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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31화 (1,098/2,000)

< 1114. 그해, 여름-29- >

밤이긴 했지만, 차창 밖으로 비치는 이국적인 풍경에 미나가 눈을 떼지 못했다.

"와, 가로수 좀 봐. 싹 다 야자수야. 제주도 온 것 같아."

도훈은 제주도에 야자수가 있는 게 오히려 독특한 것 아니냐고 따지려다 그냥 웃므며 입을 다물었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지.’

PT 강사 시절의 미나는 선생님 같은 느낌이었다. 늘 회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고 때론 가열차게 몰아붙였다.

필라테스 학원을 차리고 나선 조금은 사업가 다운 분위기가 났다. 조그만 학원이긴 하지만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다던가, 강사를 모집하고 호원을 관리하는 모습은 확실히 나이답지 않게 성숙해 보였다.

하지만 단둘이 떠난 여행에서 미나는 애처럼 천진난만했다. 외국 여행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은지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둥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할과 환경에 따라 모습이 바뀐다지만, 도훈은 20대 중반의 발랄하고 호기심 많은 여자애 같은 지금의 미나가 가장 보기 좋았다.

‘역시 여자는 어려야 제맛이지.’

[미나양을 아주 어리다곤 볼 수 없을텐데요.]

‘그래 봐야 20대 중반이지. 생각해봐, 남자들은 저 나이 때 겨우 취업 준비한다고 도서관에 처박혀 잇을 시기라고.’

[군대 때문에요?]

‘그렇지. 암튼 미나도 이제 갓 1~2년 차 된 신입 사원이라고 해도 무방한 나이잖아.’

도훈은 전생에 연구원 시절 신입들을 떠올렸다.

연구직은 특성상 박사졸업자들이 많은 편인데도, 년차가 안 된 신규직원들을 볼때면 늘 철없고 애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아무래도 경력자가 보기엔 경험도 미숙하고, 책임감도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내가 전생에 미나 또래에 여자애를 봤다면, 여자는 커녕 애라고 생각했을 거야. 말 그래도 사회초년생 나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주인님보다 연상이죠.]

‘그러니까. 이게 참 아이러니하단 말이지.’

도훈은 자신이 누나라 부르는 존재들이 실제 본인의 정신연령에 비하면 한참 어리다는 괴리감에 행복한 고민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40대 나이에 20대 중반의 여자를 만났다면 범죄자 취급을 받았을 테니.

‘흐흐. 암튼 귀엽네. 나는 젊은 시절 이런 여자들 안 만나고 뭐했을까?’

[공부하셨죠.]

‘그래, 공부. 지긋지긋하네.’

남들보다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했던 시절. 따지고 보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현재를 희생한 것에 불과했다.

오늘은 죽이고, 내일을 위해 사는 것.

그러는 사이 청춘은 덧없이 사그라들었다.

[후회하십니까? 하지만 덕분에 주인님은 그럴듯한 직장에 남 부럽지 않을 부를 누리셨잖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그치만 결과적으론 똑같지 않나 싶어.’

[어떤점에서요?]

‘나이 들어 볼품없어진 몸뚱이를 재력으로 커버하는 것이나, 젊은 시절 실컷 미인들과 연애하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나. 결국엔 시기의 차이일 뿐 총합은 같은 게 아니겠냐는.’

[인생을 두 번 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이군요.]

‘깨달음은 무슨. 그냥 잡소리지.’

도훈은 로시의 칭찬을 일축하며 미나와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단순히 야자수가 좌우로 심어진 시골 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호텔에 도착하자 야간 비행을 마치고 레이트 체크인을 하는 손님들이 우르를 로비에 모였다. 미나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이 너 영어 좀 하지?"

"응?"

"아니…. 미국에 부모님도 계시고…."

"우리 아버지 한국어로 소설 쓰시는데?"

"아, 아 그렇댔지?"

"왜?"

"음…. 나 실은 영어에 울렁증 있거든."

"아까 입국 수속 밟을 때 보니 잘하는 것 같던데?"

"아니…. 그때는 그냥 무조건 'yes.' 라고 했어. 뭐라고 말하는 지 못알아 듣겠어서. 근데 프론트 직원은 더 어렵게 물어 볼 거 아니야?"

도훈은 그녀답지 않게 긴장하는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도훈이 너 영어 좀 하지?"

"응?"

"아니…. 미국에 부모님도 계시고…."

"우리 아버지 한국어로 소설 쓰시는데?"

"아, 아 그렇댔지?"

"왜?"

"음…. 나 실은 영어에 울렁증 있거든."

"아까 입국 수속 밟을 때 보니 잘하는 것 같던데?"

"아니…. 그때는 그냥 무조건 ‘yes.' 라고 했어. 뭐라고 말하는 지 못알아 듣겠어. 근데 프론트 직원은 더 어렵게 물어 볼 거 아니야?"

도훈은 그녀답지 않게 긴장하는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외국 나오니까 확실히 애같네. 한국에 있을 때랑 전혀 달라.’

"알았어. 예약 확인하고 방 키 받으면 되는 거지?"

"응, 응. 너가 해줘."

[주인님 괜찮으시겟습니까?]

‘뭐래? 미국에서 박사마치고 온 사람한테.’

[발음은 영 구리던데요?]

‘알아듣는데 지장없이만 말하면 되는 거야. 물론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잘한다고는 할 수 없는데, 이 정도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돈 아냐.’

도훈은 능숙한 솜씨로 예약된 객실을 확인하고 키를 받았다. 한 발 떨어져 지켜보던 미나는 도훈의 막힘없는 의사소통 실력을 보고는 눈을 반짝거렸다.

"우리 8층이래."

"와! 대단하다. 넌 어쩜 그렇게 영어도 잘해?"

"응?"

"아니. 너 체육교육과라지 않았어?"

"그게 뭔 상관이야?"

"아…, 그, 그런가?"

미나는 본인이 사회체육과였기 때문에 운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도훈의 영어 실력은 전생의 경험을 기반하기 때문에 나이와 이력에 비하면 수준급이긴 했다.

도훈은 겸손해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별로 잘하는 편은 아니야. 그냥 뭐 일상회화나 대충하는 거지. 저기 저 사람이 잘하네."

도훈이 프론트 앞에서 예약을 확인하는 여자를 가리켰다. 발음이 너무 좋아 원어민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가만 보니 아까 비행기에서 자기에게 수작을 부리던 허은지였다.

"그렇네. 와, 저 분 엄청 잘한다."

미나는 영어를 못 하는 스스로가 창피해 계속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어깨가 좁아지며 자꾸 가슴이 몰려 깊은 골이 파였다. 도훈은 그런 미나를 격려하기 위해 농담을 건넸다.

"가슴 펴. 몸매는 네가 압도적이니까."

"아, 앗. 뭐야 진짜."

미나가 창피해 했지만, 딱히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녀는 누가 봐도 우월한 몸매를 보유했기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이목을 잡아 끌었다.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던 은지도 슬쩍 미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암튼, 올라가자.‘

두 사람이 짐을 끌고 가려는데 호텔 벨보이가 어느새 달려와 양손에 캐리어를 잡고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객실이 어디 신가요?‘

영어로 묻는 질문에 도훈이 능숙하게 대답했다. 미나는 여전히 그런 도훈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

"팁이에요."

"감사합니다."

클리닝 상태와 금고 사용법을 소개한 벨보이에게 도훈이 팁을 건넸다. 벨보이가 나가자 미나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방금 왜 돈을 준거야? 이용료도 있어?"

"음, 미국은 팁 문화가 발달해서 왠만한 서비스엔 팁을 주는 게 관례야."

"아항, 그렇구나. 너한테 달러 맡겨두길 잘했다. 앞으론 도훈이 네가 알아서 줘."

"나 혼자 들고 다니면 위험하니까, 절반은 금고에 넣고 너도 일부 가지고…."

도훈이 현금을 나누려고 하는데 미나는 어느새 창가로 달려가 달밤에 비친 해변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우아! 도훈아, 와서 봐. 야경 너무 예뻐!"

자꾸 들떠서 촐싹거리는 미나를 보며 도훈이 흐뭇하게 웃었다.

‘원 참. 외국 나오니까 완전히 애가 됐구나, 미나는.’

[그러게요. 저렇게 좋아하다니.]

짐정리부터 하려던 도훈은 미나와 함께 발코니로 나가 밤바다를 구경했다. 호텔은 바다와 가까워 위에서 내려보면 찰랑이는 파도와 해변에 심어진 야자수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일 저기 꼭 가보자. 물놀이도 하고!"

"응, 그래."

"도훈아, 너랑 같이 이곳에 와서 나 너무 기뻐."

미나가 이국적인 풍경에 취한 듯 발코니에서 도훈을 와락 껴안았다. 난데없는 포옹에 도훈이 난처해하며 미나를 안아주는데, 옆 객실 발코니로 누군가 걸어나왔다.

발코니가 외벽에 튀어나온 구조였기 때문에 인접 객실에서 사람이 나오면 근거리에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어? 저 여자는….’

또 허은지였다.

미나는 등진 상태라 그녀가 나오는 줄 몰랐지만, 도훈은 정면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옷 상태가….’

놀랍게도 은지는 이브닝드레스로 갈아 입은 상태였다.

실크 재질의 이브닝드레스는 하의가 실종된 것처럼 허벅지가 완전히 노출되었고, 브라도 풀어 헤쳤는지 젖꼭지 부분이 툭 튀어나와있었다.

‘허, 헉!’

도훈이 야한 의상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은지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대며 쉿-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마치 자신의 등장으로 분위기를 깨지 말라는 조언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진하게 포옹을 이어가는 도훈과 미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위험합니다, 아주 위험한 여성입니다.]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도훈은 자꾸 자신을 도발하는 은지가 괘씸해 미나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 아아 도훈아앙…."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자 미나가 흥분하며 도훈에게 더욱 파고 들었다. 그것은 마치 둘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일종의 무력시위였으나, 은지는 그 모습을 보고도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덤덤히 쳐다볼 뿐이었다.

도훈은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혀를 내두르며 미나에게 속삭였다.

"밤바람 춥네. 들어가자."

"응."

미나는 사각지대에서 끝내 허은지를 눈치채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짐정리가 끝나자 미나가 말했다.

"먼저 씻을 게."

"응."

무료하게 앉아있던 도훈이 TV를 켰으나 영어로 된 방송 뿐이라 이내 흥미를 잃었다.

‘담배나 한 대 피울까.’

객실 내 흡연은 금지였기 때문에 도훈은 다시 발코니로 나왔다. 혹시나 아직까지 은지가 발코니에 나와 있을까 하는 약간의 궁금증도 있었다. 하지만 속옷 바람으로 계속 창밖에 나와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겹친 거겠지.’

도훈이 발코니로 나가 옆을 돌아보는데, 놀랍게도 은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훈은 화들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담배 태우시나 보구나."

"아…. 안녕하세요."

외벽 발코니 간의 거리는 대략 3M.

건너 뛸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했다.

도훈이 뻘쭘하게 다시 집어들며 물었다.

"혹시 담배 연기가…."

"괜찮아요. 우리 그이도 피우니까."

은지는 괘념치 말라는 듯이 말했다. 도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설마 내가 다시 나오길 기다린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수상한데요.]

도훈이 의구심을 품은 채 물었다.

"객실이 서로 붙어있었네요?"

"그러니까요. 인연이 참 질기네요 우린."

허은지는 굳이 안써도 될 "인연" 이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아까 비행기에서도 그렇고 너무 대놓고 흘리고 있었다.

"안 들어가세요? 밤바람 제법 찬데."

"괜찮아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은지가 그 말을 내뱉으며 손부채를 가슴 위에서 흔들었다.

유독 골이 파인 이브닝 드레스가 그녀의 골짜기를 여과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도훈의 시선이 자연히 툭 튀어나온 젖꼭지로 향했다.

‘어우씨, 아줌마 몸매가 무슨….’

은지는 30대 치고는 굉장히 몸매가 좋은 편이었다.

전체적인 탄력은 미나가 앞섰지만, 가슴 크기 만큼은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녀는 도훈이 쳐다보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여자친구는 안에 있나봐요?"

"아… 네. 씻으러…."

"호호. 샤워 후엔 두 사람이 뭘 할지 궁금해지는데?‘

"네, 네"

도훈이 당황하자 은지가 허리를 구부리며 깔깔거렸다.

"부디 살살하세요. 방음이 잘 안 될지도 모르니까."

"아…. 네. 넵."

‘뭐야, 이 음담패설은. 서로 안면 튼지 얼마나 됐다고.’

[주인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은데요?]

‘내 반응?’

[쑥스러워 하니까 더 나가는 것 같다고요.]

‘그런가?’

은지는 곤혹스러워하는 도훈을 향해 계속 말했다.

"그래도 부럽네요. 뜨거운 청춘이라."

"누님도 아직 젊으시잖아요?"

"나야 한창이죠. 남편이 시들해서 그렇지. 참, 이 얘긴 남편한테 비밀이에요?"

"아, 네, 넵."

"우리 그이는 벌써 나갔어요."

"나가요?"

"여기 호텔 지하에 카지노 있는 거 알죠?"

"그래요?"

"몰랐나 보네. 그래서 여길 골랐어요. 남편이 도박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피는 못 속인다고, 동생도 도박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짐 풀기도 전에 같이 내려갔어요."

"아…."

"그니까 살살해야 돼요? 알았죠? 혼자 방에 있는데 이상한 소리 들리면 참기 힘들어 질것 같으니까."

"아, 저, 저기."

"풉-. 농담이에요 농담."

그때 방에서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아, 뭐해? 나 다 씻었어. 너도 얼른 씻어."

방음이 잘 되는 편인지 크게 소리친 것 같았는데 막상 목소리는 집중해야 들릴 정도였다. 그 말은 도훈이 은지와 서로 얘기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도훈이 맞은편 발코니에 있던 은지에게 양해를 구하며 물러났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훗-. 너무 예의 안 차려도 괜찮아요. 남자가 너무 예의 바르면 매력없더라 난."

은지는 끝까지 추파를 던지며 도훈을 유혹했다.

도훈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미나는 베스 타올을 몸에 두른 채 화장대 앞에 앉아 젖은 머릴 말리고 있었다.

"담배 피우다 왔어?"

"…응."

"비행기 안에서 참기 힘들었겠다."

"아니야. 그 정도는."

"너도 얼른 씻어. 벌써 잘 시간이야."

미나가 자꾸 샤워를 재촉했다. 도훈은 잠시 후 미나와 치러질 거사보다, 옆 방에 유부녀 허은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흉이라…. 왠지 불길하단 말이지.’

< 1114. 그해, 여름-29-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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