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1. 질투는 나의것-26-
시엘은 오늘따라 유독 외모에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화장을 고치는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도훈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옆에서 헤어롤을 말고 있는 지희를 의식했다.
지희는 소위 뱅 헤어라고 불리는 스타일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마에 원통 형태의 플라스틱 롤을 꽂은 모습이 발랑 까진 여고생을 연상케 했다.
특히 진한 립스틱을 바른 채 이따금 풍선 껌을 크게 불었다 터뜨리는 버릇은 방정맞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다 지희 때문이야. 지희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졌잖아?’
처음 소개팅을 부탁했을 때까지만 해도 시엘은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희가 하루종일 도훈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시엘 본인까지 덩달아 도훈을 의식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지희가 왜 저렇게 오버하나 싶었는데, 자꾸 옆에서 잘 생겼다고 극찬을 해대니 그녀 역시 도훈을 자꾸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언니, 그분 사진이 더 잘 나오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죠? 은근 사진빨 잘 받는 사람이 있다던데."
마스카라를 말아 올리던 지희의 물음에 시엘이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있다 직접 보면 되잖아.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한게 많니?"
"혹시 알아요? 나중에 제 남친 될 사람일지? 그래도 언니가 오작교 노릇 해준 건 잊지 않을게요. 히히."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정식 소개팅 같은 거 아니고, 그냥 가볍게 식사 한 끼 하는 거니까. 그쪽에서도 후배 하나 데리고 온대잖아."
"참, 그 후배는 몇 살이래요? 후배면 나랑 동갑이려나?"
"자세한 건 못 물어봤어. 어제같이 야구장 왔다는 것밖에는."
"암튼 우리 그럼 더블데이트하는 거네요?"
"더블데이트라니 무슨 소리야, 자꾸! 그냥 밥만 먹을 거라고."
시엘이 자꾸 귀찮게 구는 지희를 구박했지만, 성격이 괄괄한 지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산 치어리더팀에서 가장 막내인지희였지만, 원체 성격이 뻔뻔한 타입이었기 다들 두손 두발든 상황이었다.
"모르죠. 밥 먹고 나서면 술이 당길 테고, 술 들어가면 또···
. 혹시 알아요?"
"혹시 뭐?"
시엘이 지희를 째려보며 물었다.
"네?"
"너 내가 말했지. 우린 공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혹시나 이상한 수작 부릴 생각하지마."
"언닌 왜 그렇게 보수적이에요?"
"내가 뭐?"
"솔직히 직업이 치어리더일 뿐 저흰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잖아요. 구단 소속으로 월급 받는. 막말로 사내 연애도 아니고 바깥에서 남자 만나서 노는 것도 안 돼요?"
"아니, 지희야 내 말은 그러니까···."
논리에서 밀린 시엘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지희가 작심한 듯 따지고 들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자팀 선수들하고 연애 금지는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쳐요. 괜히 치어리더가 운동하는 선수들하고 어울리면 구단 이미지에 손상이 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일반인이랑은 상관없잖아요. 안 그래요?"
"지희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알았어요. 처신 잘할게요. 암튼 누구랑 연애하고 말곤 제 자유라고 생각해요. 언니도 팀장이라는 것에 너무 의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프런트 소속 직원이라도 개인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는 건 월권이니까."
"음···."
지희는 시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스스로 표현이 과했다는 걸 깨닫고 이내 사과했다.
"미안해요, 언니."
"아니야."
"제가 좀 흥분했나 봐요."
"나도 과했던 것 같아. 나는 그저 아직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니까 조심하자는 뜻이었어."
서로 사과를 하며 기분이 풀리자 지희가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저 모르세요?"
"뭘?"
"제가 풋내나는 남자들한테 공사나 당할 사람으로 보이시냐고요. 언니, 저 이지희예요."
당당한 지희의 태도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대졸자가 대부분인 치어리더 중 몇 안 되는 고졸 출신.
대학을 안 나온 게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대학을 안 가게 된 과정이 문제였다.
바로 아이돌을 하겠다며 부산에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것.
외모에 자신감이 넘쳤던 지희는 곧바로 소속사와 캐스팅을 보고 데뷔를 준비했지만, 대개의 아이돌 그룹이 그렇듯 내부 사정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이에 실망한 지희는 이후 아이돌 지망생을 그만두고 프리카 TV라는 인터넷 채널에서 여성 BJ로 활동했다. 빼어난 춤 실력과 남다른 바스트(?)로 금방 유명세를 떨치던 지희는 한동안 인터넷 검색어 상위권에 노출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나 워낙 직설적인 성격과 감정 컨트롤에 미숙했던 탓에 인기와 더불어 악플러도 늘게 되었다. 계속된 악플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불현듯 프로야구 백산팀의 치어리더에 지원하여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파란만장한 행보를 보였던 지희였기 때문에 남자에게 휘둘리거나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거라며 호언 하는 것.
"그래. 너 잘 났다 정말. 맘대로 해."
별수 없다는 시엘의 반응에 지희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아잉, 언니. 섭섭하게 말하지 말고용."
"으읏, 머리 망가져 이것아."
"삐지신 거 아니죠?"
"내가 왜 삐져. 그냥 어련히 잘하겠거니 싶은 거지.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서."
"정말이죠?"
"근데 그것 좀 치워주면 안 되겠니?"
"뭘요?"
"뒤에서 무거운 게 자꾸 압박하잖아."
"앗!"
가슴이 워낙 큰 지희가 뒤에서 껴안는 통에 시엘이 답답함을 느낀 것이었다. 물러서는 지희를 보며 시엘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집애. 가슴은 젖소만큼 커 가지고···.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를 더 좋아한다던데 괜히 비교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시엘도 꽉 찬 B컵으로 절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희에 견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지희와 비교하고 있다는 생각에 퍼뜩 놀랐다.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람? 난 지희한테 도훈씨를 소개 시켜주는 입장인데···. 휴, 왜 이렇게 의식한담.’
단장을 마친 두 사람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 * *
"반갑습니다.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올해 스물셋이고 대학생입니다."
"안녕하세요. 도훈이 형 후배 김영철입니다. 스물둘이고요.
와, 두 분 다 엄청 미인이시네요."
영철은 한 껏 꾸미고 나온 시엘과 지희를 보자마자 입이 귓가에 걸렸다. 오늘 따라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도훈이 둘 중 누구를 넘겨줘도 만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쪽도 미남이세요."
도훈과 영철을 보자마자 만족한 것은 지희도 마찬가지. 특히 곁다리로 따라온 영철마저 눈호강할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희는 몹시 기뻤다.
‘세상에. 모르고 만났으면 호빠 선수들인 줄 알았겠네. 무슨 일반인들이 저렇게 잘생겼담? 혹시 모델들 아니야?’
영철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남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희는 영철보다 그 옆에 있는 도훈의 단단한 팔뚝에 더 눈길이 갔다.
‘영철이라는 애도 잘생기긴 했는데···. 도훈 오빠 옆에 있으니까 확 죽네. 특히 저 핏줄 돋은 팔뚝 좀 봐. 완전 내 타입이야.’
지희는 얼굴도 따지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라면 근육질의 몸매를 더 좋아했다. 그녀가 처음 도훈의 사진을 보고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잘생긴 얼굴보다 태평양처럼 넓은 도훈의 어깨때문이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 낫네. 오히려 사진이 못 나온 거였어.
하여간 시엘 언니도 참 남자 보는 눈도 없다니까? 이렇게 멋진 남자도 몰라보고.’
지희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여자측에서 소개가 이어졌다.
"또 뵙네요. 저는 황시엘이라고 해요. 이쪽은 저희 팀 막내이지희."
"반가워요, 오빠들. 아니지. 영철이 너는 나랑 갑이네. 말 놔도 되지?"
"그럴까?"
대충 호칭을 정리하니 시엘이 가장 연장자.
그리고 도훈이 영철과 지희보다 한 살 많은 정도였다. 소개를 마친 네 남녀는 음식을 주문하고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오늘도 두 분 출근하고 오신 거에요?"
붙임성이 좋은 영철이 포문을 열었다. 그는 늘 자신감이 넘치는 타입이었기에 눈에 띄는 미인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확실히 영철군이 태영군이나 우선군과는 다르군요.]
‘뭐가?’
[저런 미인들 앞에서 조금도 안 꿀리잖습니까? 대체로 주인님 주변의 선후배들이 미인들 앞에만 서면 쩔쩔매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 차인데요?]
‘그게 영철이가 가진 장점이지.’
[장점이요?]
‘어려서부터 얼굴이 잘 생겼잖아.’
[그게 영향이 있나요?]
‘당연히 있지. 외모가 주는 장점은 외모 그 자체에 있는 것만이 아니야. 오히려 잘난 외모로 인한 당당함이 자신감을 심어 준다는 게 더 중요하지. 남자는 못 생겨도 자신감 넘치면 매력 있어 보이는 법이거든. 그래서 코미디언들이 자기 얼굴과 상관없이 미인들을 많이 만나잖아.’
[호오, 정말요?]
‘그렇지. 일단 남자는 자신감이 가장 중요해.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도 여자들 앞에서 쭈뼛거리는 남자는 매력 없거든. 영철이는 그런 면에서 상당한 장점을 갖춘 셈이지.’
"네. 퇴근하고 바로 온 거에요."
"오늘 경기도 이겼어요. 스윕!"
"와! 응원하는 보람이 있겠네요. 저도 어제 경기장 가서 직관했는데···."
영철은 처음 보는 두 여자 앞에서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잘 이끌었다. 반면 도훈은 일부러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도훈이 너무 말이 없자 그를 아까부터 의식하고 있던 지희가 물었다.
"오빠도 야구 좋아하시죠?"
"응? 그죠."
"에이, 말 편히 하세요. 저보다 오빠신데."
"그래도 초면이라···."
"호호. 완전 상남자처럼 생기셨는데 의외로 순진하시당."
"제가 좀 낯을 가려서요. 편해지면 말 놓을게요."
도훈이 의외로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자 로시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답지 않게?]
‘일단은 탐색전이야.’
[탐색전이요?]
‘시작부터 신내서 달린다고 결과가 뒤바뀌는 건 아니란 말이지. 일단 두 여자 성격부터 파악하고 적당한 시점에 찔러야지.’
[호오, 한마디로 간을 보고 있는 거군요.]
‘뭐, 비슷하지. 근데 지희라는 애 되게 몸매 좋은데.’
[큰 가슴 성애자인 주인님이 눈독을 들일 줄 알았습니다.]
‘아니, 허리가 가는 데 비해 불륨이 너무 좋네. 설마 수술은 아니겠지?’
[설마요.]
‘모르지 또. 일단 TV에 자주 나오는 직업이잖아. 그런 애들은 대부분 고친다고 보면 돼.’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스리사이즈 스카우터로요.]
‘맞다. 그게 있었지?’ 두 여자의 몸매도 확인할겸 도훈이 갑자기 헛기침을 하더니 들고 온 가방에서 안경을 꺼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이었는데,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스카우터가 안경 형태로 형상변환을 한 것이었다.
"눈이 좀 침침해서."
"어머, 안경도 쓰세요? 와, 안경 쓰니까 엄청 범생이 같아요!"
지희는 안경을 쓴 도훈의 모습마저도 마음에 쏙 들었는지 연신 칭찬을 해댔다.
"자주는 아니고 공부할 때만요."
도훈은 자연스럽게 안경을 쓰고 두 여자를 번갈아 훑어 보았다. 곧 두 여자의 몸매가 안경 내부 디스플레이에 표시되었다.
[황시엘 : 33-25-36]
[이지희 : 39-26-35]
수치를 확인한 도훈이 로시에게 물었다.
‘저거 보정 안 된 결과지? 뽕이나 수술로.’
[맞습니다. 애초에 쓰리사이즈 스카우터 자체가 참거짓을 판별하기 위한 아이템이니까요.]
‘음, 그럼 지희는 참젖이겠네. 진짜 장난 아니구나. 거의 D~E정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요? 시엘양도 작은 측은 아닌데 옆에 있으니 비교가 되는군요.]
‘보니까 시엘은 골반이 더 발달한 하체 위주고, 지희는 바스트가 훌륭한 상체 위주네.’
[가슴과 골반의 대결인 겁니까?]
‘이거 완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급 아니냐?’
[주인님은 어느 쪽이신가요? 역시 가슴학대파?]
‘씁-. 골반 잘빠진 애들 뒤치기 하는 맛이 또 일품인데. 그래도 지희 정도면 젖치기로 응수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둘 다 고르면 안 되냐?’
[네?]
‘둘 다 따먹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
[역시 주인님은 남다르십니다.]
"도훈이 형 공부도 엄청 잘해요."
"정말요?"
"뻥아니에요? 공부랑은 담 쌓으신 것 같은데?"
반신반의하는 두 여자 앞에서 영철이 침을 튀겨가며 도훈을 치켜세웠다.
"진짜로요. 1학기 단대 수석했을 걸요? 맞죠?"
"야, 그런 말을 뭐하러 해."
도훈이 겸양을 떨었으나, 여자들의 놀라는 반응을 보곤 속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아! 정말요?"
"대단하시다."
[이상하군요. 영철군이 왜 주인님을 갑자기 칭찬하는 거죠?
두 분은 지금 라이벌 관계 아닙니까?]
‘라이벌이 아니라 전략적 동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전략적 동맹이요?]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게,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누군가를 깎아내리면 동시에 자기도 못난 사람이 되는 거거든. 오히려 저렇게 칭찬을 해서 띄워주는 편이 훨씬 평판에 도움이 되지.’
[하지만 주인님을 높이면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거 아닙니까?]
‘영철이는 어차피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거야. 나를 띄워준 뒤 둘 중 하나가 나를 고르면 나머지는 자신의 차지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
‘하지만 셈법이 틀렸어. 아쉽게도 이건 1:1 매칭이 아니니까. 내가 상도덕이 없는 사나이라는 걸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야.’
[영철군만 불쌍하게 됐군요.]
‘말했잖아. 영철이는 오늘 들러리만 서다 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