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5. 질투는 나의것.-10-
* * *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이 있다.
1960년대 야구광으로 유명했던 미 대통령 후보 존 F. 케네 디에게 '어느 점수대 경기가 가장 재미있습니까?'란 요지로 질문했는데, 케네디가 8:7 이라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물론 후에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졌지만, 도합 15점이 터지는 난타전 끝에 1점차의 승부면 당연히 재밌는 경기일 것이다.
야구를 오래 즐긴 팬들은 짠물 투구를 펼치는 명품 투수전을 더 재밌다고들 하지만, 라이트한 팬일수록 점수가 많이 나는 화끈한 타격전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오늘 벌어진 백산의 경기가 스코어가 딱 케네디 스코어였다.
4:0으로 리드하던 경기가 4회말 4:4 동점에 이르렀고, 이후 만루 홈런을 맞으면서 4:8로 역전 당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더블 스코어에 많은 홈팬들이 실망했지만, 끈끈한 백산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고 한 점 한 점 차근히 따라 붙었다.
이윽고 대망의 9회말.
2사 주자 3루.
점수는 7:8 .
전광판에는 야구 경기 중 가장 흥미진진하다는 케네디 스코어가 펼쳐지고 있었다.
"배액산! 배액산!"
"날려버려!"
"끝내기 가즈아!"
이제 안타 하나면 동점.
최소 연장승부에 만에하나 홈런이 터진다면 역전까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손에 땀을 쥐는 승부에 정음이 목청 높여 소리쳤다.
"제발, 안타 하나만!!"
생전 처음 직관을 온 정음은 야구가 너무 즐거웠다. 사실 야구라는 종목은 규칙도 복잡하고, 양팀 선수도 너무 많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진입장벽이 제법 있는 스포츠다.
하지만 정음의 옆에는 야구에 대해 척척박사급인 아영이 있었고, 하필 오늘 경기가 시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드문 접전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야구의 매력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는 야구장에 따라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목 놓아안타를 부르짖었다.
옆에 있던 아영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꼭 잡고 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너무 긴장이 되면 오히려 게임을 외면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TV로 경기를 시청할 때도 중요한 순간 일부러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채널을 돌리는 식으로 제대로 보질 못했다.
‘제발 백산이 역전하게 해 주세요···. 백산이 오늘 이기면··
·. 이기면···.’
아영은 옆에 있던 도훈을 힐끔 쳐다보았다.
‘백산이 역전하면 저도 도훈 오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게요.’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백산에 빗대고 있었다.
이미 지고 있는 상황. 상대팀은 절친인 정음이었고, 아웃 카운트 하나 밖에 안 남은 절망적인 스코어였다. 하지만 백산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경기를 뒤집는다면, 자신도 포기하지 않고 도훈을 끝까지 좋아해 볼 생각이었다.
‘···끝날 때 까진 끝난 게 아니니까.’
반면 아영이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와중에도 도훈은 치어리더만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는 경기의 승패보다는 업적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황시엘과 다시 접점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마지막 승부에 이르자 열심히 응원하던 치어리더들도 모두 동작을 멈추고 게임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도훈은 노랗게 염색한 머리의 황시엘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뒤태가 몹시 훌륭해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직 답장을 안 보냈는데 나중에 경기 끝나고 연락을 해볼까?’
공략 팁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라는 조언이 마음에 걸렸다. 여느 여자들처럼 쉽게 자빠뜨리긴 어려운 상대일 게 분명했다.
세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유독 얼빠진 표정으로 멍 때리고 있는 영철이 있었다.
정음에게 치이고 아영에게 까인 그는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멘탈이 걸레짝이 된 상태였다.
‘···그깟 공놀이···. 야구 따위가 뭐라고.’
정음은 힘차게 응원을 보냈고, 한 술 더 뜬 아영은 두 손을 맞잡고 기도까지 하고 있었다. 야구만도 못한 남자가 된 영철은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좋은 시절 벌써 다 가버린 거야?’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하던 영철은 겨우 마음을 추스렸다.
‘아니야. 마음만 너무 급한 거 같아. 군대 가서 2년 동안 여자를 많이 못 만나다보니 인내심을 잃어 버린거야. 나도 얼마든지 여자한테 까일 수 있어.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면 아영이 말대로 진짜 찌질이 되는 거야.’
영철은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다.
7전 8기다.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서면 된다.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근성으로 들이대면 그 갸륵한 정성에 하늘도 감동할 것이다.
‘그래. 시끌벅적한 야구장에서, 그것도 나란히 관람석에 앉아서 작업을 해보려던 것 자체가 무리수였어. 어차피 나중에 술 한 잔 하러 갈 테니 그때 다시 기회를 노리면 돼. 못할 게 뭐야? 내가 사범대 폭격기 김영철이라고!’
영철이 다시 자존심을 세우던 그때.
갑자기 주변에서 함성이 터지며 모두의 시선이 한 쪽으로 쏠렸다.
"어어어!"
"오오!"
"온다, 피해!"
백산의 타자가 친 타구가 파울이 되면서 1루 쪽 관중석으로 날아든 것이다. 파울 타구는 공교롭게도 멍 때리고 있던 영철의 머리위로 낙하했다.
경기장 스텝들의 경고성 호루라기가 울리고 사방에서 비명이 터진 상황.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영철이 고개를 쳐들었을 땐 이미 공이 눈 앞 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영철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타구에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리 궤적을 눈으로 따라갔으면 몸을 피하거나 공을 잡으려는 시도를 했겠지만, 넋 놓고 있다 코앞까지 다가온 바람에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으앗!"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영철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움츠러드는데, 잠시 후 착! 소리가 나면서 주변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우오오오오!"
"봤어? 맨손 캐치 대박!"
"저, 저 사람 뭐야?"
"멋있다!"
바짝 쫄아있는 영철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도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야, 괜찮냐?"
"혀, 형!"
자세히 보니 도훈이 날아오는 공을 낚아챘는지 손바닥 위에 야구공을 말아 쥐고 있었다. 장갑도 없이 떨어지는 공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한손으로 캐치를 해낸 모습에 옆에 있던 관중석이 떠들썩해졌다.
"와, 저걸 맨손으로 잡았어!"
"운동선순 가봐. 저 사람 키 좀 봐."
"생명의 은인이네, 옆에 있던 사람 얼굴 맞을 뻔 했는데."
도훈은 주목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민망해 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응원석 근처에 있던 시엘은 곧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저 남자.’
시엘은 문득 도훈과 그 일행들을 눈 여겨 보았다. 특히 옆에 앉은 여자들이 어리고 예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갑자기 콧방귀를 뀌며 짜증을 냈다.
"흥···. 어쩐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시엘은 도훈을 외면하며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파울 타구가 터진 이상 공이 배트에 맞고 있다는 의미였다.
볼카운트는 불리해졌지만, 충분히 역전 가능성이 있었다.
"힘내라 백산!"
"날려버려!"
"홈런, 홈런!"
경기장이 다시 달아오르자 도훈의 맨손 캐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옆에서 그를 지켜본 정음이 도훈을 걱정했다.
"오빠, 손 괜찮아요?"
"어? 어. 끄떡 없어."
사실 도훈은 손바닥이 얼얼했지만,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딱히 부상을 입거나 하지 않았다. 묘기에 가까운 실력에 바짝 쫄아있던 영철도 고마움을 표했다.
"형 아니었으면 뚝배기 깨질 뻔 했어요."
"하하. 정신 바짝 차려. 야구장에선 늘 집중해야지."
그리고 바로 그때.
또 다시 함성이 터져나왔다.
영철은 또 파울 타구가 날아드는 줄 알고 움찔 했으나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측 담장을 향하고 있었다.
"설마!"
"우아, 크다!"
믿기지 않는 역전이 벌어졌다.
백산의 7번 타자가, 시즌 3번째 홈런을 결정적인 순간에 때 려낸 것이었다.
"와!!! 넘어갔다!"
"9:8 역전!"
"꺄아아아아!!!"
야구장은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관중들이 방방 뛰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라운드 안에선 선수들이 홈런 친 선수를 향해 생수를 뿌리며 세레모니를 했다.
정음은 짜릿한 역전승에 감동한 듯 아영에게 소리질렀다.
"봤어? 봤어! 우리가 이겼어!"
그러나 누구보다 기뻐할 줄 알았던 아영은 오히려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겼구나."
아영은 뭔가 각오를 다진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 *
출구가 혼잡해 지기 전 경기장을 재빨리 빠져나온 일행들은 잠실 주변 밤거리를 걸었다. 힘겹게 이긴 승리 덕분인지 다들 들뜬 모습이었다.
"경기 이겨서 기분 좋은데 우리 맥주나 한 잔 하다 갈까요?
제가 승리 기념으로다가 쏠게요."
영철이 먼저 제안했다.
"네가 왜?"
"아까 간식 한 번 못 사서요."
"괜찮아. 너 아직 군인이라 용돈도 없을 거 아니야."
"아니에요, 형."
도훈이 영철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했지만, 영철은 괘념치 말라는 듯 말했다.
"요새 병장 월급 엄청 올랐잖아요."
"그래? 올라봐야 얼마나 올랐다고. 끽해야 몇 만원 아냐?"
"무슨 소리세요? 지금 병장 월급 40만원 넘는데."
"뭐!?"
도훈이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그가 군 생활을 했던 90년 중반에는 군인 월급 이래 봐야 만원 남짓 정도였던 것이다.
[뭔가 말 실수 하신 것 같은데요?]
‘그렇네. 물가보다 훨씬 빨리 올랐구나. 둘러대야겠다.’
"와, 많이 올랐네 진짜."
"형 때는 얼마였는데요? 그때도 한참 올리던 시기라고 알고 있는데?"
올해 초 제대한 도훈과 8월 전역인 영철은 현실적으로 6개 월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당연히 비슷한 시기에 군복무를 했으니 월급도 차이가 나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렇지. 내가 좀 착각한 것 같아. 사실 통장에 얼마 들어오는 줄 모르고 살았거든."
"암튼 저 은근히 알뜰하게 모았거든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가요. 제가 오늘 쏠게요. 너희들도 갈 거지?"
영철이 정음과 아영을 향해 물었다.
정음은 아까 영철을 때린 일도 있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감정을 풀고 싶어 흔쾌히 동의했고, 아영 역시 정음이 간다고 하자 따라 나섰다. 사실은 도훈과 정음 둘만 남겨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오늘 결과로 결정됐어. 난 도훈 오빠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다만 도훈만 살짝 난감해했다.
경기가 끝난 후 황시엘에게 연락을 취해 작업을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위기상 자기가 빠지면 안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래, 후배가 쏜다는 데 한 번 얻어먹어야지."
그렇게 일행은 택시를 타고 근처 번화가로 향했다. 도훈은 계산을 하기 위해 택시 맨 앞자리에 타고 몰래 황시엘에게 연락했다.
-이도훈 : 경기 너무 재밌었어요! 사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도훈이 문자를 보내고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도훈은 경기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느라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못 읽었나?’
[봤어도 무시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왜?’
[애초에 답장할 필요가 없는 사이잖습니까. 게다가 답장이 필요한 문자도 아니었고요.]
로시의 설명을 들은 도훈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이제껏 만난 대부분의 여자들이 먼저 자신에게 연락하거나, 혹은 귀찮아서 답장을 안 하더라도 끈질기게 문자를 보내는 통에 시엘도 그럴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 너무 안일했군. 아직 나에 대해 호감도가 높지 않은 상대였는데.’
도훈은 어떤 핑계로 연락을 할까 고심하다가 술집에 도착해 후배들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나 담배 좀···."
"오빠, 아까도 피우지 않았어요?"
정음이 걱정하는 듯 묻자 도훈이 변명했다.
"경기 끝나고 피우려고 내내 참았거든. 후딱 피우고 갈게."
"조금만 펴요. 몸에도 안 좋은데."
"형, 같이 피우실래요?"
영철이 눈치 없게 또 따라붙으려고 하자 도훈이 말렸다.
"아니야. 같이 자리 잡고 있어. 나 담배가 떨어져서 옆에 편의점 들렀다 와야해서."
"그냥 제 거 같이 피우셔도 되는데."
"난 피우던 것만 피워서. 계속 얻어 필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넵. 그럼 들어가 있을 게요."
세 사람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가자 도훈은 편의점으로 향하는 척 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문자는 상대방이 읽었는지 확인이 잘 안되니까 깨톡으로 보내야 겠다.’
도훈은 번호를 저장한 뒤 깨톡에 친구추가를 했다. 친구목록을 새로 갱신하자 황시엘이 친구로 등록되었다. 프로필 사진을 살펴보는데, 치어리딩을 하는 황시엘의 사진이 보였다.
‘확실히 예쁘단 말이지. 공략하는 맛이 있겠어.’
[그나저나 정음양과 아영양도 함께 있는데 이 와중에도 다른 여자를 꼬시려고 하다니···. 주인님은 정말 못 말리겠군요.]
‘어차피 오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일단 양념만 쳐놓자는 거지. 시간을 들여야 하니까.’
도훈이 다시 깨톡을 보냈다.
-이도훈 : 맞다. 저 아까 파울 타구 잡았는데, 혹시 선수한테 직접 사인 받을 방법이 있을까요?
깨톡을 보내놓고 담배를 태우며 기다리는데 잠시 후 대화창의 숫자 ‘1’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읽었다!
그러나 시엘은 메시지를 읽고도 한참 반응이 없었다.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든 도훈이 다시 메시지를 입력하려는데 마침 답장이 왔다.
-황시엘 : 저기, 죄송한데 개인적인 메시지는 보내지 말아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