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7. 질투는 나의것-12-
"아무거나 시키랬더니 아무거나 안주를 시킨 거야?"
"네, 메뉴판에 있던데요?"
"나참. 그래 뭐 딱히 고를 게 없으면 그게 제일 무난하긴 하지."
"저 아무노래도 잘해요."
"아무노래?"
"한 번 보여드려요?"
영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노래와 함께 춤을 선보였다. 요새 유행하는 ‘아무노래’ 챌린지라는 것으로 모 가수의 춤을 따라하는 인터넷 밈의 일종이었다.
"아무노래나 일단 틀어~."
영철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한참 흉내를 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자리에 앉았다. 도훈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방금 그거?"
"형, 이거 모르세요? 요새 인싸들에게 엄청 핫 한 건데?"
"아···. 인싸."
"개인기로 써먹으려고 군대에서 연습했어요."
영철은 어느새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그는 실패에 쉽게 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과거에 사범대 투어(?)를 할 적에도 성공한 시도보다 실패한 사례가 훨씬 많았다.
헌팅을 잘하는 바람둥이라고 백이면 백 성공하지 않는다. 남들이 2~3번 해보고 안 된다고 포기할 때, 20~30번은 들이대서 그중에 몇 번을 더 성공하는 것뿐이다.
‘근성이 뭔지 보여주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야.’
그는 야구장에서 정음에게 치이고, 아영에게 까이며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다시 일어섰다.
그의 뻔뻔함에 정음도 그를 조금은 달리 보았다.
‘···영철 선배는 이상한 사람이구나.’
"형도 한 번 연습해 보세요."
"에이, 난 별로 그런 거 안 좋아 해."
"왜요? 잘하실 것 같은데? SNS같은 데 올리면 인기 폭발하실 듯?"
"안해, SNS."
"안 하신다고요?"
"응."
"설마 계정도 없으세요?"
"굳이?"
물론 도훈도 과거 인스타 계정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략이 끝나고선 곧바로 없애버렸다. 관리하기도 귀찮고,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헐! 회장님 완전 인싸신 줄 알았는데···."
"인싸건 아싸건 그게 뭔 상관이야? 남의 관심 받으면서 살것도 아니고."
"역시, 찐인싸! 하긴 SNS는 인생의 낭비죠!"
영철이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속으론 도훈이 구시대적인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도훈이형은 은근 아재같은 스타일이네.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형이랑 이미지가 겹치면 내가 무조건 불리하니까 나는 아예 다른 컨셉으로 가야지.’
영철은 보면 볼수록 도훈이 막강한 상대라는 것을 인정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무엇보다 운동신경이 넘사벽 수준. 얼굴로 날아드는 파울볼을 맨손으로 낚아채는 모습은, 일반적인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있었다.
‘그러니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체육과 회장까지 했겠지.
어차피 난 피지컬로는 상대가 안 돼.’
하지만 영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도훈에게 비빌 구석이 있을 거라 여겼다.
‘그렇다고 도훈이형이 체육과 모든 여자들을 혼자서 다 독차지 할 수 있는건 아니야. 그랬다면 잘생긴 영화배우나 아이돌 몇 명이서 세상 여자들을 다 나눠먹고 있게? 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거든.’
영철의 생각은 이랬다.
도훈이 잘난 것은 ok, 인정.
자기보다 뛰어난 점이 많다는 것도 역시 인정.
하지만 그런 도훈이라도 혼자 체육과 여자 모두를 감당할 순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영철은 2등 전략으로 그 빈틈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대충 구도를 보니 정음이가 도훈이형을 좋아하는 건 확실해 보여. 도훈이형도 사귀지만 않았지 같이 썸 타는 느낌이고.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노릴 건 아영이라는 말씀이야.’
차일게 겁나서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은 3류다.
한 번 까였다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것은 2류다.
진짜 1류는, 깨지고 무너져도 또 다시 덤벼드는 것이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기 마련이므로.
자신감을 다시 회복한 영철은 특유의 인싸 드립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대화를 주도했다. 야구장에서 찌그러져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 도훈도 살짝 놀랐다.
‘얘가 근본이 있구만.’
[네?]
‘유미 말대로 여자 경험은 많아 보여.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도 입 터는 게 수준급이잖아.’
[웬일이십니까? 주인님이 다른 남자를 인정하시고?]
‘솔직히 그전에 있던 후배들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잖아. 우선이는 성격은 듬직하긴 한데 너무 숫기가 없었고, 태영이는··
·. 어휴, 태영이 그 자식 때문에 진짜 암 걸릴 뻔 했는데.’
[태영군 확실히 선 넘긴 했죠.]
‘반면에 영철이는 제법 쓸모가 많을 것 같아.’
[언제는 바람둥이라고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람둥이는 맞지. 나랑 비슷한 부류일까 봐 솔직히 신경 쓰이기도 했고. 한 과에 카사노바가 둘인 게 말이 돼? 한 놈은 짜져야지. 근데, 지금 보니 딱히 나랑 겹칠 것 같진 않아.’
[겹치다뇨?]
‘영철이가 미남에 호색한이긴 해도,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으로 보이거든. 어차피 내 어장에 있는 여자들이 녀석에게 끌릴 일은 전혀 없을 거란 말이야.’
[호오, 근자감은 아니고요? 자칫하면 호랑이 새끼를 키울 수도 있습니다만.]
‘내 여자 채갈까 두려워서 주변에 온통 바보 멍청이들만 둘순 없잖아. 가끔 빠릿빠릿한 녀석들도 있어야지. 그리고 내 밥그릇은 내가 알아서 지켜. 영철이는 먹다 흘린 찌꺼기나 주워 먹으라고 해야지.’
[캬-. 정말이지 주인님의 독점욕은···.]
"어, 술 왔다. 자 우리 찐하게 한 잔 해요. 요건 제가 쏘는 거니까요!"
"그래, 고맙다 영철아."
"선배, 잘 먹을게요."
"······."
다들 영철에게 감사를 표하는데 유난히 표정이 좋지 않은 아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철은 실망하지 않고 끈기있게 기다렸다.
‘뭐 때문인지 몰라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괜히 말 걸어서 화를 돋우느니 그냥 닥치고 있어야지.’
잔이 부딪히고 맥주를 들이키는데 아무소리 않고 있던 아영이 500 CC를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절반을 마셨다.
"아영아 천천히 마셔."
정음이 걱정했지만, 아영은 끄떡없다는 듯 맥주잔을 내려놓고도 안주 하나 입에 대지 않았다.
"이야, 아영이 술 잘 마시는 구나. 먹고 싶을 땐 마셔야지. 더 시켜줄게, 얼마든지."
"······."
자꾸 쫑알대는 영철을 한 번 째려본 아영이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섰다. 정음이 걱정되었는지 뒤따르자 테이블에는 도훈과 영철만 남았다.
아영이 사라지자 영철이 물었다.
"형, 근데 아영이라는 애 원래부터 말수가 별로 없어요?"
"어, 그럴걸. 난 쟤 처음에 실어증인줄 알았잖아. 왜?"
"아···. 난 또. 아까 편의점 같이 가서 말 거는데 엄청 귀찮아하더라고요."
"음, 그럴 수 있지 아영이 성격이면."
여자들이 없는 틈을 타 영철이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근데 아영이 남자친구는 있어요?"
"남자친구? 글쎄. 회장이라고 후배들 연애사업까지 소상히 파악하고 있진 않는데. 왜?"
"솔직히 말하면 저 아영이 되게 마음에 들거든요. 그래서 남자친구 없으면 들이대 보려고요."
"진짜? 오늘 두 사람 처음보지 않았어?"
"원래 처음 봤을 때 심장이 두근거려야, 사랑이라잖아요. 저 아영이 사랑하는 거 같아요."
"뭐라고?"
‘크크. 이 새끼 진짜 또라인데?’
[근데 본래는 정음양 때문에 야구장에 따라온 거 아니었습니까? 그새 아영양으로 타겟이 바뀌었을까요?]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거나 정음이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나 보지.’
[호오, 갈아타기가 능수능란하군요.]
‘무릇 바람둥이면 포기가 빨라야지.’
[하지만 주인님이 곁에 있는 이상 아영양도 넘어갈 것 같진 않는데요?]
‘헛물켜는 거지. 앞으로도 8선녀라던가, 체육과에 반반한 애들은 죄다 한 번씩 찔러 볼 거야. 물론 쉽진 않을 걸. 어차피 내 어장에 들어온 여자들은 나에게서 절대 헤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냥 말해주시죠. 누구누구는 빼고 건드리라고요.]
‘냅 둬. 몇 번은 더 차여봐야, 현실 파악이 되겠지. 솔직히 체육과 내가 먹은 여자애들 말고도 많잖아. 그 왜 초기에 8선녀하다 떨어진 애도 있고.’
[1학년 김희수 학생 말씀이군요.]
도훈도 후에 듣게 된 얘긴데 1학년에서 가장 예쁘다는 여학생 8명도 처음부터 멤버가 확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학과 행사에 거의 참여를 하지 않아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아영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8선녀를 다시 선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돌았다.
어차피 우리끼리 정하는 거 9선녀로 늘리자, 그래도 처음부터 8선녀로 했으니 숫자를 맞춰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결국 가장 경쟁력이 없던 후보 하나가 탈락했다는 소리였다.
그게 바로 김희수였다.
새터에 말뚝박기를 할 때 엉덩이에 잦이침을 맞았던.
‘희수정도면 내가 대국적으로 양보해 줄 수 있지.’
[정말이지 사악하시군요. 주인님은 거들떠도 안 보던 여자들을 던져주시다니요.]
‘아니면 2학년 우현미도 상관없고.’
[꼴페미잖습니까?]
‘어쨌든 영철이 건드릴 수 있는 여자들은 딱 그 정도라는 거야. 혼자 고군분투 해보겠지만, 결국에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진짜에요."
"진정해. 원래 군대 막 제대하면 치마만 둘러도 다 예뻐 보인다잖아. 그때가 제일 눈이 낮을 때야."
"형도 그러셨어요?"
"뭐 나야···. 제대하자마자 아르바이트 하느라 정신 없었지."
"그러셨구나. 암튼, 아영이 남친 없는 거 확실하면 형이 좀 도와주세요. 아까 물었을 땐 없다고 한 것 같긴 한데, 긴가민가 하거든요."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음, 그냥 옆에서 적당히 추임새만 넣어주심 돼요. 그럼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도훈은 어림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적당히 호응했다.
"알았어. 근데 내가 그리 해주면 넌 나에게 뭘 해 줄건데?"
"네?"
"기브 엔 테이크 아니야?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아···."
영철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회장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
"동기들한테 들었어요. 2학기에 새롭게 출범하는 집행부에 남학생이 한명도 없다고요. 저도 이제 복학하면 같은 학년이니까 물심양면으로 학과일 도와드릴게요."
"그거 괜찮네. 안 그래도 힘쓸 사람 필요했는데."
"넵, 시키시면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 해."
"넵!"
* * *
"아영아, 괜찮은 거지?"
"응."
화장실 칸막이로 들어간 아영을 향해 정음이 문밖에서 물었다.
"많이 안 좋으면 말해. 내가 집에 바래다 줄 게."
"···괜찮아."
정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화장실에 앉아있던 아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아···. 너무 힘드네.’
도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러자니 천진난만한 정음과 연적이 되어야할 상황. 아무것도 모르는 정음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정음아 너···."
"응?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아영은 몇 번이고 솔직히 말을 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서 속마음을 밝히는 순간, 정음과는 척을 지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정음과 영영 절교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야···. 정음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나 때문에 괴로워 해야 하잖아. 도저히 말 못 하겠어.’
"아니야."
"편의점에서 생리대라도 사올까?"
"···그래 줄래?"
"응, 잠깐만 있어?"
정음이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영은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저히 말 못해. 정음이를 잃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도훈 오빠를 포기하기도 싫어.’
삼각관계라는 딜레마 속에서 아영은 결심했다.
‘정음이까지 끌어들이지 말자. 이건 나와 오빠 둘 사이의 문제야.’
정음과 도훈이 각별한 사이라는 건 알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커플은 아니었다. 아영은 그 점에 주목했다.
‘나는 몰랐다고 하면 돼. 이건 도훈 오빠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나와 정음이 사이의 문제는 아니니까. 그래 나는 나대로 좋아하면 되는 거야. 정음이랑은 상관없어.’
마음을 굳히자 한결 편해진 기분이었다.
아영은 이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 * *
"어, 다시 왔네."
아영이 술자리로 돌아왔을 때 표정이 한결 밝아져있었다. 다시 술이 돌았고, 네 사람은 오늘의 경기에 대해 한참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영철은 가끔 티가 날 정도로 아영에게 잘해주며 호감을 드러냈고, 아영은 적당히 받아 넘기며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술자리가 두어 시간 진행될 무렵. 정음이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엄마가 집에 일찍 들어오래요."
"그래? 우리도 그럼 적당히 일어나 볼까?"
시간은 어느덧 저녁 1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다들 지하철을 타고 왔기에 돌아갈 때도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가만있자, 다들 집 방향이···."
영철은 아영을 바래다주고 싶었으나, 아쉽게 지하철 방향이 달랐다. 게다가 처음 올 때부터 정음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왔기에 이제와서 속보이게 행선지를 바꿀 수도 없었다.
"정음이랑 저랑 위치가 비슷하니 제가 바래다줄게요."
"어, 지하철 왔다. 저 먼저 가볼게요. 오빠, 다음에 봬요! 아영이도 조심히 들어가!"
"어, 잘가!"
"연락해."
제대로 인사를 마치지도 못하고 두 사람이 쌩하고 사라졌다.
영철은 미련이 많이 남는지 지하철 차창 너머로 아영을 향해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영을 향해 말했다.
"어쩌다보니 둘만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