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90화 (1,157/2,000)

1173. 질투는 나의것.-28-

"지희야, 그래도···."

시엘이 일장 연설을 하려던 그때.

도훈과 영철이 동시에 자리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앗, 벌써 드시고 계셨네."

결국 시엘은 남자들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희는 바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딴청을 피우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오기 전에 다 먹어버리려고 했는데, 헤헤."

다시 재개된 식사 자리.

통성명을 하며 탐색전을 펼치던 처음과 달리 식사 중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도훈의 충고를 새겨들은 영철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대화를 주도했고, 여자 측에서는 그와 동갑인 지희가 티키타카를 이끌었다.

음식은 비주얼만큼이나 훌륭했고, 반주로 곁들인 와인 덕분인지 점점 긴장이 풀리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당연히 구장 보안요원 불렀지. 폰 뒤지니까 어우, 막 도촬한 사진들이!"

"와, 진짜 변태 새끼네. 할 짓이 얼마나 없으면···."

어쩌다 보니 대화 주제가 치어리더 생활에 대한 곤혹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지희는 평소 쌓인 게 많았는지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어휴, 말도 마. 도촬은 약과야. 가끔 관중석 사이로 지나갈 때면 팬인 척 은근슬쩍 손잡고 다리 몰래 만지고···. 시선 강간이 아주 일상이라니까?"

지희의 발언 수위가 높아지자 보다 못 한 시엘이 나섰다.

"지희야. 넌 무슨 말을···."

"왜요? 제 말 맞잖아요, 언니. 솔직히 남자 팬들이 우리 춤추는 거 구경하고 있겠어요? 완전 침 질질 흘리면서 어떻게 한 번 자빠뜨릴 수 있나 속으로 상상하고 있지."

"아니, 넌 말을 해도···."

시엘은 필터링 없이 떠드는 지희가 점점 불안해졌다. 평소남의 눈치를 조금도 보지 않는 그녀였기에, 처음 보는 남자들 앞에서 조만간 큰 사고를 칠 것 같았다.

‘어휴. 도훈씨 앞에서 민망해 죽겠네, 진짜.’

다행히 도훈은 듣는 듯 마는 듯 시큰둥하게 밥을 먹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동갑내기이자 지희 못지않게 텐션이 높은 영철이 맞장구를 치며 호응해 주는 게 문제였다.

"근데 솔직히 어쩔 수 없지 않나? 여자가 옷을 그렇게 짧게 입고 눈앞에서 막 흔들어 대면."

"뭐라고?"

"아니. 남자의 본능 말이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흠···. 그럼 영철이 너도? 막 섹시한 여자들 보면 눈이 저 절로 따라가고 그래?"

영철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사실 영철은 지희와 무척이나 죽이 잘 맞았다. 서로 동갑내기기도 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대화 지분의 80%는 두 사람의 차지였다.

분위기로 봐선 자연스럽게 지희와 엮어질 분위기였지만, 영철은 화장실에서 보인 도훈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형 혹시 골랐어요? 시엘 누나랑 지희 중에서 누구에요?

-그게···. 아직은 모르겠어.

-모르겠다뇨?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에이, 아니죠. 원래 호감도는 첫인상으로 결정된다잖아요.

5초면 이 여자가 나랑 맞을지 아닐지 알 수 있다고 하던데요?

-그럼 넌 누군데?

-제 선택은 중요하지 않죠. 어차피 전 형이 먼저 고르면 남은 여자 고르기로 했으니까.

-아니. 그냥 말해봐. 누구냐고. 5초 만에 바로 마음에 들었던 여자가 누군데?

-음···. 솔직히 전 둘 다 괜찮았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요. 둘 다 마음에 들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나도 그래.

-네?

-아직은 모르겠는데, 나도 둘 중 누구라도 괜찮을 것 같아.

-아···. 하긴 일장일단이 있다 보니.

-그렇지. 외모에서 동점이라고 치면 결국 남은 건 성격이지.

그래서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아.

-알겠어요. 그럼 바로 결정하지 마시고, 확실하게 마음에 드시면 저한테 언질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양념 쳐 드릴테니.

-걔들이 무슨 통닭이냐? 양념을 치게?

‘쓰읍. 대체 도훈이 형이 누굴 찍은 거람?’

어느새 식사 시간은 1시간이 넘어선 상황. 예쁘게 음식이 담겨있던 접시는 바닥을 드러냈고, 그 사이 대화는 충분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영철은 도훈이 아직까지 누굴 마음에 들어 하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화끈하고, 도발적인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단연 지희겠지만 의외로 그런 여자들은 호불호가 강한 편. 오히려 묵묵히 보조를 맞추며 보다 여성스러운 시엘을 더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시엘 역시 치어리더고, 응원석 위에서 보이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봐선 남자와 단둘이 있을 때 의외로 화끈한 타입일지도 몰랐다.

‘거참. 도훈이 형이 그냥 속시원하게 알려주면 좋을텐데.’

"뭐, 나도 남자니까."

"으. 하여간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지희가 불쑥 도훈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혹시 오빠도 그래요?"

"응? 뭐가?"

도훈은 뜬금없이 소환되는 바람에 흐름을 놓쳤는지 질문을 되물었다.

"오빠도 막 짧은 치마 입고, 가슴 파인 여자들 보면 야한 상상하고 그러냐구요."

"지희야!"

시엘이 말렸지만, 도훈은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난 착한 여자를 더 좋아해."

"에이, 괜히 순진한 척하시긴?"

지희가 아슬아슬 선을 넘었다. 시엘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는데 여전히 도훈은 아랑곳 않고 여유 넘치게 대답했다.

"아니. 어디가 착하다고는 말 안 했는데?"

"네?"

"뭐, 많잖아. 착한 곳은. 마음 말고도."

도훈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이번엔 지희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어머. 저 오빠 순진하게 봤는데 은근히 야한 농담도 잘하네? 역시 내 느낌이 맞았다니까?’

사실 도훈에게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으로 소위 ‘색기’라고 불리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이는 감추려고 해도 은연중에 발산되는 마성의 매력이었기 때문에 성욕이 강하거나 성관계가 잦은 여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도훈을 마주하면 묘한 끌림을 받곤 했다.

이는 발랑 까진 지희에게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도훈을 처음 본 순간, 별말을 하지 않는데도 무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야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조금도 근거는 없지만, 막연히 섹스를 잘할 것 같은?

옆에 있던 영철 역시 방금전 도훈의 반응에 살짝 놀랐다.

‘오, 도훈이 형이 저런 드립도 할 줄 아나? 하긴. 절대 순진해 보이는 타입은 아니긴 하지.’

영철은 도훈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여자를 많이 만나봤을 거라고 짐작했다. 학과에서야 운동만 좋아하는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성욕이 없을 리만무했다.

분명 안에선 조용히 학교 생활을 하면서도 밖에서는 실컷 풀고 다닐 것이라 생각했고, 그 끼를 조금이나마 훔쳐본 기분이었다.

‘가만. 그럼 도훈이 형이 지희를 찍은 건가?’

사실 영철에게도 지희는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 당장 원나잇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헤프고, 자유분방하고, 어딘가 욕정이 가득 하다는 느낌이었다.

‘오케이, 좋아. 그럼 도훈이 형이랑 지희를 밀어주기로 하고 나는 시엘 누나를···.’

영철이 목표를 바꾸어 시엘을 주목하는데 시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왠지 안절 부절한 모습으로 도훈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억, 뭐야 저건?’

바람둥이인 영철은 여자의 감정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시엘의 눈빛을 보고 대번에 그녀가 도훈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우연히 본 눈빛에선 명백한 질투와 애증이 담겨 있었다. 마치 도훈이 지희와 색드립을 주고받는 모습에 화가 난 사람처럼.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영철은 뒤늦게 일이 꼬였음을 직감했다. 생각해 보면 남자에게만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두 사람 중 하나를 고를 권리가 있었고, 심지어 그 선택이 겹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 버린 것이다.

‘젠장. 도훈이 형이 지희를 찍었는데, 시엘은 도훈이 형을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런 상황인 건가?’

경험이 많은 영철이 볼 때 최악이었다.

보통 남자들이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경우보단 여자들끼리 마음에 드는 남자가 겹칠 때 사달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안돼. 이러면 무조건 판이 깨질 거야. 흐름을 바꿔야 해.’

결심을 내린 영철이 갑자기 다 비워진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배도 적당히 채운 것 같은데 슬슬 2차 나갈까요?"

"2차 좋다! 어디?"

"레이디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환영이지요."

"흥, 웃겨. 진짜 어디든 따라갈 거야?"

"왜? 생각해 놓은 데 있어?"

영철과 대화하던 지희는 그를 팽개치더니 불쑥 시엘에게 물었다.

"언니, 우리 2차로 클럽이나 갈까요?"

"클럽?"

"응. 시엘 언니 완전 클럽 죽···. 죽을 만큼 좋아하잖아."

‘죽순이’라고 말하려던 지희는 왠지 그 표현이 시엘에게 실례일 것 같아 순간적으로 단어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뉘앙스는 충분히 전달된 상황이라 시엘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다급히 항변해야 했다.

"무, 무슨! 그냥 스트레스 푸는 거지. 오해 마세요. 전 정말 춤만 추러 가는 거니까."

"아무도 오해 안 했는데요?"

"그러게?"

"아, 아니!"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시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정말로 춤이 좋아서 가는 것이었지만, 왠지 남자들에게 클럽죽순이라는 오해가 생길 것 같았다.

‘으, 진짜 지희 저것은 도움이 안 되네.’

"클럽은 너무 시끄럽잖아요. 아직 얘기도 많이 못 나눴는데, 술이나 마시러 가죠?"

시엘의 제안에 도훈이 찬성했다.

"술 좋다. 나도 같은 생각."

"아! 진짜. 시엘 언니 춤추는 거 보셨어야 하는데."

"아니, 안 가겠다는 말은 아니고 지금은 클럽 가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니까."

현재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시간상 아직 클럽이 오픈도 안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좋아요. 그럼 클럽은 취해서 가는 걸로!"

"안 갈 거라니까."

"왜요? 언니. 혼자도 자주 가시면서."

"아니 그건···."

시엘과 지희가 투닥거리는 사이 도훈이 조용히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세웠다.

"여기 빌지 가져다 주세요."

"넵, 손님."

잠시 후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오자 금액을 확인한 도훈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한창 옥신각신하고 있던 시엘이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그를 말렸다.

"뭐 하세요 지금?"

"네? 계산하려고요."

"도훈씨가 왜요?"

"네?"

"아니. 도훈씨가 왜 여길 계산하느냐고요. 놔둬요. 식사는 저희가 살게요."

"아···. 그래도 처음 뵙는 건데."

도훈이 고집을 피워 보았지만 시엘은 어림없다는 듯 도훈의 손에서 빌지를 빼앗았다.

"저희 직장인이에요. 아무렴 대학생에게 얻어먹으려고 비싼음식점 왔을까봐서요? 처음부터 저희가 사려고 했어요."

"맞아요, 히히."

"그래도 초면인데···."

"에이, 오빠. 정 그러면 오빠가 2차 쏘기? 콜? 언니 가요. 가서 계산해요."

계속 있다간 실랑이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지 지희가 시엘을 등 떠밀며 카운터로 향했다. 둘 만 남게된 도훈이 뻘쭘한 표정으로 영철에게 말했다.

"저녁 내가 사려고 했는데."

"형 말이 맞았네요. 제가 오해했나 봐요. 처음부터 자기들이사려고 우릴 데려온 것이라니···."

사정도 모르고 남자들 피 빨아 먹는 거머리라느니, 염치가 없다느니 비난을 했던 영철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과적으론 도훈의 말이 맞았고 그때 감정 컨트롤을 잘 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결국 나도 얻어 먹게 됐는데 뭘."

"그러니까요. 괜히 미안해지네."

"넵 둬. 대학생이면 모를까 직장인에겐 큰 부담은 안 될 거야. 2차는 내가 쏠게."

"형. 아니에요. 같이 내요."

"왜? 나 돈 많다니까?"

"에이, 그래도 그럼 안 되죠. 아깐 괜히 남자한테 뜯어 먹으려고 하는 건 줄 알고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런 거에요. 같이 내요. 형이 혼자 쏘시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흠···. 그래. 그럼."

"저희 계산 다 했어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계산을 마친 지희와 시엘이 화장실로 사라지자 타이밍을 본 영철이 도훈에게 말했다.

"형, 밖에서 담배나 태우면서 기다릴까요? 나중에 타이밍 안나올 것 같은데."

"그러자."

도훈과 영철은 먼저 가게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영철이 도훈에게 말했다.

"형, 결정은 하셨어요? 지희죠?"

"지희 애가 괜찮더라. 성격도 싹싹하고."

"그쵸? 저도 얘기해보니까 완전 진국이더라고요. 잘 생각하셨어요."

"아니. 지희로 결정했다는 얘긴 아니고."

"아니라고요? 그럼 시엘 누나?"

"아직은 좀 애매한데."

영철은 우유부단한 도훈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형, 다른 게 아니라 일이 좀 꼬일 것 같아서 그래요."

"뭐가?"

"아까 제가 형이랑 지희랑 얘기할 때 시엘 누나 눈빛을 봤거든요."

"근데?"

"시엘 누나가 형한테 관심이 있어 보였어요."

"에이, 무슨 눈빛만 보고."

"아니라니까요? 제가 눈치가 좀 빠르거든요. 특히 누가 누굴좋아하면 티가 안날 수가 없어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거니까."

"음···."

"근데 만약 형이 지희랑 잘되면 시엘 누나가 2차에서 판을 깨뜨릴지도 몰라요."

"그럼 어떡하지?"

"형이 노선을 정해 주시기만 하면 되요. 그럼 남은 사람은 제가 어떻게든 커버를 쳐 볼 테니까요. 2차 가서 술 좀 때려 넣다보면 나중엔 취해서 어떻게든 되겠죠."

도훈은 영철의 눈썰미에 살짝 놀랐다.

‘제법인데? 나도 그때 느끼긴 했는데, 영철이도 보고 있었구나.’

[주인님께 견줄 바는 아니지만, 입대 전 한 학기 만에 사범대 투어를 거의 성공시킬 정도였으면 여자 문제에 있어선 눈치가 귀신이라고 봐야죠.]

‘그러게. 암튼 영철이 말이 맞아. 괜히 판 깨지기 전에 섭섭지 않게 해 줘야지.’

"그럼 난 시엘이로."

"···시엘 누나요?"

영철이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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