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 질투는 나의것-29-
"응."
"아···. 저는 형이 지희를 더 마음에 들어 하시는 줄 알았어요."
"왜?"
"시엘 누나랑 별로 얘기를 안 하시길래요. 그리고 오늘 식사는 누나가 형한테 지희를 소개하는 자리기도 했고요."
"이제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그리고 지희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애가 좀 가볍더라고. 나쁘게 말하면 경박하달까?"
도훈의 냉정한 평가에 영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죠. 형은 그런 스타일 싫어하시는구나."
"딱히 싫어한다기 보다는, 굳이 꼬시고 싶은 스타일이 아닌 거지."
어쨌든 결정이 난 이상 영철은 자동으로 지희 쪽을 담당하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지만, 사실 그도 지희가 더 끌리긴했다.
‘흐흐. 대충 보니까 시엘 누난 완전 철벽 칠 스타일이던데.
반면 지희는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에도 당장 자빠뜨릴 수 있을 것 같고.’
영철은 감출 수 없는 지희의 커다란 가슴을 떠올리며 므흣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술 먹다 눈 맞으면 그대로 모텔 직행이겠구나. 도훈이 형이 너무 어려운 상대를 골랐어.’
영철이 속으로 개이득이라고 좋아하는 사이, 도훈은 로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왜 하필 시엘 양을 고르신 건가요? 업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지희 양쪽이 더 수월할 것 같은데요.]
‘그건 나도 알지. 대충 사이즈 보니 지희는 거의 자동문이겠더라.’
[자동문이라뇨?]
‘벌리라 하면 바로 보픈할만큼 개방적이라고.’
[보픈이 뭡니까?]
‘봊이 오픈.’
[아···. 그걸 알면서도 굳이요?]
‘곰곰이 생각해 봤어.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선후배 사이다 보니 3P 동시 공략 같은 건 절대 무리겠다고. 지희는 몰라도, 시엘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걸.’
[그렇겠죠?]
‘그럼 결국 순차로 공략해야 한다는 소린데, 시엘을 먼저 공략한들 지희는 신경을 안쓸 것 같았어.’
[하지만 그 반대는···.]
‘맞아. 절대 불가능이지. 후배랑 붙어먹은 남자하곤 상종도안 할 것 같잖아.’
[하지만 영철군도 동시에 움직일 겁니다. 영철군이 먼저 지희양을 꼬신다면 결국 순차 공략은 실패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지 못하게 막아야지.’
[무슨 수로요?]
‘슬쩍슬쩍 시그널을 보낼 예정이야. 오늘 밤 너랑 자고 싶다고. 영철이 먼저 보내고 둘이 따로 보자고.’
[아니, 그럼 영철군은···.]
‘헛물만 켜다 새가 되겠지. 재미야 깔짝 보겠지만.’
[역시 주인님은 욕심쟁이십니다.]
‘하필 나를 만난 게, 영철에겐 불행인 거지. 어쩌겠어. 하늘이 영철을 낳고 나를 또 낳았는데.’ 그 무렵 여자들이 가게에서 나왔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다는 소리에 한껏 들떠 보이는 지희가 영철에게 물었다.
"우리 2차 어디로 가? 정했어?"
"혹시 그런 곳 없나?"
"어디?"
"너무 오픈된 곳 말고, 칸막이 같은 거 쳐진 곳. 우린 상관없는데, 두 사람은 괜히 이목이 신경 쓰일 것 같아서."
"하긴. 식사야 그렇다 치고 남자랑 술 먹고 있다가 엄하게 사진이라도 찍히면···."
시엘과 지희는 백산 야구팀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분명 공개된 장소에서 술을 먹었다간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지희가 시엘에게 물었다.
"언니 거기 어때요?"
"어디?"
"왜, 지난달 저희 팀끼리 회식하러 갔던데 있잖아요. 2층인데 방마다 커튼으로 입구가 막혀 있는 곳."
"아! 스벅 사거리 쪽에?"
"네. 거기면 다른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이고 괜찮을 것 같아요."
결정을 마친 지희가 영철에게 말했다.
"괜찮은 가게가 생각났어. 거기로 가자. 내가 안내 할게."
"2차는 남자들이 쏠 테니, 기왕이면 비싼 곳으로 고르라고."
"걱정마. 안주가 싸도 술 왕창 마셔버릴 거니까."
지희가 먼저 앞장서고 영철이 옆에 붙었다. 자연스레 시엘과 도훈은 뒤에서 나란히 거리를 두고 걷게 되었다.
시엘은 도훈과 단둘이 남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처음 사인해 줄 때만 해도 별 감정 없었는데, 오늘은 왜 그렇게 도훈이 신경 쓰이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나랑 연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시엘이 묵묵히 걷고 있는데 도훈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저번에 그 옷은 빳빳하게 다려서 벽걸이에 걸어 놨어요."
"네? 옷이라뇨?"
"직접 사인해주신 거요. 가보로 삼으려고요."
"하하, 뭘 그런 걸 다."
시엘은 도훈이 자신의 사인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것을 듣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빈말인 줄로 알았는데, 도훈이 자신의 팬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시엘은 도훈을 떠보기 위해 앞서가는 지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희 막내 어때요?"
"네?"
"지희 말이에요. 우리 팀 막내거든요. 성격도 너무 밝고 애가 예쁘잖아요."
"아···. 네. 좋은 것 같아요."
"마음에 드세요?"
시엘은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뭐라고, 도훈의 대답을 듣는 게 너무 긴장되었다.
"네, 괜찮아요. 얘기를 더 나눠봐야겠지만, 앞으로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아···. 그러시구나."
시엘이 애써 실망한 표정을 감추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웃긴 일이었다.
소개팅이랍시고 주선했던 사람은 자신인데, 막상 둘이 잘 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서운함이 울컥 밀려왔다. 괜히 죽쒀서 개준꼴이었다.
‘지희도 도훈씨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
"···잘됐네요."
"네?"
"아까 둘이 따로 얘기했는데 지희도 도훈씨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어, 진짜요?"
"네. 잘해봐요. 어차피 오늘 지희 소개시켜 주러 나온 자리니까."
시엘이 이내 섭섭함을 털어버리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더 마음이 커지기 전에 그만둘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지희도 괜찮고, 도훈씨도 좋은 사람 같으니. 서로에게 더 잘된 일일지도 몰라.’
시엘이 현실을 수긍하고 체념하는데, 갑자기 도훈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 곤란하게 됐네요, 이것 참."
"네, 뭐가요?"
"제가 지희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한 건, 시엘씨가 아끼는 후배라서 그런 거였어요. 앞으로 시엘씨랑 자주 보려면 주변 지인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편이 좋으니까요."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시엘은 혼란스러웠다.
마치 도훈의 말은···.
"저 사실 오늘 소개팅 자리, 시엘씨 때문에 나온 거거든요."
"네? 근데 분명 지희가 도훈씨 보고 싶어 한다고 해서 제가 만든 자리잖아요."
놀란 시엘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커다란 눈을 껌뻑였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안 그러면 도저히 만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희씨에겐 좀 미안한지만···. 사실 그래서 영철일 데려 온 것도 있고요."
"아!"
"저도 후배를 데려오면 2:2로 짝수가 맞잖아요. 그럼 시엘씨가 같이 오래 남아있을 것 같고."
"아니, 저 도훈씨 저는···."
시엘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기뻤다.
도훈이 지희를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고 실망했는데, 사실 자신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 아닌가?
‘어떡하지 그럼? 지희는···.’
"전에도 말했잖아요. 시엘씨 팬이라고."
"어···. 고마워요, 고마운데···.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너무 부담갖지 않으셔도 돼요. 일단은 호감이 있다는 정도니까. 다만 지금 말씀 안 드리면 나중에 괜히 오해할까 봐 알려 드린 거예요."
"네···."
"저 근데 진짜 지희한테 소개 시켜 주려던 거에요?"
"네. 지희가 도훈씨 사진 보고 엄청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음. 그렇구나."
도훈이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시엘이 곧바로 덧붙였다.
"근데 도훈씨가 그런 마음인 줄 알았으면 소개 안 시켜줬을 거에요."
"정말요?"
"네. 괜히 일만 복잡하게 됐네요. 지희는 어떡하지···."
시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앞서 걷고 있는 지희를 쳐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친한 후배가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를 빼앗은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도훈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두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 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희는 힘찬 걸음으로 앞장서고 있었다.
"좀 천천히 좀 가."
"너가 빨리 와야지."
"아니, 나 말고 뒤에 도훈이 형이랑 시엘 누나가 못 따라 오잖아."
영철의 지적에 지희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식당에서 나올 때는 비슷하게 걸어왔는데 저만치 거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걸음이 좀 빠른 편이긴 해."
지희가 잠시 속도를 늦추었다. 영철도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지희보고 들으라는 듯 넌지시 미끼를 던졌다.
"근데 저 두사람 분위기 수상한데?"
"응? 뭐가?"
"둘이서 막 쏙닥거리는 거 같지 않아? 시엘 누나도 막 웃고 있고."
영철은 도훈이 시엘을 선택했음을 은연중에 알리고 싶었다.
지희도 그걸 알고 나면 도훈에 대한 호감을 접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넌 탈락이야. 도훈이 형은 그냥 포기하고 나한테 오라고.’
"뭐 재밌는 얘기라도 하나보지."
지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더니 영철에게 물었다.
"너 근데 도훈 오빠랑 많이 친해?"
"응?"
"원래 처음엔 셋이 보기로 했던 건 알지?"
"알지."
"근데 굳이 너를 데려왔길래 원래부터 친한 사이냐고 묻는 거야."
"아···. 아니야. 나도 최근에 알았어."
"응? 무슨 소리야? 같은 과 선후배 사이 아니였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영철이 짧게 둘의 인연을 소개했다. 내막을 모두 들은 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아직 군인인거야?"
"응. 근데 거의 끝났어. 말년 휴가 복귀하고 나면, 다음날 전 역이거든."
"그렇구나."
지희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영철은 스스로를 더 어필하기 위해 군필임을 강조했다.
"어쨌든 군대도 다 끝냈으니, 복학하면 본격적으로 연애사업해보려고."
"그래, 잘해봐."
은근히 지희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한 발언이었으나, 지희는 별 관심 없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도훈에 대해서만 계속 물었다.
"그럼 도훈 오빠도 군대 다녀왔겠네?"
"그···, 그렇지? 나보다 반년 먼저 전역했으니."
"으응."
‘이게 아닌데···.’ 영철은 지희의 마음을 돌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훈은 이미 시엘로 결정했기 때문에, 지희가 도훈에게 집착하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대놓고 말하는 수밖에.’
"지희야. 저기···."
"응? 거의 다 왔어. 저기 보이는 2층 가게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뭐? 나한테 할 말 있어?"
"아까 사실 둘이서 화장실 갔을 때 도훈이 형이랑 얘기 했거든."
"무슨 얘기?"
"왜, 여자들도 그런거 있잖아. 2:2나 3:3으로 단체 미팅 오면 마음에 드는 사람 먼저 밝히는 거. 그래야 나중에 싸움 안날 테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희가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다.
"도훈이 형은 시엘이 누나가 더 마음에 든대."
"······."
"혹시나 너가 나중에 실망할까 봐 알려주는 거야."
"···웃기고 있네."
"뭐?"
지희는 살짝 화가 난 듯 보였다.
"너 진짜로 웃긴 애구나? 뭘 남자들끼리 얘기한 걸 나한테 쪼르르 일러바치고 그러니?"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야. 그래봐야 너한테는 일도 관심 없거든?"
"뭐, 뭐?"
지희의 분노가 갑자기 자신에게로 향하자 영철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둘이서 각각 나눠먹기로 약속이라도 한 거야? 그래서 그렇게 한 명씩 찍으면 우리가 따라 준대?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아, 아니 지희야."
"야, 까불지 마. 누가 보면 선택권이라도 있는 줄? 남자가 여자를 고르는 게 아니야. 여자가 누구한테 줄지 결정하는 거지."
"아···."
"도훈 오빠가 시엘 언니한테 관심 있다고? 당연히 그렇겠지.
처음부터 시엘 언니한테 들이댔으니까. 누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눈치도 없어 보여?"
"······."
"상관없어. 신경 안 써. 난 한 번 찍은 사람, 누구한테도 양보할 생각 없거든."
영철을 한껏 쏘아붙인 지희는 먼저 가게 앞에서 기다리다 도훈과 시엘이 도착하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왜 그렇게 걸음이 느려요?"
"네가 빠른 거야."
"암튼 올라가요. 여기 이층이에요!"
지희가 능청스럽게 시엘과 도훈 사이에 파고들어 팔짱을 끼더니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영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와···. 강적이네. 일이 엄청 꼬여버린 것 같은데.’
하지만 이미 도훈이 먼저 올라가버렸기 때문에 방금 전 상황을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영철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앞서간 일행을 뒤따랐다.
‘에이, 괜히 말했네. 어쨌든 내가 수습하는 수밖에 없어.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술 진탕 취하게 만들어서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수밖에.’
자신의 발언으로 일이 꼬인 것을 깨달은 영철은 뒷 수습을 위해선 모두가 취하는 경우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어디 두고 보라고. 술자리 게임의 마스터 김영철의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군대 가기 전부터 잘 놀기로 유명했던 영철이 마침내 주특기를 발휘할 결심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