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5. 질투는 나의것-20-
* * *
"아참, 형. 혹시 저녁에 있으시다는 소개팅이요,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와···. 영철이 선 넘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그러게? 눈치가 없는 놈이 아닌 줄 알았는데 너무 뜬금없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 영철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나랑 같이 가겠다고?"
"네."
"왜?"
"형 말대로면 그쪽은 치어리더 두 명이 나오는 거잖아요. 형은 혼자 가고요."
"그래서?"
"기왕이면 남녀 쪽수를 맞추는 편이 더 재밌지 않을까 해서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영철아. 내가 아는 여자를 만나는 경우라면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고 데려갈 수도 있었을 거야."
"네."
"근데 이 경우는 좀···. 그렇지 않냐?"
영철은 나의 설명을 듣더니 곧바로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헐?’
[뭐가 저렇게 포기가 빠르죠?]
‘그러게. 저럴거면 왜 물어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영철의 방금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아 다시 물었다.
"근데 진짜 따라가려고 했어?"
"가능하다면요."
"왜?"
"아, 그게···."
영철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형.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 신조가 못 먹어도 찔러보자 주의거든요."
"뭘 찌른다고?"
"아니 뭐 이런 거죠. 형 혹시 중고거래 해보셨어요?"
"중고거래?"
"왜, 중고월드나 단군마켓같은 데서 가끔 중고품 구할 때 있잖아요. 새 걸 사긴 돈 아깝고, 남이 좀 썼어도 덜 찝찝한 물건 필요할때요."
"어, 근데?"
"전 중고거래 하면 무조건 일단 네고 치고 보거든요."
"네고?"
"네고시에이션이요. 협상. 그러니까 흥정을 붙이는 거죠."
"아니 근데 그게 지금 상황이랑 뭔 상관이지?"
"네고를 치면 어떤 사람은 들어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바로 쌩까거든요. 막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5만원을 깎으면 2만 원 정도는 빼주는 사람도 있고요."
"난 지금 이 비유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한마디로 이런 거죠. 네고를 시도해서 상대가 들어주면 원래사려던 가격보다 더 싸게 샀으니 이득이죠. 하지만 판매자가 안 들어줘서 그냥 산다고 해도 제가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엉?"
"그렇잖아요. 한 번은 물어볼 순 있는 거잖아요. 물어본다고 손해는 아니니까."
"아니 그게 무슨···."
"형이 가령 소개팅에 따라 나오라고 승낙했다고 치면, 저는 말 한마디로 치어리더를 만날 수 있으니 개이득이죠. 하지만 거절하면? 뭐, 제가 손해본 게 있나요?"
"하-. 이 자식 이거···."
[대단한 뻔뻔함이군요.]
‘나 이 새끼 뭔 스타일인지 알 것 같아.’
[뭔데요?]
‘그러니까 존나게 찔러보는 펜싱 선수타입이야.’
[갑자기 웬 펜싱 선수?]
‘일단 들이대고 본다고. 어제도 정음이랑 아영이랑 놓고 존나 들이 댔을 거야. 그렇게 해서 잘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딱 그 마인드 잖아.’
[오호.]
‘방금도 마찬가지야. 나한테 일단 찔러봐서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아까 말했던 대로 물어볼수는 있는 거니까.’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중고거래가 아니지 않습니까? 거래야 협상이 틀어지면 안 보면 말 사이지만, 주인님과는 계속 얼굴 봐야하는 데요.]
‘그래서 영철이가 1학년 때 욕을 많이 먹은 거야. 무작정 들이대고 아님 말고라는 방식은 결국엔 가벼운 이미지만 남기게 되니까.’
[아하, 영철군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군요.]
‘아니야.’
[아니라고요?]
‘여자를 많이 사귀려고 한다면 저런 무대포 같은 방식도 의외로 쓸만할 수 있어. 대부분의 남자들은 실패가 두려워 시도 조차 못 하고 여자를 놓치는 경우가 많거든. 하지만 영철이는 몇 번을 실패해도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들이대는 거잖아.
저런 타입이 오히려 성공률은 더 높을 수 있지.’
[성공보다 실패가 많으면 확률은 더 낮은 거 아닙니까?]
‘아, 그러네. 아무튼 직접 증명했잖아. 군대 가기전에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렸으니까.’
[그렇군요. 간만에 재밌는 후배가 등장했군요. 펜싱 선수 타입의 난봉꾼이라니.]
‘가만 있자. 근데 영철이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진짜요? 어떻게 말입니까?]
‘생각해봐. 영철이는 외모만 봐선 어디가서 꿀릴 타입은 아니잖아. 일단 데려가서 비호감 살 일은 없다는 거지.’
[그거야 그렇지만 주인님은 업적을 도전하러 가는 것이잖습니까? 특수직종이 더 맛있어, 업적요.]
‘방금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엘이랑 다른 여자가 나오면 분위기가 애매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왜요?]
‘명목상 시엘은 다른 후배를 소개해주려고 나를 만나는 거야.’
[그렇죠. 주인님은 사인볼을 받구요.]
‘근데 통상적인 소개팅이라면 처음에 잠깐 있다가 주선자는 빠져버린단 말이지. 그럼 내가 시엘을 붙잡을 명분이 없잖아.
상대방에게 실례가 되기도 하고.’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영철이가 함께 있다면 자연스럽게 균형이 맞춰지니까 시엘이도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지. 즉, 명분을 제공해 주는 거야.’
[오, 듣고 보니 그럴싸한데요?]
‘솔직히 말해서 후배라는 애도 나쁘진 않아. 와꾸도 쓸만하고 내 사진만 보고 소개해 달라고 할 만큼 적극적이기도 하고.
업적을 위해서라면 그냥 시엘이를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지. 후배 쪽이 훨씬 쉬운 게임이거든.’
[그렇죠.]
‘근데 난 시엘이 더 마음에 든단 말이지. 먼저 찍은 타겟이기도 하고, 공략했을 때 성취감도 더 클 것 같고.’
[흐음.]
‘나중에 소개팅 경과를 봐야겠지만, 어쨌든 꽃놀이 패를 들고 골라 잡으려면 영철이가 같이 따라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영철군은 일종의 라이벌인데요.]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은 아니지.’
나는 핸드폰의 거울처럼 반사되는 면으로 변화된 내 얼굴을 확인했다. 오늘만큼은 얼굴 천재라는 타이틀을 영철이 반납해야 할 것이다.
[아하!]
‘어차피 상대적인 거야. 나보다 잘난 존재가 곁에 있으면 신경에 거슬리는 경쟁자가 되지만, 나보다 못난 존재가 옆에 있으면 든든한 병풍이 되어주는 거야. 나를 더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역시 주인님은 사악하십니다.]
‘일단 시엘이 한테 연락해서 물어봐야 겠다.’
"영철아."
"네?"
"진짜 같이 갈 생각이야?"
"네? 아니 뭐, 방금 말씀드린데로 찔러나 본 거예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하하."
"그게 아니라 사실 나도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이라 좀 부담이 돼서 말이야. 아직 주선자도 잘 모르는데, 그 후배라니···."
"그럼요?"
"일단 내가 한 번 물어는 볼게. 소개팅이 부담스러우니 그냥 넷이서 밥 먹고 술 먹는 걸로 하자고."
"엇, 진짜요?"
"어. 물론 상대가 거절하면 방법은 없지만, 네 말마따나 물어는 볼 수 있는 거잖아."
"와, 형 진짜! 최고에요, 형!"
"새끼. 있어봐 톡 해 볼테니까."
시엘에게 톡을 날렸으나 응원하느라 바쁜지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답이 없었다. 결국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음식점을 나와야 했다. 지갑을 꺼내려는데 영철이 갑자기 나를 말렸다.
"형, 이건 제가 살게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어제 말씀드렸듯이 요새 병장 월급 좀 돼요. 그리고 소개팅자리도 따라가게 해주셨는데 밥 정도는 제가 사드려야죠."
"아직 답장 없어. 허락할지 안 할지도 모르고."
"그래두요. 형이 신경 써주신 것도 있는데 맨입으로 받아먹을 수 있나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나참."
"대신 형이 나중에 더 맛있는 거 사주세요."
"그래라 그럼."
후배한테 밥을 얻어먹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태영이나 우선이 같은 후배들과 밥을 먹을 땐 거의 내가 샀던 것 같은데.
[영철이 남자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요.]
‘은근히 경우가 바른 편인 것 같아. 무작정 여자를 찔러보는 습관만 아니었으면 훨씬 좋은 평판을 받았을 텐데 말이지.’
[완벽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식사를 마치고 나와 가게 앞에서 담배를 폈다. 태영이랑 달리 흡연자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둘이서 담배를 피우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는데 시엘에게서 답장이 왔다.
"어? 깨톡왔네."
"뭐래요, 형?"
"잠깐 나도 못 읽었어."
-황시엘 : 후배분을 데려 오신다고요?
폰 화면을 보여주자 영철이 "yes!"를 연발했다.
"형, 이거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요? 진짜 싫었으면 바로 거절했을 것 같은데."
"예의상 한 말일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물어보자."
-이도훈 : 네, 아무래도 소개팅 자리처럼 하면 괜히 부담스러우니까 넷이서 만나는 게 더 좋지 않나 해서요. 어제 야구장에 같이 왔던 동생이에요.
쉬는 시간이었는지 답장이 바로 도착했다.
-황시엘 : 음···.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곧 응원 시작해야 해서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예쓰! 됐다!"
시엘의 답장을 확인한 영철이 방방 뛰며 좋아했다.
정말이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인 것 같다.
"잘 됐네. 니 말 대로 밑져야 본전이었는데."
"형, 진짜 고마워요. 근데 약속 시간이 언제에요?"
"응, 경기 끝나고 보기로 했어. 5시쯤 끝난다던가? 아마 끝나고 씻고 뭐하고 7시나 돼야 할 걸. 정확한 시간은 아직 미정이고."
"그럼 시간 넉넉히 남았네요. 형 저 그럼 집에 가서 씻고 옷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뭐야, 안 씻었어?"
"네. 아침에 급히 나온다고 그냥 대충 나왔거든요. 그래도 치어리더랑 만나는데 신경 좀 써야죠."
"그래라, 그럼 내가 시간이랑 장소 잡히면 다시 연락 줄 게."
"넵, 형! 아니 회장님!"
영철이 와락 포옹을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고 말았다.
"사랑합니다!"
"야, 뭐야 이 자식!"
남자의 포옹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순간 닭살이 돋고 말았다.
영철이 바로 물러나더니 머쓱하게 대답했다.
"너무 고마워서요, 저도 모르게."
"나 남자 안 좋아하니까 다신 그러지 마라."
"넵!"
영철은 저녁에 다시 보자는 말을 마치고 먼저 사라졌다.
나는 녀석이 떠난 뒤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잇, 씨팔. 깜짝 놀랐네. 게이 새끼인 줄.’
[여자를 저렇게 밝히는데 설마요. 근데 스킨쉽이 좀 과하긴 하네요.]
‘그나저나 남은 시간동안 뭘 해야 하나.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버렸는데.’
약속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영철이마저 집으로 돌아가 버리자 혼자 서너 시간을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깨톡이나 한 번 정리하시지 그럽니까? 관리하는 여자분들에게 연락이 와있을 텐데요.]
‘아, 그럴까?’ 로시의 조언을 받아 간만에 깨톡을 정리했다. 업그레이드 된 망부석이 되지 마오, 아이템이 자동응답을 통해 관리되는 여성들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 등록이 안된 여성들의 경우 일일이 관리하지 않으면 방치된다는 게 문제였다.
주르륵 쌓여있는 메시지를 훑던 중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안소영에게 연락 왔었네?’
[안소영이면, 그 재활치료학과 여의사요?]
‘어.’
-안소영 : 투자는 잘 되고 있니? 어째 경과보고가 없어?
소영의 메시지는 단 한 개. 싸이판 여행을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으니 거의 10여일 가까이 단 한 통의 메시지만 보낸 셈이었다.
‘맞다. 주식 어떻게 됐지?’
소영의 말을 듣자 출국하기 전 주식 어플로 100만원을 넣어둔 기억이 떠올랐다. 비교적 작은 돈이라 돈을 넣어두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얼마가 되어 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MTS 어플을 통해 잔고를 확인하자 100만원을 넣어두었던 돈은 160%가까이 올라 있었다.
"억! 뭐야, 160만원이 됐다고?"
[오. 축하드립니다.]
‘에이씨, 이건 축하할 게 아니지. 1억을 넣었으면 1억 6000만원이 되는 거였는데!’
생각도 안 했던 주식이 엄청 올라 있자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넣어두는 건데.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소영에게 계좌 인증한 스크린 샷을 보냈다. 잠시 후 소영에게 답이 왔다.
-안소영 : 축하해. 초심자의 행운인가?
-이도훈 :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박을 걸 그랬어요.
-안소영 : 몰빵은 언제나 금물이야. 소소한 성공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지. 주말인데 뭐하니?
-이도훈 : 저녁 약속 기다리고 있어요.
-안소영 : 혼자야?
-이도훈 : 네.
-안소영 : 잘됐네. 나 오늘 쉬는 날인데 놀러 올래?
-이도훈 : 누나 집에요?
-안소영 : 응, 주식 알려준다고 했잖아. 첫 투자도 성공적으로 했으니 이제 슬슬 진도 나가야지.
소영의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실은 주식을 배우는 것보다 그녀를 하렘 왕국의 멤버로 포함 시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다른 여자들의 경우 조건을 맞추기 위해 이런저런 제약을 풀어야 하지만 그녀는 비교적 최근에 만난 사이라 별다른 제한 사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도훈 : 네, 그럼 30분 안에 갈게요.
-안소영 : 비밀번호 알려줄게.
소영은 아파트 현관 비번과 자기 집 출입문 번호까지 모두 알려주었다. 그렇게 부잣집에 혼자 살면서 도둑이 들까 무섭지도 않나 보다. 하긴, 그런 부자 아파트를 털 간 큰 도둑놈이 있겠냐 만은.
소영의 아파트에 도착해 알려준 대로 비번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커다란 집은 텅 빈 것처럼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 같았다.
"뭐야? 사람 불러놓고 외출한 건가?"
무료해진 나는 혼자서 아파트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