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44화 (1,111/2,000)

< 1127. 그해, 여름-42- >

***

상철은 캔 맥주와 탄산수, 감자칩을 사 들고 파라솔로 돌아왔다. 한바탕 물놀이를 마친 일행들은 잠시 휴식을 취할 겸 파라솔을 중심으로 모여 들었다.

"목마를 텐데 이것 좀 마시지."

상철이 도훈 커플에게도 음료를 나눠주었다.

"저희 것까지 챙겨주시고, 감사합니다."

"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두 사람은 오후에 뭐 하기로 했어?"

"차량 렌트해서 섬이나 한 바퀴 하려고요. 지리도 익힐 겸."

"오, 드라이브 좋지."

도훈의 얘기를 듣던 은지가 상철에게 물었다.

"참, 우리도 렌트해야 하지 않아요?"

"네, 형수님. 안 그래도 좀 있다 형님이랑 같이 나가 보려고요."

"어? 근데 지금 술…."

은지의 지적에 상철이 마시고 있던 맥주를 급히 뿜었다.

"억! 차 가지러 간다는 걸 깜빡해버렸네. 캔 절반 마셨는데 괜찮겠죠?"

상철은 무더위에 갈증이 난 나머지 차를 운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맥주를 들이키고 만 것이었다. 은지는 처음부터 맥주를 주문했고, 도훈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남은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은지가 단호히 말했다.

"위험해요. 여기도 어쨌든 미국령이라 경찰도 되게 깐깐하다고 들었어요. 음주운전 걸리는 날엔 굉장히 난처해 질 거예요."

"형님한테 전화해 볼까요?"

어차피 운전은 형철이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형철은 잠이 깊이 들었는지 한참을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아직까지 자고 있나보네. 나중에 방에 가서 깨워야 하겠는데요."

"저희 차 한 대만 빌려오면 되는 거죠?"

"응?"

대화를 듣고 있던 민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지. 꼴랑 4명인데 두 대는 좀 그러니까."

"그럼 제가 다녀올게요. 전 술 안 마셨거든요."

민희는 도훈처럼 술을 안 먹고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또 은지와 달리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굳이 자는 분 깨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긴 그래도 되겠다. 도훈이네 커플이랑 같이 가서 차만 받아오면 되니까."

"네."

민희는 무슨 꿍꿍인지 도훈네 커플과 함께 움직이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던 미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상철 아저씨 여자 친구라는 저 여자 왠지 기분 나빠. 도훈이한테 관심 있는 것처럼 굴잖아?’

이런 미나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민희가 미나에게 먼저 싱긋 웃어 보였다.

"잘됐다. 안 그래도 미나씨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우리 친구잖아요."

"아…, 네. 뭐."

"그럼 동갑끼리 말 편히 할까?"

"…그래.‘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나이가 같았다.

미나 입장에선 갑자기 친한 척하는 민희가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붙임성이 좋은 민희를 자신이 오해하는 것은 아닐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 이런 모습이 괜스레 남자친구에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사실 민희 성격이 본래 아무에게나 쉽게 말 걸고 금세 친해지는 타입인데, 자신이 괜히 오버해 민희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예민하게 군 것 일지도 몰라. 결혼할 남자친구네 가족 여행에 따라올 정도로 돈독한 사이잖아. 더구나 상철 아저씨는 잘나가는 프렌차이즈 대표기도 하고. 저런 잘난 애인이 있는데 뭐가 아쉽다고 도훈이를 눈독 들이겠어? 도훈이가 나에게는 최고의 남자지만, 모든 여자들이 동의하진 않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나의 우려는 사실이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여자들은 오로지 도훈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만약 일반적인 부부나 커플이었다면 미나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대체로 짝이 있는 커플의 경우, 매력적인 이성이 나타난들 억지로라도 관심을 끄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 사이의 매너였고 사회적 통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에 있는 두 여자는 그런 통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쇼윈도 부부인 은지는 도훈이 아니라도 누구와도 바람을 필 준비가 된 여자였고, 민희 역시 돈을 받고 여친대행 알바를 하러 온 나가요걸 출신. 둘 다 돈만 많고 변변찮은 형제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탈출구를 찾고 싶어 했으며, 하필 그 타이밍에 도훈이 나타난 것이었다.

거기다 도훈 역시 지고지순한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바람둘이 플레이어라는 독특한 사명 때문에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잘 붙잡지도 않았다. 그저 기회만 생기면 얼마든지 몰래 바람필 궁리를 하는 세 사람이 만났으니, 미나가 생각하는 사달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냉정한 현실이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출발해 볼까?"

오전 내내 물놀이를 했기 때문에 지친 일행은 음료를 마시고 숙소로 다시 복귀했다. 소금기 묻은 바닷물을 씻고 일상복으로 준비를 마치자 민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까 친구랍시고 미나와 번호를 교환한 것이었다.

"으응, 우리도 준비 끝났어. 지금 로비로 내려갈게."

통화를 마친 미나의 안색은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도훈이 그녀의 불편한 심사를 짐작하고 넌지시 물었다.

"미나야. 그냥 우리끼리 갈까?"

"응?"

"네가 불편한 것 같아서. 어차피 잠깐 마주칠 사람들인데 굳이 계속 일정을 맞출 필욘 없잖아. 한국가서 계속 만날 사이도 아니고."

"음…. 아니야.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잖아."

"네가 정 불편하면 저 사람들이랑 안 어울려도 돼. 난 상관없어."

"괜찮아. 내가 좀 낯을 가려서 그래. 민희는 나이도 우리랑 비슷하니까 얘기하다 보면 친해지겠지."

"그래. 아무튼 억지로 친해질 필욘 없어. 그럴만한 사람들도 아니고."

세 사람은 로비에서 만나 곧바로 택시를 타고 렌터카 업체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사이 미나와 민희는 서로 통성명을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민희가 이것저것 묻고 미나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오, 그럼 벌써 원장님인 거야? 강사 이런 거 아니고?"

"으, 응. 어쩌다 보니."

"대단하다. 어쩐지 사장님 포스가 나더라니."

"아니야. 그냥 조그만 학원인걸."

"도훈이 진짜 땡잡았구나! 너 정말 미나한테 잘해야겠다!"

민희가 보조석에 혼자 앉은 도훈에게 소리쳤다. 민희는 세련된 외모와 달리 굉장히 수다스러웠는데, 그런 쾌활한 성격이 미나의 우려를 조금은 불식시켰다.

‘역시. 원래 약간 수다쟁이구나.’

대체로 얼굴이 예쁜 애들은 새침하고, 콧대가 높은 경우가 많은 데 민희는 그런 쪽이랑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늘 웃는 낯으로 말을 걸고, 상대를 유쾌하게 만드는 타입이었다.

처음엔 민희를 경계하던 미나도 민희의 적극적인 태도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꺄하하하! 진짜? 진짜?"

"응, 그렇다니까?"

외국 여행 중에 만난 친구는 빨리 친해진다는 말처럼 민희와 미나는 렌터카 업체로 이동하는 30분 동안 금세 의기투합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도훈이 생각했다.

‘속셈이 너무 뻔하군.’

[뭐가 말입니까?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니 보기 좋은데요.]

‘너 바람 피우는 사람들이 쌩판 모르는 남하고 만난다고 생각해?’

[아닌가요?]

‘아니. 그보단 여친의 친한 친구, 남친의 절친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걸?’

[왜 그렇죠?]

‘친하니까 자주 보게 되잖아. 서로 끌리는 남녀란 자석과 같아서 자꾸 붙어 있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거든. 그러다 꼭 사고가 터지는 거지.’

[그럼 설마 민희양은….]

‘그래. 고의적으로 미나에게 친한 척 하는 거야. 그래야 미나가 경계를 늦추고 방심할테니까.’

[와, 완전히 못된 심보군요.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근데 나도 업적을 위해서라면 미나와 민희가 서로 잘 지내는 편이 나아. 만약 미나가 민희를 거부하면 나로선 저쪽 커플들과 연결고리가 끊기는 셈이거든.’

[아…. 그럼 미나양이 너무 불쌍한데요.]

‘아니. 어차피 내가 민희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저런 못된 계집애한테 내가 왜 굳이?’

[일단 주인님이 간파하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암, 절대 저런 수작에는 안 당하지.’

세 사람은 렌터카 업체에 도착해 서류를 작성하고 차를 빌렸다. 민희는 일행이 많아 큰 차를 빌려야 했기에 8인승 밴으로, 도훈은 한국에선 타보기 쉽지 않은 2인승 컨버터블 차량이었다.

"그럼 호텔에서 봐."

"응!"

어느새 친해진 민희와 미나가 손을 흔들며 각각의 차량을 출발시켰다. 컨버터블은 도훈이, 밴은 민희가 몰고 미나는 도훈의 옆에 타고 갔다.

전면이 휑하니 뚫린 컨버터블을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자 미나가 애처럼 신이났다.

"와! 너무 예쁘다. 야자수길!"

"그러게. 여기 오길 참 잘했어."

단지 스쳐가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도훈을 앞서가던 민희의 밴 차량이 미상 깜빡이를 켜더니 갓길에 정차했다.

"어? 민희 차 왜 저러지? 도훈아 잠깐 세워봐."

도훈이 바로 뒤에 차를 정차하는데, 민희가 울먹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아… 미안. 나 운전 안 될 것 같아."

"응? 왜 그래?"

미나가 걱정스럽게 묻자 민희가 대답했다.

"실은 나 큰 차는 처음이거든.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아…, 정말? 호텔까지 2차선 도로라 위험할텐데…."

"미나 네가 대신 운전해 주면 안 돼?"

하지만 미나 역시 2종 보통인데다 큰 차를 운전하는 데 자신이 없었다.

"아,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도후닝 너 1종 보통이지?"

"어."

"그럼 네가 민희 차를 몰고 가. 우리 차는 내가 몰게."

"괜찮겠어?"

"응. 뭐 이정도는. 민희가 우리차로 오고."

"고마워, 미나야."

도훈과 민희를 맞바꾸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자리를 바꾸려던 민희가 곧 바로 난색을 표했다.

"아…. 맞다."

"왜?"

"아까 설명할 때 들으니 렌터카는 지정된 사람 외에 한 명만 몰 수 있다고 했잖아."

"그랬나?"

"만약 도훈이가 내 차 몰다가 단속에 걸리면 빌릴 사람이랑 명의가 달라서 위험할 거야. 만에 하나 사고가 나도 보험 처리가 안될 거고."

"그럼 어떻게 하지?"

"내가 같이 타고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일행이라고 하면 되니까."

"아…."

민희의 설명은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미나도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게 하는 건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아…. 도훈이랑 민희랑 같이 둬도 괜찮을까?’

그러나 그 방법 외엔 자신이 8인승 벤을 운전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미나는 그것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에이, 설마 그 사이에 별일이야 있으려고. 아까 얘기해보니까 민희도 남자친구분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던데.’

민희는 택시를 타고오던 중 내내 상철의 자랑을 했다.

남자친구가 나이는 많지만 의외로 귀엽다는 둥, 남들이 돈보고 만나느냐고 구박해도 자신은 정말 사랑해서 사귄다는 둥의 이야기였다.

미나가 볼 땐 민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본래 미나는 사람을 잘 믿고, 남을 속여 본 적이 없는 인성이었다. 당연히 민희도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여기서 괜히 의심하면 민희가 기분 나빠 할 거야. 본인은 생각도 없는데 나만 끙끙대는 꼴이니까. 거기다 도훈이가 설마 곁에 두고 바람피울 사람도 아니고.’

미나는 자신이 도훈을 믿는 사랑하는 만큼, 도훈도 그러리라고 믿었다. 아니, 애초에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순진하다고 믿는 부류였다.

"그래, 그럼 도훈아. 네가 민희 대신 운전해줘. 내가 이 차 몰고 갈게."

"괜찮겠어?"

도훈이 왠지 찜찜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볼 땐 너무나 뻔한 수작.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하자니 일만 복잡해질 상황이었다.

"응. 나도 운전 잘해."

도훈의 괜찮냐는 말을 혼자 운전해도 되겠냐는 의미로 받아들인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민희의 벤으로 이동했다. 민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도훈의 옆에 앉았다.

"미안. 여자친구랑 드라이브 하는데 괜히 방해한 것 같아서."

"아니에요. 출발할게요."

도훈은 일부러 무뚝무뚝뚝하게 대답하더니 차량을 출발시켰다.

룸미러로 힐끔 쳐다보니 바로 뒤로 미나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단 둘이 차량에 앉자 마자 민희가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도훈이는 좋겠네?"

"네?"

"여자 친구가 미인이라서."

"별 말씀을. 누나도 예쁘세요."

도훈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지만, 민희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정말? 나 예뻐?"

"네."

"고맙네. 나는 눈도 잘 안 마주치길래 내 얼굴 쳐다도 안 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그런 건."

"아, 맞다. 나 아까 오빠한테 이상한 얘기 들었는데."

오빠는 그의 남자친구 상철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무슨 얘기요?"

"상철씨가 잘 못 봤는지 모르겠는데, 아까 너 바닷가에서 미나랑 야한 거 했다던데?"

"…네?"

도훈은 상철이 민희에게 일러바쳤을 거라곤 생각을 못하고 있다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자 민희가 갑자기 운전을 하는 도훈의 허벅지 위로 손을 짚으며 말했다.

"그거 진짜야?"

"뭐, 뭐가요."

"미나가 물속에 잠수해서 니꺼 빨아줬다는 거."

"아, 아니 무슨…."

너무도 적나라한 물음에 도훈이 당황하는데 민희가 연거푸 몰아쳤다.

"나도 잘 빠는데. 어때? 한 번 받아 볼래?"

‘이런 또라이를 봤나?’

도훈이 정색하려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울림이 들렸다.

띠링-!

간만에 울리는 미션 알림이었다.

< 1127. 그해, 여름-42-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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