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 질투는 나의것-2-
"쓰레기라니?"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자가 쓰레기라고 부르는 남자란 예외 없이 여자 문제가 복잡하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더구나 진성 변태인 마유미마저 치를 떨게 할 정도면 대체 어떤 수준인 걸까?
-어휴, 말도 마요. 근데 오빠가 영철일 어떻게 알아요? 오빠군대 있을 때 들어왔을 텐데?
"아···. 우연히 조교 선생님 만났는데 다음 학기 복학생 들어올 거라고 이름을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어떤 앤가 하고 물어본 거야. 이제 회장이니까 후배가 누군지 정도는 알아야지.
혹시 무슨 일 있었어?"
-그러니까 영철이는 말이죠···.
유미가 알려준 영철의 신상은 이랬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현역으로 입학. 새터에서 도덕교육과 여학생과 눈이 맞아 입학보다 빠르게 CC탄생.
"새내기 배움터에서 만나 CC를 했다고?"
-그러니까요. 하여간 그때부터 싹수가 보였어, 지금 보면.
그리고 불과 일주일만에 결별.
-헤어진 이유가 뭐였냐면, 컴교과 다른 여자애 꼬시다가 당시 여친한테 딱 걸렸거든요.
"컴퓨터 교육과?"
-네. 근데 걔랑도 한 달도 못 갔어요. 그렇게 사범대를 아주들었다 놨죠. 몇 명을 사귀었다더라?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람만 다섯인가, 여섯인가 될 걸요?
"한 학기만 다니고 바로 군대 갔다지 않았어?"
-맞아요. 1학기 끝나자마자 입대했으니까.
"그러니까 한 학기 만에 대여섯 명을 사귀었다고?"
-그렇다니까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어요.
당시에 몰래 만난 애들까지 포함하면.
"와···. 무슨."
-군대 간 것도 사고 치고 갔을걸요?
"사고? 무슨 사고?"
-이건 당시 들리던 소문인데···.
유미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과학교육과 여자애를 임신시켰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이, 임신?"
-아니 뭐, 이건 확실치 않아요. 근데 그 여자애가 갑자기 휴학하더니 나중엔 자퇴를 했거든요. 그리고 곧바로 영철이는 군대로 도망쳤고.
"아니 잠깐. 휴학하고 자퇴하는 것하고 임신은 너무 간 것 같은데? 그게 연관성이 있는 소리야?"
-그게 아니라, 누가 우연히 봤데요. 둘이 손잡고 산부인과 드나든걸요. 그래서 아마 그런 소문이 돌았을 거예요.
"와, 이건 뭐···. 근데 그렇게 잘 생겼어? 얘기 들어보니 바람둥인 것 같은데 그래도 따르는 여자가 엄청 많았나 봐?"
유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네. 짜증 나도록.
"진짜?"
-그게 좀···. 뭐랄까? 아이돌 누구 닮았어요. 그러니까 소문이 안 좋아도 여자는 끊이질 않더라고요. 미친 얼빠년들 진짜.
"유미, 너는?"
-네?
"유미 너도 예쁘잖아. 근데 영철인가 뭔가 하는 애가 안 들이 대던?"
-뭐래요? 그런 기생 오래비 같은 새끼. 오빠, 제 취향 몰라요?
"니 취향? 사람 때리는 취향?"
-에이씨, 진짜. 그게 아니고 전 호리호리한 애들 별로 안 좋아 하잖아요. 아, 그리고 그건 있어요.
"뭔데?"
-동기 모임 때 술김에 나왔던 얘긴데, 본인이 남자 동기들한테 그랬다더라고요. 자기 꿈이 사범대 전과에 여자친구를 하나씩 만들어 보는 거라고.
"엥?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쵸? 제 정신 아니죠? 근데 희한하게도 우리과 여자들은 안 건드리더라고요. 새터에서도 그렇고 그 뒤에 사귄 애들도 모두 사범대 다른과 애들이었어요.
"그렇네? 왜 그렇지?"
-본인이 하는 말이, 체육교육과는 맨 마지막에 꼬시겠다면서.
"왜?"
-안 그래도 소문 안 좋은데 같은 과까지 분란을 일으키면 자기한테 불리하다고 생각했나 보죠. 암튼 쓰레기에요, 그 새끼.
쓰레기란 말도 아깝지.
"음···. 알았어. 일단 참조할게, 고마워."
-오빠. 제가 훈련 계속 있어서 길게 통화는 못 하는데, 암튼그 새끼 조심하세요.
"내가 여자도 아닌데 뭘 조심해?"
-그게 아니라 영철이 그 자식 남자 선배나 동기들한테는 정말 깍듯하게 잘하거든요. 무슨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그러면서 뒤로는 여자들 족족 건드리고 다니고. 이중인격자 랄까? 진짜 내가 회장 할 때 복학했으면 과에서 완전히 매장시켜 버리는 건데, 윽, 안되겠다. 오빠 감독님이 얼른 튀어오래요. 그럼 다음에 봐요!
뚝-.
유미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무튼 유미를 통해 아직 일면식도 못 한 영철에 대한 정보를 제법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첫째, 그가 아이돌처럼 생긴 미소년이라는 것.
둘째, 여자를 무지하게 밝힌다는 것.
셋째, 의외로 남자에게는 또 잘해서 남자에게 한정 좋은 동기이자 후배라는 것.
[듣고 보니 이도훈MK2 인데요?]
‘뭐? 이런 쓰레기 새끼랑 내가 같다고? 완전 다른데?’
[아니 그렇잖습니까? 물론 생김새는 다르죠. 주인님은 근육질 훈남 타입, 영철은 호리호리한 미소년타입이니까.]
‘거봐. 완전 다르잖아.’
[어쨌든 외모에서 매력을 풍긴다는 점은 같죠. 그리고 여자를 밝힌다는 것은 확실히 똑같구요.]
‘야, 말 똑바로 해. 나는 미션이랑 업적 때문이잖아. 이 새낀그저 난봉꾼이고.’
[암튼 사범대 전과의 여자를 꼬신다는 병신같은 로망은 주인님에 비빌만 하네요.]
‘지랄.’
[남자들한테 잘한다는 점도요.]
‘그거 죄다 연기야 씨발. 여자들한테 멋있어 보이려고 평판 높이려는 수작이라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주인님이 딱 그렇지 않습니까?]
제길. 듣고 보니 정말이다.
아직 얼굴도 모르지만, 이 새끼가 하는 짓은 내 대학 생활 전략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다만, 나는 여자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꼬시는 한편, 영철은 사범대에 국한시켜 카사노바 노릇을 한다는 점이었다.
어째서 사범대 정복이라는 병신같은 목표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리하고 보니 왠지 병신같지만 멋있는···.]
‘에이씨. 지금 정음이 노리는 것 같아 신경 쓰여 죽겠는데 그런 말이 나와?’
[정음 양이요? 설마요. 주인님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다른 남자는 신경도 안 쓸 겁니다. 걱정 일도 마십쇼.]
‘그렇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나에 대한 정음의 호감도는 100
호감도 시스템의 특성상 100이란 수치는 한 인간이, 인간에 대해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이다. 말 그대로 상대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는 수준. 정음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에서 막 전역한, 아니 이제 말년 휴가를 나온 전 직 난봉꾼 출신이라면 정음을 꼬시기 위해 안간힘을 쓸게 뻔했다.
정음은 누가 봐도 사범대에서 손꼽히는 퀸이고, 영철이 군대 가기 전까지는 없었던 뉴 페이스니까. 모름지기 남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여자는 처음보는 예쁜 여자니까.
‘하-. 이거 듣고 나니 더 신경 쓰이네? 그냥 확 만나자 마자 줘패버릴까?’
[무슨 근거로요?]
‘이유가 갖다 붙이면 그만이지.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좆나 패버리면 되잖아.’
[주인님. 이제 주인님은 어엿한 체육과 차기 회장님이십니다. 이유도 없이 후배를 때렸다가 누가 주인님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부디 체통을 지키십시오.]
‘염병, 그깟 회장이 뭐라고.’
[아무튼요. 사람을 이유 없이 패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거 폭행인데요.]
‘그럼 어떻게 한다?’
[거참,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정음양이 한 눈 팔리도 없는데 말이죠.]
‘난 그 새끼가 정음이를 눈독 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좆나게 마음에 안 든다고. 그리고 들어보니 여자라는 여자는 죄다 건드리고 다니는 난봉꾼 새끼 같은데, 그런 바람둥이 새끼가 순진한 정음이를 꼬시려고 작업 들어가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살인충동을 느낄걸?’
[호오,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휴먼?]
‘질투는 무슨.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그게 질투죠.]
그래, 질투다.
인정한다.
이 구역의 바람둥이는 나다. 두 번째, 세 번째는 필요 없다.
나의 어장에 침범하는 새끼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범대 전과 공략?
웃기지마라.
국성대 전부가 내거다. 내 주변에서 여자들 따먹으려면 허락부터 맡아라, 애송이 새끼.
나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만나기도 전부터 기분 나쁜 새끼는 굉장히 오랜만이다.
* * *
야구장을 나선 도훈은 그날따라 외모에 무척 공을 들였다.
평소엔 대충 세수만 하고 청바지에 흰 티만 걸치는 패션이었다면, 오늘은 보란 듯 한껏 멋을 냈다.
각종 아이템으로 치장에 공을 들인 그는 누가 봐도 멈칫할만큼 잘생겨져 있었다.
[허어, 주인님이 초조해보이는 모습은 간만이군요.]
‘초조하긴 누가 초조하다고 그래?’
[본래 작업할 때 제외하곤 외모에 공들이는 타입은 아니지 않습니까?]
‘작업하러 가는 거잖아?’
[누굴요? 정음이양이나 아영양이나 다 공략 끝난 대상 아닙니까?]
‘그게 아니지. 오늘 가는 목적직를 생각해봐.’
[야구장이요?]
‘그래. 거기 아직 업적 남았잖아. 특수직종 공략의 마지막 퍼즐.’
[아하, 치어리더!]
‘그렇지. 그러니 겸사겸사 꾸미는 거야.’
[왠지 그럴싸한 핑계처럼 보이는데요.]
‘정말이라고. 작정하고 간 여름 휴가에서 계획했던 업적 두개 다 놓쳤잖아.’
[흑마공략이랑, 뻐꾸기요? 근데 흑마는 만나지도 못했고, 뻐꾸기는 주인님이 거부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말이야. 다른 업적으로라도 매꾸려는 거야. 아, 그리고 흑마는 사실 시간 문제야.’
[시간 문제요?]
‘마법의 문고리가 있잖아. 이제 여유있을 때 외국으로 나가는 건 일도 아니라고. 기회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략가능하다는 소리지.’
[아하! 그런 신박한 방법이!]
‘암튼, 오늘은 치어리더까지 꼭 공략하고 만다. 아니, 적어도 연락처 정도는 따와야지.’
[뭐, 믿어 드리겠습니다. 새로운 후배를 다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탓이겠죠?]
‘어차피 군바리 새끼라며? 머리 빡빡 밀었을 텐데, 제깟놈이 잘생겨 봤자지.’ 하지만 잠실역 앞에서 영철을 처음 만난 본 도훈은 굉장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영철이구나?"
"앗, 안녕하세요 선배님. 정음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영철입니다."
영철은 유미가 묘사한 데로 굉장한 꽃미남이었다.
피부도 엄청 희고, 속 쌍커플 진한 눈매가 기생오라비의 전 형이었다. 도훈은 저런 얼굴을 호빠 알바를 할 때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말년 휴가하면서? 군인 새끼가 머리가 왜 저렇게 길어?’
"어, 너 근데 군대···."
"넵. 아직 군인입니다. 막판에 남은 휴가를 모두 합쳤더니 한 달짜리 말년휴가지만요."
"머리는··· 음. 그렇게 길어도 돼?"
영철이 해맑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데,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미소였다.
"하하, 말년이라고 봐주더라고요. 상병 말호봉부터 조금씩 길렀는데···."
"영철 선배랑은 집 방향이 같아서 같이 왔어요."
정음이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도훈은 둘이 같이 등장한 시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영철이 정음에게 말했다.
"근데 왜 내가 선배야? 우리 동기 아냐?"
"아···. 그래도 학번이 위시니까."
"괜히 선배라고 부르면 헛갈리니까 그냥 오빠라고 하지?"
‘···오빠?’ 도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가 알기론 정음이 오빠라고 부르는 대상은 오직 자신뿐이다.
‘감히 저 새끼가!’
[주인님 고정을!]
"아뇨. 그냥 선배라고 할게요. 전 그게 편해서요."
"···아, 그러니?"
영철이 머쓱한 듯 웃었다. 아무튼 첫 등장부터 도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음이한테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아보려는데 마침 아영이가 등장했다.
"다 모이셨네요?"
아영은 깜찍하게도 야구 유니 모자에 상의엔 유니폼을 걸치고 있었다. 백산의 원정 유니폼으로 흰색 바탕에 스트라이프무늬가 있는 예쁜 옷이었다. 특히 모자는 스냅백 스타일로 각 없이 평평한 챙을 삐딱하게 썼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귀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영의 등장에 영철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커지는 걸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하여간 바람둥이 새끼, 미인이라면 바로 반응하는구만.’
[주인님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닥쳐.’
"와···. 우리과 물 엄청 좋아졌네요?"
"예?"
"아, 아니야. 반가워. 난 영철이라고 해. 2학기부터 너희랑 졸업할 때까지 같이 다닐 거야. 호칭은 그냥 오빠라고···."
"도훈 오빠. 혹시 응원봉 쓰실래요?"
아영은 영철이 하는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도훈에게 바람을 채운 응원 막대를 건넸다. 한참 자신을 소개하던 영철은 아영의 태도에 살짝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뭐, 뭐지? 사람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영철이 받은 대접은 역대급이었다.
복학을 앞두고 동기들과 친해지기 위해 우연히 만난 정음의 소개로 야구장에 따라왔다. 황금 같은 말년 휴가 중 좋아하지도 않는 야구를 보러 온 이유는 다름 아닌 정음 때문.
보는 순간 엄청난 미인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정음은 눈치가 없는 편인지 야구장을 핑계로 친해 지겨로 개인 톡을 보내도 단답으로 끊기 일 수. 차라리 만나서 친해지겠다는 생각으로 굳이 시간을 맞춰 함께 지하철을 타고 왔지만, 자신에겐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영철은 거기서 1차로 당황했다.
이제까지 늘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그로서는 다소 섭섭할만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난 동기인 아영이.
아영이도 정음 못지 않은 미인이었다. 이번 체육과 1학년이 예쁘다는 얘기는 몇 번 들었는데, 막상 두 사람을 만나고 나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닌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영 역시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군입대로 매력이 꺾였다고 볼 순 없었다. 당장 이틀 전 클럽에서도 처음 만난 여자를 따먹고 온 영철이었다.
‘뭐지? 설마···. 저기 저 회장 형 때문인가?’
영철이 마침내 도훈의 존재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