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63화 (1,130/2,000)

1146. 질투는 나의것-1-

* * *

"그런 사람들인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어."

참고인 조사를 받고 나온 후 풀려난 미나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사람은 겉만 보곤 모르는 법이라잖아."

나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새벽에는 정말이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출동한 경찰은 수영장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광경에 얼이 빠져 있다가 형철과 상철 형제를 현장에서 체포했고, 피해자인 은지와 민희는 물론 최초신고인인 나까지 줄줄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미나는 비몽사몽중에 깨어 날 따라왔다. 한국인 관련 범죄였기 때문에 영사관에서까지 사람이 출동했고, 제법 장시간 조사가 이어졌다.

어쨌든 결론은 이랬다.

형철은 향정신성 약품 복용 및 민희에 대한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 동생인 상철 역시 은지에 대한 강간 혐의로 구속. (그 짧은 사이 삽입까지 진행된 모양이다.)

그 와중에 은지가 민희까지 상철의 공범으로 몰아세움으로써 민희에게 추가적인 혐의가 덧씌워졌다.

나와 미나의 경우엔 처음부터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특히 은지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단순 참고인 조사만 받고 풀려날수 있었다.

은지가 나를 아끼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나를 끌어들일 때 자신이 상철에게 덫을 놓은 것이 발각될 우려 때문에 적당한 시점에 손절한 느낌이었다.

경찰에게 듣기론 위의 위법사례 경우 속지주의가 적용되어 현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 했다. 때문에 형사 고발된 세 사람 외에 은지 역시 차후 수사를 위해 싸이판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국제변호사를 구하고, 기나긴 법정 다툼이 이어지겠지만 이제 나로선 상관없는 이야기다. 특히 마지막 풀려나올 때 민희에 대해서 인연의 끈을 끊어 버림으로써 혹시나 모를 만약의 사태를 예방했다.

마음 같아선 네 사람 모두 정리하고 싶었지만, 스킬은 한번에 한 사람밖에 쓸 수 없었다. 그와중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민희라고 판단되었다.

어차피 형철은 본인의 과실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나와는 무관하게 중형이 예상되었다. 상철의 경우 내가 연루되었다고 의심할 부분은 있었지만, 본인의 죄목과는 상관없었다. 특히 은지는 나와의 공모를 밝혔다간 자기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에 끝까지 입을 다물 것이다.

결국 민희의 입만 봉하면 문제 될 부분이 전혀 없었는데, 마지막 순간 인연을 끊어버림으로써 민희는 나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더이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아무 일도 아니다.

벌어진 일도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번엔 정말 위태위태했습니다. 호랑이 굴에 자진해서 들어간 느낌이었으니까요.]

‘미션을 해치우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거 하난 건졌으니 다행스러운 일 아니야?’ 나는 주머니에서 금장 라이터를 꺼냈다. 반짝이는 금빛이 유독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이를 본 미나가 물었다.

"뭐야, 그건?"

"엊그제 가게에서 하나 샀지. 라이터가 떨어져서."

"정말? 거긴 또 언제 들렸대?"

"주유소에서 렌트카 기름 넣을 때 담배 산다고 잠깐 편의점들렀잖아. 거기에 팔더라고."

"아하, 도훈아. 우리 말 나온 김에 기념품점이나 들를래?"

"그럴까?"

경찰 조사로 인해 마지막 날 일정을 망친 우리는, 겨우 저녁기념품점에 들러 한국으로 가져갈 선물을 살 수 있었다.

"부담 없이 마음껏 집어. 내가 다 사줄게."

"정말? 비싼 거 골라도 돼?"

"응. 나 여기 와서 돈 벌어 가잖아."

"정말 다행이다. 어제 그 사람들 때문에 여행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건진 것이 있었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라잖아."

"히히, 정말 그런가 봐. 근데 가방에 다 못 넣겠는데?"

"그럼 캐리어도 하나 더 사 버리지 뭐."

기념품 점에서 선물을 아낌없이 질렀다. 이후 공항 면세점에서도 시계니 가방이니 마음껏 샀다. 하지만 그렇게 쓰고도 3만 불이란 거금은 쉽게 줄지 않았다. 남은 돈에서 만불은 미나에게 주었다.

"됐어. 난 이 돈 못 받아."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비행기 값부터, 호텔비, 그밖에 여행 경비 미나 너 혼자 다 댔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 나 이렇게까지 안 들었어."

만 불이면 우리 돈 1,200만원.

실제 우리가 쓴 여행 경비보다 2배 이상 많은 돈이었다.

"아냐. 미나 네가 여기로 오자고 안 했으면 어차피 못 땄을 거야. 그러니까 너에게도 분명 지분이 있지."

"아이참···. 진짜로 괜찮은데···."

"그냥 받아. 이럴 때 아니면 내가 또 언제 기분 내보겠어?"

실랑이 끝에 겨우 미나가 돈을 받았다. 이리저리 다 썼는데도 그래도 나에겐 15,000불 이상이 남았다.

‘여기 와서 돈 벌어 가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주인님이 횡재수 하나는 기가 막히죠.]

‘어쨌든 아쉽지만 큰 미션도 해결했고, 미나랑도 좋은 추억도 쌓았으니까. 실보단 득이 많았어.’

[한국에 가시면 다시 달리셔야죠.]

‘그래야지. 방학도 거의 끝물인데.’

돌아오는 비행기는 업그레이드 비용을 지불해 1등석으로 왔다. 확실히 좌석이 넓고 편안해 좋았다.

* * *

"그럼 조심히 들어가."

"응, 연락할게."

미나가 차로 집까지 바래다줬기 때문에 손쉽게 올 수 있었다. 분명 갈 때는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양손 가득 커다란 캐리어가 들렸다.

"어으, 피곤하다."

비교적 편안히 왔음에도 확실히 해외여행은 피로도가 상당했다. 특히 집에 도착한 시간이 거의 저녁 10시가 넘었기 때문에 짐을 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잠들어야 했다.

다음날 일어나 짐 정리를 하는데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빠, 이제 연락되네요?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아영이었다.

"어, 근데 무슨 일이야?"

-설마 까먹으신 거예요?

순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데, 로시가 부연했다.

[출국 전 오늘 야구 경기를 보러 가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아, 그날이 오늘이었어?’

[네. 일요일 백산 홈경기. 오늘 저녁 일정입니다.]

‘이런 젠장, 깜빡하고 있었는데.’ 충실한 비서, 로시의 조언으로 스케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아냐, 아냐.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가지고. 멤버는 다 구했어? 그때 정음이랑 너 말곤 아직 확정 아니라면서."

-그게···. 일단 제가 다 알아봤는데요, 다들 야구 경기에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래? 그럼 셋이서만 가는 거야?"

-아뇨. 정음이가 한 명 더 데려온 데요. 이름이 영철이라던가?

"영철이? 그게 누군데?"

-오빠 모르세요? 저희 동기라던데.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생각 나질 않았다.

가만, 근데 1학년이라고?

"너희 동긴데 너가 몰라서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아···. 제가 학과 생활을 잘 안 해서요.

"크흠, 그렇구나. 알았어. 일단 그럼 넷이 가는 거지?"

-네. 6시반 경기 시작이니까 잠실역 앞에서 6시까지 모이기로 했어요.

"응, 그때 보자."

통화를 끊고 다시 생각했다.

영철이?

1학년에 그런 애가 있었단 말인가?

‘로시, 누군지 알겠냐?’

[저도 금시초문입니다만. 정말로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어랍쇼?’

나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모를 수 있지만, 인공지능인 로시까지 모르는 건 이상했다. 하지만 정음이가 불렀다고 하고, 아영이도 동기라고 했으니 체육과 학생인 건 분명했다.

[근데 회장이 모르는 신입생도 있습니까?]

‘그건 좀 이상한데. 아, 이럴 때 태영이 자식 있으면 물어보는 건데···.’ 마당발 역할을 하던 태영의 부재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쯤 논산 훈련소에서 뒤지게 구르고 있겠구나.

나는 다시 정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음아."

-앗, 오빠! 귀국하셨어요? 깨톡 프로필에 어제까지 미국에 계신다고 하셔서···.

역시 정음은 나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었다.

물론 가족을 보러 미국 다녀온 줄 알겠지만.

"어, 어젯밤에 도착했어. 잘 있었어?"

-네, 오빠. 전화할까 하다가 여독으로 피곤하실 것 같아서 참았어요. 다시 목소리 들으니까 반가워요.

"나도 반갑다. 참, 근데 방금 아영이한테 연락 왔는데 영철이랑 애도 같이 가기로 했다고?"

-네. 맞아요. 제가 꼬셨어요.

꼬셔?

왠지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일편단심인 정음이로선 별 뜻 없이 한 말이겠지만, 어쨌든 상대는 남자가 아닌가.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근데 1학년에 영철이란 애가 있었어? 난 처음 듣는 이름인데?"

-아아! 오빠는 모를 수도 있겠다. 1학기까지 군휴학했다가 이번 2학기 때 복학 예정이래요. 지금은 말년 휴가 중이고요.

말년 휴가라고?

[원주인이 군대갔을 적에 입학했던 신입생인가 본데요.]

원주인 이도훈이 군대를 간 것은 1학년 마친 겨울방학.

아마도 이듬해 신입생으로 들어왔다가 1학기만 마치고 군대 간 후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올해 2학기 복학이면 거의 칼복학인 셈인데···.

‘가만. 따지고 보면 1학년 복학이라고 해도 정음이랑 안면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근데 너랑은 어떻게 알아?"

-네? 아아, 그게요.

정음이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기휴가에 포상을 덕지덕지 붙여 무려 한 달에 가까운 말년휴가를 나온 영철은 복학을 위해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고 한다. 그때 우연히 학과 사무실에서 볼일을 보던 정음과 마주쳤다고.

-그때 제가 1학년 단톡방에 야구장에 가자고 했더니 아무도안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낙담하고 있는데···.

정음은 아웃 사이더인 아영을 대신해 본인이 1학년 단톡방에 메시지를 돌렸다고 한다. 하지만 방학중이기도 하고 야구에 별 흥미가 없던 동기들은 외면했고, 우연히 복학계를 제출하던 영철과 대화를 나누다 야구장에 따라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 그럼 잘은 모르는 사이야?"

-네. 그게 어제 있었던 일이거든요.

"그렇구나. 알았어. 암튼 나중에 보자."

-네, 오빠.

통화를 마치는 데 기분이 찜찜했다.

‘영철이라는 새끼 마음에 안 드는데.’

[왜 그러십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말년 휴가 나온 군바리 새끼가 생전처음 보는 후배랑 야구장에 따라온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

[친해지려고 그럴 수도 있죠.]

‘친해져?’

[방학 중이라 얼굴 보기도 힘들 텐데, 어쨌든 정음양은 앞으로 졸업까지 함께 할 동기인 셈이니까요.]

‘아니, 지가 동기면 동기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순한 의도가 느껴졌다. 딱봐도 보이지 않는가? 군대도 일찍 다녀왔겠다, 정음이 예쁘기도 하겠다 우연히 건수 잡아서 친해진 다음 꼬시려는 수작 같다고 할까?

더욱이 1년 반 넘게 군대에 처박혀 있었으니 오죽 굶었을까.

[뭐, 어장관리 어플에 한번도 경보가 뜨지 않은 걸 보면 주인님의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어장의 물고기를 침범하려고 들면 무조건 경보가 울리게끔 되어 있다. 만약 영철이라는 놈이 흑심을 품었다면 분명 싸이판에 있었더라도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아니야. 어제 잠깐 만났다잖아. 아직은 그냥 탐색하는 중이겠지. 첫날 만나서 뭘 어떻게 해보려는 금사빠는 아닐테니까.’

[유독 신경쓰시는 군요. 정음양 일이라서 그런가요?]

‘당연히 신경 쓰이지. 내 여자니까. 내 여자에게 똥파리가 꼬이는 걸 두고 볼 순 없잖아.’

[하지만 비공식적인 관계잖습니까? 영철이라는 학생도 지금쯤 정음 양이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이미 다 알아보지 않았을까요? 그건 주인님의 잘못이기도 하죠.]

‘흠···.’

확실히 그게 문제다.

정음은 어쨌건 대외적으론 솔로. 그러니 만에 하나 영철이 정음을 꼬시려 한다고 해도, 내가 화낼 명분은 없다.

그렇지만 절대 좌시하진 않을 것이다.

어디서 감히 침을 흘려?

[정말이지 주인님은 이기적입니다.]

‘됐어. 그게 내 스타일이야.’ 약속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어젯밤 못다 한 짐 정리부터 했다. 하지만 괜히 영철이란 아이가 신경이 쓰이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가만. 내 동기들이 오수정같은 4학년이면, 영철이란 애 동기는 지금 3학년이겠네?’

[그렇죠.]

‘3학년··· 3학년···. 성수 형은 의병제대로 중간에 복학했으니 영철이랑 접점이 없을거고, 그렇지. 마유미가 알겠구나.’

[마유미 양이요?]

‘그래. 유미는 휴학없이 학교를 꾸준히 다녔으니까 영철이랑 동기일 거 아냐.’

[그래서요?]

‘뭘 그래서야?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게 우선이지. 전화해서 물어봐야 겠다.’

[와! 주인님이 유미양에게 먼저 전화를 다 거시다니.]

‘그럴때도 있지 인마.’

나는 곧바로 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훈련 중이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30분 후에 유미에게서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 어쩐 일이에요?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배구부 연습중이야?"

-네, 여름 컵 대회 일정으로 춘천에 와 있어요. 아쉽네요. 선배가 오랜만에 연락하셨는데···.

"아···. 고생하네 더운데. 그게 아니라 나 뭐좀 물어 보려고."

-뭔데요? 오늘 팬티 색깔 알려드려요?

"에이씨, 뭐래. 변태같이."

-흐흐. 어디 선배만 하겠어요?

"다른 게 아니고 혹시 너네 동기 중에 영철이라고 알아?"

-영철이요?

유미의 목소리 톤이 다소 격앙되었다.

마치 말하지 않을 사람을 언급한 느낌이었다.

-그 새끼는 왜요? 군대 가지 않았나?

‘그 새끼라고?’

[오, 뭔가 있나본데요?]

"2학기 때 복학한다던데? 1학년으로."

-복학이요? 완전 철판이 따로 없네? 그 새끼 완전 쓰레기 새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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