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3. 질투는 나의것.-8-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경기는 이닝이 더해갈수록 흥미진진하게 변해갔다.
양 팀 선발투수는 모두 5이닝을 못 채우고 마운드를 내려갔고, 벌써부터 불펜 싸움이 전개되는 중이었다.
아영은 마치 해설을 하듯 경기 상황을 중계했다.
"이거, 게임 어려워질 것 같아요."
"왜?"
모처럼 도훈이 관심을 보이자 아영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둘 다 1차전 치렀다고 했잖아요. 금토일 3연전이니까."
"어, 어젠 백산이 이겼다면서?"
"네, 근데 어제 이길 때 점수가 너무 타이트한 바람에 백산이 필승조를 소진해 버렸거든요."
"필승조가 뭐야?"
야구에 대해선 문외한인 정음이 물었다.
"불펜 투수가 뭔 줄은 알지?"
"응, 선발 내려간 뒤에 이어서 던지는 중계 투수 말하는 거 아냐?"
"응. 보통 팀에서 가장 잘 던지는 투수들 대여섯 정도를 선발로 먼저 뽑아.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할 만큼 선발의 역할이 중요하니까."
"오호. 그럼 불펜은 선발보다 못 한 거야?"
"물론 꼭 그렇진 않아. 가령 마지막 이닝을 책임지는 마무리 투수는 역전을 막기 위해 짧은 이닝을 확실히 책임질 수 있는 강한 투수를 쓰거든.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대부분 불펜은 선발보다는 못 던지는 게 맞아."
"아하, 그렇구나."
"불펜도 두 부류로 나뉘는데, 이기는 게임을 확실하게 홀딩할 수 있는 필승조랑 지고 있더라도 역전각이 보일 때 투입하는 추격조가 있어."
"그럼 어제 백산이 필승조를 써버렸다는 말은···."
"그래. 지금 백산이 낼 수 있는 불펜들은 대부분 평균자책점이 상대적으로 높은 추격조뿐이야. 심지어 지금 올라간 투수는 작년까지 가비지 이닝이나 먹어주던 패전조 투수였고."
"가비지 이닝이 뭐야?"
정음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하는 바람에 아영의 설명도 많아졌다.
"가끔 초반에 게임이 터질 때가 있잖아. 선발 투수의 컨디션난조든, 상대 팀에서 행운의 안타를 몰아치든 점수차가 너무 벌어져 도저히 역전이 안 나올 것 같은 게임. 근데 프로야구에선 우천을 제외하면 콜드게임 규정이 없 기때문에 이기든 지든 9이닝을 끝까지 소화해야 하거든."
"아···. 그럼 지는 게임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던지는 투수를 말하는 거구나."
"그래서 가비지, 말 그대로 패전처리를 위해 올라오는 거야.
득점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고, 평균자책점이 엉망이 되더라도기록에 신경 쓰지 않을."
"잠깐, 근데 그럴 바에는 어제 던진 필승조를 다시 올리면 안돼? 이틀 정도는 괜찮지 않나?"
"물론 상황에 따라 연투를 시킬 수도 있어. 한 번 올라오면 100구씩 던지는 선발과 달리 불펜은 평균 20~30개 던지고 내려가니까. 근데 문제는 어제 던진 필승조 대부분이 그저께 경기에도 올라갔단 말이야. 3연투를 시키면 제아무리 강견이라도 부상을 입을 확률이 올라가거든. 구위도 신통치 않을 거고.
차라리 한 게임을 버리더라도 부상을 방지하는 게 맞으니까."
"아···. 그럼 백산이 지금 많이 불리한 상황이네."
"그럴 거야. 불펜 싸움으로 넘어간 이상 백산은 여기서 더 실점할 확률이 높아."
아영의 설명대로 게임은 점점 백산이 불리해져 가고 있었다.
새로 올라온 불펜은 안타를 얻어맞더니, 급격히 위축되어 공을 가운데로 뿌리지 못하고 볼 질을 남발했다.
"또 볼이야? 어휴, 진짜!"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정음이 볼넷으로 결국 만루가 채워지자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어느새 백산을 동일시하기 시작한것. 아영도 답답했는지 한마디 했다.
"강경식 투수는 저게 문제야. 맞더라도 과감하게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꽂을 줄 알아야 하는데, 게임이 어려워지면 늘 피해 가는 피칭을 한단 말야. 어차피 주자를 보낼 거면 볼넷보단 안타가 나은데."
도훈이 아영이 늘어놓는 해박한 야구지식에 감탄했다.
"와, 아영이는 야구 진짜 좋아하나 보구나?"
"맞아요.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으니까. 전 원래 뭐든 한 번 꽂히면 끝까지 가거든요. 절대 중간에 그만두는 법을 몰라서."
아영이 도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얼핏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 같으나, 실상 도훈에 대해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말이었다.
도훈은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저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맞지?’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참나, 무슨 자기가 풍산개도 아니고.’
[갑자기 웬 풍산개요?]
‘그 왜, 북한산 명견있잖아. 먹잇감을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는.’
[그렇군요. 주인님의 하렘목록에 또 한 명이 추가되었다는 소리 같네요.]
‘상관없어. 아까 그런 일을 겪고도 한 마디도 못 하는 걸 보면 어차피 아영이도 내 앞에선 절대 약자야. 강한척 해보지만, 결국 나한테 끌려다닐 거야.’
[가끔 보면 주인님도 참 잔인한 사람입니다.]
‘내가 뭘 좋아하라고 했나? 자기가 좋아서 그런 거지.’
[그래도 보통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명을 선택하겠죠.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니까요.]
‘난 오는 여자 막지 않아.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도 좋아하는 거라면, 본인도 잘못이 없다고 볼 수 없지.’
[역시 궤변이십니다.]
"어, 어! 맞았다!"
그때였다.
상대 팀의 4번 타자가 작정하고 휘두른 배트가 백산의 불펜강경식의 공을 제대로 강타했다.
깡소리와 함께 날아간 공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높이 뻗어 나갔다. 원정팀 응원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고, 홈팀인 백산쪽 팬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떨궜다. 누가 봐도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는 커다란 타구였다.
"아아, 안돼! 넘어가지 마!"
"으아아악!"
그러나 모두의 바람과 달리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그랜드슬램이 터지자 백산은 순식간에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어흑, 하필 맞아도 만루홈런이라니!"
"형, 이거 이미 터진 것 같은데요."
경기는 순식간에 8:4 .
인내심이 부족한 영철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냥 나가죠. 더 이상 볼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응?"
아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자 영철이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요.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점수가 벌써 두 배 차인데? 게다가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았잖아. 이건 절대로 못 이겨."
"야구에서 절대란 말은 없어요. 팬이라면, 이럴 때 더 열심히 응원해야죠!"
아영이 급기야 준비해온 응원 봉을 힘차게 두들겼다.
이기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아영의 집념을 본 영철이 어깨를 으쓱하며 챙겨들었던 짐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 그래. 뭐. 아직 경기 안 끝났으니까."
그러면서 속으로는 아영에 대한 평가를 달리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의외네.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겨 가지고 포기를 모르는 성격이라···. 저러면 나중에 헤어지기도 힘든데.’
영철은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며 아영과 사귀고 나서의 탈출 전략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훈 역시 아영의 모습에 섬뜩함을 느꼈다.
‘음, 아영이 생각보다 무서운 애구나.’
[왜요? 주인님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까봐 겁나십니까?]
‘집착 쩌는 여자애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저건 타고난 성격이야. 절대 안 변할 걸?’
[그러면 영철에게 양보를 하시던지요. 아까부터 계속 관심을 보이던데요.]
‘미쳤어?’
[아니 방금전에는···.]
‘남 주기는 아깝잖아. 그리고 영철이 저 자식 왠지 마음에 안들어.’
[마치 동족혐오 같은 건가요?]
‘동족 혐오라니?’
[그렇잖습니까. 주인님이 군대 간 태영군을 싫어하셨던 건 눈치 없고 늘상 사고만 쳐서잖습니까. 하지만 영철군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닌데 싫어하시잖습니까? 오히려 주인님과 비슷한 바람둥이과 인데도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볼 땐 어쩌면 주인님이 비슷한 부류를 볼 때 느끼는 혐오감 같은 게 아닐까 해서요. 원래 사람은 자기랑 비슷한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내가 영철이한테? 풉. 그래 뭐 영철이가 잘생긴 건 나도 인정해. 저 정도 얼굴이면 여자들이 끊이지 않겠지. 근데 만나보고 느낀 건데, 쟤는 나한테 안 돼.’
[호오, 주인님이 더 상위호환이라는 뜻인가요?]
‘같은 포식자라도 나는 최상위라는 소리야. 영철이가 나랑 경쟁했다간, 앞으론 내가 먹다 남긴 찌꺼기나 챙기게 될걸? 그마저도 내가 안 주겠지만.’
[캬,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관찰 결과 내린 객관적인 분석이야. 그다지 우려할 필욘 없을 거 같아. 무엇보다 정음이나 아영이가 영철이한테 넘어갈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 혹시 넘어가면요?]
‘장담하건 데, 그럴 일 절대 없어. 영철이가 헛물 켤 거 생각하니 괜히 불쌍해지는군.’
도훈의 예상대로 영철은 약간의 벽을 느끼고 있었다. 작정하고 나온 야구장 데이트에서 그는 아직까지 여자애들과 제대로 말도 나누지 못했다.
정음에겐 괜히 도훈의 흉을 봤다가 얻어맞았고, 아영은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영철은 살면서 여자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낙관적이었다.
‘어차피 도훈이 형 옆에는 정음이가 있잖아? 그럼 아영이는 결국 무주공산이라는 뜻이니까.’
그는 설마 도훈이 두 사람에게 모두 손을 뻗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임자가 있는 여자는 어림없어도, 임자 없는 성문은 두들기면 열릴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이 열심히 응원한 덕인지 만루 홈런 이후로 꾸역꾸역 막아서며 이닝이 마무리 되었다. 6회에 접어들어 클리닝타임이 되자 정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깐 화장실좀 다녀올게요."
"같이 가자. 나도 편의점에서 음료수 좀 더 살게."
이번엔 여자들이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좌석에 남자 둘만 남은 상황에서 영철이 갑자기 뭔 생각을 했는지 도훈에게 말했다.
"어, 저도 편의점 다녀올게요."
"응? 왜?"
"생각해보니 경기장 입장권도 아영이가 대신 냈는데, 제가 뭐라도 더 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영철은 아영에게 단둘이만 있는 호젓한 기회를 틈타 말을 걸기 위해 그녀를 쫓아갔다. 도훈은 허겁지겁 뛰어가는 영철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백날 쫓아다녀 봐라.’
* * *
그라 운드를 정비하는 클리닝 타임이 되자 치어리더들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스태프 대기석으로 돌아온 치어리더들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음료를 나눠 마시며 간만에 휴식을 취했다.
"10분만 쉬었다가 나가자."
"네, 언니."
팀장인 황시엘은 팀원들에게 휴식을 명한 뒤 놔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별다른 메시지가 온 것은 없었고, 자기가 보낸 것만 있었다.
‘어라? 이게 뭐였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시엘은 그것이 팬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맞다. 아까 4회 끝나고 같이 사진 찍었던 팬이구나.’
그때는 급히 화장실을 가야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던 시엘은 여유가 생기자 앨범에 저장한 사진을 폰에 띄워놓고 차근히 살폈다.
‘그러고보니 키도 굉장히 컸던 것 같은데 얼굴은 되게 작네?
’얼굴을 나란히 하고 셀카로 찍은 사진에서 시엘과 도훈은 나란히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확대해 도훈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오···. 이제 보니 진짜 잘생긴 학생이었네?’
곱씹어 볼수록 도훈의 외모가 빛이 났다.
처음에는 전체적인 실루엣에 눈이 갔다면 사진으로 보자 그때는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시엘이 한참 폰에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쉬고 있던 후배가 시엘에게 물었다.
"누구에요? 남자친구?"
"어머, 언니 남자친구 생겼어요?"
다른 후배들까지 구경하기 위해 가까이 오자 시엘이 당황하며 폰을 숨겼다.
"아, 아니야."
"방금 사진에서 남자 봤는데요?"
"오, 저도 보여줘요!"
공식적으로 시엘은 남자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후배들이 유독 관심을 보였다. 시엘은 여전히 폰을 숨긴 채 부정했다.
"아, 아니야. 내가 무슨 남친이 있어. 그냥 팬이랑 인증사진 찍은 거야."
하지만 시엘의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에이, 팬이랑 찍은 거면 언니 폰으로 찍을 필요가 없잖아요."
"저도 한 번만 보여주세용~."
"아이, 진짜 남친 아니라니까 그래."
"알았어요. 남친 아닌 줄 알았으니 그럼 사진만 보여줘요. 엄청 잘생긴 것 같은데?"
"진짜, 진짜? 언니 한 번만."
"아이참···."
시엘이 결국 관심을 보이는 후배들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두 후배가 서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사진을 보다가 도훈의 훈훈한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동그레졌다.
"우아, 미남이다."
"엄청 잘생겼는데요? 진짜 남친 아닌거 맞아요?"
"그렇다니까. 같이 사진 찍어달라는데 폰을 두고 왔다고 내 폰으로 찍어서 전송시켜 준거야."
"아항!"
그때 후배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시엘에게 물었다.
"언니 그럼 여기 사진에 있는 남자 연락처도 있는 거예요?"
"어···. 사진 발송하느라고."
"언니, 저 그분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미쳤어, 이지희 너 남친 있잖아. 바람 피우려는 거야?"
다른 후배 한명이 뜯어 말리는데도 지희라는 치어리더는 포기하지 않았다.
"야,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 거 몰라? 이 정도면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지."
"어머어머, 말하는 것좀 봐."
두 후배가 도훈을 두고 옥신각신하는데 시엘이 딱 잘라 말했다.
"야. 그만해. 어차피 안 알려줄거니까."
"설마 언니가 채가려고요?"
"남친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고. 오늘 처음 본 남자 연락처를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 동의도 없이."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요."
"물어보다니?"
글래머러스한 몸으로 인기가 높은 후배 치어리더 지희가 말했다.
"혹시 후배랑 소개팅 할 생각 있으시냐고,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