭐, 뭐?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근거가 있는 행동이었다. 계속 얼굴을 가까이 댄 채 귓속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개인 공간으로 침범하게 되었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맞붙고, 힙과 골반이 비벼졌다.

팔과 팔은 계속 붙어있었으며, 얼굴은 10Cm만 더 들이 밀면 키스를 할 만큼 가까웠다.

이성과 이런 상태로 계속 붙어 있다보면 스킨십의 허용 범위가 확장된다. 시엘의 가슴위에 손을 얹어도 그녀가 꼼짝 못 할 정도로.

-흡!

-이상한데? 심장 빨리 뛰고 있는 거 아니야?

-너, 너 무슨···.

-아, 심장이 이쪽이 아닌건가?

처음엔 가볍게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정도였는데, 점점 그녀의 젖가슴을 문지르듯 쓸어내렸다. 나의 대담한 행동에도 시엘은 꼼짝하지 못했다.

-그, 그만해.

-거짓말 맞네. 엄청 빨리 뛰고 있는데.

-그만하라고!

시엘이 손목을 잡아 채더니 내 손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는 조금 흥분한 목소리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뭘? 거짓말 테스트했지.

-아니 그래도 어떻게 여자 가슴을···.

-왜? 너도 만졌잖아.

이른바 피장파장의 오류.

물론 납득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호감만 있다면 때론 추행도 스릴 넘치는 스킨십이 되는 법이다.

못생긴 놈이 하면 쇠고랑 차는 행동도, 잘생긴 분이 하면 커플링을 차듯이.

-너 진짜 바람둥이 맞구나? 못된 손이야, 아주.

시엘은 짐짓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실제로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정말로 화가 났다면 아마 가슴을 만졌을 때 뺨을 걷어 붙였을 테니까.

-손만 못 된건 아닌데?

-뭐, 뭐?

기왕 나가는 거 더 뻔뻔해 지기로 했다.

어차피 어둠 속. 우리가 무엇을 해도 둘 밖에 모른다는 잇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귓속말을 하는 척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뭐, 뭐하려는···.

시엘이 엄청 긴장한 듯 부들부들 떨었다.

알면서 묻기는, 당연히 네가 생각하는 그거지.

-난 입술도 못 됐거든.

-읍!

그대로 시엘의 입술에 키스를 강행했다.

처음엔 놀라 바둥거리던 시엘은 잠시 후 혓바닥을 받아들이며 입을 벌렸다.

[오오!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익명성이란 본래 본능을 일깨우는 법.’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런 실험이 있어.’

[무슨 실험이요?]

‘지금은 비윤리적이라 절대 못 하겠지만, 예전에 미국에서 성인 남녀 여럿을 지금처럼 어두운 공간에 가둔 채 24시간을 지내게 한 적이 있거든.’

[그래서요?]

‘처음엔 당연히 거리를 두고 경계하지. 인간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고, 어둠은 공포를 자극하니까.’

[그렇겠죠, 당연히.]

‘그러다 어느 순간 대화가 시작돼. 어둠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거야.’

[오호.]

‘이 실험은 처음부터 나체로 투입되었지. 그래서 서로가 모두 발가 벗고 있는 걸 알고 있거든.’

[설마···.]

‘맞아. 경계심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해소되면 오로지 본능만 남게 되지. 실험의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어.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성인 남녀가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지쳐 쓰러질때까지 섹스를 해댔다는 거야.’

[정말 놀랍군요.]

‘원래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야.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익명 속에선, 인간은 어느 때보다 과감해지는 법이야.’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졌다.

시엘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붙는 느낌이었다.

-미안. 참기가 힘들어서.

-······.

-못된 손에 못된 입술까지. 난 못된 놈인가봐. 기분 상했으면 사과···읍!

이번엔 시엘이 나를 덮쳤다. 그녀는 아예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더니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처음의 경계하던 수줍음 많은 아가씨는 온데간데 없고, 욕망에 불을 지핀 야수만이 남았다.

* * *

"너 방금 일부러 그랬지?"

"무슨 소리야? 실수라니까."

"실수?"

"아니, 솔직히···.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렇겠어? 그리고 네 책임도 있지."

"무슨 책임?"

지희가 따지듯 물었다.

"아니···. 원체 커야 말이지. 그냥 스치기만 해도 닿는데."

"하-. 이 자식 봐라?"

지희는 약이 올랐지만, 영철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슴이 원체 커서 평소 주변 지인들도 실수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암튼, 너 한 번만 더 실수해봐. 확 그냥!"

"미안해 진짜. 술이나 한잔 해."

"몰라! 자작이나 해."

방금 전의 실수도 무리하게 건배를 하려다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지희는 혼자 술잔을 들고 맥주를 홀짝거렸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투닥거리는 사이 도훈과 시엘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나중엔 둘이 속닥거리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지희는 속이 질투로 부글부글 끓었다.

‘흥. 팔자 좋으셔? 누군 마음에도 없는 애랑 상대하고 있는데 말이야. 시엘 언니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 지희의 입장에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오늘의 모임 자리는 시엘이 도훈을 자신에게 소개시키는 목적이었다. 남녀 간의 소개라는 게 당연히 통성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분명 한 쪽이 호감을 가졌으니 만남이 성사된 것이고, 지희는 명백히 도훈에 대한 감정을 밝힌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훈과 알콩달콩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니 열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씨. 짜증나.’

지희가 씩씩거리고 있는데 영철이 조용히 물었다.

"지희야."

"뭐?"

"잠깐만 가까이 와봐."

"뭐래?"

"아니 할 얘기 있어서."

"뭔데?"

어둠 속에서 지희가 영철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영철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 방금 이상한 소리 들은 거 같아.

-이상한 소리라니?

-아니 막···. 정확하진 않는데. 쪽쪽거리는 소리.

-뭐?

-둘이 지금 키스하는거 아냐?

지희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깜깜한 암흑이었다. 물론 안력을 집중하면 뭔가 거무스름한 것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에이, 설마.

-아니야. 아까부터 조용해지더니 아무 말도 없잖아. 그래서 내가 귀 기울여서 들어보니까 뭔가 쩝쩝 거리는 소리가 나더라고. 백퍼 키스각이라니까?

영철의 고자질을 들은 지희가 속이 뒤집혔다. 그의 말이 질투심 유발을 위한 거짓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몰래 비밀스러운 행위를 벌이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서 뭐? 애들처럼 놀리기라도 할래? 둘이 뽀뽀했다고?

-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왜? 너도 하고 싶은데 못 해서 억울해?

지희의 도발적인 말에 영철의 귀가 번쩍 띄었다.

-지, 진짜? 해도 돼?

짝-!

별안간 영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둠속에서 난데 없이 따귀가 날아온 것이었다.

-미친놈. 누가 준대?

-아윽!

영철은 쪽팔림에 큰소리도 못 내고 얻어맞은 부위를 어루만질뿐이었다. 차라리 밝은 상태였으면 정타로 맞았을 텐데, 하필 어두워서 아무곳에나 날리는 바람에 귀싸대기를 처맞고 말았다.

-내가 분명 말했잖아. 난 너한테 관심 없다고.

-아흑, 진짜로 세게 때리네!

-때린 건 미안해. 나도 모르게.

-아니, 도훈이 형은 시엘 누나 찍었대도?

-그래서 뭐?

-가망 일도 없다고.

-그래서 꿩대신 닭이라도 잡으라는 거야? 도훈 오빠는 힘드니까 너랑?

-아, 아니 뭐 그렇다는 건 아니고. 솔직히 난 너한테 관심 있단 말이야.

-왜?

-그냥···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성격은 좀 불같긴 하지만. 암튼 난 너 마음에 들어. 나도 생각보다 괜찮아. 도훈이 형이 워낙 잘나서 그런 거지.

-알아 나도. 너 잘생겼어.

-근데 왜?

-왜냐니? 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듯이, 나도 도훈 오빠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뿐이야. 네가 자존심 버리고 지금 나한테 조르는 것처럼 나도 똑같은 심정이라고. 이해 안 돼?

-······.

그것은 지희의 본심이었다.

영철이 크게 낙담하는데 잠시 후 지희의 도발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너, 섹스는 잘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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