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46화 (1,113/2,000)

1129. 그해, 여름. -44-

* * *

"운전 고마웠어, 그럼 둘이 드라이브 잘하고 와~!"

다시 미나의 차로 옮겨 타는 데 민희가 크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러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가 불경하게 느껴져 나는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응, 저녁에 봐. 민희야."

미나 역시 인사를 마치곤 차를 출발시켰다.

"진짜로 직접 운전 하게? 내가 해도 되는데···."

"아니야. 오늘은 내가 하고 싶어. 직접 몰아보니 재밌더라고."

미나는 운전을 그닥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싸이판 외곽 도로를 도는데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또 본인 스스로도 뚜껑이 없는 차량은 처음인지 무척신이 난 상태였다.

"진짜 이 차 끝내줘. 밟으면 밟는데로 나가!"

"그렇다고 속도 너무 내지 마. 여기 시속제한 걸려 있는 거 알지?"

나는 들뜬 미나를 진정시켰다.

싸이판은 공항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2차선 도로인데다 관광객이 많아 섬전체가 40마일이란 속도 제한이 걸려있었다.

"힝, 맘껏 밟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좋은 차 빌려놓고 밟지도 못하다니."

"드라이브 하면서 경치 구경도 하고 좋지,뭘."

원체 섬이 작아 한 두시간이면 섬 전체를일주 할 수 있을 정도. 물론 오늘은 중간 중간 관광 포인트를 들러볼 예정이었기 때문에좀 더 시간을 넉넉히 잡았다.

"응. 근데 우리 어디부터 가지?"

"자살 절벽 부터 들르자."

"아, 맞다. 거기 가보기로 했었지?"

미나가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대신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검색했다. 수어사이드 클리프를 검색하자 멀지 않은 거리에목적지가 나왔다.

"근데 왜 이름이 자살 절벽이야? 누가 많이 죽었나?"

"아, 그게 뭐냐면···."

자살 절벽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게패배한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미군의 투항을거부하고 전원 뛰어내려 자살한 곳으로 유명해진 포인트였다.

뭐, 나름 사무라이 정신이라 해야 하려나?

한참을 설명하자 미나가 기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우아, 우리 도훈이 공부 많이 했구나?"

"당연하지. 너랑 함께 하는 첫 여행인데."

"···난 나 혼자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미나가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긴 그도 그럴것이 이번 여행의 제안부터, 예산수립, 그리고 거의 모든 시설 예약을미나 혼자 단독으로 진행했다.

한달 가량을끙끙 머릴 싸매고 준비한 여행이다 보니, 솔직히 나로선 몸만 얹혀가는 상황이었다.

"아니야. 나도 좋아."

"정말?"

"당연하지. 너같은 미인과 단둘이 여행이라니. 어느 남자가 안 좋아 하겠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뻐."

"···다행이네."

미나는 진심으로 기쁜지 살짝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운전하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고마워, 미나야. 나랑 함께 해줘서."

"힝, 그러지마. 나 심장 터질 것 같다 말이야."

미나가 얼굴이 빨개졌다.

[주인님이 그런 느끼한 대사도 할 줄 아시는 군요.]

'뭐, 고마운건 사실이니까. 순진한 미나를속이고 있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미안한 줄 아니 다행입니다.]

'어쨌든 은지나 민희에게 사적인 감정은없어. 그건 두 사람도 마찬가질 거고.’

[하지만 은지와 관련된 업적을 수행하려면 호감도 100을 달성해야 합니다.]

'바람바람바람 업적 말이지?’

[그렇죠. 주인님께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겁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이제껏 수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호감도 100을 달성한 경우는 손에 꼽았다.

환생 이후 처음 관계를 맺은 편의점주 허영자라던가, 수많은 학과 후배 중에서도 가장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육정음, 그리고기나긴 조교 끝에 사랑으로 발전한 강민주까지.

이외에도 90을 넘어선 경우는 있겠지만,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100을 달성한 여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였다는 점이 공통점. 단기적인 목표로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문제는 허은지가 호감도 100을 달성한다른 여자들처럼 주인님에게 푹 빠져들 수있느냐는 거겠죠.]

'쉽진 않을거야. 시간도 시간인데, 성향도딱히···.’ 은지는 쉽게 말해 남자를 도구로 여기는타입이다.

첫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결혼 때문인지는몰라도,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녀를 갱생시키려면 단기간이 아니 상당한 시간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또 생각해보면 은지에게 걸린 또 다른 업적인 탁란도 문제다.

전생의 아이가 진짜 내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사실상 처음 내 아이를 갖는 셈인데 은지같은 여자에게 내 씨를 주자니 뭔가 억울했다.

차라리 미나를 임신시키면 모를까, 은지같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삶은 얼마나또 불행하겠는가? 엄마는 바람 피울 생각밖에 없는 데다, 남편 또한 음침하고 비정상적.

부자라서 집에 돈은 많겠지만, 사랑 받지못하는 아이가 될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 혹시나 이후에 생김새가 달라 친자확인이라도하는 날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말았다.

'이거 힘들겠는데.’

업적을 이루고 싶은 욕심에 하마터면 커다란 죄를 지을 뻔했다. 막상 임신이 돼버리면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섹스와 출산은엄연히 다른 문제. 순간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새로이 태어날 생명을 불행하게 만들수는 없었다.

[포기하시려고요?]

'포기라기 보단 목표를 수정하려고.’

[어떻게 말입니까?]

'일단 바람바람바람 업적과 뻐꾸기 업적은그만 두겠어.’

[네? 그것 때문에 은지를 공략한 게 아닙니까?]

'시작은 그랬는데 몇번을 생각해도 이건아닌 거 같아.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고싶진 않아. 랭커가 못 되면 또 어때서?’

[주인님···.]

'아니. 설득할 생각하지마. 대신 다른 업적은 얼마든지 도전해 볼 테니. 바람바람바람 업적이야 다음에도 할 수 있잖아. 탁란은두번 다신 생각안할 테지만.’

[그럼 목표를 수정하신다는 건 뭡니까?]

'망각의 지포라이터. 전설급 아이템을 노리겠어.’

[오.]

'업적은 포기해도 미션은 수행할 값어치가있어. 어찌됐건 은지나 민희와는 여전히 진행중이니까.’

[그럼 형철상철 형제와 호감도를 올리는데 주력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호감도만 달성하면 이번 미션은거의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선택이 그렇다면어쩔 수 없지요. 은지의 피임약을 괜히 훔쳐냈군요.]

'뭐,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미안해, 도훈아."

잠시 로시와 대화하느라 맥락을 놓치고 말았다.

미나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하는 것일까?

"응? 뭐가?"

"난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아까 질투했어."

"질투라니?"

"너랑 민희랑 단둘이 차타고 가는데 나도모르게 질투가 나더라고. 괜히 둘만 태웠나싶고···. 막 불안하고."

"미나야."

"미안해. 널 의심하는 건 아니었는데, 혹시나 민희가 허튼 짓 할까봐 걱정돼서."

"걱정마. 너 말고 다른 여자들한테 눈길도안줄테니까."

"힝···. 도훈아!"

갑자기 미나가 나를 껴안으려고 운전대를놓는 바람에 차량이 크게 흔들렸다.

"우오! 알았으니까 일단 운전대부터 잡아!"

"나 안 미워할거지?"

"내가 널 왜?"

"내가 너무 속좁고, 의심 많아서."

"아니야. 그럴수 있지. 일단 운전에 집중해. 이러다 사고 나겠어!"

"으, 응."

미나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운전에 집중했다. 하마터면 자살 절벽으로 가는 길이 자살주행이 될 뻔한 아찔한 상황.

'휴우, 간 떨어 질 뻔 했네.’

[근데 미나양이 의심할만 합니다. 실제 일도 벌어졌구요.]

'뭐 내가 빨아 달랬나? 민희가 알아서 덮친거지.’

[어쨌든요.]

'아까도 말했지만, 민희나 은지에겐 별 다른 감정은 없어. 미션만 아니었으면 솔직히거들떠도 안 봤을 거고.’

[몸은 주되 마음은 주지 않는 다는건가요?]

'은근히 내가 지조있는 타입이거든.’

[그 입은 정말이지 한없이 가볍군요.]'조용히 해.’

"어? 다 온것 같아."

마침 차량이 자살 절벽에 도착했다. 싸이판의 명소라더니 벌써 관광객이 우르르 모여있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절벽위에 오르자 멀리 태평양 바다가 보였다.

"와, 바다 좀 봐! 너무 예쁘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단체로 뛰어내리다니 정말···. 쪽바리들은."

우리는 줄을 기다려 안전 펜스가 설치된절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야외로 나와 사진도 찍고 데이트를 하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에너지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도훈아, 우리 여기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미나야."

미나는 걸어다니는 내내 내 손을 꼭 붙잡고 다녔다. 싸이판에서 만큼은 여친행세 제대로였다.

아니 실은 미나가 실제로 여친이라도 나로선 나쁠게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벌써 사회 진출에 성공했고, 예쁜 얼굴에 상위 1%에 드는 훌륭한 몸매를 갖췄다.

또 은근히 퍼주는 타입이라서 나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했다.

솔직히 플레이어의 사명만 아니었다면 여행 분위기에 취해 내가 먼저 고백했을지도모를 일이다.

우린 오후내내 싸이판 섬 북부의 관광명소들을 들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들른 이름모를 해변에서 노을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학창시절의 이야기나, 가족 친구. 혹은 우리가 만났던 헬스장에 관련된 추억이대부분이었다.

미나와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문득 그녀가 물었다.

"난 도훈이 너를 아직도 잘 모르겠어."

"무슨 뜻이야?"

"어떨때 보면 한없이 자상하다가도, 또 어떨때는 답답할 만큼 연락도 없고. 그냥 뭐랄까, 너에 대해 나는 조금도 모르니까."

그것은 미나가 느끼는 서운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늘 남자들에게 대쉬를 받았던 그녀에게 있어, 나라는 남자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크게 들이대지도 않았고, 이후 몸을 섞는관계가 되었음에도 여러번 만난것도 아니었다.

지인이라기엔 너무 가까웠고, 남사친이라고 부르기엔 한없이 모자랐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사이.

미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그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했다.

"그래서 너를 좀 더 알고 싶었어. 네가 뭘좋아하는지, 평소엔 누굴 만나는지.

나중엔 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에 대한 모든 게 궁금해."

어쩌면 이것은 고백이나 마찬가지.

누구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과 함께 있고싶다는 의미였다.

"···미나야."

나는 대답없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 안으며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가끔 솔직히 대답할 수 없는 내 처지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실은 난 쓰레기라고.

너 말고 맨날 다른 여자 따먹고 다녔다고.

나 같은 바람둥이는 절대 좋아하지 말라면서.

그녀의 간접 고백을 받으니 갑자기 이루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고백을 받아줄수도, 그렇다고 내칠수도 없는 어정쩡한처지가 서러웠다.

[주인님···.]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로시가 위로했다.

'후우-. 이럴 때 보면 대물 플레이어라는건 생각보다 별로구나.’

[아무래도 그렇지요. 보통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런걸 풍요속에 빈곤이라고 하나봐.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수 많은 미인과 떡을 치고 다녀도 결국 언제나 혼자니까.

만인의 연인이란 사실 누구와도 연인이 될 수 없는 것이겠지?’

[너무 센치해 지신것 같습니다만.]

'그러네. 분위기에 너무 취한 것 같다. 적당히 일어서야지.’

"우리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응, 좋아!"

저녁은 호텔 주변 유명 식당에 들러 랍스터로 먹었다.

여행에서 느끼는 즐거움중 하나가 한국에선 쉽게 먹을 수 없는 색다른 음식을 맛보는 것이다.

음식도 만족, 분위기도대 만족인 데이트였다.

"참, 아까 민희한테 연락왔었어."

"민희 누나한테?"

두 사람은 번호를 교환했기 때문에 핸드폰연락은 미나를 통해 이루어졌다.

자연스럽게형제커플과 연락망이 생긴 셈이다.

"어. 저녁에 호텔 지하에 카지노 놀러 가자던데?"

"카지노? 너 할 줄 알어?"

"음, 한번도 안해봤는데···."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민희가 정말로 미나랑 놀자고 불렀을리는없고, 아마도 나를 노리는 거겠지?’

[속셈이 너무 뻔하군요. 미나양을 도박에정신 팔리게 한 다음 주인님을 유혹하려는속셈입니다.]

'그건 그런데 그 형제들도 분명 올 거 아니야?’

[도박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분명 오늘도죽치고 있겠죠.]

'흐음···. 민희의 속셈만 적당히 넘기면두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있겠는데?’

[어떻게 말입니까?]

'도박쟁이들이랑 친해지는 거야 별거 없지. 뭐든 잘하면 주목 받는 법이니까.’

[지금 도박을 하시겠다고요?]

'지금처럼 나를 좆밥으로 여겼다간 영원히호감을 사지 못 할 거야. 하지만 능력을 보여준다면 조금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허참, 여자를 공략해야 할 플레이어가 남자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다니.]

'업적도 다 포기한 마당에 미션은 꼭 잡고 말겠어.'

나는 미나에게 말했다.

"밤에 심심한데 그럼 우리도 조금만 해볼까?"

"도훈이 너도 가보고 싶어? 할 줄 알어?"

나는 씩 웃었다.

내가 말이야, 이래봬도 타짜를 털어먹은 몸이걸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