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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86화 (1,153/2,000)

1169. 질투는 나의것-24-

* * *

"도훈아, 넌 진짜 최고야!"

섹스가 끝난 뒤 소영이 힘겹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깨 위로 팔을 올리는 것조차 버거워할 만큼, 완전히 탈진해 버린 모습이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나 잠깐 씻고 올게."

소영이 비틀거리며 안방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혼자 남게 된 도훈은 습관처럼 담배를 찾았다. 섹스를 마치고 나면 끽연 욕구를 유독 참기가 힘들어했다.

그는 아까 집어 던졌던 금장 라이터와 담배를 손에 쥐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다시 내려놓았다.

‘맞다. 담배 냄새 싫어한댔지?’

[집안에서 담배 피우는 걸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순간 모텔방으로 착각했지 뭐야. 침대가 너무 넓다 보니.’

확실히 소영의 침대는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사이즈였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되자 심심해진 도훈은 금장으로 반짝거리는 망각의 지포라이터를 들고 생각했다.

‘싸이판 가서 얻은 이 아이템 말이야. 진짜 효과 하나는 직빵인거 같아.’

[당연하죠. 나름 특급 아이템인걸요.]

‘젊었을 때 봤던 영화 중 맨 인 블랙이라는 SF영화가 있었거든. 거기에 나오는 요원들 장비랑 비슷하달까?’

[그렇습니까?]

‘응. 기다란 막대를 카메라 플래시처럼 눈앞에서 번쩍 터뜨리면, 빛을 본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앞선 기억을 잃고 쓰러지거든. 우주인을 목격한 증인들 입막음 용도로 쓰이곤 했지.’

[플래시 라이트가 라이터 불꽃으로 바뀐 버전이로군요.]

기억을 떠올리던 도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잠깐. 근데 그 영화에서는 해당 장비가 사용자에게 영향을 끼쳤었는데?’

[네?]

‘맞어. 그랬던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플래시를 터뜨릴 때 등장인물이 꼭 진한 선글라스를 착용했었어. 본인도 같이 기억을 잊어버릴까 봐. 혹시 망각의 지포 라이터도 그럴 수 있나?’

로시가 바로 대답했다.

[그런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천상계의 기술력은 영화보다 훨씬 뛰어나니까요. 라이터를 작동한 사람에 한 해 기억 상실에 면역을 갖습니다.]

‘호오. 그럼 나는 보고 있어도 상관없다?’

[네.]

도훈은 직접 실험을 해보려는 듯 지포 라이터의 금장 뚜껑을 튕겨 열더니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보통의 라이터와 같이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도훈이 한참 동안 불꽃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네?’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일전에 써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불꽃은 장식이 아닙니다. 혹여나 실수로 담배 피우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마십시오. 연료가 떨어지면 아이템의 효과도 끝나니까요.]

‘아차. 그렇지.’

그 말을 들은 도훈이 재빨리 뚜껑을 닫았다. 횟수 제한이 있는 아이템을 남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보통의 라이터처럼 쓸 수 있다고 한다면 꽤 사용기간이 남았겠지만.

‘가만. 근데 사용자에게만 면역이라고?’

생각이 거기로 미친 도훈이 로시에게 물었다.

‘그럼 사용자인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아이템 효과가 적용되는 거야?’

[맞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다른 플레이어나 PK단이라고 할지라도?’

[물론입니다. 정신 조작류 스킬에 대한 면역이 없다면요.]

‘면역? 그런 것도 가능해?’

[당연하죠. 세뇌나 최면, 기억 조작, 또는 매혹 같은 정신조작류 스킬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나 아이템이 존재한다면, 그 반대 역시 당연히 가능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정신 조작계 능력 자가 타 직업 대비 너무 오버파워(OP)가 될 테니까요.]

‘X맨 에선 그래서 대머리 할배가 짱 먹잖아.’

[네? 대머리 할배라뇨?]

‘아, 아냐. 암튼 그렇다는 거군. 그럼 혹시 로시 너에게도 해당 되는 부분인가?’

[저요?]

‘어. 사용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라면, 로시 너에게도 통한다는 거 아냐?’

[하하. 주인님이 저랑 오래 지내시다 보니 저를 사람으로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애석하게도 저는 인공지능입니다. 0과 1의 2진수로 짜인 프로그램에 불과하지요. 프로그램에겐 정신 조작류 스킬이 통하질 않습니다.]

‘아···. 그렇지.’

도훈은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쳇. 전 마누라한테 복수할 때 써먹을 수 있을까 했더니 인공지능에는 무용지물이구만.’

도훈은 속마음을 감춘 채 말했다.

‘암튼 그렇다는 거군.’

[네. 근데 방금 경우처럼 상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라면 소모성 아이템을 사용하는 대신, 스킬을 사용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스킬? 무슨 스킬? 나에게 망각 관련된 스킬은 없는 걸로 아는데?’

[망각 스킬은 없으시지만,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순 있지요.]

‘아차! 이지선다!’

[넵.]

도훈이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제 이마를 탁 쳤다.

‘이런, 머저리 같은···. 생각해보니까 이지선다 스킬을 써도 상관없었겠는데?’

[물론 두 개의 스킬의 매커니즘이 전혀 다르긴 합니다. 망각의 지포라이터는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데 쓰이고, 이지 선다는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결과를 예견하는 용도로 쓰이니까요.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효과는 비슷하죠.]

‘듣고 보니 그렇네. 그냥 이지선다를 썼어도 결과는 같았을 텐데.’

도훈은 미처 스킬을 떠올리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선택 결과를 확인해 보는 이지선다 스킬을 사용했더라도 소영의 마음을 떠보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한 번 정도 실수하실 수 있죠. 너무 자책 마십시오. 그거 조금 썼다고 당장 소모되는 일회용 아이템은 아니니까요.]

‘암튼 내 실수다. 하도 안 쓰다 보니 스킬 활용력이 떨어진 것 같아.’

[뛰어난 플레이어들도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시의적절하게 보유한 스킬을 활용하는 것 또한 플레이어의 역량이거든요.]

‘오케이. 다음에는 쓰기 전에 미리 알려주라고.’

[저도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저질러놓고 말씀하시지 말고, 다음엔 생각하고 저질러주시길.]

‘이게 한 마디를 안 져!’

도훈이 로시와 옥신 각신하는 데 샤워를 마친 안소영이 걸어 나왔다. 고급스러운 가운을 걸친 모습이었는데, 오성급 호텔에 서나 볼법한 값비싼 원단의 제품이었다.

"아-. 개운하다. 너도 씻고 와."

"그럴까요?"

도훈이 막 일어서는데 그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본 소영이 물었다.

"담배 피우려고?"

"아, 아뇨. 그냥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꺼낸 거예요. 집안에선 절대 안 펴요."

"음···. 아무래도 흡연자는 참기 힘들지. 화장실에서 피우면 배관 타고 다른 집에 냄새 올라가니까. 피울 거면 뒤편 발코니 나가서 펴."

"발코니요? 이 아파트에 발코니도 있어요?"

"응. 외벽에 살짝 튀어나온 정도지만."

"와, 역시 비싼 아파트는 다르구나."

"별소리를."

소영의 배려에 도훈은 짧게 샤워를 마친 후 뒤쪽 발코니에 나가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다. 그때쯤 이미 소영은 머리를 완전히 말린 뒤 옷까지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오피스룩에 가까운 스타일에 도훈이 놀라 물었다.

"왜 그렇게 차려 입으셨어요? 집인데 그냥 편하게 입으시지."

"난 이게 편해."

"오피스룩 아니에요? 회사 출근할 때나 입을 것 같은데."

도훈의 말대로 소영은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H라인 치마를 받쳐 입었는데,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음, 일종의 습관이라고 해두자."

"습관이라뇨?"

"나한테 주식을 알려주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거야. 집에서 트레이딩을 하더라도 백수처럼 보이지 말라면서."

"왜요?"

소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 어디서 주식을 사고팔더라도 전문가처럼 생각하라는 거지. 여의도 증권맨들이 밤새도록 술 퍼먹고도 다음날 출근할 때 빳빳하게 정장 차려입는 이유가 뭐겠어? 걔들이 고객 응대하려고 그러는 거 같아? 아니야. 그게 바로 프로페셔널 정신이거든."

"아···."

도훈은 살짝 오버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 소영의 태도를 존중했다.

색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소영의 직업 의식은 매우 투철한 편이었다. 본업인 의사로서 커리어 뿐만 아니라, 주식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 이제 정신 차렸으면 이제 수업 시작해 볼까?"

소영은 도훈을 자신의 서재로 이끌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벽면에 늘어선 두꺼운 전문 서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그만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장서량이었다.

‘와, 책이 죄다 원서네.’

뒷배경에 정신이 팔릴 무렵 도훈은 창가 앞 커다란 책상 위로는 모니터 3대가 병렬로 늘어선 것을 목격했다.

"이게 다 뭐예요?"

"응, 주식용 컴퓨터."

"근데 모니터가 3대씩이나 필요해요?"

"당연하지. 전 세계 경제는 서로 연동되어 있어. 미국 주식 차트 띄워놓고, 호가창도 띄우고, 각종 찌라시부터 증권사 뉴스까지 동시에 훑어보려면 솔직히 3대로도 모자라."

도훈은 입이 떡 벌어졌다. 안소영은 말로만 떠드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말로 집으로 출근하는 펀드매니저의 느낌을 풍겼다.

"이쪽으로 와봐. 차트보는 법부터 알려줄게."

컴퓨터는 24시간 풀로 돌아가는지 주식 차트가 띄워진 채였다. 주말이었기 때문에 거래가 되진 않았지만, 소영의 모니터에는 다양한 지표들이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근데 주말엔 장 마감되지 않아요?"

"당장 거래 하려는 게 아니야. 각종 선물지수부터, 환율, 그리고 해외 사항 등을 수시로 체크 하는 거지. 주식은 감으로 때려 맞추는 로또가 아니거든. 시장 상황을 주시하면서 저평가된 우량주를 사들이고, 적절한 시기에 제값에 매도하는 게 포인트야. 뭐, 사실 방금 말한 게 전부지만."

소영은 한참 차트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프를 읽는 기술부터, 재무제표를 분석하는 방법 등이었다. 간만의 학습에 도훈은 뇌에 부하가 올 것 같았다.

‘으씨, 대가리 터지겠는데.’

[주식이란 게 보기보다 참 어렵군요.]

거의 2시간여를 내리 강의한 끝에 소영이 도훈에게 말했다.

"다 알아들었지?"

"전혀요."

"뭐라고?"

소영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기껏 설명해 줬는데, 하나도 모르겠다고?"

"너무 어려워요. 누난 이쪽 분야에선 전문가지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라고요."

"흠···."

소영은 살짝 아쉬운 표정이었다.

‘도훈이가 보기보다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구나.’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이었지만 반의 반도 흡수를 못 하는 도훈의 학습력에 소영도 살짝 기댓값을 낮췄다.

"알았어. 그럼 완전히 기초부터 시작하자."

"잠깐만요. 누나, 저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벌써?"

"저녁에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아참, 그렇지? 그럼 나머진 숙제로 내 줄 테니까 공부해와."

"수, 숙제요?"

도훈이 질렸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오늘 배운 내용만 해도 본인의 것으로 완벽히 흡수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거기에 숙제까지 더하라니?

소영이 그런 도훈을 보고 물었다.

"왜? 주식 배워보고 싶다며. 벌써 자신 없어?"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용어도 어렵고 봐도 모르겠어서요."

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역시 어렵지? 그렇다면 쉬운 길이 있어."

"뭔데요?"

"그냥 배우지 않으면 돼."

"네?"

의외의 대답에 도훈이 놀라 되물었다.

"주식을 배우지 말라고요?"

"응. 내 경험상 주식은 공부한다고 느는 분야가 아니야. 게다가 투자라는 건 원금손실의 위험도 있고. 운 좋게 첫 투자에서 돈을 벌어도, 두 번째도 또 성공하리라는 법은 없거든."

도훈은 맞는 말이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살짝 반발심이 들었다.

"그럼 왜 저보고 계좌 만들고 투자 해보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쉽게 포기하라고 할 거면요."

"어려움을 느껴야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배워보고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처음부터 발을 들이지 않는 게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거든. 그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어."

"아니···."

"도훈아. 네 힘으로 꼭 주식을 공부할 필욘 없어. 주식으로 돈을 벌고 싶다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으니까."

"전문가요?"

"응. 나한테."

"누나한테 투자하라고요?"

"그렇지. 그럼 넌 주식을 더이상 안 배워도 되고, 안정적으로 자산을 늘릴 수 있겠지. 어때?"

‘이게 뭐 하자는 거지?’

[그러니까요. 어쩜 주인님을 한 번 가르쳐보니 재능이 없다는 걸 간파한 게 아닐까요? 소영 양은 전생의 주인님 못지않은 천재과니까.]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주식은 선택의 게임이야. 손절을 할지, 익절을 할지. 장투로 눌러 앉을지, 단타로 치고 빠질지. 손익을 계산해서 빠르게 판단해야 해. 자, 한번 판단해봐. 내 제안이 솔깃하니?"

도훈은 이것이 소영의 시험이란 걸 깨달았다.

‘나를 시험하고 있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크기를 보여줘야지.’

"배우고 싶어요."

"어째서?"

소영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잘 생각해. 네가 주식을 배우건 안 배우건 나를 통해 대신 투자를 할 수 있어. 너는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신경 쓸 필요 없이 이따금 불어 나있는 잔고만 확인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편해?"

"남이 잡아다준 고기는 매력 없잖아요. 고기 잡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도훈의 대답에 소영이 흡족하게 웃었다.

"짜식. 그래도 오기는 있네."

"죄송해요. 너무 복잡해서 머리가 아파서 그랬어요. 숙제 내주시면 열심히 해올게요. 누나한테 꼭 배우고 싶어요."

"알았어. 내용은 톡으로 정리해서 보낼 테니까 다음에 볼 때까지 공부 열심히 해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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