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2. 그해, 여름-37- >
어제 새벽 4시까지 카지노를 들렀다 온 형철은 여전히 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이었다. 실은 더 자고 싶었지만, 조식을 먹자는 요청에 억지로 끌려온 것이었다. 그는 무척 피곤했기 때문에 말없이 음식만 먹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형철의 옆에 앉은 그의 부인 허은지는 굉장히 표정이 밝았다. 어젯밤 도훈과 간만에 정을 통한 뒤 텐션이 바짝 올라간 것이다.
평소에도 음욕이 강한 그녀는 섹스를 하고 나면 오히려 기운을 받는 타입이었는데, 새벽 간 도훈이 두 번이나 시원하게 뚫어주고 나서인지 온 몸에 에너지가 넘치는 것처럼 활기가 넘쳤다.
"형수님, 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동생 상철이 은지를 향해 깎듯이 물었다. 그는 실제로 나이가 동갑임에도 결혼 후 지금껏 은지에게 말을 놓은 적이 없었다. 은지가 한껏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날이 너무 좋아서요. 한국에서 벗어나니까 너무 좋네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도훈을 보는데, 도훈은 옆에 미나의 눈치가 보여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은지가 테이블 밑에서 발을 쭉 뻗더니 도훈의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어디 봐? 여친 앞이라고 나한테 눈길도 안 줄 거야?’
도훈은 은지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계속 모른 척을 했다. 만에 하나 은지와의 불륜이 들통 날 경우 그 폭발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흉. 그래, 맞아. 대흉은 은지와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었어. 은지를 둘러싼 주변인들과 빚어지는 문제일 거야.’
도훈은 음식을 먹는 척하며 계속 주변 사람들을 스캔했다.
상대가 무슨 의도인 줄 알아야 위기가 닥쳐도 헤쳐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시, 지금 이 상태에서 마음의 소리를 켜면 어떻게 들리지?’
[어떻게 들리다뇨?]
‘아니 나 빼고 5명이나 모여있으니, 서라운드 오디오처럼 사방에서 마음의 소리가 울리지 않겠냐는 거야.’
[동시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중첩될까 우려되시나 보군요. 그렇게 허술한 스킬은 아니됩니다. 주인님이 지정한 분의 소리만 걸러져 나오니까요. 참, 또한 스킬 강화 효과로 지속시간이 1분가량 증가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오호. 그래?’
[네. 빠르게 훑으신다면 모두의 생각을 한 차례씩 들어볼 수 있을 겁니다.]
본래 마음의 소리 스킬의 지속시간은 3분. 하지만 펜던트 강화 효과로 1분이 더 늘어난 4분이 최대 사용 시간이었다.
도훈은 미나를 제외한 나머지 4명에게 1분씩 할애해 속생각을 읽어낼 생각이었다. 다만 단순히 식사 중에 갑자기 스킬을 썼다간 대부분 어떤 음식이 맛있네, 반찬이 짜네 등의 음식 투정에 대한 리뷰만 잔뜩 듣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겠어. 모두가 자기의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질문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제 고민해 봐야지.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이에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가 좋을까?’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던 도훈은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미나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훈아?"
"으, 응?"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왜?"
"오늘 일정 알지? 낮에는 해변으로 갈 거야.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오케이. 바닷가 구경 좋지."
미나의 질문에서 힌트를 얻은 도훈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참, 혹시 그쪽 분들은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질문을 받은 상철이 대표로 대답했다.
"우린 딱히 정해진 일정 같은 건 없어요."
"네?"
"원래 우리 형님 여행 스타일이 뭘 정해서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상철이 자신을 언급하자 형철은 눈길만 한 번 주더니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요?"
"아, 혹시나 동선이 같나 해서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밖에서 만나면 왠지 반가울 것 같고."
"그렇죠. 싸이판이 관광지다 보니 치안이 좋은 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같은 한국 사람끼리 서로 의지할 수 있으면 더 좋으니까. 참, 그래. 내가 명함 하나 드릴게요.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상철이 하와이안 셔츠 포켓에서 머니 클립을 꺼내더니, 안에 든 명함을 건넸다.
도훈이 명함을 받아 보니, 유명 실내포장마차 브랜드 이름이 적혀있었다. 직함은 대표이사. 명함을 확인한 도훈은 깜짝 놀랐다.
‘어? 연신내포차?’
[왜 그러십니까? 아시는 브랜듭니까?]
‘당연하지. 대학가 중심으로 엄청 유명한 술집이거든…. 가만, 근데 대표이사면 단순 점장이 아니라….’
"혹시 아시나요?"
"연신내포차라면 저희 대학 근처에도 하나 있어요. 혹시 가게가 어디에?"
도훈은 일부러 대표이사란 직함을 이해 못 한 것처럼 되물었다. 어리숙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상대를 방심시켜 안도하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아, 저는 점주가 아니고…."
상철이 어깨 뽕이 살짝 들어가더니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여기 프렌차이즈 대푭니다."
"대, 대표님요?"
도훈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져 먹던 음식을 마구 튀겼다.
[너무 격한 반응 아닙니까?]
‘티 났냐?’
[주인님 성격을 아는 미나양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주인님은 본래 담담한 분이니까요.]
‘아니야. 어쩌면 이 정도 놀라는 게 당연할 수도 있어. 생각해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평범한 대학새잉, 어디 자영업 사장님도 아니고 전국 체인을 가진 거대 프렌차이즈의 대표와 우연히 겸상을 하게 된 거잖아. 이쯤 놀라줘야, 상대가 만족해하지 않겠냐? 애초에 자랑하려고 명함 준 거 같은데.’
[그럼 계속 호들갑을 떠시겠다는 겁니까/]
‘더 떨어야지. 내가 병신 같아 보일수록, 오히려 더 안전해지는 길이거든.’
"네, 맞습니다."
상철이 주변을 둘러보며 웃자, 그의 일행들의 표정에도 덩달아 자신감이 피어났다. 마치 힘을 숨기고 있던 주인공들처럼 사실 우리가 이런 사람이었어, 놀랬니? 하고 도훈의 반응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도훈이 이에 호응했다.
"우아아! 엄청 놀랐어요. 싸이판에 와서 연신내포차 대표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TV에도 몇 번 나오시지 않았어요?"
"하하. 별 말씀을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 편히 하세요. 제가 한참 어린데."
"그럴까?"
자신을 마치 대단한 사람인냥 떠받드는 도훈의 모습에 상철은 금세 말을 놓고 아랫사람 대하듯 태도를 바꾸었다. 힘을 드러낸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 근데 이름이 혹시…."
"아, 저는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아직 대학생이라 명함이 없어서요."
"아하, 그럴 수 있지. 그럼 여자친구분도 같은 대학생?"
상철이 미나를 향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니 알아서 기어라는 무언의 압박. 하지만 미나는 거들먹거리는 상철의 태도가 별로였다. 부자들 특유의 여유와 자기과시에 도훈이 주눅 든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어디가서 꿀리는 모습을 좋아할 여자친구는 없었다.
"…아뇨. 저는 필라테스 학원 운영해요."
"아! 원장님이셨군? 어쩐지."
상철은 노골적으로 미나의 몸매를 위아래로 훑었다.
몸매가 좋은 이유가 이제 납득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도훈이 이쯤에서 결정적 질문을 던졌다.
대화의 흐름상 어색하지 않아야 했다.
"그럼 싸이판에는 뭐하러 오신 거예요?"
‘로시, 지금. 마음의 소리 준비해.’
[넵!]
‘우선 눈앞의 박상철부터.’
도훈은 명함에서 읽은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상철에 집중했다.
"하하, 뭐하러 왔냐뇨. 일정 없이 편하게 쉬러 온 거죠. 앞으로 가족이 될 여자친구도 소개할 겸."
그러면서 상철이 옆에 앉은 민희를 가리켰다.
{가족은 무슨? 룸에서 몸이나 팔던 창녀 따위랑? 형한테 창녀 던져주고, 형수님을 따먹을 수 있으면 엄청난 교환 아니겠어? 진정한 상인이란 이런 것이지}
상철의 생각을 읽은 도훈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그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와, 예상대로 미친 새끼잖아? 그렇다면 공사 뭐 이런 게 아니라 민희의 정체를 알면서도 직접 데려왔단 소리네? 가족들에게 결혼할 여자라고 속이고서 말이야. 완전히 또라이구나.’
[그럼 설마 자기 형수와 자려고 저런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허은지가 이걸 아는 지 모르겠네.’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슬쩍 은지의 생각을 읽었다.
{도훈이랑 같은 호텔에 묵게 되서 정말 다행이야. 어차피 남편은 맨날 카지노나 들락거릴 테니, 도훈이 여친 몰래 재미나 봐야지. 어젯밤엔 진짜 끝내줬는데.}
허은지는 역시나 바람이 목적.
아니 정확히는 도훈이 아닌 누구였어도 상관이 없는 눈치였다. 기회만 있으면 아무나 붙어먹을 작정으로 여행에 따라온 것이다. 발상은 어처구니 없지만, 가장 본능에 충실한 사람 같았다.
‘저년도 저거 또라이군. 머릿속에 섹스 생각으로 가득찬 거 같아. 섹무새처럼.’
[섹무새라뇨?]
‘왜, 그 맨날 섹스만 외치는 새 말이야. 뭐든 섹스로 끝나는.’
[그렇네요. 정말…. 그저 주인님과 붙어먹을 생각 뿐이군요.]
‘근데 저렇게 쉽게 대주는 여자가 상철이한테만은 절대 안 줬나 보네. 상철이가 작정하고 룸녀까지 포섭해 온 걸 보면.’
[그들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겠죠.]
‘오케이, 그럼 다음.’
"우리도 오전에 도훈이네 커플하고 바닷가 놀러 가요! 나 새로 산 비키니 입어보고 싶은데.‘
민희가 도훈과 어떻게든 함께 하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작전이고 뭐고 그냥 도훈이 꼬셔버리고 싶다. 막말로 저런 씹돼지 좆만이 새끼랑 하고 싶겠냐고. 으으, 돈 많이 준다고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갑자기 화나네 진짜.}
‘작전이란 아마도 상철의 계획을 말하는 것일 테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음모를 꾸며 이곳에 온것 같군요. 하지만 우연히 만난 주인님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나 봅니다.]
‘정보창에서 금사바에 헤픈 성격이라고 했잖아. 나한테 강한 호감을 느꼈으니 어쩌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구석이 있을지도 몰라.’
[이용해 먹다뇨?]
‘대흉의 점괘가 무엇이든, 민희를 내 하수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야. 허은지도 마찬가지고.’
[호오, 사실상 저쪽 일해잉 아니라 주인님 편으로 포섭하려는 것이군요.]
‘그렇지. 뭐가 됐건 내가 여자들을 휘두를 수 있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방법이 있을테니까.’
그때 민희의 제안을 들은 형철이 한마디 했다.
"해변을? 날도 더운데 굳이…."
그는 억지로 잠을 깨 끌려와서인지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만사가 귀찮다는 듯.
‘사실 저 사람이 제일 의심스러워.’
도훈은 형철을 보며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아… 쓰벌. 무슨 날파리 같은 새끼가 귀찮게 껴들어 가지곤. 가족 일에 다른 사람이 끼면 괜히 귀찮은데.}
‘날파리라고?’
도훈은 자신을 벌레 취급하는 형철의 모습에 화가 났다. 그러나 속마음을 읽었다고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겉으론 젠틀한척 하지만 속으로 무시하고 있을 상철보다 감정을 속이지 않는 형철 쪽이 더 솔직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왜요, 시아주버님. 싸이판에 왔는데 바닷가 구경도 해야죠~."
"아니… 음."
{시아주버님? 미친년. 식도 아직 안 올린 년이 어디다 대고 형부야? 어제 보니까 학원강사도 아닌 업소녀 출신이더만.}
형철의 속마음을 들은 도훈이 흠칫 놀랐다.
‘알고 있었어?’
[그런 것 같은데요?]
‘뭐야 이건 대체? 민희가 업소녀 출신인 걸 알면서 모른 체 하고 있단 말이야?’
[왠지 서로 뭔가 굉장히 꼬여 있는 느낌인데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동생이 상철은 부부 스와핑을 제안하려고 창녀를 고용했는데, 형은 그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말이지?’
[네.]
‘그런데 전혀 티를 안내고 있고.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도훈이 혼란에 빠져있는데, 형철의 부인 은지가 두 사람이 대화에 껴들었다.
"그래요, 우리도 가요."
"그게 아니라 너무 피곤해서…."
"숙소 오자마자 카지노에 가서 날 새니까 그렇죠. 정 힘들면 혼자 숙소에서 쉬세요. 어차피 일정도 없으니 저희끼리라도 놀다 올테니까요."
"어머, 형님!"
모처럼 죽이 맞은 은지와 민희가 서로 다른 속셈을 가지고 해변으로 나가기로 의기투합했다. 어차피 물놀이는 핑계고 어떻게든 도훈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스킬 유효시간이 끝난 도훈이 모두에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흰 그냥 저희끼리 놀아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뭐 꼭 같이 놀자는 게 아니라 저희도 할 일이 없어서 바닷가 구경이나 가려던 거였어요."
"아…."
은지가 딱 잘라 말하자 그녀를 흠모하는 상철 역시 은지 편을 들었다.
"저도 형수님에 한표. 형님 많이 피곤하면 숙소에 쉬었다 나오세요. 어차피 호텔 바로앞 이잖아요."
상철은 은지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 그녀의 환심을 사려했다. 은지 역시 뻔히 알면서 남편을 따돌리기 위해 받아주었다.
"역시 도련님이 훨 낫네! 멀리까지 놀러와서 숙소에만 있으려고 하고. 하여간 당신도 참.‘
모두가 핀잔을 놓는 분위기에 형철이 토라졌는지 표정을 구기더니 이내 식사를 마쳤다며 숙소로 먼저 올라가 버렸다. 도훈은 괜한 불화를 만든 것 같아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저러다 금방 풀릴거라면서 밥 먹고 나서 해변에 가자고 약속을 잡았다.
< 1122. 그해, 여름-3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