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6. 질투는 나의것-11-
깨톡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은 큰 충격을 받았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한글 못 읽으십니까, 휴먼?]
‘아니 그 뜻이 아니고···. 나 설마 까인 거냐?’
[네, 연락하지 말아달라는 데요.]
‘아니 씹, 이게 말이 돼?’
도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 차여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황시엘은 분명하게 말했다.
좀 더 과장을 보태면,
꺼지라고.
[그만 포기하시죠. 주인님이라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애초부터 공략 난이도가 높은 상대였습니다.]
‘이건 말도 안 돼. 분명히 뭔가 잘못됐어!’
[뭐가 말입니까?]
‘시엘의 호감도 말이야. 분명 60 넘었잖아. 그건 충분히 이 성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거라고.’ 도훈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담배를 연달아 물었다.
너무나도 직설적인 거절에 뭐라고 다시 말을 붙여야 할지 갈피도 잡지 못했다.
[그건 맞습니다만,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개인차?’
[어떤 여자들은 호감도가 70만 넘어도 쉽게 남자에게 마음을 여는 반면, 어떤 여자들은 80이 넘어도 꿈쩍도 않을 수 있다는 거죠. 애석하지만 시엘양은 후자인 것 같습니다.]
‘근데 왜 아까 나한테 그렇게 잘해준 건데?’
[뭘요?]
‘사인도 해주고 같이 사진도 찍었잖아!’
[그거야 팬 서비스 차원이겠죠. 연예인이 첨보는 사람과 포옹하고 악수했다고 그게 이성적으로 좋아서겠습니까? 당연히 팬 관리 차원이죠.]
‘음···. 그래도 이건 예상과 너무 다른데. 이렇게까지 나를 배척할 분위기는 아니었단 말이지. 내 눈치가 병신도 아니고.’ 도훈은 고심 끝에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이번엔 최대한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였다.
-이도훈 : 죄송합니다. 귀찮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우연히 파울볼이 생기는 바람에 선수 싸인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메시지를 보내는 도훈의 손이 오랜만에 떨렸다.
만약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는 도훈이라도 이번 공략이 쉽지 않을 터였다.
뻐끔뻐끔도훈이 새롭게 꺼낸 담배를 다 태워갈 무렵.
마침내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황시엘 : 알았어요.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깨톡으로 친구추가까지 해서 연락 하길래, 일부러 번호 받아 가신 줄오해했어요.
‘예쓰! 왔다.’
[답변에 신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오해는 풀었지만, 정보창 설명대로 낯선 남자를 무척 경계하는 타입으로 보이니까요.]
‘당연하지. 일단 대화를 유도해보자.’
-이도훈 : 그러셨구나. 문자보다 톡이 편해서 저도 모르게··
·. 그리고 일부러 번호 받아간 거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황시엘 : 알겠어요. 아까 파울볼 받을 때 우연히 봤어요. 여자친구분이랑 같이 오셨었죠?
도훈은 답장이 빨라진 시엘의 태도에 점점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 시엘이 쌀쌀맞게 변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아영이를 여자친구로 오해했던 모양이군.’
[아영양을요?]
‘파울볼 받을 때 내 옆자리 앉아있었잖아. 보통 야구장은 커플끼리 많이 오니까.’
[아!]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일부러 번호 따려고 접근한 바람둥이로 오해한 것 같아.’
[그러면 차라리 다행아닙니까?]
‘뭐?’
[주인님은 사실 바람둥이 정도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
‘닥쳐!’
도훈은 흐름이 끊기기 전에 곧바로 해명했다.
-이도훈 : 아, 보셨구나. 응원석 근처였어요. 그리고 여자 친구 아니에요. 과 후배들이랑 넷이서 야구 보러 왔거든요.
왠지 변명 같아 보였지만, 상대방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면 구차하더라도 일일이 해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훈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게, 실제 여자친구가 아니기도 했다.
다행히 도훈의 항변을 믿었는지 시엘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황시엘 : 아, 그러셨구나. 파울볼 캐치는 잘 봤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시엘은 도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연달아 메시지를 보냈다.
-황시엘 : 그거 유승우 선수 파울볼 맞죠? 싸인볼 받고 싶으시면 제가 여쭤 볼게요. 장담은 못 해드리지만요.
-이도훈 : 앗,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훈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시엘에게서 먼저 제안이 들어왔다.
-황시엘 : 은혜까진 아니고···. 혹시 도훈씨 애인 있으세요?
"오잉?"
도훈은 눈을 비비며 시엘의 답장을 확인했다.
난데없이 여자친구의 유무를 왜 물어본단 말인가?
‘이거 그린라이트지?’
[글쎄요, 다소 뜬금없긴 한데.]
-이도훈 : 없는데 왜요?
-황시엘 : 다름이 아니고···. 저희 팀 막내가 도훈씨랑 찍은 사진 보더니 한 번 물어봐 달라고 해서요.
‘막내? 백산 치어리더팀 막내 말이야?’
도훈은 재빨리 인터넷 검색으로 백산 치어리더 프로필을 싹훑었다. 검색 결과 모두 다섯 명의 이름과 사진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을 찾긴 어렵지 않았다.
‘이지희? 설마 얜가?’
프로필상 나이는 스물 두 살. 얼굴은 꽤 귀여운 편이었다.
이미지를 검색하자 치어리더 이지희의 전신사진 몇장이 나왔다.
‘오우, 뭔데 이 빨통은?’
사진을 확인한 도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른 치어리더들과 함께 찍힌 사진속의 지희는 어려보이는 얼굴에 비해 가슴이 유독 큰 편이었다. 특히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찍은 사진으로 보아 최소 C컵 이상이 확실했다.
[이건 대체 무슨 전갭니까?]
‘그러니까 이지희라는 다른 치어리더가 내 사진을 보고 애인 이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는 거잖아?’
[그렇죠.]
‘설마 소개팅인가?’
[네?]
도훈의 예상대로 시엘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황시엘 : 음, 저희 막내가 도훈씨 한 번만 만나보고 싶다는 데···. 혹시 괜찮으시겠어요?
"오옷, 지, 진짜네?"
[주인님. 이건 기횝니다.]
‘무슨 기회?’
[환승요. 어차피 공략 대상이 치어리더기만 하면 되는 거 잖습니까? 시엘양은 까다로워 보이니 주인님께 호감을 보이는 지희라는 분으로 갈아타시면 되잖습니까?]
‘환승이라···.’
도훈은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망설이다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이도훈 : 그러면 제가 다음에 싸인볼 받으러 갈 때 밥 한끼살게요.
-황시엘 : 괜찮으시겠어요?
-이도훈 : 네, 뭐. 그 정도야 하하.
-황시엘 : 알겠어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어떠세요? 저희 월요일은 경기가 없는 날이라 쉬거든요.
-이도훈 : 네, 괜찮습니다. 저녁으로 하죠.
-황시엘 : 네, 그럼 다음에 연락 드릴게요.
시엘과 다시 만날 약속을 잡은 도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쓰! 약속 잡았어."
[그렇게 좋으십니까?]
‘첨에 까이는 줄 알고 얼마나 쫄았다고. 근데 결과적으로 지희라는 보험까지 들었으니 이번 공략은 거의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거야 두고 볼 일이겠지요.]
‘이크, 술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시엘이랑 톡하다가 너무 밖에 오래 있었어.’
도훈이 황급히 술집으로 뛰어갔다.
* * *
"됐지?"
"힝, 언니 밖에 없다니까?"
여성 탈의실.
스타디움 내부에 위치한 치어리더전용 탈의실에서 지희가 시엘을 껴안았다. 시엘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지희를 겨우 떨쳐냈다.
"으으, 야, 땀나 치워."
"앗, 미안요. 이제 약속 잡았으니 샤워해도 되겠다."
여성 탈의실 내부엔 샤워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땀을 많이 흘린 날에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막내인 지희가 신이 나서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스포츠브라에 감춰진 거대한 가슴이 툭- 하고 튀어 나왔다. 옆에 서 있던 시엘은 지희의 풍만한 가슴을 곁눈질했다.
‘쟤는···. 나이도 어린 게 뭘 먹고 저렇게 큰 거람?’
시엘도 분명 B컵이 넘는 가슴으로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지희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지희의 경우는 워낙에 큰 사이즈 때문에 압박 스포츠브라로 꽁꽁 싸매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휴, 좀 살 것 같네."
답답했던 브라에서 풀려나는 게 기쁜지 지희가 말했다.
"응? 언니는 안 씻으세요?"
"어, 어···. 씻어야지."
시엘은 글래머러스한 막내 앞에서 옷을 벗기를 주저했다. 괜히 비교될 것 같은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어느새 훌훌 나신이 된 지희가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시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탈의를 하고 뒤따랐다. 평소엔 바로 집으로 가는 날도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힘든 경기에 응원을 열심히 하다보니 샤워를 하지 않고는 못 버틸 지경이었다.
쏴아아뜨거운 물줄기로 내부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한 샤워 장에 먼저 들어간 지희가 비누거품을 만들어 몸을 씻고 있었다. 시엘은 일부러 비교되지 않게 두 칸 떨어진 곳에 자릴 잡았다.
"참, 언니."
"응?"
"아까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죠?"
"이도훈?"
"얼굴은 잘생겼던데 이름은 살짝 촌스럽네요. 히히."
사실 도훈과 바로 약속을 잡았던 이유는 옆에서 지희가 자꾸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같이 씻기 시작한 시엘이 지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근데 진짜로···. 소개팅 할 거야?"
"네? 당연히 해야죠. 월요일에 약속 잡은 거 아니에요?"
"음···. 맞는데. 그래도 누군지도 잘 모르잖아."
"괜찮아요. 뭐, 별일 있겠어요. 언니도 같이 가는데."
"근데 저번 달에 남자친구 새로 사귀었다지 않았니? 그 왜, 대기업 다닌다던."
"진작 헤어졌죠."
"왜?"
"별로 더라고요. 맨날 야근에, 회식에. 있잖아요 언니, 저는 저랑 오래오래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그 오빠 대학생이랬죠?"
"어."
"학생이면 뭐, 시간은 많겠네. 저녁에 맨날 데이트 할 수 있고. 히히."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지희를 보며 시엘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지희를 우려하는 것보다 도훈이 더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지희는 남자친구도 자주 바뀌는 것 같은데, 괜히 소개시켜주는 건 아닐까? 나중에 헤어지면 괜히 나만···.’
"가만."
샤워기로 비누거품을 씻어내던 지희가 갑자기 고개를 훽 돌리더니 시엘을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왜요? 혹시 이제와서 아까우신 건 아니죠?"
"뭐, 뭐가?"
"아니, 남 주기는 아까운 뭐 그런?"
"내가? 헐, 말도 안 돼. 절대 아냐."
"그죠? 언닌 운동하는 사람은 질색이라면서요."
"······."
시엘은 예쁜 외모 덕분에 일전에도 야구선수들에게 대쉬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려서 안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시엘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뭐랬더라? 막 무식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맞다 맞다, 성욕이 너무 강하다면서."
"야. 그건 술 마실 때 농담으로 한 얘기잖아. 별걸 다 기억하네."
"암튼, 전 상관없어요. 기왕이면 몸 좋은 남자가 낫지. 비실비실한 것들은 어휴···."
평소에도 지희는 나이답지 않게 발랑 까진 편이었다. 반면에 보수적인 시엘은 그런 지희가 때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샤워를 하는 내내 시엘은 지희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남주긴 아까운 거예요?
시엘이 무심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 * *
"오늘 경기 진짜 재밌지 않았어? 나 너무 재밌었어!"
술자리에 앉은 정음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첫 직관에 끝내기 홈런 역전 게임을 봤으니 충분히 그럴만 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누구보다 백산의 진성 팬이던 아영은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음은 혼자 떠들다 아영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근데 아영이 너 어디 안좋니?"
"어? 아, 아니. 왜?"
"아까부터 표정이 좀 불편한 것 같아서."
"아니야. 살짝 컨디션이."
정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뭔가를 직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영이가 그 날인가 봐.’
급격히 안 좋아진 아영의 안색을, 생리통으로 착각한 정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특히 영철이 함께 있는 자리다 보니 더 입조심을 하기로 했다.
"선배는 어땠어요?"
정음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영철에게 말을 걸었다.
"어, 재밌더라. 난 근데 오늘 도훈이 형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잖아."
"아! 파울볼이요?"
"어, 잠깐 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짜 눈앞으로 공이 떨어지더라고."
"저도 엄청 놀랐어요."
"다행이 도훈이형이 잡아줘서 망정이지. 어휴···."
도훈의 이름이 거론되자 정음이 입구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회장님은 왜 안 오시지?"
"편의점으로 담배 사러 가셨잖아. 금방 오겠지."
그때 마침 도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도훈이 형! 여기요!"
영철이 손을 흔들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어쩌다보니 4인 테이블에 여자 둘과 남자 둘이 마주앉는 모양새가 되었다.
"미안, 늦었지? 아까 그 가게에 내가 피우던 종류가 떨어져서 다른 곳 다녀오느라고. 안주는 시켰어?"
"아직요. 형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무거나 괜찮아."
"아무거나요? 네, 그럼 그걸로."
"응?"
도훈이 당황했지만 그 사이 영철은 지나가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주문을 넣고 있었다.
"여기 아무거나 하나랑요, 생맥 500짜리 4잔 주세요."
자존감이 바닥 쳤던 영철은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는 이번 술자리에서 꼭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주리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두고 봐.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보여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