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2. 질투는 나의것-27-
네 사람이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퓨전 레스토랑 ‘별 밤’의 대표메뉴라고 할 수 있는 새우 스깜피 알리오 올리오와 발사믹 관자 감자퓨레, 항정살 페퍼 파스타였다.
이탈리안 베이스에 쉐프의 독특한 개성이 어우러진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군침을 돌게 했다. 플레이팅 비주얼은 당장 인스타에 인증 샷을 남기고 싶을만큼 화려했고, 특히 음료로 와인까지 곁들어지자 대학생인 영철의 입장에서는 살짝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와···. 여기 비싼 가게였구나? 확실히 직장인들이라 먹는 것부터 다르네.’
영철은 실은 들어올 때부터 고풍스러운 식당 외관에 살짝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로서는 첫 만남부터 비싼 음식점에 온 것이 살짝 못마땅했다.
‘아무리 첫 소개팅 자리라도, 이건 좀 심한 거 같은데···.’
그는 한창 연애를 할 적에도 소시민적인 데이트를 즐기는 편이었다. 저녁 식사로 분식집으로 가기도 일 수였고, 모텔비를 아끼기 위해 일부러 자취하는 여자를 고른 적도 있었다.
그런 쫌생이 같은 그에게 지금의 메뉴는 사치에 가까웠다.
물론 그렇다고 첫 만남에 더치페이를 요구할 정도로 미련하진 않았다. 여자를 많이 만나본 경험에 따르면, 첫 만남에서 남자가 지갑을 열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여자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음···. 도훈이 형이랑 둘이서 나눠 낸다고 해도 장난 아니겠는데. 앞으로 한 달은 쫄쫄 굶어야 하려나.’
영철은 대체로 돈 문제에 있어서 쿨한 척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실제론 굉장히 예민했다.
이는 그의 기구한 가정사에서 비롯된 성격이었다.
그가 중학생 때 가세가 기울였을 때, 결국 부모님은 어른들의 사정으로 이혼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아버지는 다시 재기했지만, 그 사이 어머니는 ‘김’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해 버린 뒤. 본래 박영철이던 그가 김영철이 된 사연이기도 하다.
영철은 새아버지에게 대들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한 아버지를 철없게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을 하며 속으로 삭혔고 지금도 이혼한 아버지와 평소에 자주 연락 할 만큼 친하게 지냈다.
어쩔 수 없이 이혼은 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였다.
지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어쨌든 새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려서 지독한 가난을 겪었던 탓에 영철은 굉장히 돈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군인 월급을 알뜰히 모은 것도 그런 돈에 대한 집착에 기인했다. 상병이 꺾이고 병장이 되었을 때도 그는 후임들에게 시원하게 PX에서 쏘는 법을 몰랐다.
이제는 이혼한 아버지에게서도 용돈을 받고, 새 아버지도 든든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 가정 형편이 크게 어렵지 않는데도 쓸데없는 데 돈을 쓰기를 주저했다.
결국 영철은 참다못해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근데 이 음식점 누가 추천한 거예요?"
"어. 내가 했어. 음식 괜찮지?"
지희가 잘 골랐다는 칭찬이라도 받는 줄 알고 환하게 웃었다. 영철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거머리 같은 년. 남자들 피 빨아 먹는 스타일이 분명하군.’
아무리 소개팅이라도 상도덕이란 게 있다.
어차피 2차는 여자들이 낸다고 해도 끽해야 커피 한 잔에 조각 케잌 정도. 몇 십 만원을 호가할 것 같은 1차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영철의 표정을 읽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짐작한 도훈이 갑자기 그를 향해 말했다.
"음, 갑자기 배가 아프네. 영철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것은 두 사람이 사전에 맞춘 싸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철이 도훈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영철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형, 둘 중 누구든 마음에 드는 사람 찍으면 저한테 신호 보내주세요.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아니 그래야 형이 찍은 분 말고 다른 여자를 노리죠. 타케팅이 확실해야 작업이 수월하거든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막상 만나고 나면 애매해 질까봐서요. 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싸인만 맞춰 놓게요.
-참나. 어떻게?
-형이 저한테 이렇게 말하세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 좀 다녀온다고.
-갑자기 화장실을?
-그래야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죠. 그럼 핑계대로 저도 뒤따라 갈게요.
-하-. 별걸 다 하네. 그렇게 까지 해야 겠어?
-옛말에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헤헤.
도훈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자, 사인을 눈치 챈 영철이 곧 뒤따랐다.
"식사중 죄송합니다. 저도 도훈이 형 간김에 화장실 좀."
갑자기 화장실로 사라진 두 사람을 보며 시엘과 지희가 머쓱해 했다.
* * *
"형, 형! 벌써 찍으신 거에요? 누구예요? 역시 시엘 누나죠?
얼굴은 시엘 누나 쪽이 확실히 예쁘던데."
남자 화장실 문이 닫히지도 않았는데 큰 소리로 떠드는 영철을 일단 조용히 시켰다.
"쉿, 문 닫고 얘기해."
"아차!"
영철은 문을 닫더니 능글맞게 걸어왔다.
"흐흐, 타이밍이 살짝 빠른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처음부터 노선을 확실히 하는 게 좋죠. 괜히 늦장부리다 사랑의 작대기가 엇갈려서 파국을 맞는 것 보담요."
"그것 때문에 부른 거 아니야."
"아니라고요? 혹시 그럼 지희에요? 와, 역시 형도 얼굴보단 몸매구나. 하긴 지희가 좀 국보급이긴 하더라고요. 진짜, 형님.
여자 보는 눈이 있으시네."
헛다리를 짚은 영철이 이번엔 지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순식간에 태도를 뒤집는 영철의 태세 전환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뭐 조변석개도 아니고 빈대떡 뒤집듯 말을 바꾸네.’
[영철군은 정말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나 본데요?]
"아니. 영철아 여자들 문제로 부른 거 아니라고."
"엥? 아니에요? 그럼요?"
"너.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네? 제가 뭘요?"
"아니. 방금 지희한테 음식점 추천 누가 했느냐고 물을 때 표정이 완전 썩어있던데?"
"제, 제가 그랬어요?"
"야. 너무 티나더라. 난 그래서 화난 줄 알고 불렀잖아."
내가 조곤조곤 알아듣게 말하자 영철이 갑자기 크게 한숨을 쉬더니 대답했다.
"죄송해요, 형. 순간적으로 표정관리가 안 됐나봐요."
"진짜로 화난 거야, 그럼?"
"실은···.저희 집이 어렸을 때 한 번 망해가지고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요."
"엉?"
난 난데없이 가정사를 꺼내는 영철을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암튼, 그때 충격 때문인지 제가 좀 돈에 예민한 부분이 있어요. 아니, 그렇다고 남자 동기나 선배한테 돈 쓴 걸 아까워하진 않는데 이상하게 여자들에게 돈 쓰는 건 너무 아깝더라고요."
"······."
"솔직히 저희 다 처음 만나는 자린데 너무 비싼 음식점으로 데려 온 것 같아서 기분 상했었어요. 막 그런애들 있거든요. 일부러 사귈 마음도 없는데 남자들 피빨아 먹으려고 생계형 소개팅하는 애들요. 저는 딱 보면 알아요."
"아니, 영철아···."
"물론 저 두 사람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암튼 그것 때문에 저도 모르게 표정 관리가 안 된 것 같아요."
야구장에서부터 느꼈지만 영철은 굉장히 자기 개방이 강한 편인 것 같아. 소위 TMI라고 불릴 만큼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노출한다. 솔직한 성격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때론 듣는 사람이 참으로 민망하다.
[아···. 영철군에게 저런 트라우마가 있었군요. 저건 좀 중 증같은데요.]
‘그러게. 성격 참 좋은데 저런데서 살짝 에러네. 결국엔 식사비 많이 나올까봐 그랬다는 거 아냐.’
[영철군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주인님이야 억대로 재산을 가지셨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 같은데요.]
‘어렵다고? 그 정돈 아닌 것 같은데.’ 영철은 나와 로시의 대화를 훔쳐 듣기라도 한 것처럼 덧붙여 설명했다.
"아,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어머니랑 재혼한 새아버지가 공무원이시라 나름 안정적이거든요. 아버지도 나중에 사업 잘 풀리셔서 지금은 괜찮으시고요. 뭐, 돈이 없다거나 그래서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저도 모르게 가난했을 때 습관이 불쑥불쑥 튀어 나와가지고."
"음, 그런 거였구나."
"네. 근데 저도 제 표정이 그런 줄은 몰랐어요."
"아니. 약간 욱한 느낌이 있었어. 어쩌면 여자들도 느꼈을 거야. 계속 있다간 말 실수 할 것 같아서 일단 데리고 나온 거고."
"아···. 아니에요, 형. 저 그런 실수 안 해요. 거기서 진상 피웠다간 소개팅이고 뭐고 초장부터 엎어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데리고 온 거라고. 혹시 그럴까봐."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암튼 미리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말 못했다."
"네? 뭘요?"
"여기 식사는 내가 쏠거야."
"형이요? 형이 왜요?"
"시작은 내가 소개 받는 자리였잖아. 너는 나 따라온 손님이고."
"아니에요, 형. 진짜로 괜찮아요. 저 군대에서 돈 진짜 많이 모았어요. 이등병 때부터 진짜 거의 안 쓰고 모았거든요. 몇백돼요."
"······."
‘하, 이거 생각보다 더 쫌생이네?’
[네? 뭐가 말입니까?]
‘아니, 옛날부터 군대 월급 다 모아서 나오는 애들 진짜 독종이라고 했거든.’
[그게 왜요? 근검절약하고 건전한 태도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군대라는 게 원래 이등병, 일병 때야 막내니까 선임들한테 얻어먹으면 되니까 돈을 안 쓸수도 있지. 근데 상병 병장 때까지 월급 한 푼 안쓰고 아꼈다면 후임들 간식 한 번 안사준 짠돌이라는 거잖아.’
[아···.]
‘영철이도 나중에 분대장도 달고, 부대에서 나름 선임급이 되었을 텐데 심지어 그때에도 월급을 바득바득 모았으면···.
와, 이거 진짜 독한놈이네.’
[부모님이 이혼했을 때 트라우마가 상당했나 봅니다.]
‘그러게.’
"너가 악착같이 모은 돈을 어떻게 쓰냐. 됐다, 그냥 내가 산다."
"아니 형, 전 그런 의도가···."
"야."
"네?"
"나 돈 많아."
"예?"
"나 돈 많으니까 부담갖지 말라고."
"아···."
재수없게 보일까봐 되도록 밝히지 않는 편이지만, 영철에겐 나의 재력을 오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영철이 다시는 돈나가는 문제로 쫌생이처럼 굴지 않을 테고, 욱하는 마음에 판을 엎는 경우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와···형네 집 잘사시는 구나."
"암튼, 그러니까 조금도 부담 갖지 마. 알았지? 아니 그냥 오늘 자리에서 돈에 관련해선 아예 신경을 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 제가 그러면 너무 죄송한데."
"대신 내가 먼저 고르라며."
"예?"
"니가 그렇게까지 양보했는데 나도 양심이 있지."
"아! 형 혹시 골랐어요? 시엘 누나랑 지희 중에서 누구에요?"
"그게···."
* * *
"밥 나오자마자 화장실 가는 건 좀 깨네요."
"갑자기 배가 아프다잖아. 음식 식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먹고 있자."
"네, 언니."
시엘과 지희는 남자들을 기다리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지희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생글거렸다.
"언니. 저 진짜 도훈 오빠 괜찮은 거 같아요."
"···뭐?"
방금전까지 밥 나오자마자 화장실을 갔다고 흉보더니 갑자기 도훈이 마음에 든다는 지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첨 보자마자 딱 제 스타일이라고요. 언니, 진짜 저한테 양보해도 괜찮으신 거죠?"
시엘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실은 시엘도 두 번째로 도훈을 만나고는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을 땐 그저 몸 좋은 대학생 정도로만 여겼는데, 조명이 밝은 음식점에서 다시보니 훈남도 그런 훈남이 없었던 것이다. 꽤 잘생긴 편인 영철을 못나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아씨···. 괜히 소개팅 해준다고 얘기를 꺼내가지고···.’
시엘은 뒤늦게 후회막심이었지만, 이제와 자신의 말을 뒤집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갖긴 싫고 남주긴 아까워하는 여자처럼 보일 것 같았다.
"아니 뭐···. 알던 사람도 아니고 양보랄 것도 없지. 근데 지희야. 도훈씨의 마음도 중요하지 않을까?"
"네?"
"아니 그렇잖아. 소개팅 자리는 좀 부담스럽다면서 후배까지 불러 다 같이 식사하는 거니까. 도훈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
시엘의 말을 듣던 지희가 커다란 가슴을 내밀더니 자신감을 드러냈다.
"언니는 별 걱정을 다 하네. 나 싫다는 남자 아직 못 만나 봤어요."
"진짜로?"
시엘은 지희가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희가 남자들이 선호하는 글래머 스타일에 얼굴도 제법 깜찍하다고 하지만, 충분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취향이었다.
"언니. 남자들은 말이에요, 우연인 척 요거 한 번 팔꿈치에 비벼주면···."
그러면서 지희가 음탕하게 젖가슴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살짝 허리를 바운스 하는 것만으로 출렁출렁 흔들리는 슴부 먼트에 시엘이 할 말을 잃었다.
‘처, 천박해.’
"그냥 자빠지면 끝이죠."
"야!"
시엘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가 이내 음식점이란 건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너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뭘요?"
"아니···. 무슨 가슴을 비빈다느니, 자빠진다느니. 어휴, 진짜 못 살아."
"뭘요. 마음만 맞으면 소개팅한 날 원나잇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지희의 뻔뻔한 태도에 시엘은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내쉬었다. 보수적인 그녀의 마인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엘은 아직 남자들이 화장실에서 돌아오기 전에 정신교육을 해야할 필요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