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 질투는 나의것-25-
* * *
소영에게서 숙제를 받은 도훈은 곧 그녀의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때마침 깨톡에서 치어리더 황시엘이 약속장소와 시간을 알려왔다.
-황시엘 : 저녁 7시. 홍대 ‘별 밤’에서 봐요.
‘별 밤?’
[가게 이름 같은데요?]
‘상호만 알려준 걸 봐선 검색하면 나오는 유명한 가겐가 보네.’
도훈의 예상대로 차량 내비게이션 해당 상호를 치자 상단에 바로 이름이 나왔다.
‘여기서 40분 거리군. 지금 출발하면 늦진 않겠다.’
[참, 영철군에게도 알려주셔야죠.]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차를 출발시키며 도훈이 통화를 눌렀다. 블루투스로 연동된 스피커에서 영철의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늘 텐션이 올라가 있는 것이 영철의 특성이었다.
-회장님!
"넌 어떻게 걸자마자 받냐?"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저 어디로 가면 되나요?
"홍대로 와."
-홍대요? 그 클럽 많은 쪽이요?
"잘은 모르겠고, 암튼 주소 불러줄게. 7시까지 오면 돼."
도훈이 네비에 뜬 주소를 부르려고 하는데 영철이 물었다.
-형, 혹시 차 가지고 가세요?
"어. 그런데?"
-가는 길이면 얻어 탈 수 있을까 해서요. 헤헤. 지하철 타면 애매할 것 같거든요.
‘자식, 택시 타고 오면 되지. 사람 귀찮게.’
[인심 한 번 쓰시죠? 오늘 점심도 얻어 드셨는데.]
‘하긴, 그러지 뭐.’
도훈은 살짝 성가시긴 했지만, 뻔뻔하게 선배에게 픽업을 부탁하는 영철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처음 볼 땐 뺀질거리기 좋아하는 호색한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붙임성도 좋고 특히 남자 선배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얼굴이 하도 잘생기다 보니 서로 마주 보고 얘기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풀어져 버리는 측면도 있었다. 잘생긴 사람들이 은연중에 받는 특권을 영철도 누리고 있었던 것.
"너희 집 어딘데?"
-미래 아파트 3단지에요. 혹시 아세요?
"대학교 근처 맞지?"
-네. 거기예요.
도훈은 경로를 예상하며 시간을 가늠했다.
"대충 15분 정도 걸릴 거야. 미리 나와 있어."
-감사합니다. 304동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통화를 끊은 도훈은 방향을 바꿔 영철의 집으로 향했다. 혼자서 차를 몰고 가는데, 아까 소영에게서 배운 주식 강의가 떠올랐다.
‘ELS니 BPS니 PER이니 당최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
[용어가 제법 낯설긴 했죠. 전생에 주인님이 따로 주식을 독학하신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소영이는 나름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 같은데···.’
몇 번을 생각해도 가르치는 교사 쪽 문제가 아니었다.
배우는 학생이 열등했을 뿐이다.
도훈은 자신의 머리가 빠가가 되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접때 머리 좋아지는 열매 먹은 건 언제쯤 효과 나타나는 거야? 그거 효과가 있긴 해?’
[말씀드렸듯 체내에 흡수되는데만 6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됩니다. 이제 겨우 2달 지났구요.]
‘젠장. 그거 먹는다고 당장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너무 더디네.’
[근데 좀 이상합니다.]
‘또 뭐가?’
[주인님은 맘먹고 공부를 해 이번에 사범대 수석까지 오르셨지 않습니까? 그 어떤 편법이나 아이템 도움 없이요.]
‘그게 왜?’
[근데 왜 이해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거죠?]
‘로시 넌, 뭔가 착각하고 있군.’
[뭘 말입니까?]
‘공부를 잘하는 것과 머리가 좋은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말이야.’
[별개라고요?]
‘대학 공부, 그중에서도 시험에 나오는 것을 잘 치는 데는 적당한 머리와, 지독한 끈기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야. 더욱이 국성대 정도의 3류 대학이라면 더 쉽지. 네 말대로 머리가 좋으면 공부하는 시간을 줄일 순 있겠지만 결국 누가 더 의자에 엉덩이 오래 붙이고 앉아있느냐의 싸움이거든.’
[아···.]
‘그리고 내가 이번에 수석을 한 건 남보다 노력했기 때문이야. 물론 전생의 경험을 활용해 시험 대비를 철저히 한것도 도움이 됐겠지. 결론은 시험을 잘 봤다고 이해력이 발달하지는 않는다는 소리지.’
[역시 빠가의 한계인가요?]
‘그렇지. 아이큐 100이 안된다는 건 결국 평균 이하라는 뜻이거든. 100명을 줄 세우면 50번째 사람보다 뒤처져 있다는 의미니까. 아찔하지 않냐? 앞에 선 줄이 뒤에 기다리는 줄보다 많다는 게. 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안타깝군요. 주인님처럼 능력 있으셨던 분이 하필···.]
‘물론 오버클럭 스킬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야. 두뇌를 활성화시키면 그깟 주식 강의 쯤 누워서 떡 먹기지.’
[오늘 있을 소개팅 때문이었군요.]
‘맞아. 부작용으로 현자 타임이 와버리면 이틀간 여자는 쳐다도 보기 싫어질 테니까. 기껏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는 꼴이지.’
[아무쪼록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언젠간 아이템이 효과를 발휘할 테니까요.]
‘솔직히 지금도 큰 불만은 없어. 아이큐 대신 얻은 것들이 내가 전생에 간절히 원했던 것이니까. 또 머리가 나쁘다고 겉으로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시험 성적이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기도 하고. 다만 내가 화가 나는 건, 전생의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를 또렷이 기억하기 때문일 거야. 그 괴리감이 너무 크달까? 연예인들이 인기 떨어지면 우울증 걸리는 것과도 비슷해. 정점을 찍었던 이에겐 바닥이 너무 깊거든.’
[저런···.]
‘소영이가 나를 아주 잘 봤어. 주식을 끝까지 배우겠다고 한건 진짜 오기로 한 결정이었어.’
[저도 실은 그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소영의 제안대로 그녀에게 투자를 일임하셨어도 그닥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사실 그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소영이 본인을 위한 꼼수였으니 그렇지.’
[꼼수라뇨?]
‘사람이 한 번 얽히게 되면 복잡해지는 게 몇 가지 있어. 남녀 사이의 섹스같은. 돈도 마찬가지야. 어떤 면에선 지독스럽게 관계를 꼬이게 만들거든.’
[설마 소영양의 의도가 그럼···.]
‘맞아. 소영이는 나를 오랫동안 보고 싶은 것 같아. 애인까진 바라진 않지만, 몰래 감춰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먹고 싶은 간식 같은? 만약 내 돈을 소영에게 맡겼다면 돈을 불릴 수 있을 지언정, 돈 때문에 얽혀서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거야. 그녀가 내 자산을 관리해 주는 대가를 요구할 건 뻔하니까.’
[역시 주인님은 바람 같은 남자로군요.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군요.]
‘그것 때문에 여태껏 여자친구도 안 사귀는데, 돈 맡겼다가 코 꿰일 순 없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소영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 거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주인님.]
로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도훈이 영철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영철이 알려준 동을 찾아 차를 정차시키자, 밖에 미리 나와 있던 영철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형! 오셨어요!"
차 안에서 본 영철은 점심을 먹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과하지 않은 옷차림이었으나, 디테일한 부분을 따져보면 의외로 신경을 잔뜩 쓴 스타일이었다. 머리도 고데기를 사용해 한참 고정 시켰는 지 살짝 뜬 상태로 멋지게 스타일링이 되어 있었다.
도훈은 한껏 꾸미고 나온 영철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자식 완전 작정했구나.’
[영철군은 꾸미니까 더 잘생겼군요. 인기가 많았던 이유가 이해가 됩니다.]
"타라."
"넵."
영철이 보조석에 앉자마자 유난을 떨었다.
"와, 근데 이거 형 차에요?"
"어."
"형네 집 엄청 잘 사나봐요!"
"뭘, 그냥 중고차야."
"그래도요. 저도 이런 중고차 한 대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부모님께서 사줄 리가 없겠지만."
영철은 차를 모는 도훈을 한껏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일단 출발부터 하자. 늦으면 곤란하니까."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보조석에 앉은 영철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과장되게 말하면 몇 달간 묵언수행을 하다 풀려난 사람 같았다.
"와, 그래서 행보관이 막 초소로 뛰어가는데!"
영철의 주제는 주로 군생활 시절의 에피소드였다. 도훈은 간간이 추임새만 맞춰주며 그의 입담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제법이군요. 잘생긴 얼굴만큼 언변도 유창하네요, 영철군은.]
‘그러게. 말로 사람 홀릴만 하겠는데? 여자들이 왜 그렇게 쉽게 넘어갔는지 알 것 같아.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네, 이 녀석은.’
[주인님도 입심으론 어디 가서 뒤지는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 나는 입으로 조지기 전에 이미 혀가 들어가 있다고 봐야지. 마우스가 아니라 오랄로 조져.’
[큭, 허세를!]
‘지금 비웃냐?’
"암튼 이제 전역한다고 생각하니 다 추억이네요."
"원래 지나고 나면 추억이지. 안좋았던 기억이건, 좋았던 기억이건."
"형은 어떠셨어요?"
"뭐?"
"어디 부대 나오셨다고 하셨죠?"
영철은 가만 놔두면 계속 군대 이야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도훈이 적당히 끊었다.
"영철아."
"네?"
"너 좀 있다가 여자들 만나면 군대 얘기는 되도록 하지 마라."
"앗!"
"물론 아직 전역 안 했으니 당연히 할 얘기도 많겠지만, 첫 만남부터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
도훈이 알아듣게 설명하자 영철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형, 말이 맞네요. 자중하겠습니다."
"자중까지는 아니고. 혹시나 가서 여자들 앞에 가서도 군대 이야기만 할까봐 그렇지."
"하하. 역시 형은 소문대로군요."
"소문대로라니?"
"3학년 중에 저랑 친한 동기 있거든요. 왕희준이라고. 아세요?"
"왕희준?"
도훈은 얼핏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았으나, 같은 학년이 아니라 얼굴을 특정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잘 모르실 수도 있어요. 과 생활은 거의 담쌓은 놈이라. 동아리를 더 좋아하거든요. 지금은 동아리 회장도 하고 있고."
"그래?"
"암튼 희준이가 저번에 형 얘기 많이 해줬어요."
도훈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귀를 쫑긋 세웠다.
"내 얘기? 뭐라는데?"
"희준이 말론 도훈이 형이 여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다더라고요."
"내가?"
"네. 사범대 강의동 지나만 가도 여자애들이 막 졸졸 따른다면서."
"과장이 심하네. 무슨 말도 안 되는."
"맞다. 그 얘기도 했어요. 여자애들은 죄다 형만 쳐다 보는데, 형은 여자들한테 별로 관심이 없다나? 암튼 전혀 신경 안 쓰신다고."
영철은 말을 꺼내면서 계속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이는 도훈의 여성 편력을 파악하기 위한 밑 작업이었다. 도훈은 곧바로 영철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두루뭉술 둘러댔다.
"학과 생활 잘 안하는 친구라고 했어?"
"네."
"잘 모르고 한 소릴 거야.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뭔 여자들이 졸졸 따라다녀. 웃기는 소리지."
"아···. 그래도 여자들한테 인기 많지 않으세요?"
"딱히. 그리고 난 대학생들보단 캠퍼스 밖에서 만나는 걸 좋아해."
"정말요?"
"응, 솔직히 주변에 널린 게 대학생이잖아. 너무 흔하달까?"
"역시! 형님은 남다르시군요."
도훈은 일부러 학과에 존재하는 하렘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하필 오늘 소개팅이 야구팀의 치어리더와 만나는 것이었으므로 영철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말았다.
‘도훈이 형이 왜 학교에서 여자를 안 만났는지 알겠어. 어차피 밖에 나가서 예쁜 여자들 실컷 만날 수 있는데, 굳이 대학에 얽매이지 않는 거지.’
또한 도훈의 인기비결 역시 나름대로 해석했다.
‘저렇게 잘생겼는데 같은 학교 여자들은 거들떠도 안보니까 오히려 여자애들 사이에서 주가가 올라가 버린 거야. 원래 못먹는 감이 더 매력적인 법이니.’
"형, 근데 오늘 만나는 두 분 다 사진 봤는데 엄청 미인이시더라고요."
"당연하지. 그래도 치어리던데."
"형은 혹시 어떤 스타일 더 좋아하세요?"
"뭐?"
"황시엘이랑 이지희 중에서요."
도훈은 당연히 ‘둘 다 내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부러 고민하는 척 했다.
"글쎄다. 근데 그건 왜?"
"아휴, 저희끼리 미리 나눠야지 성공확률이 높잖아요."
"성공확률이라니?"
"소개팅이요."
"야.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네?"
"그냥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밥 먹으러 가는 거야. 소개팅 뭐 그런 거창한 거 아니고."
"물론 그렇지만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않을까요?"
"난 그냥 편한 마음으로 볼 거야. 그리고 우린 민간인이고 상대는 나름 얼굴도 알려진 사람들인데 그리 쉽게 되겠냐?"
"음···. 그럴려나. 암튼 전 형이 먼저 고르시면 남은 쪽 택할 게요."
"얼씨구?"
"당연히 형님 먼저 아우가 나중이죠. 헤헤, 전 사실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겠더라고요. 황시엘 치어리더는 얼굴이 되게 예쁘고, 이지희는 슴가가 어우···."
도훈도 마찬가지로 이지희의 신체 부위 중 가슴이 유독 큰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엘이 밸런스가 잘 잡힌 몸이라면, 지희는 타고난 거유 타입이었다.
[영철군이 정말로 적극적이군요. 주인님도 슬슬 선택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누가 준대?’
[네?]
‘시엘을 따먹든, 지희를 따먹든 업적은 업적이고 암튼 난 둘다 양보할 생각 없거든.’
[근데 둘 중 한명의 공략에 성공하면 나머지는 결국 불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힘 빼시는 걸텐 데요.]
‘황시엘은 내가 찍은 애고, 이지희는 나를 찍은 애야. 어쨌든 나 보러 나오는 건데 꼽사리 낀 영철이가 눈독들이는 게 마음에 안 들잖아.’
[이런 욕심쟁이 같으신 분.]
‘어쩔. 내가 따먹고 싶다는데. 영철이는 그냥 들러리만 서주면 돼. 황시엘을 자리에 잡아두기 위한 명분용이지.’ 두 남자는 곧 만나게 될 치어리더에 대해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