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22화 (1,089/2,000)

< 1105. 그해, 여름-20- >

사실 도훈은 유난히 돈에 초탈한 편이었다.

대다수 소시민들이 부자를 목표로 열심히 사는 것에 비하면 그의 목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특히 전생에 돈은 벌 만큼 벌어봤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는 전생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그 덕에 돈에 쪼들린 기억이 없었다. 따라서 환생한 두 번째 삶에서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보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흐음, 이건 제법 구미가 당기는데?'

하지만 소영의 제안에는 그도 솔깃했다.

[웬일입니까? 주인님이 돈벌이에 흥미를 다 보이시고?]

'아니. 전생에 나는 주로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거든.'

[아하.]

'근데 이건 전혀 모르는 분야잖아. 그래서 배워보면 재밌을 것 같아.'

전생의 도훈이 부를 획득한 과정은 대한민국에서 부자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대기업 연구원이라는 고소득 직장인이 되어 알뜰살뜰 종잣돈을 모으고, 적당한 입지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몇 년 뒤 뻥튀기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공격적인 레버지리 투자로 몇 번 재미를 보고 나니 금세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난 사실 그렇게 대단한 부자까진 아니었어. 돌이켜보면 그냥 성공한 주택 투기꾼에 불과했지. 처음 분양받은 아파트 주변으로 몇 년 뒤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갑자기 아파트 가치가 두배로 올랐거든.'

[오호 두배나요?]

'그걸 담보 잡힌 뒤 이번엔 재건축 아파트 매물을 사들였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질질 끌던 인허가가 덜컥 나버린 거야. 거기서 또 두배.'

[또 두 배요?]

'그 뒤로는 상가도 사고 오피스텔도 몇 개 갖고 그런 식으로 문어발 투자를 했지.'

[그럼 주인님도 나름 재능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야. 솔직히 투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해. 그건 투기지. 게다가 내가 잘해서 된 게 아니라 운이 좋아서 얻어걸린 거니까. 부동산 상승장에서.'

[어쨌든요.]

'사실 부자 중에서 제일 별로인 게 땅부자, 아파트 부자야.'

[왜요?]

'부동산은 환금성이 떨어지거든. 쉽게 말해 돈을 바닥에 깔고 앉은 셈이지. 세를 내주고 받아봐야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차익 실현 하려면 나중에 양도소득세도 내야하고…. 암튼, 부자라고 해도 막상 입고 다닌 옷이나 차가 그리 좋지 못했던 이유가 재산이 다 건물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어. 부자인데, 부자답게 살지 못하는 거지.'

[그렇군요.]

'주식은 또 다르잖아. 좋은 투자처를 잘만 고르면 2배 정도가 아니가 몇 십배까지 뛴다고. 막말로 연속으로 상한가 3번만 쳐도 3일 만에 두배를 튀기는 투자니까.'

[헌데 왜 주식은 안 하셨습니까?]

'그쪽으론 영 재능이 없더라고.'

[재능요?]

'나도 나름 머리 좋고 수계산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주식은 머리랑 아무 상관없었어. 아니 대한민국에서 머리 좋은 사람은 주식판에 다 모여있다고 보면 돼. 하지만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지.'

[소영이 그 따로 잇다는 사람인가요?]

'그런 것 같아. 이건 배워볼 가치가 있어.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소영처럼 부자가 되고 나면 아예 돈걱정을 안 하고 살 수도 있는 거잖아.'

[지금도 충분히 많으신데요?]

'대학생치고 여유가 있다 뿐이지, 돈이 돈을 벌어다 주는 수준은 못 이르렀으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진짜 부자란 이런 거야. 빌게이츠가 생일 날 하루에 50억씩 나가는 초호화 요트를 타고 일주일간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다고 쳐. 일주일이면 350억을 쓴 거 잖아.'

[그렇죠.]

'근데 그 사이 보유한 주식이 올라서 500억을 벌었네? 그럼 놀고 먹었는데 150억이 더 생긴 거잖아. 그런게 진짜 부자지.'

[오…. 그럼 주인님은 이번 생에 또 다시 부자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일하지 않아도 알아서 돈을 벌어다 주는 시스템을 마련해 놓겠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업적이나 미션에만 집중할 수 있거든.'

[하긴 플레이어를 하기에도 부자인 편이 낫겠군요.]

'그렇지.'

도훈이 한참 로시와 대화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본 소영이 물었다.

"어때? 고민은 다 끝났어?"

"네. 근데 어떻게 주식을 배우죠?"

도훈의 질문을 승낙으로 받아들인 소영이 기뻐하며 말했다.

"일단 소액부터 시작해."

"소액요?"

"처음부터 대박을 노려선 안 돼. 천천히 시스템을 이해하면서 용어들을 숙지하는 거야. 공매도니, 주봉이니 월봉이니, 콜금리니 옵션이니 하는. 주식에는 많은 용어들이 있거든."

"아…."

"그렇게 연습 과정을 거치고 나서 종목 선택하는 법부터, 손절 악절을 배워야 해. 주식은 판단의 싸움이니까."

"누나는 진짜 주식 고수 같아요."

"아직 멀었어. 나도 아버지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거야."

"아버님이요?"

"울 아버진 회사 생활 시작하면서 주식을 공부했데. 어지간한 주식쟁이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투자한 셈이지."

"근데 왜 전업 투자자를 안 하셨데요?"

"그게 중요한 거야."

"네?"

소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주식으로 재미를 보더라도 절대 직장을 놓아선 안 돼. 하루종일 차트보고 단타 치면 돈 금방 벌 것 같지? 전혀 아니야. 주식은 진득한 사람이 이기는 거야. 주식 격언에 그런 말이 있거든. 단타로 흥한자, 단타로 망한다. 차라리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주식을 한 발 떨어져서 볼 수 있거든. 최악의 경우 망해도 비빌 언덕이 남아 있는 거지. 그래서 전업은 비추."

"여튼, 네가 진짜로 배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내가 알려줄게. 돈을 얼마 주는 것보다 차라리 돈을 어떻게 버는 지를 알려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잠깐만요. 근데 누나한테 제가 이렇게 공짜로 배워도 되는 거예요?"

소영이 씩 웃었다.

"이게 공짜라고 생각해?"

"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이 말했지. 주식에 있어선 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 그와 한끼 점심 식사가 얼만지는 알아?"

"얼만데요?"

"우리 돈으로 20억."

"이, 이십억이요?"

"그렇지. 그런 사람하고 점심을 함께 하면서 1시간 남짓 조언을 듣는데만 그만한 돈이 들어."

"그걸 진짜로 신청하는 사람이 있어요?"

"많아. 너무 많아서 추첨을 해야할 정도야.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거든."

"아…."

"당연히 나도 공짜로 알려주진 않을 거야. 대가가 없는 배움은 값어치가 없으니."

"그럼 저는."

"별거 없어. 가끔 우리 집에 와서 나랑 이렇게 식사하고 가는 거야."

"혹시 식사만…."

"…일리는 없겠지?"

도훈은 불쑥 소영에게 회초리로 등짝을 맞는 장면을 떠올렸다. 주식 공부의 대가는 소영의 취향인 SM 플레이에 참여였다.

[와, 주인님 이건 좀….]

'왜? 그녀 입장에선 충분히 제안할 수 있는 딜인데.'

[설마 채찍을 맞으면서 주식을 공부하시겠다고요?]

'좀 맞아주면 되지. 이걸로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흐음. 그거야 주인님의 선택이니까.]

'어쩌면 굉장히 운이 좋은 걸지도 몰라. 주식 고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면서 몸으로 때우는 정도라면.'

"할게요!"

"역시 보기보다 똑똑하구나. 넌 방금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거야."

소영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훈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오히려 안심했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라면 분명 실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죠? 뭐부터 배워야 해요?"

"급할 필요 없어. 시간은 충분하니까. 일단 주식 계좌부터 개설해. 그리고 상장된 주식중에 아무거나 넣어."

"아무거나요?"

"그래. 아무거나."

"종목 선택은 따로 안해주시고요?"

"후훗. 시키는 대로만 해. 그리고 보름 뒤에 다시 만나는 걸로."

"그러니까 계좌 열고 그냥 아무 주식에나 투자하고 보름 뒤에 보자는 말씀이죠?"

"그렇지. 처음에는 그게 전부야."

소영의 첫 번째 가르침은 너무나 이상했지만, 도훈은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키는 대로 할게요."

"잘했어. 가르침을 줬으니 그럼 오늘의 대가를 지불해야지?"

"네?"

소영이 도훈의 팬티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충분히 휴식을 취한 거 같은데?"

그날 밤 도훈은 소영에게 수십 번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

다음날.

계좌 개설을 끝내고 스마트 폰에 HTS 프로그램까지 설치한 도훈은 소영이 시키는 대로 아무거나 주식을 골랐다.

'100만원이면 충분하겠지?'

[가진 돈이 그렇게 많으신 분이 고작 100만원이요? 주인님 지금 억단위로 들고 계신거 아닙니까?}

'소영에게 들키면 곤란하잔항. 택배 상하차하는 가난한 대학생이 무슨 돈으로 그만큼 쏟아 붓겠어? 일단 눈가림용이야.'

[근데 왜 아무 주식이나 사라고 했을까요?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내 생각에 소영은 내가 주식을 처음 해본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처음이 아니셨습니까?]

'아닌데?'

[네?]

'말했잖아. 재능이 없었다고. 당연히 전생에 주식에도 손을 대봤지.'

[그래서요?]

'1억 남겼어.'

[오오오!]

'2억으로 시작해서.'

[으아니!]

'진짜로 재능 없다니까 그래. 소영은 아마도 주식을 보유한 기분을 느껴보라고 시킨 것 같아.'

[기분이라뇨?]

'원래 처음 주식 사면 하루종일 차트만 보고 있거든. 하루는 파란불. 하루는 빨간 불. 그렇게 일희일비하면서 중독되는 거야. 그것에 초연해진 뒤에야 제대로 된 투자를 시작할 수 있지.'

[차라리 주식을 해봤다고 하시지 그랬습니까? 이미 시행착오는 충분히 겪으신 것 같은데요.]

'기초부터 배우고 싶어서 그랫어. 설마 이런 지시를 내릴 줄 누가 알았나.'

소영이 내준 미션을 마친 도훈은 병원에 주차된 차를 끌고 미나를 찾아갔다. 어느덧 여행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점검을 위해서였다.

원장이 된 미나는 수업을 강사들에게 맡기고 잠시 짬을 내 도훈과 커피숍에서 만났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수업 마치고 급히 샤워하고 오느라."

"아,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아니야. 도훈이 네가 기다리는데 어떻게 그래?"

오랜만에 만난 미나는 여전히 예뻤다. 평범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빼어난 몸매가 감춰지질 않았다. PT강사를 할 땐 여성치곤 살짝 어깨가 넓다고 생각했는데, 필라테스 원장이 되면서는 실루엣도 더 여성스럽게 변했다.

'여전히 예쁘네, 미나는.'

도훈이 미리 시킨 잔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어요. 이거 잘 드시죠?"

"응, 고마워. 근데 테이크 아웃으로 시키지."

"네?"

"여기서 얘기하려고?"

"그럼요?"

미나가 귀엽게 웃었다.

"내 머리좀 봐. 완전 미역 됐잖아. 이거 좀 말려야지 싶은데."

"머릴 어디가서 말려요?"

"드라이기가 있는 곳을 알아."

"드라이기라면…."

도훈은 미나와 만나자 마자 모텔로 끌려갔다.

미나는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도훈을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도훈아."

"누, 누나."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구나."

아직 저녁 수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미나는 2시간 정도 짬을 낸 상태였다. 금방 또 학원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먹고 할래, 하고 먹을래?"

"네?"

"아잉, 나부턱 먹을 거냐구, 여행 얘기부터 할 거냐구."

"아아…."

도훈은 시작부터 섹스를 원하는 미나를 십분 이해했다.

'하긴 나야 맨날 다른 여자랑 자고 다니지만, 미나는 나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단 얘기부터 할까요. 어차피 모텔 왔으니."

"그래. 용무부터 마무리 하자."

미나가 어깨에 걸치고 온 에코백에서 아이패드를 꺼냈다. 두 사람은 아이패드를 두고 모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테이크아웃으로 바꿔 담은 커피도 함께였다.

[그냥 커피숍에서 모텔로 장소만 바뀐 것 같은데요?]

'그게 중요하지. 커피숍에선 커피만 마실 수 있지만, 여기선 언제든 섹스가 가능하니까.'

[아하.]

"일단 이게 일정표야."

미나가 아이패드에 작성된 표를 띄웠다.

표에는 출발 일시부터 여행 코스, 그리고 투숙할 호텔까지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와, 이걸 누나가 다 짠 거에요?"

"응, 한 번 보라고."

도훈이 잠깐 둘러봤지만, 재수학원 시간표처럼 숨쉴틈 없는 일정이었다. 심지어 밥 시간도 정확히 1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이동 코스도 여유가 전혀 없게끔 빡빡했다.

'가만. 이런 일정이면 도저히 짬을 못 내는데?'

[지나치게 타이트 합니다. 이 스케줄 대로면 주인님은 여행내내 미나양과 붙어 있어야 할 겁니다.]

도훈이 싸이판 여행을 승낙한 이유는 미나와 여행을 가려는 것도 있었지만, 외국에서 수행할 수 있는 미션이나 업적을 해치우고자 하는 목적도 함께였다.

특히 장소가 바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미션의 특성상, 돌발 미션이 생성될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이러면 곤란하겠어. 숨 쉴틈은 있어야지.'

"음…. 엄청 고생하셨을 것 같은데요."

"응. 몇 일 동안 계속 인터넷 찾아가며 알아본 거야. 재밌겠지?"

"네, 그렇긴 한데 너무 타이트 하지 않을까요?"

"응? 타이트해?"

"계획대로 되면 좋은데, 이러면 하나만 틀어져도 계속 빵구 날 수도 있잖아요. 관광도 좋고 레져도 좋지만 살짝 여유를 두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도훈이 차분하게 설득하자 미나도 납득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너랑 같이 가는 게 너무 좋아서 내가 너무 하고 싶은 걸 다 집어 넣었나봐."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중간에 몇 개만 빼면 더 여유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미나는 고생해서 짠 여행 계획을 수정하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도훈에게 뭐든지 맞춰줄 셈이었다.

< 1102. 그해, 여름-20-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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