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5. 질투는 나의것-30-
"여기 어째 분위기가 좀 으슥한 것 같은데?"
가게로 올라온 도훈이 어두컴컴한 2층의 전경을 보고 말했다. 실제로 실내는 유난히 조명이 어두웠다. 전체적으로 붉은 톤의 배경에 일부러 조도를 낮춰놓아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가 났다.
복도식으로 되어 있는 긴 통로를 따라 좌우로 검은 암막커튼이 쳐져 있는 것도 수상한 기운을 더했다. 전체적으로 검고 붉은 색에 조명까지 어두우니 흡사 비밀 결사 단체가 출몰할 것 같은 오래된 아지트 느낌이 났다.
"아, 그게요."
내막을 아는 지희가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 이곳이 처음부터 술집이 아니라 암흑 카페를 하던 곳이라 그래요."
"암흑 카페라니?"
"실내가 정전된 것처럼 어둠 속에서 식사하는 곳 있잖아요. 아무것도 안 보이게요."
[저게 뭔 소립니까?]
‘아아, 들어본 것 같아. 암흑 카페.’
[그게 뭔데요?]
‘유럽에서 처음 시작된 건데, ‘다크다이닝’(Dark Dining)이라 부르기도 해. 시각을 완전히 차단한 상태에서 미각, 촉각, 청각, 후각에만 의존해 식사하면서, 평소 느끼지 못했던 음식 본연의 맛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거야.’
[오! 굉장히 이색적이군요.]
‘그래서 배경이 독특했구나.’
"저번에 알바생이 살짝 말해줬는데, 식사 위주로 팔다 보니 장사가 잘 안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말아먹고 술집으로 종목을 바꿨다면서."
"아하."
그때 지희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참, 시엘 언니. 그때 이따금 주말에 이벤트 한다지 않았어요?"
"이벤트?"
시엘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아, 언니가 아닌가? 암튼 제가 기억하기로는 토요일인가 일요일인가는 저녁 시간에 한 번씩 예전 암흑 까페 형식으로 운영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불을 다 꺼버린단 말이야?"
"네."
"그럼 술을 어떻게 마셔?"
"뭐,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일행들이 2층 입구에서 서성이는데, 위아래를 온통 검은색으로 빼입은 알바생이 등장했다.
"어서오세요, 예약 하셨을까요?"
"예약이요? 혹시 자리가 없어요?"
"네. 일요일은 이벤트가 있는 날이라 예약 손님만 받고 있거든요. 잠시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암흑 까페로 운영됩니다."
"아, 진짜요?"
알바생의 말에 지희가 잔뜩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술집을 예약 못 해 입장을 거부당할 줄은 몰랐던 것. 굳이 이곳으로 오자고 했던 장본인이다 보니 지희가 책임감을 느끼고 다시 물었다.
"많이 기다려야 해요? 자리 나려면?"
"아···. 그게 예약이 다 차가지고···. 어, 잠시만요."
그때 한쪽귀에 이어폰을 차고 있던 알바생이 누군가와 얘기를 했다.
"···네. 8번 방 노쇼라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마친 알바생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으셨네요. 방금 딱 한자리가 예약 취소 되었거든요."
"정말요?"
"네. 대기가 없으니 바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알바생은 시계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주문은 바로 하셔야 할 거예요. 15분 뒤에 불이 완전히 꺼질 테니까요."
"앗, 넵."
알바생과 대표로 이야기하던 지희가 반색을 하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자리 났대요. 근데 오늘 이벤트가 있는 날이라 암흑 까페로 운영된다는 데 괜찮으시겠어요?"
도훈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난 상관없는데. 영철이 넌?"
"저도요. 색다를 것 같은데요? 인기 많아서 예약해야 하는 곳이라면서요. 그럼 가야죠. 시엘 누나는요?"
"음···. 그냥 난 그냥 편한 데서 술 먹고 싶었는데···."
시엘은 불이 완전히 꺼진다는 소리에 불안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처음 본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난데없이 불을 싹다 끄고 얼굴도 못 보고 얘기를 나누는 것은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시엘이 망설이자 지희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언니, 여기 저번에 좋았잖아요.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그냥 여기서 마셔요."
지희가 시엘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자 시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동의했다.
"그래, 그러자. 이제와서 다른 곳을 찾기도 곤란하니까."
얘기가 끝나자 알바생이 일행들을 8번 방으로 입장시켰다.
두꺼운 암막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자 내부엔 새까만 식탁과 가운데 고풍스러운 양식의 은촛대 하나만 덩그라니 올려져 있었다.
창가 쪽에도 암막 커튼이 드리워있고, 내부의 조명이라곤 촛대 위에서 빛나는 커다란 양초 하나 뿐이라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되도록 빠르게 메뉴 골라주세요. 저희도 9시 넘으면 어두워서 서빙이 힘들거든요. 참, 추가 주문도 어려우니까 되도록 한 번에 싹 다 시켜주세요."
"네."
알바생이 물러나자 일행은 메뉴판을 펴놓고 빠르게 메뉴를 선정해야 했다.
"시간 없다는 데?"
"뭘 먹지?"
"추가 주문 안된다니까 술은 최대한 많이 시켜요. 중간에 술 떨어지면 텐션 끊기니까."
"안주는 국물 종류는 절대 안되겠다. 잘 못해서 흘리면 감당 안될 것 같아."
"그럼 마른안주나 과일로 하죠?"
빠르게 의견을 통일한 일행은 알바를 불러 주문을 했다.
"여기 캔맥주 스무개랑요, 육포랑 오징어. 그리고 과일세트요."
"네, 캔맥주 스무개···. 육오에 과일. 넵. 최대한 빠르게 가져다 드릴 게요. 참, 9시 넘으면 촛불 꺼야 합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핸드폰은 지금 다 걷어 주시겠어요?"
"핸드폰은 왜요?"
알바생이 핸드폰 수납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설명했다.
"아, 저희 가게가 예전에 암흑 까페로 운영될 때부터 룰입니다. 혹시 핸드폰 불빛이 켜지면, 다른 손님들에게 항의를 받을 수 있어서요. 여기 가방에 수납해 주시면 나가실 때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핸드폰 수납 가방은 국가 시험장에서 수험자의 핸드폰을 수거하는 용도로 쓰이는 물품이었다.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 알겠다는 듯 핸드폰을 건넸다.
"거참, 핸드폰까지 거둬갈 줄은···."
"혹시 몰래 훔쳐보거나 그러는 건 아니죠?"
시엘의 물음에 알바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유, 무슨 말씀을요. 요샌 다 지문인식으로 보안이 돼서 볼수도 없어요. 나중에 나가실 때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잠시 후 알바생이 나가자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떻게 딱 이벤트 맞춰서 왔네요."
"근데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술집을 암흑 까페로 운영하는 거지? 한 번 망했다면서?"
영철의 물음에 지희가 대답했다.
"아마 인기 있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뭔데?"
"뭐···. 서로 얼굴 안 보이면 더 진심을 느낄 수 있다던가?"
"진심?"
"왜 외모에 혹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한 거라잖아."
"흐음. 그런가?"
오늘 모인 네 사람은 다들 선남선녀다 보니 딱히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특이한 컨셉의 가게에 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도훈은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역시 럭키가이!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왜 그러십니까?]
‘잘하면 어둠을 틈타 둘 다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요?]
‘생각해봐. 시엘은 이미 내가 자기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렇죠.]
‘그럼 적당히 스킨십해도 받아 줄 거 아니야. 어차피 안보이니 부끄럽지도 않을 테고.’
[호오.]
‘동시에 지희를 노리는 것도 가능하지. 내가 누굴 만지고 있는지 알게 뭐람?’
[역시 주인님은 그 생각 뿐이시군요.]
‘여기서 적당히 흥분시켜 놓으면 둘 다 공략이 가능할지도 몰라. 암흑 까페라니, 정말이지 신의 한 수 구만.’
반면 영철은 낭패감을 금치 못했다.
‘아씨, 술 게임으로 분위기 잡아서 달리려고 했는데 무슨 생뚱맞게 암흑 까페람?’
그는 본래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유쾌한 성격과, 거침없는 입담으로 술자리에 유독 돋보이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시야가 차단된 상태로는 게임이 힘들 게 분명했다.
아니 적어도, 할 수 있는 게임의 가짓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둠속에서도 가능한 게임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참, 우리 이렇게 앉으면 재미 없으니까 섞어 앉을까요?"
‘ㄷ’ 형태의 소파에는 남남 여여 나뉘어 앉아 있었다. 남녀가 붙은 쪽을 제외하곤 접근할 수 있는 거리가 차단된 것이었다.
"그럴까?"
불이 꺼지기 전에 자리가 바뀌었다.
맨 끝에 영철이 앉고 연이어 지희, 도훈, 그리고 시엘 순이었다. 그 결과 도훈은 양 옆에 여자를 끼게 되었지만, 영철은 오로지 지희만 공략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철은 오늘 밤 오로지 지희만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집요하게 달려드는 스타일이었다.
자리 배치가 끝나자 알바생이 술과 안주를 카트에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세팅을 하면서 일행들에게 당부했다.
"곧 불 꺼지고 나면 방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일 거예요. 나가는 출입구 쪽에 형광 테이프 발려 있으니까 그걸로 위치 파악하시고요."
"네."
"맥주캔은 넘어지지 않도록 홀더에 끼워 마시세요. 이거 보이시죠?"
점원이 시범을 보이듯 컵 손잡이처럼 생긴 뭉툭한 도구안에 맥주 캔을 집어넣었다. 아귀가 꼭 맞게 합체되듯 홀더안에 들어간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마치 자석이 붙은 것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테이블 밑에 철판을 넣고, 홀더에 자석 작업을 해놓은 거에요. 여기에 끼워 마시면 어지간 해선 넘어지지 않을 거에요."
"와, 신기하다."
"예전에 음식점 하실 때 설치하신 거래요. 그리고 안주위치도 잘 기억해 두시고요."
"넵."
상세한 설명을 마친 점원이 한 이벤트 당첨을 축하합니다.번 더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9시 정각이네요. 저 나가면 바로 촛불 끄시면 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되세요."
알바생이 나가자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도 촛불 하나로 간신히 밝혀진 상황인데 이것마저 꺼지면 철저한 암흑으로 변할 게 분명했다.
"누가 끌래?"
"제가 끌게요."
영철이 자신있게 나서더니 타오르는 촛불에 대고 바람을 후- 불었다.
순식간에 룸안이 어둠으로 가득찼다.
* * *
‘와,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네?’
암막 커튼의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얼마나 촘촘히 작업을 해놓았는지 영철이 불을 끄자마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꺄야! 뭐, 뭐야 무서워."
"진정해요, 언니. 불만 꺼진 거에요."
놀라는 시엘과 달리 지희는 상당히 침착한 목소리였다.
"다들 살아 있는 거죠?"
"불 껐다고 사람 안 죽어."
"왜, 추리 소설 같은 거 보면 이런 데서 한명씩 막 죽지 않아요?"
"영철이 군대에서 소설 너무 많이 봤구나."
"헤헤!"
사방이 어둠으로 변하자 확실히 목소리가 더욱 또렷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와, 근데 느낌 엄청 이상하네요. 어렸을 때 비오는 날 아파트 싹 정전되었을 때 같아요."
"그러게. 무섭기도 하고···. 스릴있기도 하고."
"일단 건배라도 할까요?"
"맥주캔 어딨지?"
"바로 앞에 홀더에 담겨 있을 거에요."
나는 불이 꺼지기 전 위치를 기억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 생각하는 곳에 차가운 맥주캔이 느껴졌다. 캔 뚜껑을 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햐, 분위기 으스스하네."
"에어컨 너무 세게 튼 거 아니에요?"
"점원 불러서 꺼달라고 할까?"
"근데 어떻게 불러?"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마시고 생각하자. 건배."
"어디로 뻗어야 해?"
"일단 가운데로!"
정말이지 중구난방이었다.
하지만 왠지 상황이 웃기다 보니 뭔가 색다른 기분이었다.
술잔을 부딪히려 팔을 뻗고 있는데, 누군가의 팔이 내 팔꿈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위치로 보아 시엘 같았다.
"앗, 누구지? 죄송해요."
"아니에요."
"안 보여가지고."
"저 여기있어요."
나는 일부러 시엘의 팔을 손으로 붙잡은 뒤 내 잔에 부딪치게 했다.
"앗. 고마워요."
"말 편히 하세요. 누나잖아요."
"그래도···."
시엘은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 비해 혼자 차이나게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럼 제가 말 놓을까요?"
"네?"
"누나가 너무 불편하는 거 같아서요. 내가 말 놓을 게.
누나도 놔."
나는 시엘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말을 놓아 버렸다. 아랫사람이 먼저 말을 놓으니 억울해서라도 말을 놓을 것이다.
"와···. 야자타임도 아닌데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데?"
"술이나 마시자, 짠."
나는 시엘과 술 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들이켰다. 물론 취하지 않기 위해 미리 아이템을 복용하는 것도 까먹지 않았다.
‘이거 괜찮네. 어두워서 아이템 쓰기가 너무 쉽잖아?’
[그렇군요. 나름의 장점이 있군요.]
‘우선 시엘이부터 공략하고···. 지희는 잠깐 영철이에게 맡겨 둬야겠어.’
자리 배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처음에는 시엘과 내가, 그리고 지희와 영철이 따로따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나는 고개만 반대로 돌리면 지희랑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우선 시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등 뒤에서 두사람이 뭐라고 쑥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일부러 만졌지?"
"미안, 실수야."
"어우 진짜. 조심해 좀."
왠지 영철은 시작부터 스킨십을 시도하는 것 같다.
과연 놈이 색다른 환경에서 얼마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