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25화 (1,092/2,000)

< 1108. 그해, 여름-23- >

***

D-day 1. 여행 전날.

본격적이 짐 싸기에 들어갔다. 사실 외국이라고 특별할 것은 없었다. 싸이판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기 때문에 지난 여름캠프에 챙겨갔던 것과 비슷했다.

여벌의 속옷과 옷가지, 각종 세면도구, 핸드폰 충전기 등을 챙겼으나 기내반입용 캐리어의 절반도 채울 수 없었다.

‘안이 너무 휑 한 것 같은데….'

[캐리어가 굳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조촐한 구성이군요.]

‘남자의 짐싸기란 대게 그렇지.’

[그냥 백팩이 어떠신가요?]

‘아니야. 혹시 또 모르잖아. 안되면 나중에 돌아올 때 기념품이라도 채워오면 되니까.’

중요한 여권 등은 가슴 앞으로 찬 메신저 백에 넣었고, 내일 공항 환전소에서 달러만 찾으면 끝.

짐 싸기가 끝나자 마침내 여행을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간만에 외국여행이군.’

[5월 연휴 기간 일본 방문 이후론 처음이군요.]

‘그렇지.’

[본래 전생엔 외국 자주 나가시지 않았습니까?]

‘익숙하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했고, 해외 출장도 잦은 편이었으니. 근데 이렇게 여자랑 단둘이 외국 나가는 건 전 마누라랑 신혼여행 다녀온 이후 처음인 것 같아.’

[호오. 신혼여행이라.]

‘웃긴 게 뭔 줄 알아? 신혼여행 다녀와서 전 마누라가 덜컥 임신을 했다더라고. 나는 허니문 베이비라면서 신나서 좋아했는데 죽고 나서 보니 내 애가 아닌 거 있지?>’

[아….]

‘그러고 보면 기간부터 수상했어. 뱃속에서 10달을 다 못 채운 걸 봐선 전 마누라는 처음부터 다른 남자의 애를 임신한 상태를 인지한 상태로 서둘러 나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커. 물론 이건 내 추측이지만.’

[처음엔 모르셨나요?]

‘딸이었으니까. 차라리 아들이었으면 자라는 얼굴을 보면서 나랑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을 텐데, 딸아이가 엄마를 너무 많이 닮았었거든. 그러다 완전히 뒤통수 맞은 거지. 죽고 나서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걸?’

[저런….]

‘애초에 사기 결혼이었어. 남의 아이를 밴 상태로 의도적으로 나랑 결혼한 셈이잖아. 재미는 딴 놈들이랑 실컷 보고 시집갈 때 되니 호구하나 덥석 문 거지. 내가 바로 그 호구였고. 결국 제 버릇 개 못 주고 신랑 몰래 바람이나 피우고 말이야. 하여간 썅년.’

[워워, 너무 열 내지 마십시오 주인님.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로시가 위로했지만 조금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 마누라의 괘씸한 행태가 재차 떠올라 가슴 속에 무거운 추가 가라앉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명분도 있고, 능력도 충분한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플레이어라는 제약만 없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다 지나간 일이지.’

나는 복수의 뜨거운 불길을 차갑게 식혀 내부에 갈무리했다.

분명 기회는 올 것이다.

아무리 신께서 플레이어를 주시한다고 해도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신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PK 단의 존재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걸 찾아야 한다.

[아참, 방금 이야기를 듣고 생각난 업적이 있는데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뭔데?’

[어떠한 편견 없이 단지 업적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주인님 입장에선 심적으로 많이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이니….]

‘괜찮으니 말해봐. 70대 할망구 따먹는 업적도 있고, 똥꼬충 되는 업적도 있는 판에 그보다 더 한 게 뭐가 있을라고?’

[그게….]

로시가 평소답지 않게 주저했다. 내가 재차 대답을 종용하자 겨우 말을 이었다.

[업적 명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입니다.]

‘뻐꾸기?’

[네, 신혼여행 온 새색시를 꼬셔 임신 후 탁란시키는….]

‘야이씨!’

[죄송합니다. 역시 무리겠죠?]

‘내가 당한 게 있는데 탁란 같은 소릴!’

아무리 업적에 미쳤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애초에 신혼여행 온 여자를 꼬시는 것도 사람으로선 하면 안 될 짓인데, 그 와중에 내 애를 임신시켜 뻐꾸기 아빠를 만드는 업적이라니…. 아무리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다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이건 못 들은 걸로 하지. 난 원래 남의 여자 안 뺐어. 내가 당한 게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있어?’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기엔 이미 애인이 있는 여자를 많이 건드리지 않으셨나요? 일관성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만….]

‘아니 그건….’

물론 지금껏 남자친구 있는 여자를 안 건드렸던 것은 아니다.

편의점 알바 기춘의 여친 수아를 건드린 적도 있었고, 남친이 있던 희주를 노래방에 불러 오랄을 시킨 것도 나다. 교대생 하린 역시 남친을 새로 사귀었는데도 섹파로 만들었고, 유부녀였던 애자매 엄마 정선희와는 불륜도 저질렀다. 최근에도 러시아 모델 크리스티나를….

솔직히 로시의 말대로 일관성이 전혀 없는 셈이다.

그래도 입은 달렸으니 항변을 해보자면,

‘말했지만 오는 여자 피하지 않는 것 뿐이야. 내가 적극적으로 꼬신다기보다,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바람을 피운 거라고.’

[그렇게 변명하셔도 주인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죠. 상대를 거부한다는 선택권이 있었음에도 그 옵션을 실행한 적은 한 번도 없으셨으니까요. 미필적 고의나 마찬가집니다.]

‘알아, 아는데…. 내가 당장 당한 게 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해? 탁란은 또 뭐야? 어우.’

[그렇다면 만약 상대 쪽에서 주인님을 유혹하신다면요?]

‘유혹이라니?’

[앞서 주인님이 반증한 사례와 같습니다. 상대가 먼저 유혹했고, 주인님은 알면서도 묵인하는 거죠. 예전처럼.]

‘음….’

[그러다 무정자증 스킬을 해제했는데 덜컥 임신이 되면?]

‘잠깐만. 유부녀를 임신시키는 건 절대 안 할 거야.’

[왜죠?]

‘정말로 그건 아니야. 물론 나는 아직까지 내 애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내 애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랑 낳아 기르고 싶어.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몰라도.’

[아쉽군요. 이번 여행에서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업적이었는데요.]

‘로시. 되도록 남의 가정의 평화는 깨뜨리지 말자. 내가 개새끼인건 나도 아는데, 존나 개새끼까진 되고 싶지 않다고. 그냥 평범한 개새끼로 살래.’

[알겠습니다. 탁란까진 여전히 주인님이 불편하신 것 같군요.]

‘시집 안 가고 남자친구도 없는 예쁜 처녀들 지천에 깔렸는데 남의 여자를 굳이?’

[남의 떡이 더 맛있다고 하신 건 주인님이셨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떡만 먹고 사냐!’

[그치만 주인님은 떡만 치고 사시잖습니까?]

‘아 쫌!’

업적을 가지고 옥신각신 하다보니 감정이 팍 상해버렸다. 따지고 보면 인공지능 주제에 은근히 고집이 있는 것 같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인간의 감정마저 학습시킬 수 있는 것일까?

원룸 옥상에 올라-만능키가 생긴 뒤부턴 내 아지트다-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식히고 나니 흥분됐던 마음이 다소 가라 앉았다.

‘…삐졌냐?’

[아닙니다.]

‘미안하다. 내가 말하라고 해놓고 괜히 흥분했네.’

[괜찮습니다. 주인님의 트라우마를 알면서 괜한 업적을 권한 것 같습니다.]

‘난봉꾼도 좋지만 너무 선을 넘지 않고 싶다는 게 내 본심이야. 아까 말한 대로 세상은 넓고, 여자도 많고, 그 중에 처녀에 예쁜 애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로는 업적을 모두 채울 수 없으니까요.]

‘음….’

나의 사과에 다소 누그러졌는지 로시가 차분한 톤으로 말했다.

[주인님은 취향이 너무 확고합니다. 닥치는 대로 업적을 해치우는 게 아니라,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시니까요.]

‘그건 맞아.’

[물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실 필욘 없죠. 하지만 그렇게 하나둘 가리다간 결국 나중에 랭커에 근접하게 될 땐 하기 싫은 업적만 잔뜩 남아있을 겁니다. 콩밥이 먹기 싫다고 콩만 골라 뺐다가, 결국엔 콩자반을 숟가락으로 들이키는 경우랄까요?]

‘풉, 비유 찰진 거 보소?’

[암튼, 최종적으로 주인님이 판단하실 문제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업적에 덤비셔야 합니다. 해당 업적은 포기하시더라도 말이죠.]

‘오케이 알았어. 유념하고, 또 유념하지.’

그렇게 옥상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건물 밑 전봇대 아래 누군가 보였다. 설마하는 마음에 안력을 돋궈보니 다름 아닌 정음이었다.

‘오잉? 쟤가 저기서 왜 나와?’

정음은 내가 옥상위에서 훔쳐보는지도 모르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정음이 폰을 들었다.

부르르-

나에게 거는 전화였다.

"여보세요? 정음이니?"

-오빠. 안녕하세요.

정음이 긴장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옥상 난간 위에서 훔쳐보면서도 모르는 척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야?"

-아…. 저.

"응?"

-다름이 아니고 근처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생각나서요.

자세히 보니 정음은 손에 분홍색 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익숙한 포장이었다.

[저게 뭘까요?]

‘아이스크림이네. 버스커로빈슨33.’

[오호, 육정음양이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온 겁니까?]

‘그러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근처? 무슨 말이야."

-어…. 오빠 집이 이쪽 동네라고 했던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정음은 우리 집으로 한번도 초대한 적 없다. 집으로 불러들인 여자는 편의점주 허영자의 딸 하린과, 옆방에 살았던 서윤이 뿐.

정음은 내가 사는 동네 위치만 보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었다. 저런 귀여운 애를 봤나.

"아, 우리 동네 왔어?"

-네. 아니, 오늘 관장님이 휴가 가시는 바람에 시간이 비어서….

정음은 여전히 아이스크림 봉지를 들고 안절부절 했다.

갑자기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

"아, 진짜? 어떡하지? 나 잠깐 친구 만나러 밖에 나왔는데."

-아….

옥상에서 내려보는데 정음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든 아이스크림 봉지를 축 늘어뜨린 채 정음이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연락도 없이…. 혹시나 오빠 집에 있으면 근처 온 김에 얼굴 보려고 했었는데.

"그래? 곧 집으로 가긴 할 거야."

-정말요? 언제요?

"음…. 한 시간 뒤에?"

-한 시간요? …어, 그럼 제가 지금 알바 시간이 붕 떠서 할 일 없으니까 근처에서 기다릴게요.

"정말?"

-네. 괜찮아요.

[아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땡볕에 아이스크림 봉지를 들고 서 있는 사람한테?]

‘나도 어떻게 하는지 반응만 보려고 한 건데 장난이 심했나.’

정음이 다시 말했다.

-친구분 만나고 천천히 오세요. 전 그럼 근처에서 기다릴게요.

정음은 퍼뜩 아이스크림이 녹을 게 우려됬는지, 직사광선을 막기 위해 제품에 꼭 감싸 안았다. 진짜 저대로 한 시간을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음이는 너무 착한 거 같다.

"정음아. 갈 데 없으면 잠깐 우리 집에 들어가 있을래?"

-네,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주인도 없는데 어떻게….

정음은 잠깐 통화를 하면서도 이마에 연신 땀을 훔쳤다. 그만큼 여름날의 뙤약볕은 견디기 힘들 정도.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이스크림을 꼭 껴안고 있는 모습에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안되겠다. 장난 그만 쳐야지.’

"그래? 그럼 거기 잠깐만 서 있을래?"

-네? 무슨…

"아니 거기 전봇대 밑에 딱 서 있으라고."

-어? 오빠 혹시 저 보고 계셨어요?

정음이 황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난 재빨리 난간에서 벗어나 원룸 계단을 타고 날 듯이 내려갔다.

-오빠? …도훈 오빠?

"허, 헉, 잠깐. 잠깐만."

원룸 입구문을 열고 나가니 밑에서 정음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다. 속았다는 마음보다 나를 본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아…. 집에 계셨구나."

"미안. 우연히 창가에서 보여서 장난 친건데 속을 줄 몰랐네.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어?"

"어…. 저번에 우연히 위치를 들은 것 같아서요. 긴가 민가 했는데…."

"연락을 하고 오지 그랬어?"

"아, 아니에요. 저 오빠 이거."

정음이 품에 안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얼굴이 빨개지며 말하는 것이었다.

"오는 길에 너무 날이 덥길래. 오빠 생각나서 사왔어요. 이거 드세요."

"아니 뭘 또 이런 걸…."

나는 감동했다.

날이 덥다고 나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떠올리는 여자라니.

어찌 이런 여자를 보고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헷, 오빠 봤으니 됐어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정음이 꾸벅 인사를 마치더니 돌아섰다.

물론 이대로 그냥 보내면 사람도 아니다.

"잠깐만 정음아."

"네?"

"이거 너무 크다. 아이스크림."

"아…. 많이 드시라고 큰 거 샀어요."

"나 혼자 이거 다 못 먹어. 같이 먹자."

"네, 네?"

"우리 집에서 같이 먹자고."

"아, 아니에요. 괜히 말도 없이 방문해서…. 전 괜찮아요."

"아니야. 들어와.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추레하긴 하지만."

"진짜 괜찮은데…."

난 정음의 손을 잡고 무작정 끌어들였다.

생각해보니 이제껏 다른 여자를 부르지 못했던 건, 옆집에 살았던 서윤이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가 없으니 정음을 원룸으로 불러도 아무 상관없다.

"아…아, 죄송해요 괜히 민폐를."

"뭘 또 민폐야. 누추하지만 방문해 주셔서 감사지."

원룸에 들어가 정음을 맞이했다.

정음이 우리 집에 오니 신혼집이 된 기분이다.

< 1108. 그해, 여름-23-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흑흑, 잠들어서 아침에 올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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