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28화 (1,095/2,000)

< 1111. 그해, 여름-26- >

미션이나 업적을 위해 잠깐씩 스쳐 지나간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어장 목록에서 소거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많은 인원이 남아있었다.

‘안 되겠어. 자동응답 아이템만 가지곤 둘러대기 부족하겠어. 그것도 숫자가 제한되어 있으니….’

도훈은 아예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아예 미국에 가는 사실을 외부에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었다.

‘차라리 깨톡 상태창에 미국에 있다고 수정해 놔야지.’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어차피 나랑 친한 애들은 우리 부모님이 미국 계시는 거 다 알고 있을 거란 말이야. 싸이판도 미국령이니 미국에 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본토랑은 전혀 다른 곳이긴 하지만.]

‘게다가 내가 미나랑 단둘이 여행가는 건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거야. 다른 여자들과 미나랑은 어떠한 접점도 없었으니까.’

[맞네요. 하지만 미나양이랑 함께 있을 때 다른 여자분께 연락이라도 오면요?]

‘폰을 정지시켜 놔야지.’

[정지요?]

‘보통 해외 나갈 때 로밍을 걸어서 연락이 닿게 해놓거든. 하지만 비용 문제상 전화 기능을 정지시키고 와이파이로 메신저만 살려놔도 어색하진 않을 거야.’

[호오, 그런 방법이. 그럼 어쩔 수 없이 메시지로만 연락이 닿을테니 적당히 눈치 봐서 답장을 해주면 되겠군요.]

‘그렇지. 이래서 내가 부자인 티를 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돈이 많다면 비용 신경 안 쓰고 로밍을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가난한 대학생이면 외국 나갈 때 일주일 정도 폰을 정지시켜도 전혀 어색하지 않거든.’

[과연 주인님은 현명하십니다.]

도훈은 말 나온 김에 곧바로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여행 돌아오는 날까지 폰을 정지시키겠노라 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답변이 들려왔다.

- 고객님. 그러시면 해외로밍기능을 차단시키는 게 더 간편합니다. 로밍만 차단해두셔도 외국에 계실 땐 정지시킨 거랑 똑같은 효과거든요.

도훈은 옳겠거니 하고 로밍 기능을 차단했다. 이제 비행기에 오르고 나면 그에게 전화를 거는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한국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깨톡 프로필 역시 여행기간동안 날짜와 함께 미국에 간다고 돌려놓았다.

"좋아. 이제 여행 준비 끝."

[고생하셨습니다. 모처럼 둘만의 오붓한 여행이 되겠네요. 누구의 방해도 없이.]

‘글쎄, 그건 미션이 뭐가 떨어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

출국 당일.

도훈은 가볍게 짐을 챙긴 뒤 대중교통을 이용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차를 가져가면 공항 주차장에 주차시켜야 했는데, 쓸데없이 비용이 비싸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캐리어를 이끌고 공항 로비에 이르자 마침 미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도훈아. 어디쯤이야?

"전 방금 도착했어요."

-일찍 왔네. 미안, 나는 차가 막혀서 늦을 것 같ㅇ아.

"괜찮아요. 아직 3시간 남았는데요."

-응. 30분 내로 도착할 거야. 티켓 발권해야 하니까 20번 게이트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누나."

미나가 잠깐 도착이 지연되는 관계로 도훈은 혼자 공항 로비를 어슬렁거렸다. 공항은 일본에 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확실히 휴가 기간이라 그런지 해외 나가는 사람이 많구나.’

흔히 공항패션이라 불리는 트렌디한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선글라스를 쓰거나, 가슴 포켓에 꽂은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지난번 일본에 다녀오셨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군요.]

‘그때야 황금연휴기간에 연차를 쓸 수 있는 사람들만 나갔을테니. 하지만 지금은 공식 바캉스 시즌이라 우르르 몰려 나온 거고. 이런거 보면 우리나라 참 선진국이란 말이지.’

[그렇군요. 참, 주인님 의사소통에는 문제 없으시겠습니까?]

‘의사소통? 영어말이야?’

[네. 지난번 사라와 스테파니 자매들 왔을 때 보니 영어가 딱히 유창하진 않던 것 같은데요.]

도훈은 몇 달 전 여동생 혜은이 방문했을 때 함께 온 백마 자매와의 일을 떠올렸다.

환생 후에도 언어에 대한 실력은 크게 줄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가 전생에서도 회화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귀로 듣는 것은 충분해.’

[그럼 말만 안 되시는 건가요?]

‘응.’

[미국에서 유학 생활 하셨는데도요?]

‘유학생이라고 다 영어를 잘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

[그게 아니라…. 주인님은 학창시절에도 천재 소릴 듣던 분이신데.]

‘천재는 맞아.’

[그런데 영어만 안되신다고요?]

‘쉽게 말해 난 한국식 영어 교육의 희생양이야.’

[희생양요?]

‘수능 영어는 당연히 만점 받았지. 토익도 곧 잘했어.’

[근데요?]

‘뭐가 문제냐고? 그 둘을 잘하는 것과 영어 회화를 잘하는 것에는 연관성이 없더란 말이지. 내가 볼 때 언어는 어려서 외국 나가 익히지 않으면 유창하기 힘들어. 더구나 나는 독해 같은 것이나 문법에 특출났을 뿐, 스피킹을 따로 연습한 적이 없었으니까. 나이들어서 배우기엔 너무 늦었고.’

[아….]

‘그래도 듣기 연습은 충분히 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다 알아 들을 수 있어. 여행에서 쓰는 일상 영어 정도는 무리 없고.’

[그나마 다행이군요.]

‘미나도 영어를 잘할 것 같진 않지?’

[네. 아무래도….]

도훈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지잡대 사회체육과를 나와 어려서부터 일찍 트레이너 생활로 시작했던 송미나에게 유창한 영어 실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 영어가 안 돼서 도훈에게 동행을 제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되겠어.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 싸이판가서 흑마를 타고 외국어를 능통하게 만들던가 해야지.’

[앞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시려면 필수적인 스킬이긴 합니다.]

‘근데 마음에 드는 흑마가 있어야 할 텐데.’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의자에 앉아있는데,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 캐리어를 끌고 앞에 섰다.

남자는 볼품 없었지만 챙 넓은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눈에 띄게 예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도 예쁨이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오, 미인인데.’

"아직 형님네는 도착 안 한 거지?"

"어, 하여간 이 양반 제때 오는 법이 없네? 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리자."

남자의 제안에 여자가 도훈이 앉은 의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 칸 건너 옆에 앉았다. 남자도 나란히 앉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도훈이 듣기 싫어도 대화를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호텔 예약은 다 끝났어?"

"당연하지. 자긴 그냥 나만 믿으면 된다니까?"

도훈이 보기에 두 사람은 커플치곤 무천 언밸런스 했는데, 여자는 고급스럽게 예쁜 반면, 남자는 뱃살도 나오고 키도 짜리몽땅했다. 나이 차도 상당히 나 보였다.

다른 커플에 관심을 갖는 타입은 아니지만, 너무도 균형이 안 맞는 두 사람에 도훈이 관심을 보였다.

‘뭐지? 여자 쪽이 너무 아까운데?’

[옆에 앉은 커플 말씀이시죠?]

‘어. 남자가 돈이 많나?’

도훈이 힐끔 남자를 살폈다.

가만 보니 대충 차려입은 것 같은 옷가지가 다 유명 브랜드 제품이었다. 머리 위에 쓴 선글라스도 명품, 손에 든 가방도 명품.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남자가 부자네.’

[꼭 돈 때문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주인님이 너무 속물적으로 생각하시는 걸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지. 남모를 매력이 있을지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자 쪽이 아까운 건 변함이 없지만.’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시 후 또 다른 커플이 도착했다. 아까 말하던 형님네 인 것으로 보였다.

"벌써 와 있었어? 미안, 좀 늦었지?"

"오셨어요?"

"아휴, 어젯밤 중요한 비즈니스가 있어서 말이야. 내가 1차로 끝내자고 하니까…. 하핫."

"미안해요. 기다렸죠? 이이가 어젯밤 하도 술을 많이 먹고 들어오는 바람에…."

두 번째로 도착한 커플도 앞선 커플과 유사했다. 남자는 못생겼지만, 여자는 몹시 예뻤다. 똑같은 유형의 커플이 둘씩이나 있으니 도훈은 점점 궁금증을 더해갔다.

‘뭐지? 여기도 똑같네?’

"동서는 언제봐도 예쁘다."

"어머, 별말씀을. 그리고 저희 아직 결혼 안 했는데."

도훈은 특히 여자들끼리의 대화를 귀 담아 들었는데, 잠시 대화를 듣고 있으니 네 사람의 관계가 금방 파악이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커플은 부부 사이.

그리고 먼저 기다리던 커플은 애인 사이였다.

남자끼리는 똑같이 못생긴 게 친형제로 보였다. 실제로 체형과 얼굴이 흡사했다.

하지만 볼품없는 외모와 달리 두 사람은 상당히 돈이 많았다. 입찰이니 수의계약이니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중소업체 사장쯤되어 보였다. 어젯밤의 비즈니스라는 것도 술 접대를 하느라 무리했다는 뜻이었다.

특이한 것은 동생네 커플은 아직 결혼 전으로 보였는데, 벌써 서로 한 가족처럼 지내는 점이었다.

[약혼이라도 한 사이일까요?]

‘그렇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형님네 와이프는 30대 초중반, 동생네 여친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둘다 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겼으나 부잣집 사모님 소릴 듣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쩝, 아쉽네. 남의 여자만 아니면 한 번쯤 꼬셔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주인님이 탐을 낼 정도면 굉장히 매력적인 여자들인 건 분명하군요. 근데 남의 여자는 안 뺏는다면서요?]

도훈이 뜨끔하며 둘러댔다.

‘그냥 여자가 아까워서 하는 소리지.’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느데 전화가 걸려왔다.

미나였다.

"여보세요?"

-어, 나 방금 공항 들어왔어. 어디야?

"아까 말씀하신 게이트 근처요. 누난 어딘데요?"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

"짐 많으시죠? 제가 마중 나갈게요."

도훈이 서둘러 일어나더니 미나를 마중 나갔다. 과연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확 띄는 외모의 미나가 도훈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도훈아! 여기!"

미나는 몸에 착 달라붙는 레깅스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몸매가 너무 환상적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그녀를 쳐다볼 지경이었다.

도훈이 서둘러 나가 그녀의 손에 들린 캐리어를 대신 받았다. 확실히 도훈의 것과는 달리 바퀴가 굴러가는 게 묵직했다.

"아이고, 짐도 많이 싸오셨네."

"응, 옷을 너무 많이 가져왔나봐. 넌 그게 다야?"

"네. 이마저도 텅텅 비었어요."

가방을 나란히 놓자 부피가 3배는 차이나 보였다. 미나는 도훈에게 찰싹 팔짱을 끼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우리 티켓 발권하러 가자. 수하물도 맡길 겸."

"네, 누나."

"이제부터 누나라고 부르기 있기, 없기?"

"네?"

미나는 귀여운 척하며 말했다.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는데 애인처럼 부르면 되지."

"음…. 그럼 뭐라고 불러요?"

"자기?"

"자기요?"

도훈은 살짝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미나가 잔뜩 기대하는 눈치라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 그래요 그럼."

"응, 자기. 그리고 말 편하게 해. 누나라고 안 해도 되니까. 솔직히 너랑 나랑 몇 살 차이도 안나잖아."

"그래도 원장님이신데…."

"그게 뭐라고? 이제부터 일 얘긴 그만. 알았지?"

"응."

두 사람이 마침 열린 티켓 발권에 맞춰 줄을 서는데 앞에 아까 보았던 두 커플이 보였다. 그중 나이가 어린 여자가 도훈의 옆에 찰싹 붙은 미나를 보더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들어 보이며 관심을 보였다.

자신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미나의 미모에 상당히 자극받은 눈치였다. 그리고는 옆에선 도훈을 쳐다보더니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기 옆에 있는 짜리몽땅한 남자친구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과정을 눈썰미 있게 지켜본 도훈이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너무 티내는 거 아냐?’

[무슨 티를요?]

‘자기 남자친구 마음에 안 든다고 노골적으로 티내고 있잖아.’

[그랬나요?]

‘아무래도 둘 사이가 좋아보이진 않는군.’

한참 줄은 기다리고 나서야 도훈의 차례가 됐다.

항공사 직원의 설명에 도훈이 익숙하게 여권을 내보이고 수화물을 올렸다. 미나가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다 도훈에게 말했다.

"와…. 너 외국 많이 나가봤나 보구나. 잘한다."

"부모님이 미국에 계셔서요. 혼자 몇 번 나갔거든요."

"아, 맞다. 그랬지."

"누난요?"

"난…. 사실 별로 못 나갔어. 사이판도 이번이 처음이고."

"그랬구나."

도훈은 그제야 왜 그렇게 미나가 여행계획 세우는 데 심취했는지 깨달았다. 몇 번 안나가 본 해외여행을 멋진 남자친구와 단둘이 나간다는 게 얼마나 설렜겠는가. 도훈은 눈을 반짝이는 미나를 보며 많은 추억을 남겨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발권을 끝내고 출국 수속을 모두 밟자 어느새 비행까지 2시간여가 남았다. 두 사람은 면세점 쇼핑과 가벼운 디저티를 먹고는 출국장에서 한동안 기다렸다.

무료해진 도훈은 문득 담배 생각을 했다.

이륙 후에는 담배를 못 피운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맞다. 나 잠깐 흡연실 좀 다녀올게."

"흡연실? 아…. 응."

도훈은 미나도 가끔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물었다.

"혹시 같이?"

"아, 아니야. 나 끊었어."

"진짜로?"

"응. 그냥 몸에도 안 좋으니까."

"그럼 금방 피우고 올게."

미나는 흡연실로 향하는 도훈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에 임신이라도 하면…. 태아에 안 좋으니까.’

그녀는 이번 여행에서 도훈의 애를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 1111. 그해, 여름-26-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허니문 베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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