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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49화 (1,116/2,000)

1132. 그해, 여름. -47-

"투자?"

"네. 보시다시피 제가 돈이 좀 부족해서요."

도훈이 뻔뻔하게 같은 테이블에 있는 형철과 상철 형제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도 한 번에 만 달러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는 거금.

도훈의 요구에 상철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새낀? 몇 번 친한 척 해줬더니 다짜고짜.’

상철은 자신이 배팅할 때도 한 방에 만달러를 태우는 무모한 짓은 벌이지 않았다. 하물며 빌려줘봐야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대학생을 위해 담보도 없이 큰 돈을 꿔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이길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지. 돈 잃자고 도박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은 없는 법이야."

상철이 애둘러 거부하자 도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속으로 코웃음 쳤다.

‘하여간 쪼잔한 새끼. 사내가 배포가 저 정도 밖에 안 되서야.’

[상철이 쪼잔한 편이긴 하지만,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들은 주인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잖습니까. 직업도 없는 대학생이 고요.]

"그래? 그럼 내가 꿔줄까?"

한편 형철은 흥미가 돋는다는 듯 도훈에게 선뜻 1,000$짜리 칩 열개를 건냈다.

"아니, 형철이 형!"

상철이 놀라 만류하는데 형철이 도훈을 보고 물었다.

"분명 이길 자신이 있다고 했지?"

"네."

"좋아. 그 자신감 한 번 믿어보지. 단, 못이기면 어떡할텐가?"

"제가 지면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드리죠."

도훈의 대답에 형철이 피식 웃었다.

과연 젊은이다운 배짱이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깨닫지 못하는 철부지 같은 행동처럼 보였다.

‘멍청한 자식. 내가 무슨 짓을 시킬 줄 알고?’

"···그 말 기억해 두지."

스플릿 된 패에 판돈이 걸리자 딜러가 경직된 표정으로 남은 카드를 마저 돌렸다. 까딱하면 한 방에 2만달러가 날아갈 수 있는 커다란 판. 아무리 자기 돈이 아니더라도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한장, 한장.

카드가 쌓일 때마다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투엔티."

딜러의 카드 합은 20 .

이어 도훈의 스플릿된 카드는 왼쪽은 블랙잭.

그러나 오른 쪽 합은 20으로 동일했다.

한쪽은 승리했지만, 나머지에서 무승부가 나버린 것이었다.

"아쉽게 됐구만. 그래도 잃지는 않았으니 본전인 셈인가?"

상철이 절반의 승리에 아쉬움을 표했고, 형철은 결과를 보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이러면 나와의 내기는 진 것으로 봐야겠지?"

"네?"

"분명 그렇게 말했잖는가? 못 이기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비긴 것이 이긴 것은 아닐 텐데?"

형철이 사악하게 웃었다.

완전 억지 논리였다.

형철이 칩을 꿔준 패는 무승부가 났기 때문에 1만달러가 다시 반납될게 뻔한데, 게임에 이기지 못했으니 자신과의 내기에 진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도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형철에게 또박또박 대꾸했다.

"아직 승부 안 끝났는데요?"

"뭐?"

"카드 한 장을 더 받을 거거든요."

"잠깐, 뭐라고?"

"여기서 더?"

도훈의 말에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블랙 잭은 카드 합이 21이 되는 경우에 이 긴다.

하지만 딜러가 20, 본인이 20이 나왔기 때문에 카드를 더 받았을 때 가장 낮은 숫자인 ‘A’가 나오지 않는 이상 오히려 버스트되어 도훈이 패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훈은 마지막 패를 한 장 더 받기로 한 것이다.

상철이 도훈을 말렸다.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게. 이건 진게 아니야. 어차피 무승부니 칩을 돌려받는다고.

룰을 모르는 건 아니지?"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분명 이긴다고 했습니다."

딜러 역시 침을 꿀꺽 삼켰다. 하필이면 손해를 볼 수 있는 판에 도훈이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A는 52장의 카드 중에서도 4장 뿐.

대략 7%의 확률이었다.

카드를 추가로 더 받을 때 도훈이 패할 확률은 90% 이상이었고, 스플릿 된 패에서 한쪽을 이겼더라도 나머지 한 쪽이 져버리면 결국 본전치기일 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딜러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친구가 배짱이 대단한데?"

"저기서 A를 기다리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너무 무모해."

"그럼 마저 패 돌리겠습니다."

딜러는 도훈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마지막 패를 재빨리 뿌렸다. 마지막 카드가 오픈되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스, 스페이드 에이?!"

"저게 여태 남아있었어?"

"세상에 저걸 어떻게 알았지?"

"와우, 한 판으로 2만달러라니!"

도훈이 나머지 한 쪽마저 끝내 블랙잭을 성공시키자 희비가 교차했다. 딜러는 고개를 떨궜고, 상철은 경악했으며, 형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한 판이었다.

"세상에! 정말 행운을 타고났구만!"

"대단한 승부였어!"

도훈은 마지막 한 판으로 배팅한 금액을 포함 4만달러의 칩을 벌었고, 그 중 만달러를 형철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제가 분명 이긴다고 했죠?"

도훈이 씩- 웃었다. 이것으로 두 형제에게는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 * *

[대단합니다. 어떻게 거기서 이지선다를 쓰실 생각을···.]

‘A 카드가 남아있다는 건 카드카운팅으로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문제는 그게 언제 나오느냐였지.’

[그걸 이지선다로 미리 확인하신 것이군요.]

‘그렇지. 다음패의 결과를 먼저 봤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형철과의 내기에서 질 뻔했어. 설마 그런 억지를 부릴 줄이야.’

[그래도 형철이 돈을 빌려준 덕에 한 방에 2만달러를 따셨잖습니까? 200달러에서 3만 달러까지 불리다니, 정말 대단한 승부였습니다.]

‘이크, 온다.’ 도훈이 잠시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형철상철 형제가 쪼르르 따라왔다.

"여기있었구만? 난 또 환전하고 방으로 가버린 줄."

"따고 바로 튀면 카지노에서 의심할 걸?"

"잠깐 담배피우러 나온거예요. 여자친구는 아직 안에서 게임하고 있구요."

"아무튼 대단했네. 그런 도박은 어디서 배웠나?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

"인터넷요."

"인터넷?"

"네. 인터넷에 포커도 있고, 고스톱도 있고, 블랙잭도 있거든요. 틈 날 때마다 했어요."

"아, 아니···."

예상치 못 한 대답에 두 형제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프로 겜블러 같은 배짱과 실력을 보여놓고, 난데없이 사이버 머니로 하는 인터넷 게임이라니.

상철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굉장한 승부였네. 다시 봤어."

"운이 좋았습니다.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아참, 아까 돈 빌려줘서 고맙습니다."

도훈이 형철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이자도 같이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네요."

"이자는 무슨. 잠깐 꿔 준 건데."

"그래두요. 실은 저도 거기서 A가 나올줄은 몰랐거든요. 마지막엔 될대로 되라하고 지른 겁니다. 어차피 잃어도 본전이라는 생각에요."

"하긴 처음에 100달러 짜리 칩 두개로 시작한 거였지?"

"네. 전 다 잃어도 200달러거든요. 그냥 하룻밤 재밌게 논셈이라고 생각했죠."

"하여간 배짱이 대단해. 거기서 한 장 더 받는건 진짜 최고였어."

"이자를 안 받으신다니 그럼 제가 두 분께 술이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술?"

"하하, 우리 비싼 술만 먹는데 괜찮겠어?"

도훈이 환전한 지폐를 꺼내 흔들었다.

"도박에서 돈 딴 사람이 쏴야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무리 부자라도 공짜술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은 금새 의기투합해 호텔 바로 이동했다.

한편 자신의 방에서 도훈을 기다리던 민희는 한참이 흘러도 도훈이 돌아오지 않자 점점 화가 치밀었다.

"뭐야? 나 지금 물 먹은 거야?"

민희가 씩씩 거리며 다시 카지노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사이 남자들은 이미 바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한참 도훈을 찾던 중 슬롯머신에 앉아있던 미나를 본 민희가 슬쩍 물었다.

"어? 혹시 다들 어디간 줄 알아?"

"무슨 소리야?"

미나는 슬롯머신에 완전히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초반에 운 좋게 몇판 따더니 그새 중독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까 블랙잭 구경간다고 갔는데?"

"응. 거기 시아주버님도 다 같이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안보이더라고."

"사라지다니?"

미나도 그제야 도훈이 카지노에서 빠져나간 것을 알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어, 도훈아. 너 지금 어디야? 아···. 그래?"

통화를 마친 미나가 말했다.

"남자들끼리 바에 갔다는데?"

"바? 치사하게 지들끼리만."

민희는 도훈이 말도 없이 약속을 깨뜨린 것에 분개했지만, 남자친구 때문에 화난 척연기했다.

"우리도 따라 갈까?"

"바에?"

"응. 여기 계속 있어봐야 심심하잖아."

"그게···."

미나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녀는 슬롯머신으로 제법 코인을 딴 상태였기 때문에 막상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또한 도훈이 잠시 칵테일 한 잔만 마시고 돌아 온다고 했기 때문에 밑에서 계속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것만 마저 돌리고 가면 안 될까?"

"응?"

"아니, 아직 돈이 기계에 남아있어서."

"아···. 그럴래?"

미나의 고집에 민희도 어쩔 수 없이 눌러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슬롯머신에 앉아 있는데 잠시 후 허은지 역시 합류했다.

"여기들 있었어?"

"오셨어요."

"혹시 남자들 어디 간지 알아요? 담배피우러 나간다더니 돌아오지 않네?"

세 남자가 말없이 바로 이동했다는 설명에 은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형철과 상철이 함께 있는 한 도훈을 혼자 몰래 빼기가 녹록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까 한탕 크게 따더니 남자들끼리 신나서 술마시러 갔나보네요."

"한탕이라뇨?"

"몰랐어요? 도훈 학생 오늘 블랙잭에서 완전 날아다녔는데?"

"정말요?"

은지가 자신이 구경했던 블랙 잭 게임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말 그대로 도훈이 프로 도박사처럼 내리 연승으로 3만불을 따갔다는 거짓말 같은 무용담이었다.

"우아, 진짜요? 3만불이면 3000만원을 넘게요?"

"응, 나도 그런 거 처음 봤다니까? 미나씨는 남자친구 도박 잘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 아뇨? 강원랜드 몇 번 가본게 다라던데요?"

미나 역시 도훈이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다.

그것이 불과 20분도 안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도.

"자기들끼리 간 것도 괘씸한데 우리도 여자들끼리 술이나 마실까요? 제 방에 술 사놨는데."

허은지가 젊은 두 여자들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술로 미나를 먼저 보내고 도훈을 몰래 따로 만나려는 속셈이었다.

* * *

"여기서 제일 비싼 술로요."

도훈의 주문에 바텐더가 비싸 보이는 양주를 한 병 꺼내 왔다. 세 사람은 바에 나란히 앉아 양주를 들이켰다. 오늘의 주인공인 도훈이 가운데 앉고, 양 옆에 형철과 상철이 앉는 식이었다.

"잭 팟 축하하네. 자, 한 잔 하자고."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스트레이트로 양주를 비웠다.

도훈은 몰래 알코올을 분해하는 아이템을 복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한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오, 술 잘 마시네?"

"아침에는 못 마신다더니?"

"즐겨 마시진 않습니다. 다만 한 번 마시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서요."

"하하, 젊은 친구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 구만. 역시 남자는 술을 잘 마셔야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세 사람은 금새 화기애애해졌다. 도훈도 호감도를 올리 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비위를 맞췄고, 형철과 상철은 도훈의 도박실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터라 그를 다시 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리 연승을 하며 두배씩 돈을 불리는 모습은 설사 그것이 운이었다고 하더라도 배짱이 없으면 절대 못할 과감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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