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 그해, 여름. -48-
* * *
정보창을 확인한 도훈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상철이만 그런 게 아니고?’
처음엔 동생 상철이 몰래 흠모하던 형수 허은지를 빼앗기 위해 업소녀 김민희를 투입한 작전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니, 반대로 형철 역시 상철을 작업 중이던 것.
[음모와 음모가 뒤죽박죽이군요. 거기다 주인님까지 껴들어서 혼돈의 도가니네요.]
‘그러니까. 겉으론 가족 여행도 함께 다니는 것처럼 우애를 과시하더니 실상은 서로 뒤통수 때릴 생각만 하는 협잡꾼들이었구나. 물론 나까지 포함.’
[근데 상철의 허은지에 대한 집착은 그렇다 쳐도, 형철은 대체 무엇을 노리는 걸까요? 최소한 김민희는 아닐 거 아닙니까?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던데요.]
‘아마 재산 문제가 아닐까?’
[재산 문제요?]
‘추천 멘트를 보면 그렇잖아. 가업은 장남이 물려받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아!]
‘형제가 하필 둘 다 사업가로 성공하는 바람에 유산 상속 문제가 불거진 걸 거야. 특히 둘째가 형보다 더 뛰어날 경우 특히 그런 일이 잦지.’
[그건 왜 그렇습니까?]
‘보통 우리나라 정서상 장자 승계가 원칙이거든. 실제 몇 십년 전만 해도 장자가 집을 물려 받아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도 했고. 또 부모님을 모시니 당연히 형제 중 유산을 제일 많이 상속받는 것이 관례였단 말이지.’
[아하.]
‘근데 동생의 능력이 돋보이면 형 입장에선 눈엣가시거든.
동생만 없었으면, 아니 동생이 무능하기만 했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형철이 보기에도 상철이 자기보다 뛰어난 사업적 능력을 지닌 게 문제인 거지. 아마 형철이 그렇게 느꼈다면, 둘의 아버지도 비슷하게 생각할 거고. 한 집안에 머리가 둘일 순 없는 거니.’
[그렇다면 형철이 이번 여행을 통해 획책하는 음모라는 것은 유산을 홀로 독차지하기 위한 술수라는···. 설마 살인?!]
살인이라는 말을 듣자 순간 도훈은 소름이 돋았다. 왠지 눈빛이 께름칙한 형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귀가 맞지 않았다.
‘아니야. 그렇다면 장소 섭외부터 틀렸어.’
[장소요? 싸이판이요?]
‘동생을 진짜로 암살하려고 했으면 싸이판으론 안 왔지. 여긴 나름 미국령이라 치안이 잘되어 있단 말이야. 차라리 총기 사고가 빈번한 동남아 같은 나라를 가서 청부업자를 부르는 게 더 빠를 걸. 거긴 진짜 돈만 주면 사람 죽여주는 애들이 널렸으니까.’
[아···.]
‘그리고 본인이 직접 동생을 죽이는 방식은 너무 위험 요소가 크고.’
[가장 먼저 의심받을 테니까요?]
‘그렇지. 범죄 수사에선 누군가 죽었을 때 가장 득 보는 자를 의심하라, 라는 경구가 있거든. 동생이 뒈지면 형이 유산을 독차지할 게 뻔한데 당연히 자신에게 의심이 쏠릴 수밖에 없잖아. 형철이 바보가 아닌 이상 싸이판으로 여행지를 정한 이상 살인 같은 건 생각도 안 했겠지.’
[휴우, 그나마 다행이군요. 괜히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습니다. 그럼 대체 뭘까요? 그 음모라는게?
]
‘그게 나도 궁금해. 동생을 상속 순위에서 완전 배제 시킬 수 있는 모종의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린데···.’
도훈은 끊임없이 형철의 음모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워낙에 형철이 감정을 잘 숨기는 데다, 마음의 소리로 파악하려고 해도 쉽게 틈을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마음의 소리는 독심술처럼 모든 속마음을 다 읽어내는 스킬이 아니라, 상대가 현재 하는 생각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허무하게 마음의 소리 스킬만 허비하고 말았다.
쿨타임이 차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대충 상황은 파악했으니, 내가 어떻게 저들 틈에 섞여서 미션을 달성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면 되겠군.’
[한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서로 뒤통수 때릴 생각만 하는데요.]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방심하고 있을 걸.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대부분이 자기가 당할 건 미처 생각 못 하거든. 공격에 너무 치중하면 수비가 헐거워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 특히 두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으니 더더욱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 그렇다면 나는 더 땡큐인 거고.’
[오호.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말씀이군요.]
‘나야 뭐, 둘이랑 친해지면 미션 끝이니까.’
셋이서 한창 술을 먹다 보니 금세 분위기가 화기 애애해 졌다.
형제 둘 다 워낙에 말 술인 데다, 도훈까지 술을 물처럼 넘기다 보니 셋이 빠르게 취해버렸던 것. 물론 도훈은 조금도 취하지 않고 있었지만.
"근데 우리끼리 계속 술 마셔도 되려나?"
"왜?"
"아니 형수님도 그렇고···. 도훈이 여자친구도 아직 카지노에 있다잖아요?"
"상관없어. 애들도 아니고 알아서 방에 들어가겠지. 간만에 남자들끼리 술이나 퍼마시자고."
그 말에 도훈은 비싼 고급 양주를 하나 더 주문했다. 어차피 도박으로 쉽게 딴 돈이다 보니 아쉬울 게 없었다. 하룻밤 만에 3,000만원 넘게 벌었는데 거기서 몇백 좀 태운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야, 젊은 친구가 역시 배포가 크구만. 도박할 때 알아봤다니까?"
"이렇게 비싼 술을 대접받으니 너무 미안해 지는데."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라고 생각하십쇼."
"아니, 그러지 말고 자네 우리랑 같이 풀빌라로 가는 건 어떤가? 여행 일정이 어떻게 되지?"
느닷없이 형철이 동행을 제안했다.
대충 들어보니 이들은 처음 도착한 날 이틀 정도만 호텔에 머물고 나머지 일정은 거대한 별장식 빌라를 독채로 빌렸던 것.
"풀빌라요?"
"솔직히 카지노 때문에 여기를 1차로 잡긴 했는데, 뭐니뭐니 해도 여행은 편하게 술 마시고 놀아야지 않겠어? 호텔에선 담배 한 대 피우는 것도 눈치가 보인단 말이지."
도훈이 난데없는 제안에 살짝 당황했다. 미나랑 일정을 이미 다 짜놓은 상황이다 보니 다음 번 숙소 예약도 벌써 끝난 상황이었다.
"그게···. 여자친구랑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왜?"
"이미 다음번 숙소도 예약 해놨거든요. 지금 캔슬하면 예약금 하나도 못 건질 거에요."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리가 빌린 풀빌라가 대가족용이라 방이 5개야. 거기 아무 데나 자라고. 숙박비는 안 받을 테니. 그럼 어차피 똑같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쉽게 말해 형철은 호텔 예약금을 날려도, 풀빌라에 공짜로 들어오면 그게 그거라는 소리였다. 더구나 카지노에서 큰 돈까지 벌었으니 사실 호텔 요금 정도는 날려도 상관없었다.
"음,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 두 분이 괜히 저희 때문에 불편하진 않을지···."
"난 상관없어. 상철이 너 불편하냐?"
"아뇨? 저야 좋죠. 여자친구가 너무 어려서 어울리기 힘들까 걱정했는데 동갑인 미나씨가 함께면."
상철도 흔쾌히 동의했다.
사실 두 사람은 도훈을 꼬드기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중에 마약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총알받이가 필요할 거야. 상철이 저 새끼가 약에 당하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곤란해지니 말이야. 그때 저 얼빵한 새끼를 써먹어야지.
우리 같이 잃을 것 많은 사업가들보다야 별 볼 일 없는 대학생이 더 의심받지 않겠어? 증거만 적당히 조작해 놓으면야.’
형철이 몰래 속셈을 꾸미는데 상철 역시 마찬가지로 도훈을 끌어들이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형철이 형이 생각보다 김민희에게 관심이 없어. 이러면 파트너 돌려먹기가 쉽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근데 도훈이 여친인 미나도 꽤 예쁘장하니 민희가 실패하면 그 필라테스 원장이라도 활용할 방법이 있을 거야. 어쨌든 옵션은 다양할수록 좋으니까.’
형제 둘 다 다른 생각을 하는데 도훈 역시 동행 제안의 실익을 따졌다.
‘잘됐군. 내일이면 호텔 옮겨야하는데, 이대로는 시간 내에 절대 미션을 달성하지 못 할 거야. 하지만 남은 일정을 함께하다 보면 무조건 기회는 온다. 미나만 설득하면 돼.’
도훈은 초반에 마음의 소리 스킬을 써버린 관계로 두 사람의 생각을 더이상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됐건 동행을 하는 편이 미션을 달성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미나를 설득해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내리 2시간을 호텔 바에서 웃고 떠들었다.
* * *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남자 셋이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여자들도 자기 들끼리 허은지의 방에 모였다. 은지가 맥주나 한 잔 하자면서 두 사람을 불러들인 것이다.
"어라, 저희 바로 옆방이셨네요?"
"응. 몰랐니?"
"네. 어젯밤엔 정신이 하나도 없어 가지고 바로 곯아떨어졌거든요."
미나의 대답에 은지가 피식 웃었다.
"정말 바로 골아떨어졌어?"
"···예?"
묘하게 뉘앙스가 야했기 때문에 미나도 살짝 긴장했다. 은지가 맥주캔을 따주며 옆면의 벽을 손등으로 툭툭 두들겼다.
"소리 들려? 의외로 벽이 얇더라고 여기."
"아···."
"게다가 방 구조가 대칭이라서 침대끼리 서로 맞닿아 있는거 있지?"
은지의 짖궂은 말에 미나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제야 은지가 말한 의미를 알아챈 것이었다.
"아, 저 그게···."
"괜찮아. 젊은 사람들끼리 여행와서 한 방에 있는데 그럴 수도 있지."
"죄송해요. 침대끼리 붙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걱정마. 우리 그이는 새벽 늦게 들어와서 못 들었으니까."
"무슨 얘긴데 그래요? 둘이서만."
맥주캔을 든 민희도 슬쩍 껴들었다. 은지가 창피해하는 미나를 보며 물었다.
"민희씨한테 얘기해도 돼?"
"아, 아뇨."
하지만 민희도 당연히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대충 알아먹은 상태였다.
"아항, 그 얘기구나? 난 또."
미나가 민망한 마음에 맥주 캔으로 건배를 제의했다.
"그 얘긴 그만하고 우리도 술이나 마시죠."
"그래."
"남자들 빼고 여자들끼리만 짠!"
세 사람은 맥주를 마시면서 금방 의기투합했다.
방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의 경계심을 많이 누그러뜨려 줬던 것. 거기다 은지는 여기서 유일한 30대인 노회한 여우였고, 민희 역시 술집에서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빠르게 세 사람이 융화될 수 있었다.
오히려 미나는 두 사람의 텐션이 의외로 높은 것에 당황하며 자기만 잘 못 어울린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두 분 많이 친하신가봐요."
"나랑, 민희씨랑?"
"저희도 이번에 처음 만났어요."
"엇, 정말요?"
은지가 사정을 설명했다. 한국에 있을 때 잠깐 얼굴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술 마시고 대화를 나누긴 처음이란 소리였다.
"아, 그러셨구나."
"언니, 미나 남자친구는 연하래요."
"연하? 도훈 학생 말이지?"
"네."
"어머 부럽다."
"저도 미나가 제일 부러워요."
"아이, 왜 그러세요. 남편 분이나 남자친구 분이나 다들 잘나가시면서."
"잘 나가면 뭐해? 남자 구실을 잘 해야지."
"맞아요, 형님."
은지와 민희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도훈을 띄워주자 미나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함을 느꼈다. 도훈이 다른 사람이 볼 때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에 만족한 것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 곧 결혼하지 않아?"
미나가 민희를 향해 물었다. 민희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더니 또 다른 캔을 따며 말했다.
"결혼은··· 음, 식장 가보기 전까지는 모른다더라고."
"어머, 벌써 그걸 깨달은 거야?"
은지가 맞장구를 치며 호응했다.
"언니는 결혼해서 행복하지 않으세요? 저도 남자친구 대학만 졸업하면 결혼하고 싶어요."
"후후, 맞아. 결혼하면 행복하긴 하지."
은지가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편 몰래 바람이나 실컷 피운다면 말이야.’
곧 결혼을 앞둔(?) 민희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미나로 인해 세 사람은 한참 결혼에 대해 떠들었다. 주로 미혼인 두 여자가 묻고, 유부녀인 은지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결혼 전에 최대한 궁합을 맞춰봐야 한 다는 거야."
"궁합요?"
"궁합이란게 설마 그 궁합은 아니죠?"
"맞아, 속궁합."
"어머!"
"역시 언니가 뭘 좀 안다니까?"
순진한 미나가 부끄러워하는데 은지와 민희는 거리낌 없이 음담패설을 나누었다. 미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야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쑥스러우면서도 술에 취해 긴장이 풀리자 자기도 모르게 쫑긋 귀를 세워 경청했다.
"살아보니 결혼생활 별거 없더라. 결국엔 그게 잘 맞아야 금슬도 좋고 오래가는 거야."
"아항."
"미나는 어때? 연하 남친은 좀 다르려나?"
"예, 예?"
"아니 속궁합 말이야."
"아, 저 그게···."
미나는 도훈과의 성생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지만, 그것을 처음 보는 은지와 민희 앞에서 떠벌인다는 게 창피했다.
"그냥 비슷하죠."
"호호. 안 그럴 것 같던데?"
"맞아요. 솔직히 저희들끼리 하는 얘기지만 상철 오빠랑 저는 좀 나이 차가 나잖아요."
"그치. 열 살 넘으니까."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힘이 많이 부치나 보더라고요."
"그랬어? 도련님이?"
"이건 절대 오빠한테 얘기하면 안 돼요?"
"당연하지. 여자들끼리 당연히 의리가 있어야지."
세 사람은 계속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친해졌다. 특히 은지와 민희는 미나를 취하게해 잠이 들게 만들 속셈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무리하게 술을 권했다.
‘미나만 재우면 어제처럼 도훈이랑 몰래 만날 수 있겠지?’
‘아···. 미나 저 부러운 년. 밤마다 도훈이 튼실한 잦이 실컷 빨아보고···. 어떻게든 나도 먹어야지.’
세 사람은 얘기를 하다 내일이 이곳 홀리데이 인 싸이판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럼 다음엔 어디로 옮겨?"
"두 분은요?"
"우린 풀빌라로 갈 거야. 원래 처음부터 가려고 했는데, 예약이 밀려서 살짝 날짜가 어긋났거든."
"맞다. 형님 저희 미나네 커플도 초대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