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3. 그해, 여름. -58-
"뭔데 그렇게 폼을 잡아? 중요한 일이야?"
"네, 긴히 드릴 말씀이라 잠깐만 저랑 저쪽으로 가실까요?"
상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동의하며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도훈이랑 잠깐 한 대 빨고 올게."
그러자 형철이 제 자리에서 담배를 꼬나물었다.
"여기서 피우지 뭘 또 멀리까지 가?"
"여자분들이 연기 싫어하잖아."
"염병, 혼자 젠틀한 척은."
형철은 고집이 센 편이었기 때문에 아랑곳 않고 앉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다. 동생의 말을 듣고 자리를 옮기면 오히려 자신의 위세가 상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덕에 나와 상철은 자연스럽게 일행들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뭔데 그래? 할 얘기라는 게."
"우선 제 말 오해하지 않고 들으셨음 좋겠어요."
"뜸 들이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뭐냐니까?"
"아까 민희누나가···."
일부러 슬쩍 말을 흘리자 상철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뭔가를 예감한듯한 표정이다.
"민희가 왜? 자넬 유혹하기라도 하던가?"
"···예?"
일부러 놀라는 표정을 짓자 상철이 껄껄 거리며 대답했다.
"도박도 좋아하고 술 잘 마시길래 잘 노는 친구인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영 순진한 친구로구만?"
"그게 무슨···."
"민희가 원래 좀 사람을 많이 좋아해. 붙임성도 좋은 편이고 비슷한 또래라 반가운 마음에 친한척 좀 한 거 가지고 오해를 한 것 같네만."
"아···."
"괜찮아, 괜찮아. 그런 걸 굳이 나한테 일러바치나? 난 또 뭐라고."
상철은 대범한 척 연기하더니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나에게 슬쩍 찌르기 시작했다.
"왜? 민희가 자네랑 한 번 하재?"
"예, 예?"
미끼를 문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괜찮아. 말해봐. 자네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 아닙니다. 그런 말까진 아니었고···."
"직접적으로 말은 안했다 뿐이지, 찔러보긴 했나보네."
"아···.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입장이 굉장히 곤란해서···."
상철의 표정이 점점 더 음흉하게 바뀌었다.
"하긴 민희 고년이 제법 꼴리긴 해. 나라도 흔들렸을 걸."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건 뭐야? 나한테 솔직히 말해준 것 밖에 없는데. 하여간 민희 저 앙큼한 년 같으니."
상철은 되려 민희를 욕하더니 본격적으로 나에게 수작을 걸어왔다.
"왜? 막상 거절하니까 아쉽나?"
"절대 아닙니다."
"아냐. 오해 말라고.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취향이 좀 독특한 편이거든."
"취향요?"
"자네 혹시 네토라레라고 들어봤나?"
"네토라레면···."
"그래.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범해지면 흥분하는 타입말이야."
"아, 그럼···."
화들짝 놀라는 기색을 보이자 상철이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며 "쉿-" 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리 좀 낮춰. 저기 다 들리겠어."
"죄송합니다."
"아무튼 자네에게 밝히긴 쑥스럽지만, 내가 좀 특이한 취향이란 말이지."
"아···."
"솔직히 말해줘? 민희랑 사귀면서 초대남도 몇 번 불러봤거든."
"초, 초대남이면···."
"맞아. 다른 남자 불러서 여친이나 와이프 따먹게 하는 거 말이야."
"헉!"
"그러니까 혹시 민희 먹고 싶으면 말만 하라고. 눈 감아줄 테니까."
"아, 아니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허허.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하나? 여자들이란 원래 다 돌려 먹는 거야. 자네도 솔직히 민희 따먹고 싶지 않아? 걔가 잦이 하나는 기똥차게 잘 빠는데."
"이게 무슨···."
"민희가 자넬 괜히 유혹했을 거 같아? 자네가 이렇게 나한테 일러바칠지도 모르는데?"
"그럼 설마···."
"맞아. 내가 묵인할 줄 알고 의도적으로 꼬리친 거라고. 아까부터 나한테 와서 그러더구만. 도훈이 자네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면서."
[우아, 이게 또 무슨 미친 전갭니까?]
‘상철이 통빡을 여러번 굴리는데.’
[무슨 의돌까요, 대체?]
‘자기가 변태성향인 것처럼 위장해 나랑 민희랑 붙어먹게 만들겠다는 수작이야. 그리곤 미나까지 끌어들인 다음 자기는 따로 형수 허은지를 따먹겠다는 속셈이지. 어차피 민희야 돈주고 고용한 창녀니까 누가 먹던 무슨 상관이겠어?’
[그렇다고 스스로를 네토라레인 것처럼 위장을 한다고요?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군요.]
‘적당히 찔러볼까 했는데, 오히려 한 술 더 뜨는구만. 미끼에 대어가 걸렸어.’
[이제 어쩌시려고요?]
‘말했잖아. 상철은 늘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의 입맛에 맞춰줘야지.’
"정말이세요?"
"하-. 거참 젊은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아니 근데 저는 도저히 지금 상황이 이해가···."
상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원래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이지.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돌린다는 건 사실 미친 소리나 다름없거든. 하지만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있는 거고, 나처럼 소수 취향도 있는 거거든. 나는 자네가 내 여자친구를 따먹어도 아무 불만 없네.
아니, 기왕이면 내 앞에서 한 번 시원하게 따줘. 그럼 나도 기쁠 것 같으니."
"이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그냥 한다고 해. 그럼 허락할 테니."
‘로시. 지금, 마음의 소리.’
[넵.]
{크크크. 이 새끼 표정 보니 마음이 벌써 동했구만. 하여간 겉으로 로맨티스트처럼 행동하는 놈들이 뒤로는 더 구리단 말이지? 여자 친구 먼저 재우고나서 몰래 다른 여자 따먹을 생각에 신나 죽겠지? 멍청한 새끼. 니가 민희 따먹는 동안 니 여친은 형철이 형한테 실컷 면간 당하는 거야. 술 먹고 골뱅이 된 여자 누가 따먹던 알게 뭐람?}
[아! 저것이었군요! 상철의 변경된 계획이란게!]
‘와, 이거 진짜로 개새끼네. 설마 미나까지 끌어들일 작정이었다니!’
[하긴, 원래 희생양 역할인 민희양을 주인님이 데리고 가면 남는 여자는 미나양 밖에 없을테니까요. 설마 이대로 그냥 두시진 않겠죠?]
‘아니. 패죽여야지.’
[하지만 상철의 호감도를 높이지 않고선 미션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
[뭔데요?]
‘지켜 보라고.’
"···하, 하고 싶습니다!"
"정말?"
"네. 솔직히 형님만 눈 감아 주시면···."
"푸하하, 이 친구 알고 보니 감정에 참 솔직한 친구였구만?
완전 꽉 막힌 줄 알았더니···. 남자야 남자, 상남자!"
상철은 몹시 기분이 좋아보였다.
자신의 작전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확실한 호감도 상승을 위해선 쐐기를 박을 게 필요했다.
"저, 그리고···."
"뭔데, 또?"
"아까 보니 여자 친구가 술이 취해서 완전 뻗었더라고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그래서?"
"원하시면 민희랑 미나를 하루 정도 바꾸시는 것도···."
[미, 미쳤습니까, 휴먼!]
‘조용히 해.’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미션을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교환을! 미나양이 무슨 물물교환 대상입니까? 스와핑 제의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당장 철회하십시요!]
나는 로시의 분노를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랑 스와핑을 하자는 거네?"
"네. 형님 성향이 아무리 그쪽이어도, 저만 날름 받아먹기는 면목도 없고."
상철은 자신이 원했던 상황대로 굴러가는 게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하-.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진짜로 자네 여자친구를 하룻밤 빌려주겠다는 소리야?"
"형님도 허락하셨는데, 저도 똑같이 해드려야죠. 그게 도의가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딴 소리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민희는 경험이 있어서 그닥 신경 안 쓰겠지만, 자네 여친은···. 일반인이잖나?"
"그부분은 걱정 마세요. 미나가 원래 술취해서 뻗으면 다음 날 기억도 못 할 정도로 필름이 끊기거든요. 막말로 누가 따먹은 지도 모를 거예요. 아니, 본인이 따먹힌 줄도 기억 못 할 걸요?"
"와하하하하하하! 이 친구 진짜!"
상철이 매우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싸이판에 와서 보여준 웃음 중에 가장 만족스러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좋네!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교환에 응해주지. 이건 분명 자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네. 저는 상도덕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자네 진짜로 내 동생하게나. 아니지, 이 경우엔 동서라고 해야 하려나? 하핫!"
"구멍 동서도 동서죠."
"그래, 그래! 구멍동서! 아하핫!"
[주인님은 정말 쓰레깁니다!]
‘닥치고 상철이 호감도나 확인해.’
[···76 . 좋겠습니다. 여자친구 팔아넘기고 미션 달성하셔서.]
‘누가 여자 친구래? 말은 똑바로 해. 일시적으로 여자친구 행세 한 거야.’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미나양이 설사 동의 했다고 해도 뜯어 말려야 하는 게 정상입니다. 근데 그걸 수면 제까지 강제로 먹여놓고 홀라당···. 설마 일부러 먹이신 거였습니까?]
‘야야, 인공지능 주제에 너무 흥분하네 너. 선 넘는다? 아무튼 미션은 성공한 거지?’
[···네. 개새끼야.]
‘뭐 인마? 또 설마 본심이 튀어나왔냐?’
[주인님이 난봉꾼이긴 해도 자기 여자를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누가 버린대?’
[네? 방금 분명히···.]
‘아까 말했잖아.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다고.’
[이게 다 작전이었다고요?]
‘그래. 쉽게 말하면 선조치, 후수습 전략이랄까?’
[아니 이걸 무슨 수로 수습을···.]
‘벌써 잊으셨나? 이번 아이템 보상이 망각의 지포 라이터라는 것을.’
[아, 아니 설마!]
‘그래. 바로 그거야. 미션 완료 조건에서 은지와 민희는 이미 따먹은 상태였잖아.’
[그렇죠.]
‘그리고 형철 역시 호감도 70을 먼저 넘겼고.’
[그것도 맞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지. 만약 여기서 상철의 비위를 맞춰 호감도만 올리고 나면 아이템을 바로 수령할 수 있겠구나 하고.’
[맞습니다, 주인님! 설마 이 모든 게 미션을 클리어 하기 위한 연기였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거야. 무슨 말을 지껄였던 방금 전 대화는 상철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삭제될 거라는 거.’
[세상에!]
‘이게 바로 선조치 후수습이라는 거지.’
어느새 한 팀이 된 상철 앞에서 새롭게 받은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금장으로 된 라이터는 어둠속에서도 번쩍 거릴만큼 윤이났다.
"형님, 우리 동서된 기념으로 담배나 한 대 더 태우실까요?"
"좋지!"
"제가 불 한번 붙여드리겠습니다."
상철이 담배를 꺼내자 나는 지포라이터 뚜껑을 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1초.
2초.
3초.
지포 라이터의 불길을 바라보는 상철의 눈이 몽롱해졌다.
이제 그는 방금 전 10분 동안의 기억이 통째로 소멸된 것이다. 당연히 미나와의 맞교환도, 앞선 민희에 대한 고자질도 세상에 없는 일이 되었다. 아니 적어도 그에겐,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라? 잠깐."
"왜 그러시죠?"
"아, 아니야. 우리 지금 처음 담배 피우는 거 맞지?"
"네. 제가 불붙여 드린다고 했잖아요."
"아, 그렇지. 취하긴 취했나 보네. 순간 멍 해져가지고."
과연 라이터의 효과는 놀라웠다.
불길을 보는 순간 직전 10분의 기억이 소멸되면서 현재의상황에 맞게 재편집이 된 것이었다. 아마도 상철은 장소를 이동 후 처음 담배를 입에 물었던 것으로 상황을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뭔데 그래? 할 얘기라는 게."
그리고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이제부터 달라진 점은 그의 계획을 모두 간파했고, 어떤 말을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수가 읽힌다는 사실이었다.
* * *
"우선 제 말 오해하지 않고 들으셨음 좋겠어요."
"뜸 들이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뭐냐니까?"
여기까지는 복사하여 붙여넣은 것처럼 똑같은 진행.
하지만 이미 상철의 의도를 읽은 도훈은 전혀 다른 전개로 대화를 진행시켰다.
"아까 설거지 할때요. 저랑 형수님이랑 작은 형수님이랑 같이 있었잖아요."
"근데?"
"제가 잠깐 2층 방에서 폰 충전기 찾으러 갔다가 왔거든요?"
"아이참, 답답하게. 본론부터 말하라니까?"
성철은 성격이 급했다. 특히 시덥잖은 이야기로 도훈이 자기를 불러냈다고 생각하자 괜히 짜증이 치밀었다.
"형수님이랑··· 작은 형수님이랑 둘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다시 내려 온줄 모르고요."
"도훈이 자네가 엿들었단 소리지?"
"네. 근데 내용이 상철이 형님하고 관계된 것이었거든요."
자신의 이야기라는 말에 상철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정말? 내 얘기로 싸우고 있었다고?"
"네. 그러니까 형수님이···. 아니 헛갈리니까 이제부터 이름으로 말할게요. 은지 누나가 민희 누나한테 그러더라고요."
"뭐랬는데?"
"도련님한테 꽃뱀짓 할 생각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썩 꺼지라고."
"뭐? 그게 정말이야?"
상철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민희의 정체가 탄로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 흠모하던 형수가 사실은 뒤에서 자신을 챙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말해봐."
"저도 앞뒤 내용은 잘 모르겠어요. 근데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싸웠고, 제가 인기척을 내니까 아무일 없었다는 것처럼 조용해 지더라는 말이죠."
"아···. 이럴수가."
"아무래도 은지 누님이 뭔가 오해한 거겠죠?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드리려고요."
상철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