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47화 (1,114/2,000)

1130. 그해, 여름. -45-

* * *

민희의 초대에 응한 도훈과 미나는 늦은 저녁 호텔 지하에 있는 카지노로 향했다. 도훈과 달리, 미나는 카지노 방문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척 설레는 중이었다.

"아, 너무 떨려. 나 막 대박 터뜨리는 거아니겠지?"

"잭 팟 말야?"

"잭 팟이 뭐야?"

도훈이 화려하게 번쩍이는 슬롯머신을 가리켰다.

"저기 슬롯머신 보이지?"

"응."

"슬롯 머신은 가장 적은 금액으로도 즐길수 있는 도박이지만, 재수만 좋으면 한 방에 가장 큰 돈을 벌 수 있어."

"어떻게?"

"프로그래시브 슬롯머신이라고도 부르는데, 기계들이 서로 연동되어 있거든. 머신마다 당첨액 중 일정 금액을 축적해서 몇 달간안 터지고 쌓이다 보면 상상 이상으로 큰 금액이 된단 말이지. 저기 봐."

도훈이 잭 팟 당첨금액이 표시된 LED 전광판을 가리켰다.

커다란 전광판에는 단숨에 새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금액이 표기되어있었는데, 시간이 흐를 때마다 계속 끝자리가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만약 오늘 연동된 슬롯 머신 중 하나에서 잭 팟이 터지면 저 금액을 한꺼번에 수령하는 방식이야. 로또랑 비슷하달까."

"우아, 진짜? 저렇게 많은 돈을 준다고?"

달러로 표기된 금액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마나가 도훈의 손을 잡고 졸랐다.

"나 저거 어떻게 하는 지 알려줘. 해보고싶어."

"응, 알았어."

도훈이 빈 기계 앞에 앉아 시범을 보였다.

어차피 주사위 굴리기와 비슷한 운 빨 게임이었으므로 미나는 얼마 안 있어 대강의 사용법을 익히게 되었다. 교육이 끝나고 미나가 놀랍다는 듯 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이 넌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혹시카지노 와본 적 있어?"

"응."

도훈은 전생에 미국 유학 시절 라스베이거스에 놀러 가 카지노를 처음 접했다. 그 뒤외국 출장이 있을 때마다 재미 삼아 카지노에 들렀기 때문에 어지간한 게임 룰은 모두 섭렵한 상태였다. 하지만 미나에게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또 갓 군필 된대학생이 외국 카지노를 많이 접했다고 하는것도 어폐가 있었다. 대한민국 남성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면 해외여행이 극히 제한되는 것이다.

"정말?"

"응, 강원랜드 갔었어. 거긴 내국인도 합법이잖아."

"아, 그렇지. 나도 들었어."

"군 생활을 강원도에서 해가지고 휴가 때 가끔 가볼 기회가 있었거든. 동기들 따라 몇번 들락거린 게 전부야."

"아항."

미나가 본격적으로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하려는 데 카지노에 먼저 들어와 있던 민희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아는 척을 했다. 민희는 둘을 카지노로 끌어들인 장본인 이기도했다.

"미나, 언제 왔어? 왔으면 왔다고 얘기라도 하지. 도훈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미안. 우리 방금 막 들어왔어. 도훈이가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서 한 번 해보려고."

그때 도훈이 민희에게 물었다.

"다른 일행분들은요?"

"저쪽 블랙잭 테이블에 있어. 나도 뒤에서 구경하다 지루해서 잠깐 나왔지."

"아, 그럼 네 분 다 오신 거예요?"

"응. 언니도 혼자 있기 심심하다면서 따라나왔고."

민희가 언니라고 칭한 사람은 허은지였다.

공교롭게도 아침에 함께 조식을 했던 일행들이 저녁이 되어 다시 카지노에서 만난 꼴이었다.

잭 팟 금액을 듣고 자극받은 미나가 본격적으로 슬롯머신을 돌리기 시작하자 도훈과 민희는 뒤에 서서 그녀를 구경했다.

두 사람은 미나가 돈을 따면 함께 기뻐하고, 돈을 잃으면 함께 안타까워하면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미나가 민희의 의도대로 점점 도박에 정신이 팔릴 때쯤, 뒤에 서 있던 민희가 도훈을 향해 사인을 보냈다.

"맞다. 나 방에 가서 핸드폰 충전기 좀 챙겨와야겠다. 벌써 배터리가 다 됐나 봐."

마치 미나보고 들으라는 듯 말하면서 엄지 손가락을 따봉처럼 만들어 입속에 반복해서 밀어 넣는 시늉을 하는 민희였다. 그 동작은 마치 오랄과 비슷했는데, 차에서 도훈을 오랄해 준 장면을 일부러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미나가 도박에 빠져 있을 때, 몰래 둘이 방으로 가자는 신호.

하지만 도훈은 그 동작을 보고도 모른 척가만히 미나의 플레이만 지켜볼 뿐이었다.

보다 못한 민희가 손을 뒤로 돌려 도훈의 엉덩이를 와락 움켜쥐었다.

"그럼 게임 하고 있어. 나 잠깐 올라갔다올게."

"으응."

민희는 이쯤 사인을 보냈으면 알아서 핑계대고 따라오겠거니 하는 생각에 먼저 카지노를 빠져 나갔다. 둘이 동시에 나가면 의심받을까 순차로 움직이려는 속셈이었다.

민희가 카지노를 나가자 도훈이 게임을 하고 있던 미나에게 말했다.

"난 잠깐 다른 게임 좀 둘러보게 올게."

"어디 가게?"

"블랙잭 구경해 보려고."

"응, 알았어."

도훈은 미나에게서 멀어져 이동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호텔 숙소가 아닌진짜로 블랙잭 게임 테이블이었다. 블랙잭테이블은 카지노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해있었는데, 배팅 금액에 제한을 두어 3단계로 운영되고 있었다.

도훈이 쓱 둘러보니 형철, 상철 형제는 100$ 짜리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최소 배팅금액이 100$부터 시작하는 가장 큰 도박판이었다.

[민희양은 무시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잡은 물고기는 관심 없어. 지금은 노답형제의 호감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니까.

게다가 당장 민희를 따먹어 봐야 미션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주인님이 가지 않으면 기다리던 민희양이 실망할 텐데요.]

‘하라고 하지 뭐. 어차피 나한테 벗어날 수 없을테니. 제까짓게 나 아니면 누구한테 조를 건데?’

[캬, 역시 상남자!]

‘일단 돈부터 환전해야 겠다.’

[환전요?]

‘슬롯 머신은 동전으로 해도 상관없지만, 다른 종목은 달러를 칩으로 바꿔야 참여가 가능하거든. 저번처럼 현금 박치기가 아니란소리지.’

[아하!]

도훈과 미나는 도박에 너무 빠지지 않도록, 게임비로 각각 200달러를 챙겨왔다. 설사두 사람이 모두 잃어도 하룻밤 50만원어치유흥을 즐긴 것으로 여기기로 한 것이다.

도훈은 환전소에서 200달러를 100달러짜리 칩 두 개로 바꾼 뒤 블랙잭 판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형철 옆에 앉아 따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허은지를 발견하고는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인사했다.

"어, 여기 계셨네요?"

은지는 도훈을 발견하고는 화색이 돌았다.

실은 그녀는 도박을 좋아해 따라온 것이 아니라, 도훈네 커플이 드라이브를 나갔다는 소식에 무료한 시간을 떼우기 위해 잠시 구경 온 것이었다.

"도훈 학생이 여긴 어쩐일이야?"

"잠깐 구경왔어요."

은지의 말에 형철이 도훈을 쓱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카드에 집중했다. 아침 먹을 때 잠깐 마주친 도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반면 형철 옆에 있던 상철은 도훈을 발견하고는 아는 체를 했다. 속마음을 모르지만 상철 쪽이 훨씬 살가운 편이었다.

"오, 블랙잭 할 줄 알아? 같이 할래?"

"아···저 할 줄은 아는데···."

도훈은 일부러 테이블 최소 배팅액이 적힌 문구에 시선을 준 뒤 자신감 없이 고개를 떨궜다. 금액이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는 제스쳐였다.

상철이 그뜻을 알아 먹고는 한마디 했다.

"아, 하긴···. 여긴 학생들 놀 곳은 못 되겠구만. 판에 끼기 그러면 배팅만 같이 따라들어와도 돼."

"아, 네 감사합니다."

[배팅을 따라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원래 블랙잭은 최대 8명까지 참여할 수있어. 테이블 좌석도 딱 그 정도잖아.’

[그렇네요.]

‘근데 업장이 큰 곳에선 게임에 참여하고 싶어도 끼어들 자리가 없어 손가락만 빨고 몇 시간 째 대기를 타는 일이 다반사란 말이지. 여기도 보면 블랙잭 테이블은 겨우 3대뿐이잖아. 슬롯머신은 스무대가 넘는데.’

[그렇군요. 하긴 아무래도 딜러가 직접 패를 돌려야 하니···.]

‘암튼 그것 때문에 재수 없으면 뒤에서 하루 종일 빈 자리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그럴때 구경꾼이 플레이어에게 직접돈을 걸 수 있도록 묵인해 주는 거야.’

[구경꾼이 플레이어에게요?]

‘어차피 블랙잭은 카드카운팅 게임이야.

수학적 확률도 거의 정해진 편이고. 딜러 패를 보고 내 패를 계산하면 대충 이길 확률이 보인단 말이지. 그때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 플레이어가 걸어둔 곳에 따라가면서 똑같이 배팅을 하는 거야. 반대 배팅은 허용되지 않지만, 기존 플레이어가 들어간 곳에 돈을 얹는건 상관없거든.’

[그럼 정산은 어떻게 하나요?]

‘무조건 1:1 이지. 블랙잭은 이기면 건 돈만큼 돌려주고, 지면 모두 뺏기는 식이거든.’

[오호! 나름 깔끔하군요.]

‘어디 한 번 노답형제 실력이나 구경해 볼까?’

전생의 도훈은 머리 회전이 비상했다. 특히 순간적인 수읽기와 계산에 능해 카드 카운팅류 싸움에 유난히 강한 편이었다. 물론 타짜처럼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허무하게 판돈을 잃거나 무리한 도박은 삼가는 편이었다.

한참을 게임을 구경하자 대충 형철과 상철의 스타일이 보였다.

형철은 자신의 감을 믿는 타입이었다.

무리수로 보이더라도 확신이 생기면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야구 타자로 치면 게스 히터랑 비슷했다.

일단 크게 휘둘러보고 얻어 걸리면 홈런, 운이 나쁘면 삼진을 당하는 식이었다.

‘형철은 도박을 잘하진 못하는군.’

반면 동생 상철은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나름 속으로 카드 카운팅을 하는지 입술을 오물조물하면서 끊임없이 되새기는 버릇이 있었다.

높은 확률에만 돈을 배팅하고, 낮은 확률에선 미련없이 접었다. 흔히 말하는 공무원도박이었다.

‘상철은 너무 안전 지향이군.’

[두 사람중 누가 그럼 더 도박을 잘하는 건가요?]

‘없어. 둘다 병신이야.’

[네?]

‘형철 같은 타입은 한 번 딸 때 크게 따는 편이야. 하지만 잃을 때고 크게 잃지.’

[그럼 동생 상철이 더 잘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반면 상철은 쫄보거든. 잃는 걸 너무 두려워해. 이길 확률이 높을 땐 과감하게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거기서도 찔금거리면서 망설이잖아. 결국은 크게 따야할 판에서 조금 따고, 대신 크게 잃을 판은 일찍 죽어서 적게 잃지. 결국은 둘 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밖에.’

[아하…. 그럼 주인님은 블랙잭에는 자신이 있으신가요?]

‘전생에서는 가끔 했지. 이거 잘 보면 그냥확률 게임이거든.’

[확률 게임요?]

‘딜러의 카드 패는 총량이 정해져 있어. 그리고 한 번 사용한 패는 다신 나오지 않지.

그렇다면 카드가 새롭게 갱신될 때부터 지켜 보면 어떤 카드가 얼마나 소모됐는지 계산할수 있다는 소리야.’

[잠깐만요. 카드가 저렇게 많은데 그게 된다고요?]

도훈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정우 때는 어느정도 가능했지. 지금은 아마도 힘들겠지만.’

[아…. 아쉽군요. 주인님의 장기를 보여줄수 있는 종목인데.]

‘아마 여기선 아이템 같은 것도 쓰기 힘들거야. 모든 카지노 업장은 CCTV를 통해 플레이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거든. 속임수를 썼다간 바로 들키고 말 거야. 그럼 진짜경찰서 끌려 가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두 형제에게 어필하기 위해선 실력을 증명해야 할 텐데요.]

‘말했잖아. 이건 확률 싸움이라고. 머리만 좋으면 절대 안 져.’

[설마….]

‘간만에 현자가 되어 볼까나?’

[현!자!타!임!]

‘그래. 뇌용량 200%. 가즈아!’

도훈은 현타 스킬을 떠올렸다.

두뇌를 오버클럭해 전생의 천재였던 이정우 이상으로 끌어 내는 스킬이었다. 현자 상태의 기억력과 암기력, 그리고 순간 판단력이라면 카드카운팅을 물론 확률 예측까지 완벽할 것이다.

[부작용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현자타임에는 부작용이 뒤따랐다.

성욕이 완전히 사그라 드는 것.

스킬을 발휘하고 하루 정도는 완전히 고자가 된다고 해도 무방했다.

‘지금은 여자를 공략하는 것보다 두 형제의 호감을 사는 게 중요하니까.’

도훈은 어떻게 해서든 두 형제의 눈길을 끌어야 했다. 도박쟁이들에게 어필하는 가장간단한 방법은, 도박을 매우 잘한다는 걸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간만에 시원하게 머릴 한 번굴려보시죠.]

스킬이 발휘되자 도훈은 순간적으로 현기 증이 일어 비틀거렸다. 한순간에 오감을 완전히 개방하는 해당 스킬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집중력을 요구했다.

'으으.'

급격한 과부화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깨질것 같았지만, 간만에 흐리 멍텅했던 두뇌가 어느때보다 총명해졌다. 눈에선 총기가 솟고, 딜러가 카드를 섞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음까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하자 마치 주변시간이 느려진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오케이. 적응 완료.’

현자모드가 된 도훈은 카드패가 새로 섞일때부터 유심히 관찰하며 카운팅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머릿속에 어떤 카드가 몇 장이 나왔는지 완벽하게 엑셀로 기록하는 수준이었다.

시기가 무르익자 멍하니 게임을 보고 있던 도훈이 상철의 배팅 금액 옆에 100달러짜리칩 두 개를 조용히 올려놓았다.

이례적인 행동에 상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기에 200씩이나? 위험하지 않겠어?"

딜러패가 무척 좋았기 때문에 상철도 기본으로 100달러 칩 하나만 올린 상태. 그는 도훈이 아무것도 모르고 과감하게 배팅한다고 생각하며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도훈은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초심자의 행운을 믿어 봐야죠."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딜러가 씩 웃으며 도훈에게 말했다.

"Good Luck!"

다시 카드패가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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