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4. 그해, 여름. -49-
"초대요?"
미나가 몹시 당황했다. 한국에서부터 쭉 여행 일정을 짜놓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제안에 혼란을 느꼈던 것.
곰곰이 생각하던 은지도 민희의 의견에 동조하며 미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 좋겠다. 어차피 풀빌라라 방도 남아 돌잖아?"
"그러니까요. 어차피 사람 두 명 더 늘어난다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아··· 말씀은 고마운데 아무래도 도훈이랑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미나는 호의로 건넨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도 숙소를 알아보기 전 풀빌라에 대해서도 조사했는데, 비용이 엄두가 안 나 포기했던 옵션이었다.
"왜? 미나는 우리랑 같이 여행하는 게 별로 안 내켜?"
"아, 아니요. 당연히 좋죠. 근데 이미 다음 숙소를 예약해 놓은 상태라···."
"뭐 어때? 어차피 잘 곳만 있으면 되지. 우리가 두 사람한테 돈 받을 것도 아니고."
"그래, 미나야. 같이 가자. 어차피 내일이면 호텔 체크 아웃해야 한다며? 우리도 마침 내일 풀빌라로 옮길 거거든. 타이밍딱 좋네."
"아···. 그게···."
미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반면 두 사람은 우물쭈물하는 미나를 보고 금방 꼬드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희가 나를 도와주는구나. 그러잖아도 내일 도훈이랑 헤어지면 만나기 힘들까 걱정했는데.’
‘흐흐. 풀빌라에서 같이 지내면 도훈이랑 몰래 만날 시간도 많아지겠지?’
서로의 목적을 위해 두 사람은 끊임없이 미나를 설득했고, 결국 미나에게서 도훈을 설득해 보겠다는 확답을 받아내고 말았다.
"그래, 두 사람 일정은 일정대로 보내고 저녁에 와서 잠만 자도 돼. 어차피 싸이판은 좁은 섬이라 차만 있으면 어디든 다녀올 수 있으니까. 숙소가 어디건 상관없지."
"빌라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하고 술 마시고 놀면 재밌겠다.
그냥 게스트하우스 놀러왔다고 생각해."
두 사람은 끊임없이 풀빌라에서 함께 숙박을 하는 장점을 어필했다. 미나도 듣고 보니 딱히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캔슬이 너무 늦어서 예약금을 못 돌려받겠지? 그래도 풀빌라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면 딱히 손해까진 아니고···. 식비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일지도 모르겠는데.’
미나는 이번 여행에서 재정을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금전적인 부분부터 먼저 따졌다. 은지의 말대로 일정을 일정대로 따로 보내고 같이 잠만 자고 식사만 해결할 수 있어도 확실히 이득이었다.
게다가 도훈과 단 둘만 있을 때보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심적으로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이곳은 외국이고 혹시나 안 좋은 일을 당하면 도와줄 사람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형철과 상철 형제는 한국에서도 잘나가는 사업가인데다 나이가 제법 있는 어른이다 보니 가까이 지내도 나쁠 게 없었다.
"알겠어요. 도훈이한테 한 번 잘 말해 볼게요."
"응, 나도 동갑내기 친구랑 같이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꼭 같이 하자."
"어머, 민희씨. 우리가 많이 불편했나 봐?"
"아니에요. 형님. 그런 뜻이 아니고···."
"호호. 농담이야. 나도 꼰대들보다는 젊은 사람이랑 노는 게 훨씬 좋지. 이 얘긴 우리 남편한테는 비밀이다?"
세 여자는 술을 함께 마시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순진한 미나는 두 여자의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 술자리가 파할 때쯤에는 이미 함께 가는 쪽으로 완전히 마음이 기울고 말았다.
남녀의 술자리는 비슷한 시각에 끝이 났다. 미나는 두 여자의 농간에 완전히 술이 떡이 된 상태에서 도훈을 맞았다.
"아아앙, 도훈이 왔구나!"
만취한 미나가 현관으로 마중 나가 도훈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제 발로 균형을 잡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이고,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
미나는 남자들이 바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옆방에서 다른 여자들과 술을 마셨다고 대답했다. 도훈은 미나를 만취시킨 두 사람의 꿍꿍이를 짐작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 여자들이 진짜.’
"아앙, 도훈아 나 너무 기분 좋았어. 민희랑 은지 언니랑 너무 재밌게 놀아써."
미나가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앵앵거렸다.
도훈은 그녀를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잘했어. 나도 막 형님들이랑 술 마시고 오는 길이야."
"으으응. 아···. 나 근데 좀 취했나 봐. 머리가 어지러워. 할말 있었는데 까먹어버려땅."
"그래. 일찍 자고 내일 일어나서 얘기해."
"아아앙, 그냥 자고 싶지 않은데에에엥. 도훈이랑···."
술에 꽐라가 된 미나는 애처럼 투정하며 옷을 벗던 중 브래지어를 풀다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도훈은 현자타임의 후유증으로 성욕이 완전히 거세된 상태였으므로 그런 미나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적당히 물러섰다.
[두 여자가 일부러 미나양을 취하게 한 거죠?]
‘그렇겠지. 미나가 잠들면 나랑 몰래 만날 생각으로.’
[만나실 겁니까?]
‘전혀. 좆도 안 서 지금은. 누가와도 안 될 걸.’ 실제로 도훈은 만취해 널부러진 미나에게서 살짝 거리를 두고 누운 상태. 미나와 살이 닿는 것조차 거부감이 느껴질 만큼 현타가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으음. 은지고 민희고 오늘은 무조건 다 쌩 까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두 형제도 각각 방으로 돌아가 있을 테니 어차피 오늘은 힘들 겁니다. 근데 두 형제가 왜 주인님을 초대했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니겠지. 그거야 차차 조사해 보면 될 일이고···.’
도훈은 슬쩍 고개를 돌려 곯아떨어진 미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술에 취해 발그래진 얼굴과 살짝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봉긋한 가슴이 놀랍도록 섹시했지만, 이를 지켜보는 도훈에겐 일도 감흥이 없었다.
‘현자타임의 부작용이 심각하긴 하구나. 저렇게 무방비 상태인 미인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이거 너무 오래 가면 곤란한데.’
[너무 걱정마십시오. 내일 오후 쯤이면 원상회복될 것이니까요.]
‘후유, 그나저나 형철 상철 형제를 어떻게 구워 삶아야 할지를 연구해야겠군.’
[주인님이 여성이 아닌 남성의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도훈은 베란다 밖에서 자신을 호출하는 은지의 신호를 무시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은지 역시 술에 취한 남편의 눈치를 보며 도훈을 불러보다 이내 포기했다. 어차피 오늘만 날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한편 방으로 돌아온 상철은 민희에게 작전 계획의 변경을 알렸다. 미나 커플을 풀빌라로 끌어들여 이번 난교파티에 써먹는다는 계획이었다.
계획을 듣던 민희가 속으로 기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안 그래도 저도 두 사람을 풀빌라로 초대 했으면 했거든요."
"어쨌든 나는 형수만 자빠뜨릴 수 있으면 그만이야. 나머지들이 지지고 볶고 뭐하건 상관없다고."
"정말요? 만약 형님이란 분이 만약 미나를 원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왜? 이제와서 유혹할 자신이 없어진 거야?"
"아뇨. 당연히 돈을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봐야죠. 근데 또 사람 취향은 모르는 거잖아요. 미나씨가 꽤 매력적이기도 하고."
"나도 그 생각은 했어. 형님이 형수님 젊었을 적이랑 비슷한 너를 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관심이 없더라고. 어쩌면 미나라는 애한테 혹할지도 모르지."
"그럼 도훈이는요?"
"왜?"
"자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둘이 완전 죽고 못 사는 거 같은데."
"흐흐. 어차피 술에 진탕 취해 정신없어지면 어느 구멍에 누구 잦이가 박히든 알게 뭐야? 박을 구멍만 있으면 그만이지."
"만약 그렇게 되면 제가 커버할게요."
상철은 곧바로 민희의 속셈을 파악하고 피식 웃었다.
"왜? 그 멀대 같은 놈이 설마 네 취향이야?"
"아니···. 뭐 말씀하신 것처럼 도훈이를 적당히 떼어 놓지 않으면 계획이 틀어질 수 있으니까요. 제가 감당하겠다고요."
"걔는 유혹할 자신 있고?"
상철의 물음에 민희가 씩 웃었다. 이미 오전에 차에서 잦이에 침 발랐단 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자신감의 근거로는 충분했다.
"네, 맡겨만 주시면요."
"오늘 시험 삼아 같이 술 먹어 봤는데, 놈이 의외로 술이 엄청 세더라고. 형은 완전히 맛이 갔고, 나도 알딸딸해 졌는데 놈은 전혀 취기도 없었어. 생각보단 쉽지 않을 걸?"
"호호. 저 원래 직업이 뭐였는지 까먹으신 건 아니죠?"
"원래 직업?"
"저 매일 밤 룸에서 양주 까던 여자예요. 손님들 취하게 하는 게 제 전공이란 소리죠."
"크크.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아무튼 잘해 봐. 누가 됐건 형님을 마크해 줘야해. 니가 정 힘들면 미나라도. 그래야 나도 성공할 수 있으니까."
"네."
두 사람은 늦게까지 작당 모의를 하다 따로따로 잠을 청했다. 유일하게 더블 베드가 설치된 방을 고른 이유였다.
* * *
다음날 오전. 조식을 함께 먹은 일행들은 체크아웃을 하고 풀빌라로 함께 이동하기로 약속했다.
"저흰 그럼 오전에 스노클링 하러 다녀올게요."
"응, 미나야. 나중에 봐!"
"두 사람 재밌게 다녀와요."
도훈과 미나는 정해진 일정에 맞춰 스노클링 포인트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미나가 도훈에게 물었다.
"괜찮겠지? 저분들이랑 같이 풀빌라 가는 거."
"딱히 나쁜 사람들은 아닌 거 같던데?"
"그건 그래. 나도 어제 민희랑 은지 언니랑 같이 얘기해보니까 되게 좋은 사람들 같더라. 다만 계획이랑 틀어져버려서."
"호텔에서는 뭐래? 원래 묵기로 했던."
"직전 취소라서 당일 요금은 환불 안 된데. 대신 나머지 이틀 분은 절반 돌려준다고 했어."
"그나마 다행이네. 돈은 너무 신경 쓰지마. 나 어제 카지노에서 완전 대박 났거든."
"아, 맞다. 너 엄청 땄다며? 어떻게 한 거야?"
"운이 좋았어. 그냥 잃을 생각으로 올인했는데 계속 이겨버리더라고. 평생 쓸 운을 거기서 다 쓴 것 같아."
"히히. 우리 여행와서 그럼 돈 벌어 가는 거야?"
"응. 이번 여행경비 쓴 건 내가 다 채워줄게."
"아니야. 괜찮아. 그건 도훈이 네 힘으로 딴 거잖아. 네 돈이야."
"같이 한 거지."
"응?"
"미나 너랑 같이 여행와서 딴 거니까, 같이 한 거라고. 그러니 사양할 생각 말고 받아.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생색 내보겠어?"
도훈의 말에 미나가 감동했다. 여행경비를 보존한 것보다, 도훈이 자신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다.
도훈은 도훈대로 여행 경비를 미나가 혼자 부담한 것에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핑계로 빚을 갚은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했다. 사실 돈이 있어도 못주고 있는 처지에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아이참, 난 너랑 여행 온 것만으로 좋은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미나가 운전하는 도훈에게 바짝 달라붙으며 안겼다.
"고마워, 도훈아. 내 옆에 있어줘서."
"나야 말로 고맙지."
두 사람은 오전 내내 유명 스노클링 포인트에서 강사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다,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묵던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민희가 알려준 빌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근처로 도착하자 멀리 빌라촌이 보였다.
한 동 한 동의 거리가 꽤 멀어 옆 빌라에서 크게 파티를 벌여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거리가 있었다. 외관으로 봐서는 거의 200평 규모의 거대한 2층 저택이었는데, 서양식으로 지은 건물이 무척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미나는 차를 타고 빌라촌을 구경하던 중 입을 쩍 벌렸다.
"와, 인터넷으로 알아봤을 때 여기 진짜 비싼 곳이었는데."
"그래?"
"확실히 돈이 많은 사람들인가 봐. 고작 네 명이서 저렇게 큰 빌라를 통째로 빌린 걸 보면."
"어쨌든 우리로선 다행이지. 좀 빌붙어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니."
"그러게. 히히."
도훈이 빌라에 도착하자 먼저 와서 쉬고 있던 일행들이 두 사람을 반겼다.
"왔어? 방부터 알려줄게."
민희가 자청해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1층은 커다란 거실과 주방, 그리고 대부분의 방들은 2층에 모여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짐 풀면 돼."
"와, 여기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부가 더 좋구나. 엄청 깔끔하고 시설도 잘 되어있어."
"오전에 왔을 때 청소하는 분들이 미리 싹 치워 주시고 가셨어. 요리할 재료도 다 채워놨고."
"정말? 근데 우리 정말 공짜로 써도 되는 거야?"
미나의 순진한 질문에 민희가 피식 웃었다.
"공짜 아닌데?"
"아, 아니야?"
미나가 당황하자 민희가 도훈을 향해 눈웃음 흘기며 대답했다.
"같이 열심히 놀아줘야지. 파티도 하고 물놀이도 즐기면서.
알았지?"
"응, 당연하지."
간밤의 술자리로 어느새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민희는 한참 시설에 대해 설명하다 방을 나서며 말했다.
"적당히 짐 풀면 수영복 챙겨서 정원 뒤로 와."
"수영복?"
"여기 빌라에 풀장 딸려 있거든. 같이 누워서 태닝이나 하게.
여름엔 적당히 태워야 섹시하잖아."
"응, 알았어."
"도훈이도 올 거지?"
미나 몰래 윗입술을 핥는 민희를 향해 도훈이 대답했다.
"네, 저도 즐겨봐야죠."
"그래. 여기 엄청 재밌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민희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방을 나갔다.
민희가 나가자마자 미나가 도훈에게 폭 안기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도훈아! 여기 진짜 너무 좋다! 따라오길 정말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