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71화 (1,138/2,000)

1154. 질투는 나의것-9-

시엘은 달랑 사진 한 장만 보고 강한 호감을 드러내는 지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뜸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혹시나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야구 좋아하는 데 나쁜 사람이 어딨어요?"

"뭐?"

"그렇잖아요. 범죄자라면 한가하게 야구나 직관하러 왔겠냐고요. 그리고 얼굴에 다 써 있네. 나 착하다고."

지희가 도훈의 얼굴을 확대 시켜 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근데 이 사람 얼굴이 왜 이렇게 작아요? 언니 옆에서 찍었는데 전혀 굴욕이 없네? 혹시 키가 많이 작아요?"

"키? 작진 않았을 걸?"

"어느 정돈데요? 대충이라도."

시엘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서더니 도훈의 키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팔을 들어 키를 표시했다.

"나랑 이 정도 차이 났으니까···. 이쯤?"

"헐, 180 넘는 것 같은데?"

"아마? 아, 그래 탁현우 선수랑 비슷했어. 키나 덩치가."

"퓨마스 유격수 탁현우 선수 말이죠?"

탁현우는 백산의 라이벌인 MC 퓨마스의 유격수로, 호타준 족으로 유명한 차세대 유망주였다. TV 화면으로 보면 호리호 리한 체형으로 보여도, 실제 마주치면 185가 넘는 키에 80킬로가 넘어가는 단단한 체형이었다.

치어리더들은 선수들과 가까이서 마주칠 일이 잦았기 때문에 황시엘은 도훈과 비슷한 체형의 선수를 콕 찝어 지목한 것이었다.

"대박, 진짜요?"

"그랬던 것 같아. 등이 엄청 넓어서 처음엔 일반인이 아니라 대학야구부 소속 선순 줄 알았다니까."

지희는 핸드폰 사진을 보며 도훈의 얼굴을 재차 확인하더니 감탄했다.

"세상에, 이 얼굴에 탁현우 선수 피지컬이면···. 언니, 나 꼭이 사람 연락처 줘요. 알았죠?"

"잠깐만. 일단 물어보고."

"그냥 제가 언니 몰래 봤다고 하고 연락할게요. 네?"

지희가 애처럼 떼를 쓰자 팀장인 시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안 돼. 저번에 단장님 말 못 들었어? 우린 공인이나 마찬가지야. 구설수 오를 만한 행동은 삼가라고 했잖아."

시엘이 씹선비처럼 딱 끊는 바람에 천방지축인 지희도 대꾸를 못 하고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힝."

"일단 내가 먼저 의사를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때 연락처 줄 거야. 알았어?"

"···알았어요."

지희가 실망하며 물러서자 시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쟤는 언제쯤 철이 들는지.’

시엘은 남자를 밝히는 지희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주 일요일 클럽에 가는 자신도, 모르는 남자에게 헌팅이 오면 칼처럼 끊는 스타일이었다. 애초부터 보수적인 마인드를 가진 시엘로서는 아무 남자나 쉽게 만나지도 않았고, 여자는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희가 물러난 뒤 시엘은 혼자 도훈의 사진을 다시 살폈다.

‘이 사람이 첫눈에 반할 만큼 잘생겼었나?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사진을 곱씹어 볼수록 시엘은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주변에서 잘 생겼다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갑자기 도훈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얼굴이긴 했다.

‘뭐···. 나쁘진 않은 것 같기도.’

시엘은 어차피 응원이 재개되면 폰을 볼 수 없고, 맡은 직무에 집중하기 위해 도훈에게 바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어쨌든 지희에게 약속은 했으니 경기 끝나고 생각이 나면 연락해볼생각이었다.

* * *

"저기, 아영아!"

스타디움 내 편의점으로 향하던 아영을 영철이 불러세웠다.

"?"

"같이 가. 내가 살 게."

아영을 뒤쫓아 온 영철이 지갑부터 꺼내 들었다.

아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빠가 왜요?"

별뜻없이 한 말이었으나, 영철은 정음에게서 못 듣던 오빠라는 호칭에 감격했다.

‘오, 얘는 오빠라고 불러주네? 가망이 있어!’

영철은 여자에게서 오빠라는 말을 듣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그가 난봉꾼으로 활약한 시기는 스무살 새내기 때였고, 만났던 여자들 대부분이 같은 동갑이거나 한 두 살 많은 누나였기 때문에 ‘오빠’소릴 한번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2년간의 군생활동안, 이제 그도 오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영철이 사람을 홀릴 것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전매특허 ‘살인미소’였다. 그러나 여자들이 한눈에 뿅간다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도 아영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머쓱해진 영철이 부연설명했다.

"아니, 경기장 입장료도 네가 다 냈잖아. 아까 통닭이랑 음료는 도훈이형이 산 거고. 그러니 나도···."

"그거 나중에 1/N 하려고 했어요."

아영이 딱 잘라 말했다.

"그, 그래?"

"네. 제가 왜 다른 사람 입장료까지 내겠어요?"

아영이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 바람에 영철은 등에 땀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더 창피할 것 같았다.

"그래. 그건 나중에 입금해 줄게. 암튼, 이번 간식은 내가 살게."

"그러시던가요."

아영은 전혀 고마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영철은 그쯤에서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귀, 귀찮아하고 있잖아, 나를!’

아무리 봐도 짐짝 취급이었다. 마치 성가신 사람이 들러붙은 것처럼 마지못해 상대해 주는 느낌이랄까?

아까는 일행이 같이 있어서 그런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둘만 있는데도 아영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뭐지 이건? 혹시 낯가림이 많이 심한가?’

영철은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영이 낯가림이 심해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 쌀쌀맞은 척한다는 것이다.

‘그래, 맞아. 과에서도 왕따라고 했었잖아. 친한 동기가 정음이 밖에 없다고. 사교성이 많이 없는 거야.’

영철은 이전에도 그런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속으론 분명 좋아하면서도 괜히 틱틱거리고, 관심 없는 척하던 여자애였다. 결국 나중에는 자신에게 푹 빠져서 떨쳐내려고 하니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흐흐. 그래, 아영이도 분명 그런 과일 거야.’

오지게 행복 회로를 돌린 영철은 편의점을 함께 둘러보며 간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영이 장바구니에 과자랑 음료를 넣는데 그 뒤를 졸졸 따르며 영철이 물었다.

"너 야구 엄청 광팬이더라? 언제부터 좋아했어?"

"······."

"혹시 부모님 따라서 모태 백산 팬인가?"

"······."

"응?"

영철이 옆에서 쫑알쫑알 질문을 던졌지만, 아영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철은 아영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끈질기게 물었다.

"나도 군대 있을 때 백산 경기 많이 봤거든 근데···."

"오빠. 왜 자꾸 저한테 말 거세요?"

"···어, 어?"

아영이 참다참다 폭발했는지 과자를 고르다 말고 영철에게 쏘아붙였다.

"오빠 저랑 친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친해지려고."

"왜요?"

"왜냐니. 이제 나도 복학하잖아. 너랑 졸업할 때 까지 같이··

·."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뭐?"

"오빠가 복학하는 거랑 저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냉랭함이 묻어나오는 차가운 말투에 영철도 움찔 놀랐다.

이건 낯가림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싫은 사람에게나 할 법한 말투였다. 하지만 영철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영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그제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미쳤다.

‘아, 설마 아영이가 남친이 있었던 건가?!’

아영의 뒷조사를 해준 친구도 애인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선 확답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캠퍼스 커플이 아니라, 외부에서 남자친구를 만나는 경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남자친구가 있는데 찝쩍대는 걸로 오해했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아···. 아영이 너 혹시 사귀는 남자 있니?"

"예?"

"아니 혹시나 기분 나빴나 싶어서."

아영의 눈빛이 확 변하더니 영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걸 왜 물으시는데요?"

"어, 어?"

"저 오빠랑 더 할 얘기 없으니까 말 걸지 말아줄래요?"

사태가 이쯤되자 영철도 점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막말로 자신이 심하게 들이 댄 것도 아니고 친해지기 위해서 아영이 좋아하는 야구 얘기를 몇 마디 건넨 것뿐인데 무슨 임자있는 여자에게 작업이라도 건 것처럼 오해를 받고있는 것이다.

"너 근데 말이 좀 심하다?"

"······."

"남자친구 있는 줄 모르고 실수할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야?"

"······."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진짜."

영철이 계속 쏘아붙였으나 아영은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그 태도에 영철은 더 빡이쳤다.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니? 여보세요?"

"아, 진짜···."

끊임없이 귀찮게 구는 영철의 태도에 아영이 결국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가 틀린 말 했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저기요. 저 남자친구 같은 거 없거든요."

"뭐?"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이상한 소문 낼까 봐 말하는 거에요."

"아니 잠깐만, 근데 왜···."

"또 뭐요?"

"아니 어떻게···."

영철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을 거부한 것이 남자친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아니란 말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뭐야. 나 진짜 이런 취급 받아도 되는 거야?’

장바구니에 물건을 모두 담은 아영이 카운터에서 혼자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영철은 자기가 산다고 해놓고 아영이 계산을 마칠 때까지 멘붕이 와서 멍하게 서 있었다.

결국 아영이 다시 편의점을 나설 때 영철이 빠르게 뒤쫓았다.

"자, 잠깐만 아영아."

"···흠."

아영이 영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성가셔 죽겠다는 모습.

영철은 자존심을 내려놓고 아영에게 물었다.

"나 진짜 하나만 물어보자. 딱 하나만.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뭔데요?"

"나 그렇게 별로야?"

"네?"

"아니 나 그렇게 못 생겼냐고."

"······."

"진짜 억울해서 그래."

"뭐가요?"

"까놓고 말해서 나 여자한테 까인 적 거의 없거든? 근데 오늘만 두 번이나 까였어. 그래서 갑자기 막 자신감 엄청 떨어지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별로야? 그것만 대답해줘 봐."

"오빠 병신같아요 진짜."

"···뭐?"

"지금 하는 행동. 엄청 찌질해 보인다고요. 그래서 싫어요.

됐어요?"

"아, 아니 그게···."

"대답 충분하죠? 전 그럼 정음이 기다렸다 갈테니 먼저 가세요, 그럼 이만."

아영은 벙찐 표정을 짓는 영철을 뒤로하고 여자 화장실 쪽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영철은 얼굴을 감싸쥐며 괴로워했다.

‘벼, 병신같다고? 내가?’

복학 후 화려한 컴백을 노리던 카사노바는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다.

* * *

‘흠···. 오늘이 두 번째라고?’

여자 화장실 앞에서 정음을 기다리던 아영이 혼자 생각했다.

‘그럼 나보다 앞서 정음이한테 들이댔다는 소리구나.’

아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애초에 영철은 정음을 따라왔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군대를 전역하는 복학생이, 생면부지인 여자후배를 따라 야구장에 따라왔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아마도 정음의 외모에 혹해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아영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난 여전히 세컨드인 거네.’

정음이 영철을 거절한 이유는 명확했다.

정음은 도훈을 좋아하니까. 그러니 영철이 성에 찰리 없었을 거다. 저딴 식으로 막무가내로 들이댔으면 얻어 터지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아영은 자신과 가장 친한 정음이 도훈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리고 도훈 역시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도.

‘휴. 오늘 확실히 하려고 했는데···. 더 복잡해졌어.’

아영은 일부러 정음과 도훈을 한 자리에 불렀다.

야구경기 직관은 사실상 핑계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삼자대 면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관계 정립을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음이 도훈을 바라보는 눈을 보는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음은 도훈을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도훈을 쳐다보는 눈동자 속에는, 오로지 도훈밖에 비치지 않았다.

도훈 역시 정음을 바라볼 때는 애틋한 표정이었다.

자신에게는 거의 보여준 적 없는 모습에 아영은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다. 결국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은 자신이었다.

아니, 도훈이 손을 뻗지만 않았어도 애초에 이렇게 복잡해질 이유가 없었다. 모든 원인제공은 도훈이 했고, 자신은 불행하게 말려들었을 뿐이었다.

도훈이 미웠다.

그냥 다 모든 걸 폭로해 버리고, 자폭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화장실 앞까지 따라온 그가 보여준 행동에 그녀는 또다시 혼란을 느꼈다. 대체 그 키스는 무슨 의미였을까?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걸까?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도훈 때문에 속상했고, 그를 떨쳐내지 못하는 스스로에 더더욱 비참했다.

"나쁜 새끼···."

아영이 벽에 기대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마침 정음이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며 아영에게 물었다.

"어? 무슨일 있었어?"

정음을 발견한 아영이 움찔 놀라며 말했다.

"아, 아니야."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정음이 꼬치꼬치 묻는 통에 아영이 말을 둘러댔다.

"아니, 오다가 지하철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거든. 치한같았어."

"진짜? 혹시 누군지 알아? 내가 확 패줄게!"

정음이 자기 일처럼 흥분하자, 아영은 괜찮다고 하면서 더더욱 속이 쓰렸다. 정음은 보면 볼수록 너무나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떡하면 좋니, 정음아.’

아영의 고민이 더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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