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5. 그해, 여름-30- >
***
홀리데이 인 싸이판 지하 1층.
조그만 카지노가 있는 이곳엔 자정이 넘은 시각임에도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블랙잭 게임이 펼쳐진 테이블에는 단아하게 생긴 중국인 여성 딜러가 카드를 나누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자수로 장식된 벨벳 조끼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20대 여성이었다.
카드를 나누는 고운 손을 보고 형철이 입맛을 다셨다.
"거 존나 맛있게도 생겼네."
"형, 저거 다 상술이라니까?"
"상술이라니?"
"일부러 반반한 애들로 정신 팔리게 해서 집중력 흐트러뜨리려는 거라고, 이렇게 술도 공짜로 주고 말이야."
동생 상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웨이터가 서비스로 가져다 준 양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카지노부터 찾은 두 형제는 블랙잭 테이블을 한 자리씩 차지한채 열심히 돈을 꼴아 박고 있는 중이었다.
"Stay."
"Stay.'
다들 카드를 그만 받으라고 손짓하는데, 모처럼 페어가 뜬 형철이 흥분해 소리쳤다.
"스플릿!"
받은 카드를 둘로 쪼개 더블로 돈을 걸겠다는 의미.
그 모습을 본 상철이 놀라 소리쳤다.
"딜러 패 좋아 보이는데, 굳이?"
"새꺄. 남자는 한 번쯤 과감하게 질러야 하는 거야. 못 먹어도 고지!"
형철이 과감하게 칩을 배팅했다. 하나에 100달러짜리 칩이 10개씩 각기 100만원이 넘는 돈이었다.
"초장부터 너무 달리는 거 아뇨, 형?"
"설마 둘 다 터지겠냐? 밑져야 본전이야."
나뉜 패 위로 다시 카드가 더해졌다.
마지막 패를 받은 형철의 표정이 구겨졌다.
결과는 딜러 블랙잭.
스플릿 양쪽이 모두가 버스트가 된 형철이 허탈하게 웃었다.
"푸하하, 초장부터 신나게 얻어터지는 구만."
단판으로 200만원이 넘는 돈을 날렸지만, 형철은 눈 하나 껌뻑하지 않았다. 상철이 그런 형을 보고 놀리듯 말했다.
"생긴 것 답지 않게 딜러 아가씨가 손이 맵구만."
"썅년. 하여간 예쁜 것들이 더 하다니까?‘
형철이 재떨이를 가져와 담배를 꼬나물었다. 카지노에선 술이건 담배건 자유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싸이판은 아직 실내 흡연에 관대했다. 동생 상철이 형에게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첫날부터 너무 달리지 말고, 쉬엄쉬엄하지. 어차피 몇일 더 묵을 건데."
"꼴랑 200가지고 뭘 벌벌 떨어? 하룻밤 술값도 안 되는 거."
형철, 상철 형제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긴 것은 짜리몽땅하고 볼품없었지만, 일찍이 부를 물려받은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사업체를 경영할 수 있었다. 형인 형철은 외국에서 자재를 수입해 납품하는 오퍼상을 운영했고, 동생인 상철은 요식업 프랜차이즈 대표였다.
둘 다 사업적 수완이 탁월한 편이라 40대도 안 되는 이른 나이에 빠르게 성공한 편이었는데, 이른 성공으로 말미암아 두 형제는 점점 더 안하무인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생긴 것도 비슷한 두 형제는 술, 도박, 여자를 밝히는 편이었다. 아직 총각인 동생 상철은 그렇다 치더라도 유부남인 형철마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게 어디 순전히 술값이요? 아가씨들 이차 비용도 포함이지."
"인마. 술만 먹을 거면 그런 데를 왜 가냐? 술도 먹고 여자도 먹을라니까 가는 거지."
"근데 형수는 진짜 몰라? 형이 그러고 다니는 거."
딜러의 패를 받던 형철이 손동작으로 "stay"를 만들어 내며 말했다. 그만 패를 받겠다는 수신호.
"정말로 모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잉? 그게 뭔 소리요?"
"때로는 말고도 모른 척 하는 게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더 좋을 수 있다는 거야."
"그럼 형수가 형이 오입질하고 다니는 거 알면서 그냥 눈감아 주는 거라고?"
두 사람은 공개적인 카지노에서 멋대로 떠들었다. 주변에 한국 사람이 없으니 자신들의 대화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대부분 서양 관광객들이었고, 아시아인은 중국인 무리 몇 명 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내 생각엔 그래."
"호오. 예쁜 형수가 뭐가 아쉬워서 그럴려나? 솔직히 처음 결혼할 때야 사돈네 사업체부도 맞을 뻔한 거 막으려고 했던 거 아뇨? 근데 지금은 다시 살아나서 잘 나가고 있고."
동생 상철의 말에 형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말처럼 형철과 은지의 결혼은 사실상 매매혼이나 마찬가지. 은지 아버지가 회사의 부도 위기를 막고자, 자금을 융통해 주겠다는 형철, 상철 형제 집안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 이었다.
그것도 예쁘고 곱게 자란 은지가, 못 생긴데 바람기까지 다분한 형철과 결혼하게 된 배경이 되었던 것.
내막을 아는 상철은 그 당시 은지가 형철에게 시집간 것을 속으로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차피 돈으로 팔려온 몸이면, 그게 형이 아니라 자신이었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나이만 더 어리지 않았어도….’
상철은 그때부터 형수 허은지를 몰래 연모하며 남다른 감정을 키워나갔다. 어쩌면 자신의 와이프가 될 수도 있었던 여자를, 근거리에서 훔쳐보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상철은 자신이 형보다 조금이라도 잘생겼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토리 키재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때문에 상철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하고 결혼을 미루는 걸지도 몰랐다. 여자 친구를 늘 형수와 비슷한 스타일로 만나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였다.
"새꺄, 너는 아직 총각이라 모른다니까? 이혼이 만만해 보이냐?"
형철네 집안의 자금 융통으로 숨통이 트인 은지네 부모님 사업은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때부터 두 업체는 여러 가지로 너무 얽히고 말았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 관계로 거듭났기 때문에 이제와 발을 빼는 것은 너무나 복잡한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묶이고, 이후로는 사업으로 묶였다.
여러 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쇼윈도 커플일지라도.
"물론 쉽진 않겠지. 근데 난 형수가 알면서 참는다는 게 제일 이해가 안 가. 아쉬울 거 하나 없을텐데. 오우, 블랙잭! 씨발!"
간만에 좋은 패를 받은 상철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도박에는 둘 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돈은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이었다.
"…글쎄다, 과연 참고만 있는 걸까?"
"엉? 뭔 소리요 그게?‘
"너네 형수 말이다. 모른 척 눈 감고 있다고 했잖아."
"형이 방금 그랬잖수."
"근데 참고 있는 것은 맞는지도 모르겠어."
"안 참으면? 뭐, 맞바람이라도 피운 다는 거요? 형 몰래?"
"그야 나도 모르지."
형철이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시집올 때부터 은지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돈에 팔려오다시피 한 결혼이니 당연히 행복할 리 없었다. 게다가 형철과 달리 외모가 출중했던 은지에겐 당시 잘생긴 애인도 있었다.
형철은 언젠가 은지 지갑 깊숙한 곳에 결혼 전 사귄 남자친구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것을 처음 봤을 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돈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고 사람하고 결혼을 했다손 치더라도, 결국 평생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할 남편은 자신이었다.
신혼 3년간 바람기까지 죽이고 그렇게 잘해줬는데도 결국 뒤통수를 맞게 된 형철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
마누라가 몸은 자신에게 얽매여도 마음은 딴 놈한테 있다는 걸 안 순간 옥죄어 있던 형철의 바람기가 다시 폭발해 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려줬으면 했는데….’
형철은 은지가 자신을 붙잡기를 바랐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과거를 모두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끝내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불행한 가정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지만, 애초부터 잘못된 만남은 끝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겉으로는 화목한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곪을 대로 곪은 시한폭탄 같은 결혼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생인 상철 역시 두 사람의 갈등의 골이 보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가 이번 부부동반(정확히는 예비신부) 가족 여행을 찬성한 이유역시 형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건덕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딜러의 패를 확인하며 상철이 생각했다.
‘형이 갖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나한테 넘기란 말이야. 감당도 못할 여자 붙들고 있지 말고.’
솔직히 상철은 지금 여자 친구를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직업도 변변치 않았고, 성격도 그닥이었다. 그저 자신의 돈 때문에 옆에 붙어있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일부러 호구처럼 행동하긴 했지만, 모두가 계산된 행동이었다.
‘흐흐. 딱 형 마음에 들게 생겼잖수.’
"참, 그래서 아까 비행기 타기 전에 하던 얘기나 마저 해보지? 재밌는 계획이 있다면서?"
"뭐? 아, 그거?"
형철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겉으로 속내가 드러나는 성격인 동생과 달리 형철은 가면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타입이었다. 그런 성격이었기에 남들이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가정생활을 10년째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뭐, 나중에 다같이 술이나 진탕 먹자는 거지."
"술? 에이, 그게 뭐야?"
상철은 형의 말에 크게 실망했다. 다들 술기운 정도로 이성을 잃을 만큼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특히나 서로의 파트너를 바꿀 정도로 만취하려면 기절할 때까지 먹어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술만 먹자는 건 아니고…."
"엉?"
형철이 씩 웃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얼굴로 말을 돌렸다.
"아니야. 나중에 얘기하자.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
꿍꿍이를 감추는 형철의 태도에 상철이 속으로 애가 끓었다.
자기 여자친구를 상납할 각오까지 하고 왔는데, 형철이 알 듯 모를 듯 우유부단한 소리만 하는 것이었다.
‘하여간 저 능구렁이 같으니. 뭐든 쉽게 주는 법이 없어.’
상철이 애써 굳은 표정을 풀며 다시 블랙잭에 집중했다.
우애 좋아 보이는 두 형제 사이엔 여자문제 뿐만 아니라 아직 해결디지 않은 유산상속문제가 남아있었다. 현재 병상에 누운 아버지만 돌아가시면 막대한 유산이 형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군 재산보다 수배는 많은 유산.
상철은 분명 형이 그것의 비중을 가지고 자신과 협상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상철역시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아, 아! 도훈아 안에, 안에 싸줘!"
예상했던 대로다. 절정에 달할 무렵 미나가 두 다리로 나를 꼭 옭아매며 질싸를 유도했다.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에 내가 물었다.
"괜찮아? 오늘 안전한 날이야?"
"응."
거짓말이다. 정보 창으로 슬쩍 본 그녀의 임신가능성은 무려 89%. 완벽한 배란주기였다.
어쩌면 이번 여행 일자부터가 의사에게 날을 받아서 정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주인님 예측대로군요. 미나 양이 정말로 임신공격을 하다니.]
‘작정했다고 봐야지 이건.’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끝까지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무정자증 패시브가 발동 된 이상 임신 확률은 제로.
미나는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헛물을 켜는 것이었다.
"으, 으 그럼 간다!"
"응, 도훈아!"
파바바바밧!
힘차게 허리를 흔들고 뜨거운 정액을 토해냈다.
질 안 깊숙이 토해진 정액이 벌컥벌컥 뿜어지며 잦이를 뜨뜻하게 만들었다.
"아!"
미나는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사정이후에도 나를 꼭 껴안으며 잦이를 못 빼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겨우 나를 놓아주었다.
"하아…. 너무 좋았어 도훈아."
"응, 나도."
미나는 정액을 가득 품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응? 안 씻어?"
"비행기 오래 타서 그런지 좀 피곤한가봐."
"찝찝할 텐데."
"괜찮아. 나 조금만 눈 좀 붙일게."
미나는 그대로 내 품에 안기더니 곧 눈을 감았다. 정말로 노골적인 임신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씻고 자지."
"으, 응. 좀 있다가…."
미나는 스르륵 눈을 감더니 이내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옆에 누워 미나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정말로 잠이 든 듯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미나야, 미나야?"
"……."
[정말 잠든 것 같은데요?]
‘피곤하긴 했겠지. 그래도 씻지도 않고 잠을 청할 줄이야.’
[왜 그러는 거죠? 너무 티가 나는데요?]
‘정액을 한 방울도 흘리고 싶지 않은 거지. 씻는 척 하고 일어서면 담아둔 정액이 밑으로 흘러나올 테니까.’
[아…. 그 정도까지.]
‘사실 좀 미안하긴 해. 계속 노콘 질싸를 유도할 텐데, 결국 임신은 불가능할테니.’
[거참, 주인님도 솔직히 말을 하시지.]
‘아니야. 그냥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행복한 꿈이라뇨?]
‘왜, 일요일에 사는 로또 같은 거랄까?’
[일요일 로또요? 로또는 토요일 날 추첨하지 않습니까? 추첨 끝나고 다음날이 가장 판매량이 저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거야 성격 급한 사람들이 당일 날 사서 결과를 보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하지만 일요일에 구매한 사람은 일주일 동안 당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누릴 수 있잖아.’
[아…. 미나양에겐 임신이 그럼….]
‘그렇지. 기대하며 행복하게 두는 것도 나름 배려라고 봐야지. 담배나 한 대 빨고 자야겠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서 가운만 걸치고 발코니로 나갔다.
아무 생각없이 바다를 보며 담배를 입에 무는데 갑자기 옆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너무 옆방에 배려 없는 거 아니에요?‘
놀랍게도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에 은지가 마중 나온 것이었다.
< 1115. 그해, 여름-30-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