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52화 (1,119/2,000)

1135. 그해, 여름. -50-

* * *

미나는 민희의 제안대로 테닝을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장으로 이동했다. 도훈은 짐 정리를 마저 끝낸다는 핑계로 홀로 방에 남았다.

‘우선 이곳 구조부터 익혀야겠어.’

[구조요?]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져도 대비할 수 있도록 말이야.’

도훈은 이번 초대가 불순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건물 구석구석을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특히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중 ‘마법의 문고리’는 미리 가본 곳에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사전 탐사가 필수적이었다.

2층엔 모두 2개의 화장실과 5개의 방이 있었는데 객실 하나의 크기가 어지간한 호텔 수준이었다. 형철과 상철이 묵을 방은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되어 있었고, 도훈이 묵을 게스트 룸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빈방도 많고,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면 누가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군.’

우선 방이 많다는 건 희소식.

기회만 되면 방으로 여자를 끌고 들어가 몰래 일을 벌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확인차 빈 방들을 점검한 결과, 방마다 이부자리가 말끔히 정리된 킹사이즈의 침대가 놓여있었다.

2층을 둘러본 도훈은 계단을 이용해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은 넓은 거실과 주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거실 크기 역시 최소 스무 평은 넘어 보였다. 주방에는 최대 10명 정도가 둘러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일랜드형 식탁이 배치되어 있었다.

‘1층은 사방이 뚫려 있어서 사각이라곤 전혀 없군. 주방이랑 거실이랑 거의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겠어.’

특히 거실에는 도난과 방범을 위한 CCTV까지 설치되어 남몰래 뭔가를 벌이는 게 불가능한 구조였다.

실내를 모두 파악한 도훈은 이제 빌라를 벗어나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빌라는 크게 잔디와 수목이 조경된 앞 마당과, 건물 뒤로 실내 풀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야외용 테이블과 바비큐를 구울 수 있도록 장비가 세팅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식사 준비에 한창인 상철을 만날 수 있었다.

"벌써 저녁 준비하세요?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냐. 혼자 천천히 하려고. 풀장에는 안 가? 다들 거기 모여있을 텐데?"

"오전에 실컷 하고 와서요."

"아, 스노클링했댔지? 그건 할 만하던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강사가 알려주는 데로 따라다니기만 해서."

상철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젊을 때 몸으로 즐기는 건 다 경험해 보라고. 내 나이 되면 그냥 움직이기도 싫어지거든."

"아직 젊으신데요, 뭘."

상철은 올해 서른 여섯. 30대 중반으로 결코 늙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평소 운동을 싫어하고 술 먹기를 좋아해 이미 몸매는 망가진 상태였다. 키도 작은데 배까지 불룩 나온 전형적인 아저씨 몸.

"나이만 젊지 몸뚱이는 40대 보다 못 할 걸? 그리고 내가 남자끼리만 있어서 얘기하는 건데···."

상철은 바비큐용 고기를 다듬다 말고 도훈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요샌 좆도 잘 안 서."

"네?"

"정말이라니까? 서른 넘어서 꺾이기 시작하더니 잦이가 팍죽어버리더라고. 어디가서 창피하니까 소문내지 말고."

"아···."

도훈은 뜬금없이 치부를 드러내는 상철이 부담스러웠으나 친해지기 위한 과정이라 여기고 적당히 받아주었다.

"정말요?"

"그렇다니까? 나도 20대에는 팔팔했지. 그땐 진짜 하루에 두 번 세 번도 거뜬했거든."

[두 번, 세 번은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인님은 하루 10번도 가능하신데요.]

‘나야 정력이 강화 되서 그렇고 일반인 기준에선 그게 평균이긴 하지.’

"근데 진짜 요샌 한 번만 해도 이놈이 힘을 못 쓰더라고."

상철의 능글거리는 모습에 도훈이 의문을 가졌다.

‘굳이 왜 저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거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일단 계속 들어보자.’

"그렇군요. 전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어요."

"여친이랑은 뜨겁지?"

"네, 네?"

"미나씨 말이야. 무슨 재주로 그런 미인을 꼬신 거야?"

"아···. 제가 다니던 헬스장 PT 강사였어요."

"그러니까 헬스장에서 눈 맞았구나?"

"뭐, 그런 셈이죠."

"하긴 도훈이 너 정도면···."

상철이 부럽다는 눈으로 도훈의 두꺼운 팔뚝을 매만졌다.

"이야, 역시 단단하구만. 온 몸이 아주 돌덩어리야."

"아니에요. 운동 쉰 지 제법 됐어요."

"그래도. 어리고 잘 생긴 데다 몸까지 이렇게 좋으니 어떤 여자가 안 반하겠어?"

"왜 그러세요, 민망하게. 형님도 엄청 잘 나가시잖아요."

"돈 좀 버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남자란 자기 식구건사할 만큼만 벌어도 충분해. 나머진 그냥 다 쓸데없는 거야."

"그래도 전 형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아요."

도훈은 겸양을 표하면서도 의문을 떨치기 힘들었다.

‘뭐지? 저 두 형제는 돈 못 버는 사람 완전 개무시 하는 느낌이었는데 왜 저렇게 보잘 것 없는 나를 띄워주는 걸까?’

[주인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 아닐까요?]

‘그보다는 나에게 아부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래도. 아까도 민희가 얼마나 자네 얘기만 하는지. 비교 되서 부끄러울 지경이었어."

"민희 누나가요?"

"아, 민희가 누나야?"

"네, 한 살 많아요 저보다."

"그렇군. 암튼 질투 나더라고. 혹시나 나보다 자네를 더 좋아하나 싶더라니까?"

"에이, 별말씀을 다. 그냥 농담한 거겠죠. 곧 결혼하실 사이 라면서."

"하하. 그때까지 민희가 나 같은 늙다리를 좋아해주면 모르겠지만. 뭐, 하긴 젊은 놈 좋다고 눈 맞아도 별로 할 말 없긴 하지. 나이도 열 살 넘게 차이 나는데."

도훈은 그제야 상철의 속셈을 파악했다.

‘민희를 나랑 엮으려는 수작 같은데?’

[김민희를 주인님하고요? 원래 민희는 형철을 유혹하기로한 것 아니었나요? 여행 올 때부터 미리 계획한 거 잖습니까?]

‘아니야. 아까부터 밑밥을 까는 게 일부러 흘리고 있잖아. 민희가 나한테 이성적인 관심이 있다는 투로. 거기다 바람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야. 분명 고의적이라고.’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혹시 작전이 변경된 걸까요?]

‘형철을 커버하기 위한 미끼였던 민희를 나에게 넘기려는 의도가 뭘까? 설마···. 이 새끼. 미나 노리는 거 아냐?’

[미나양을요?]

‘애초부터 우릴 초대한 이유가 그것이었나 보네. 수틀리면 미나까지 끌어들일 속셈으로. 하여간 얄팍한 자식.’

상철의 의도를 간파한 도훈은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누가 됐건 미나를 건드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티를 낼 필요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두 형제 앞에서 어리숙해 보여야 했다.

도훈이 가만히 서 있자, 상철이 그를 등 떠밀며 말했다.

"암튼, 식사 준비는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넨 풀장에나 가보라고. 바닷물이 아니라 물도 깨끗하고 좋을 걸."

"네, 그럼 좀 이따 봬요."

상철의 음모를 모두 파악한 도훈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빌라 뒤편 풀장으로 향했다. 어쨌든 상대의 작전을 간파 했으니 미리 대비만 하면 그만이었다.

‘상철이 민희와 나를 어떻게든 엮으려고 작정했구나. 이것도 음모의 일부겠지?’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하긴 실제 여친이 아니라 돈 주고 고용한 창녀라 가능한 계획이겠지만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적당히 넘어가 주면서 계속 방심하게 만들어야지. 어차피 놈의 의도대로 될 일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실내 풀장에 도착하자 먼저 내려간 미나와 민희, 그리고 허은지가 풀장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형철은 혼자 풀장 밖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중 도훈을 불렀다.

"왔어? 여자친구는 아까 내려왔던데."

"앞 마당에 가보니 상철이 형님이 바비큐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혼자 하신다면서."

"하하. 냅 둬. 걔 요리 잘해."

"요리도 잘하세요?"

"요식업체 대표잖아. 상철이는 자기가 만들지 않은 요리는 프랜차이즈에 공급 안 시켜. 레시피도 직접 연구할 만큼 열정이 넘치거든."

"대단하시네요."

"원래 상철이가 어렸을 때부터 독종이긴 했지. 한 번 파고들면 꼭 그 분야에선 최고가 되겠다는 집념이 워낙 강해서. 요식 업체 차린다고 요리사 자격증까지 딴 놈이야."

그때 물장구를 치며 놀던 여자들이 도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도훈씨 얼른 들어와요! 물 시원하고 좋아!"

"도훈아, 같이 놀자!"

여자들의 부름에 도훈이 맥주캔을 들어 보이며 양해를 구했다.

"형님이랑 얘기 좀 하다가 들어갈게요."

그러면서 형철의 옆자리에 앉아 맥주캔을 깠다. 형철은 여자들과 놀지 않고 자신 옆에 앉는 도훈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었다.

"물놀이 별로 안 좋아하나?"

"아뇨. 오전에 스노클링 한다고 실컷 놀았거든요. 좀 쉬고 싶어서요."

형철은 상철처럼 사근사근한 맛은 없었지만, 어젯밤 술자리 이후로 조금은 도훈이 편해진 눈치였다.

"어제 보니 술 잘 마시더만. 하나도 안 취하는 것 같고. 술이 원래부터 센 편인가?"

"컨디션이 좋았어요. 어젠 잘 주무셨어요?"

"방에 가자마자 곯아떨어졌지. 아침에도 겨우 일어나서 체크아웃 했다니까."

"어제 무리하신 것 같아요."

"그러게. 오늘 밤에도 달려야 하는데 말이야."

"오늘 밤요?"

"당연하지. 그것 아니면 풀빌라를 빌린 이유가 뭔데? 실컷 마시고 놀다 눈치 안보고 아무데나 퍼질러 자려고 온 건데."

형철은 그렇게 말하더니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도훈에게 내밀었다.

"한 대 태울텐가?"

"주시면 감사하죠."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계속 얘기를 나눴다. 오후부터 맥주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변한 형철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술을 함께 마시며 담배도 피우는 도훈이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난 말이지, 바캉스를 와도 이렇게 아무데서나 담배 피울 수 있는 숙소가 좋더라고. 호텔은 왠지 너무 답답해서 말이지."

"저도 막상 와보니 풀빌라가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훈 역시 담배를 피우며 장단을 맞추었다. 확실히 개인용 별장 같은 곳이라 물놀이하는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데도 아무도 터치가 없었다.

"술 먹고 아무렇게나 어지럽혀도 신경 안 써도 돼. 내일 오전이면 청소해주러 또 사람들이 올 거거든."

"그거 좋네요. 근데 이런 곳은 제법 비싸지 않아요?"

"돈이야 뭐, 또 벌면 되지. 인생 뭐 있나? 열심히 일하고 가끔 이런 곳에서 즐기면서 사는 거야.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네."

도훈은 부를 과시하는 형철 앞에서 연신 비위를 맞추었다.

그는 유독 있는 티를 팍팍 내는 스타일이었다. 같은 있는 집 자식인데도 자수성가한 상철과는 뭔가 스타일이 달랐다.

상철이 꼼꼼하고 치밀한 빠꼼이 같은 성격인반면, 형철은 대범하고 선이 굵은 타입 같았다.

담배를 다 피운 형철이 벌떡 일어섰다.

"맥주를 너무 마셨나 봐. 난 먼저 들어가 쉬어야겠네."

"벌써 들어가세요?"

"오늘 밤새 놀아야 하니 낮잠이라도 푹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체력이 자네처럼 좋진 못하거든."

"아···. 네."

"자네도 적당히 놀라고. 오늘 밤은 정말 길테니까 말이야. 하하."

형철이 자리를 뜨자 홀로 남은 도훈에게 허은지가 다가왔다.

물속에서 막 나온 그녀는 커다란 타올로 몸을 덮고 있었는데 젖은 머리가 목덜미에 달라붙은 모습이 몹시 섹시했다.

"어라? 저희 남편은요?"

그녀는 형철이 떠난 것을 보고 접근했으면서 못 본척 도훈에게 물었다.

"방금 낮잠 주무신다고 먼저 올라가셨어요."

"하여간 이 양반 하고는. 어젯밤에도 술 퍼마시고 자더니 낮술 마시고 또 자?"

한껏 불평을 내뱉은 은지는 여전히 물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민희와 미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또 만나서 반가워."

"으, 음. 지금 미나도 옆에 있는데···."

"왜? 여친 앞이라 쫄려? 나랑 바람 피운 거 들킬까 봐?"

"아니, 저···."

"도훈아! 뭐해? 얼른 들어와!"

도훈은 미나의 요청에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했다.

"어, 지금 들어갈게."

은지가 도훈 옆에서 계속 조그맣게 속삭였다.

"언제든 나랑 하고 싶으면 말만해. 여기 빈방 많아."

"······."

도훈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상의를 훌렁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바지를 입은 채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은지가 그런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윗입술을 핥았다.

"···귀여운 녀석. 여기까지 따라와놓고 부끄러워 하긴."

"언니도 들어오세요!"

"응, 괜찮아. 난 몸이 으슬으슬해서 밖에서 좀 쉴게."

은지가 햇볕을 받으며 테이블에 앉아있는 동안 세 사람은 물장구를 치며 신나게 어울렸다. 특히 도훈이 풀장에 뛰어든 이후부턴 민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은지가 세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김민희. 저거 봐라? 도훈이 한테 너무 들러붙는데?’

한 발 떨어져 있으니 확실히 민희가 도훈에게 유달리 스킨쉽을 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히려 함께 어울려 놀고 있는 미나는 눈치를 못 챘지만,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은지에겐 그게 뚜렷히 보였다.

‘···도련님이 제법 앙큼한 계집애를 데려왔구나. 이런이런.’

은지는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오늘 밤 복잡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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