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 질투는 나의것.-7-
아영에 치이고 정음에게 처맞은 영철과 별개로 도훈은 경기를 관람하며 호시탐탐 치어리더에 접근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백산 치어리더 중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황시엘에 주목했다.
'근데 저 이름. 정말로 본명일까?'
[황시엘요?]
'어. 얼핏 외국이름 같기도 하고, 아니면 가명 같기도 하고.
혼혈같아 보이진 않는데 말이지.'
[정보창으로 확인해 보시는게 빠르지 않습니까?]
'되도록 호감도를 올린 상태로 보고 싶어서. 오늘 잘해야 딱 한 번 정도 기회가 있을 거 같으니까.'
도훈이 시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원정팀의 공격타임이었기 때문에 다른 치어 둘만 나와 관중들의 박수 유도를 하는 상황. 응원 무대 앞 지정석에 앉아있던 시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크, 지금 움직인다.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요? 또 무슨 핑계를 대시려고요? 방금 전 화장실 다녀온다고 자리를 뜨셨잖습니까?]
'별수 없지. 이번엔 담배로.'
도훈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영철을 이용했다.
"야, 너 갔다 왔다고?"
"네?"
"아니 이거 말이야."
도훈이 영철 앞에서 빈손에 담배를 꽂아 피우는 시늉을 했다.
"아, 네. 형이 화장실 가서 안 오시길래 혼자 다녀왔어요."
"그래? 어차피 이닝 끝나려면 제법 걸릴 것 같은데 나도 지금 갔다 올까? 수비보단 공격을 보는 게 재밌을 것 같은데."
"같이 가드려요?"
눈치없는 영철이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도훈이 말렸다.
"아니야. 너 방금 다녀왔다며? 애들하고 놀고 있어. 혼자 금방 다녀올게."
"네."
도훈은 영철에게만 살짝 귀띔하고 재빨리 자리에서 이탈했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정음이 좌우를 두리번 거리며 도훈을 찾았다.
"어? 도훈 오빠 방금 오지 않았나? 또 어디 갔지?"
"형, 담배 피우러 가셨어."
"아···."
"아까 경기 시작 전 한 대 피우셨으니 쿨타임 찰 때 됐지. 난 방금 다녀왔고."
정음은 담배를 자주 피우는 도훈을 걱정했다.
'오빠가 조금이라도 담배를 줄이면 좋을 텐데···.'
* * *
한편 시엘의 뒤를 따라나선 도훈은 그녀가 관중 출입구가 아닌 스텝 전용 통로로 빠져나가기 전 급히 말을 붙였다.
"저기요!"
"네? 저요?"
다행이 시엘이 도훈의 부름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황시엘 치어리더 분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싸인 좀 부탁할게요!"
"사인이요?"
"네. 저 팬이에요."
"아하, 감사합니다."
자신의 팬이라는 소리에 시엘이 방긋 웃었다. 구단 소속의 일개 직원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 치어리더들 인기가 많이 올랐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스포츠 기사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며, 최근에는 너튜브를 통해 일상의 모습까지 자주 공개되며 어느덧 연예인 못 지 않은 유명세를 뽐내는 게 치어리더들이었다.
"펜 주시겠어요?"
"예?"
"방금 사인 받으신다지 않았나요?"
시엘이 노랗게 염색된 머리를 찰랑거렸다.
5:5로 가르마 진 단발은 안 그래도 예쁜 그녀를 더욱 깜찍하게 보이게 했다.
"아, 그렇죠. 볼 펜."
도훈은 급한 마음에 아무 준비 없이 들이댔다는 걸 깨닫고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 주머니에 펜을 넣고 다닐 리 만무했다.
'로시, 뭐라도 좋으니까 싸인펜으로 쓸 거 아무거나 전송시켜봐.'
[만능펜으로 드릴까요?]
'만능펜?'
[그 왜 저번에 소설 쓰실 때 쓰셨던거요. 자동기술되는.]
'그래, 그거라도 빨리.'
아이템이 전송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훈이 호주머니를 뒤지는 척 하며 시간을 끌었다.
"분명 여기 넣어놨는데 어디 갔지?"
도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허둥대자, 시엘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편하게 찾으세요.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네, 실물로 보니 너무 예쁘셔가지고."
"감사합니다. 실은 그런 말 가끔 들어요, 히힛."
정보창으로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시엘은 굉장히 유쾌한 성격 같았다. 연예인급으로 잘 나간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았으며, 일개 팬에 불과한 도훈을 무척이나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백산 치어리더 중 인기가 가장 많은 이유가 실감이 갔다.
[방금 전송시켰습니다.]
'오케이.' 도훈이 마술처럼 호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건넸다.
"여기있어요."
"음, 종이는요?"
"예?"
"펜만 주시면 어떻게 싸인을 하죠? 정말 싸인 받으려는 거 맞나요?"
시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다는 눈치를 주었다.
사인 받겠다고 다가온 팬치고는 너무나 허술한 준비상태였다. 어쩌면 도훈이 말 한마디 걸어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훈이 워낙 잘생겼기 때문에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그러진 않았다. 기왕이면 못생긴 팬보다는 잘생긴 팬이 더 마음에 드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그러면 그냥 옷에다가 해주세요."
"네?"
도훈은 갑자기 뒤로 돌더니 등판을 들이 밀었다.
"제 옷에다 그냥 써주세요."
"유니폼도 아닌것 같은데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요? 옷 버려도 난 책임 없어요?"
"상관없습니다. 가보로 간직할게요."
"풉-. 웃겨!"
시엘은 만능만년필을 들더니 도훈의 넓은 등을 도화지 삼아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옷감을 팽팽히 만들어야 글씨가 잘 써질거라는 생각에 도훈이 의도적으로 광배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역삼각의 근육이 딱 자리잡으며 보기드문 뒤태가 만들어졌다.
‘운동선수이려나? 일반인 등이 이렇게 넓을 리가···.’
직업 특성상 늘상 접하는 게 프로선수다 보니 시엘은 도훈도 혹시 그쪽 부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펜으로 싸인을 하던 시엘이 궁금해 물었다.
"야구 하시는 분은 아니죠?"
"네?"
"혹시 투수?"
"아뇨. 그냥 대학생인데요. 왜요?"
"등이 엄청 넓어서요. 이런 건 타고난 건가?"
"하하, 그런 말 가끔 듣습니다."
도훈이 천연덕스럽게 시엘이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도훈입니다."
"그럼, 이도훈님에게."
시엘이 사인을 완성하더니 도훈의 등판을 손가락으로 톡톡두드렸다.
"다 됐어요, 이도훈님."
"감사합니다."
도훈은 자꾸 고개를 뒤로 돌리며 싸인이 잘 적혔는지 확인했다.
"이제 다 됐죠?"
시엘이 만년필을 건네자 도훈이 받으며 한가지 더 부탁했다.
"혹시 실례가 안되면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심 안 될까요?"
"사진요?"
"네, 만난 기념으로다가."
"휴, 지금은 곤란한데···."
시엘이 슬쩍 고개를 들더니 경기 진행상황을 확인했다.
쉬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일어섰기 때문에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 치어리더는 경기를 뛰는 선수와 마찬가지로 9이닝을 늘 상 대기해야 했다.
'음, 그래도 아직 원아웃이니 괜찮겠지?'
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같이 찍어요. 폰 이리 주세요."
도훈이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다 문득 다른 데 생각이 미쳤다.
"엇, 관람석 자리에 폰을 두고 온 것 같아요."
"뭐라고요? 그럼 어떻게 찍죠?"
"혹시, 시엘님 폰으로 찍어서 저한테 사진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본래 응원을 할 땐 휴대폰을 지니지 않지만, 시엘은 화장실을 향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한 손에 폰을 쥔 상태였다. 평소엔 당연히 폰이 없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하는 팬들이 없었기 때문에 시엘도 약간 당황했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진짜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팬이라서요. 사인도 받았는데 같이 사진한장 못 남기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
도훈이 통사정을 하자 시엘도 마음이 약해졌는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시간 없으니까 바로 찍어요."
시엘이 자신의 폰을 셀카 모드로 켠 뒤 팔을 쭉 뻗었다. 도훈은 앵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엘의 옆에 바짝 붙었다.
시엘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브이자를 그렸다.
"자,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찰칵-.
사진을 찍은 시엘은 자신의 얼굴이 잘 나왔는지 확인한 뒤 도훈에게 말했다.
"바로 보내드릴게요. 휴대폰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네, 공일공..."
사진을 전송한 시엘이 도훈에게 신신당부했다.
"혹시 제 번호 인터넷으로 유출하거나 그러시는 거 아니죠?
정말 그러면 곤란해요. 무슨 뜻인지 알죠?"
"당연하죠. 절대 안 그럴게요."
"제 팬이라고 하시니까 이번 만 해드린거에요. 그럼 전 이만.
"
도훈은 급히 스텝용 출구로 뛰어가는 시엘을 보며 정보창을 가동했다.
'로시, 지금.'
[넵. 준비 끝났습니다.]
도훈은 폰으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후 스마트워치로 정보창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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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황시엘(비처녀, 일시 20세 5개월)
나이 : 27 #치어리더#인플루언서#댄스머신
호감도 : 62/100
개방성 : B
성감대 : 클리토리스, 목덜미, 엉덩이
*애무 포인트 : 정상 위에서 삽입 시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주무르는 걸 좋아합니다.
성욕지수 : 보통.
공략팁
*위 대상을 공략하면 ‘특수직종이 더 맛있어’업적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늘 쾌활하고 밝은 분위기의 여성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끼가 많아 춤추는 걸 좋아했고, 현재는 백산야구단의 치어리더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팬서비스로 유명하며, 훈훈한 미담이 인터넷에 많아 일반 팬들의 호감도도 높은 편입니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춤으로 발산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남자친구가 없는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일요일 저녁 클럽에서 날새도록 노는 걸 좋아합니다.
-추천행동 : 그녀는 불쑥 들이대는 남자를 경계합니다. 오랜 기간 공을 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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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엘에 대한 정보창을 확인한 도훈은 마지막 추천 행동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런.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은 여자였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만큼은 주인님이 대상을 잘못 고른 것 같습니다. 어차피 특수직종에 해당하기만 하면 되니 지금이라도 다른 여성으로 공략대상을 수정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백산의 치어리더는 총 다섯. 시엘이 아니더라도 후보는 많았다.
하지만 도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런 여자일수록 더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지. 어렵다고 돌아가는 것도 내 스타일은 아니고. 이대로 간다.’
[정말이십니까? 장기 공략이면 꽤 시간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마음에 들어서 좆을 빼들었는데 어디든 찔러야 하지 않겠어? 마음에 안드는 여자는 따먹을 의욕도 안나고 말이야.’
[하긴 뭐, 그거야 주인님 마음이시죠. 근데 정보창 설명중에 좀 특이한 부분이 있더군요. 일요일에 클럽을 가는 취미는 무엇일까요?]
‘아마 월요일 경기가 없어서 그런게 아닐까?’
[네?]
‘야구는 연간 150경기 가까이 리그를 치르는 장기 레이스거든.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은 경기가 없는 날이니까 주말 경기 끝나고 바로 클럽으로 뛰어가는 거지. 그때가 제일 여유가 있을 시간이니.’
[오호. 그럼 시엘양이 다니는 클럽만 알아내면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는 거군요.]
‘그렇지. 정 안되면 번호를 미리 따놨으니 바로 들이대도 상관없고.’
[의심스러운 사람을 경계한다고 하니 그건 차선책으로 남겨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장기 공략이 결정된 순간 도훈은 살짝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뽕을 뽑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진즉부터 접은 상태.
시엘과 안면을 트고, 번호를 받은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때 마침 상대팀 공격이 종료되어 있었다.
도훈이 아영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고 있어 경기?"
"동점이에요. 4:4 ."
"저런, 담배 피우러 다녀온 사이 점수가 나버린 거야?"
"이것도 겨우 막았어요. 조금만 더 흔들렸으면 역전 점수까지 내줬을 걸요?"
초반 투수전으로 시작된 게임은 중반 이후 난타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분위기가 더더욱 달아올랐다. 확실히 투수전보다는 타격전이 보는 재미가 더 있는 법.
처음 야구장을 따라온 정음은 야구 경기에 푹 빠져 힘차게 응원을 따라했다. 도훈 역시 응원하는 척 치어리더가 올라가 있는 무대를 살폈다. 방금 전 자신과 사진을 함께 찍은 황시엘이 힘찬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센터에서 얼굴마담을 하고 있다 보니, 다른 치어들이 백댄서처럼 보일 정도였다.
‘음, 확실히 얼굴이 예쁘긴 하네. 저정도면 거의 아이돌급 같은데. 외모가.’
[그렇네요. 어쩌면 지난번에 만나셨던 아이돌 연습생보다 더 급이 높다고 볼수도 있겠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치어리더가 진짜 연예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지도 높은 치어리더는 쩌리 연예인 정도는 쌈싸먹을 정도니까.’
도훈은 시엘의 춤동작을 보며 성욕이 도는 걸 느꼈다.
확실히 성격도 좋고, 외모도 최상급이다 보니 공략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뚫어져라 시엘을 쳐다보자 아영이 지나가는 투로 소곤거렸다.
"자리를 잘못 잡았나 봐요."
"엉?"
"···아니에요,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