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8. 질투는 나의것-13-
"오빠, 혹시 저랑 술 한 잔 더 하실래요?"
정음과 영철을 떠나보낸 뒤 아영이 물었다.
"둘이서만?"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도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오늘 밤 뭔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좀 있음 막차 끊길 시간인데···."
도훈이 지하철 핑계를 대며 사양했지만 아영이 끈질기게 매달렸다.
"택시 타고 가면 되죠."
"택시비 많이 나올걸? 잠실에서 우리 동네까지면."
"택시비 제가 내드릴게요."
"···뭐?"
이쯤 되니 도훈도 자존심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 마치 택시비가 아까워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영 양이 고집을 피우는군요.]
‘뭔가 결심한 느낌 같은데···.’
[주인님 발목을 잡을 것 같으면 이쯤에서 손절 하시죠? 어차피 더 공략할 여지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1년을 함께 할 집행부잖아.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들어봐야지.’
"그래, 가자. 그리고 택시비는 안 줘도 돼."
"네."
도훈과 아영은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꼬치안주를 파는 조그만 가게였다. 아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시켰다.
"여기 소주 2병이요."
"2병씩이나?"
"오빤 안 마셔도 돼요. 저 혼자 마실 거니까."
"나참."
안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아영이 소주를 따랐다. 자작을 하는 아영을 말리며 도훈이 술병을 빼앗았다.
"같이 마셔."
"오빠 술 잘 못 하시지 않아요?"
"나도 마실 땐 마셔."
잔을 다 채우자 아영이 건배도 없이 곧바로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도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술이 부족했니?"
아영이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말 못 할 것 같아서요."
아영이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우려는 데 도훈이 한번 더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누가 안 쫓아와. 천천히 마셔."
"아직 안 취했어요."
아영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도훈이 차분히 말했다.
"박아영. 맨정신으로 못 할 말이면, 취해서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술 깨서 후회하기 싫으면."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들어줄 준비 됐으니까 지금 말해봐."
도훈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자 아영이 우물쭈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혹시···."
* * *
"아깐 미안했어."
"네?"
둘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영철이 말했다.
"도훈이 형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한 거 말이야. 내가 좀 경솔했던 것 같아. 미안해."
영철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정음도 기분이 풀렸다.
"아니에요. 저도 죄송해요. 제가 좀 욱하는 기질이 있어 가지고."
"아니야. 충분히 맞을 만했지. 난 둘이 그런 사인 줄도 모르고···."
"그런 사이라뇨?"
정음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학과 내에서 몇 번 소문이 돈 적은 있지만, 대놓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눈치가 빠른 영철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맞다. 두 사람이 오피셜한 관계는 아니라고 했지? 대충 썸타는 정도려나?’
"아니. 회장님이랑 너랑 그렇게 친한 사인 줄은 몰랐다고. 누구라도 친한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면 기분 나쁠 만 해."
"음. 그래요."
"근데 너 진짜 주먹 매섭더라. 앞으론 다신 안 덤벼야지."
영철은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정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어쨌든 정음도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 영철에게 실례를 범했기 때문에 서로 적당히 화해했다.
영철의 생각은 이랬다.
‘학과에서 왕따처럼 지내는 아영이가,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정음이야. 여자를 공략하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녀의 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거지.’
이른바 우회전법이었다.
"근데 넌 아영이랑 어떻게 해서 친한 거야?"
"네?"
"아니, 둘이 엄청 단짝같아 보이길래."
"이번 수영 캠프가서 친해졌어요."
"아, 여름 방학 때 갔다던?"
"네."
"그럼 얼마 안 됐네? 그전까지는 별로 안 친했어?"
"실은 아영이가 학과 행사에 잘 참여를 안 했어요. 별로 재미가 없었다나?"
"그렇구나. 너도 그럼 아영이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
"뭘요?"
영철이 슬슬 본론을 꺼냈다.
"아영이 혹시 사귀는 사람 있나 해서."
"사귀는 사람이요?"
정음이 커다란 눈을 말똥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하진 않았지만,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없을걸요? 왜요?"
"나 사실 아영이한테 관심 있어서."
"정말요?"
영철은 공개적으로 정음에게 도움을 청할 계획이었다.
이는 정음의 경계심을 낮추는 효과도 있을뿐더러, 처음부터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이후에 정음이 친구에게 좋은 얘기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근데 두 사람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에요?"
"맞아, 물론 아직은 호감 정도야. 막 좋아한다 이런 감정보다는 앞으로 잘해보고 싶은."
"음, 그걸 왜 저한테···."
"그래도 정음이 네가 아영이랑 제일 친하니까, 날 도와줄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제가요?"
정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만요. 근데 이건 아영이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두 사람 사이에 끼는 건 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마. 뭘 부탁하거나 그러려는 건 아니니까. 그냥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하려고 물어본 거야. 또 물어본 이유를 말해주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아···."
‘영철 선배는 정말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구나.’
"이해하지?"
"네, 뭐.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고마워. 학과사무실에 우연이 널 마주친 게 행운이었어. 재밌는 야구경기도 보고, 덕분에 아영이도 알게 되고."
"야구 직관은 아영이 생각이었어요."
"그렇지. 아, 맞다. 아까 아영이가 입장비 N빵 한다고 했는데. 얼마 줘야 하지?"
"글쎄요. 단톡방에서 아직 말은 없던데."
"내가 물어볼게."
영철은 톡 할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곧바로 핸드폰을 열었다. 그러다 도착한 문자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어, 잠깐만 정음아. 나 전화 좀 하고 올게."
"네."
정음에게 양해를 구한 영철이 지하철 구석으로 가더니 한동안 통화를 했다. 잠시 후 정음에게 돌아온 영철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버지랑 통화했어."
"아버지랑요?"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암튼 먼 집안 친척이 있는 데 이번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나 봐."
"네?"
영철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뭐, 어차피 친한 사이도 아니고 너한테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실은 우리 아버지 사촌 조카 이야기야."
"선배 아버님의 사촌이면···."
"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한테는 종질이고, 나랑은 육촌 관계지.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랄까?"
"꽤 머네요?"
"암튼, 지금 감옥에 수감됐대."
"네?"
"해외에서 마약류 소지 혐의로 붙잡혔다나 봐. 아버지가 뉴스에 나온 거 보고 연락하셨고."
"아···. 정말요?"
"내 항렬이 ‘철’자 돌림이잖아. 그 형들 이름이 아마 형철, 상철인가 그럴 거야."
"선배랑 비슷하네요?"
"그치? 암튼 별일이 다 있다. 예전에 나 어렸을 때 사업이 어려워 져가지고 아버지가 당숙한테 돈 꾸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적이 있거든. 그 뒤론 아예 연락 끊고 살았어···. 거참 사람 일 모르는 거네. 그 집안 진짜 부자였는데."
"그러셨구나."
"내가 너한테 진짜 별 얘길 다 한다."
"괜찮아요. 선배는 근데 정말 솔직한 사람 같아요."
"나?"
"네."
"내가 원래 좀 그래. 숨기는 것보단 뭐든 솔직한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
"···그러시구나."
영철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음은 아주 잠깐이지만 기분이 울적해졌다.
‘반면 도훈 오빠는···.’
벌써 알고 지낸 지 반년이 넘었지만, 도훈은 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도훈은 늘 거리감이 존재했다. 정음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야. 뭐, 이것도 성격 차인데 뭘.’
정음은 애써 씁쓸한 기분을 떨쳐냈다. 그런건 앞으로 더 친해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간 영철이 오해한 것처럼 도훈과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오픈할 날이 올 것이다.
"맞다. 아영이한테 돈 얼마 줘야 하는지 물어 본다고 했지?"
뒤늦게 생각이 났는지 영철이 아영에게 톡을 남겼다.
하지만 아영은 톡을 읽지 않았다.
"음, 바쁜가?"
영철은 최대한 조바심내지 않고 답변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앞으로 오래오래 볼 사인데, 급한 마음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 * *
"오빠 혹시 ···정음이 좋아해요?"
예감이 맞았다.
아영이 나와 정음의 관계를 확실하게 눈치챈 모양이다. 왠지 골치 아플 것 같더니만, 안 좋은 예감은 늘 비켜가질 않는다.
"음···. 내가 대답해야 하는 부분이야?"
"아뇨. 상관없어요. 이제 그런 건."
"그건 무슨 뜻이야?"
"내가 더 좋아하면 되니까요."
"뭐?"
"오빠가 정음이를 좋아하건, 정음이가 오빠를 좋아하건 이제 그런거 하나도 신경 안 쓸 거라고요."
"갑자기 무슨 말 하는 건데?"
"나 오빠 좋아해요."
"아영아, 너 취했니?"
"내가 오빠 좋아한다고요."
아니다. 아영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량은 보통을 넘는다. 얼굴이 빨개 보이는 건 취기가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증거였다. 그녀는 작심한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 보며 말했다.
"알아요. 나 지금 이상해 보이는 거. 캠프에서 그런 일도 있었는데, 이제와 왜 그러는지 이상하겠죠. 저도 이상했어요.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이 정말 어떤 건지."
"······."
"미웠어요. 나한테 저번에 dvd방에서 한 짓도 막 생각나고.
다른 여자들 건드리고 다닌 것도 생각나고. 오빠 생각하면 어쩔 땐 너무 화가 나서, 사람들한테 다 말해버리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정말 그러면 오빠 곤란할까 봐 걱정되고. 내가 봐도 정신이 나간 것 같았거든요, 요 근래 계속."
"···아영아."
"오늘 정음이랑 같이 있을 때 오빠 눈빛 보고 알았어요. 오빠가 정음이를 많이 좋아하는 구나. 다른 여자애들하고 있을 때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아영아 그건···."
"뭐, 이제 상관없어요. 그냥 신경 안 쓰려고요. 걱정마요. 정음이한테는 오빠 얘기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 앞으로도 절대 말 안 할 거예요. 그건 제가 싫어요. 두 사람 사이 이간질 하는 나쁜 사람 되는 거 같아요."
"······."
"그냥, 이제 내 감정대로 하려고요."
"그게···."
"나 그냥 오빠 좋아하면 안 돼요?"
[아, 이건 너무 곤란한데요.]
‘이런···.’
골치 아프다. 치정 싸움 같은 거.
나 같은 바람둥이에겐,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이런 것에 신경 쓸 정도로 플레이어의 임무는 녹록지 않다.
나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아영이를 놔두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잠깐만 아영아. 알겠으니까, 조금만 진정해."
"저 지금 멀쩡해요. 술김에 하는 얘기도 아니고요."
"그래, 알아. 다만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
[지금이 손절 타이밍입니다. 벌써 질척거리는데 앞으로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음···. 그래야 하려나.’
[주인님은 이런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싫어서 이제껏 누구와도 사귀지 않으셨잖습니까? 아영양은 이미 선을 넘었습니다.
이제껏 내내 쿨한척하다 왜 저렇게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길게 끌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결단하십시오.]
‘후-. 미안한데 괜히.’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영이를 가지고 논 꼴이 되어버렸다. 놀라운 건 아까 화장실 앞에서 추행에 가까운 짓을 했는데도, 아영의 마음이 더 강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정 떼려고 했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아영 양은 지금껏 주인님이 만난 다른 여자들과 다릅니다.
희주양이나 오수정처럼 차라리 섹파 사이라는 걸 인정하던가, 아니면 정음 양처럼 비밀관계를 지켜주던가 해야 하는데 저래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집니다.]
‘나도 저럴 줄은 몰랐어. 시크한 척은 다 하길래, 계속 이 상태로 유지가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저런 타입이 순정파인 거죠. 도리가 없습니다. 인연의 붉은 실 가위를 꺼내는 수밖에요.]
로시의 말이 옳다. 안타깝지만, 아영은 지금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의 영민함이 장차 학과를 이끌어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나와 오래 가긴 어려운 모양이다.
"아영아 나는···."
그때였다.
아영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알아요. 오빠 바람둥인 거. 누구랑도 사귀지 않고, 섹파도 제법 많다는 거."
"···뭐?"
"괜찮아요. 그런 오빠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난 오빠 좋아할래요."
"무슨 말이야 그게?"
"오빠가 싫어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좋아할래요. 그렇게 해주세요."
"아영아."
"세컨이라도 상관없어요. 오빠가 정음이 더 좋아하면 계속 그렇게 해요."
[어랍쇼?]
‘아니 잠깐, 이건···.’
"그냥···. 나 오빠 좋아할거니까."
"음."
마지막 말은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고고한 아영이 저렇게까지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 아영을 내치면 내가 정말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미안한데 더 미안해질 것 같았다. 사람이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빠."
"아영아."
"오늘 밤 나 안아주시면 안 돼요?"
"······."
나는 결국 인연의 붉은 실 가위를 꺼내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최근 싸이판에서 한 번 쓰고 나서 쿨타임도 회복되지 않았다. 물론 핑계에 불과했지만.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네. 그거면 충분해요. 지금은."
아영의 표정이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오늘밤 그녀를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우린 술을 남기고 곧바로 모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