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21화 (1,088/2,000)

< 1104. 그해, 여름-19- >

"몇 명이라뇨?"

"아무리 봐도 여자를 많이 만나본 것 같아서."

"아깐 숫총각이라면서요?"

"그건 네가 감쪽같이 속였으니까 그랬고."

도훈은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불과 반년 사이 너무도 많은 여자를 만났다. 손발을 다 합쳐도 못 새는 수준이 아니라, 머리털로 뽑으면 한쪽에 원형탈모가 생길 지경이었다.

'갑자기 물어보니 말문이 막히네.'

[너무 많아서요?]

‘인기도 많은데 잠깐 스쳐 간 여자랑 나름 지금까지 이어온 여자랑은 또 구분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어장관리에 들어간 여자를 기준으로 하면 되려나?’

[아뇨. 어장관리 어플의 특성상 일정 호감도 이하가 되면 자동으로 삭제됩니다. 여성 편력을 관라히기엔 적절한 어플은 아니죠.]

‘일회성 만남을 모두 빼더라도 계속 이어온 사람들만 대충 서른 명은 훌쩍 넘을 텐데….’

도훈은 질문이 들어온 김에 자신이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들 수를 헤아려 보았다. 어차피 그에게 여자란 ‘벌써 잔 여자’ 와 ‘나중에 잘 여자’ 밖에 없었으므로 대부분 이름을 아는 여자라면 관계를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장의 상당수를 이루는 것은 당연히 국성대학교라는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

집행부 팔선녀를 포함한 1학년부터 1학년부터 4학년을 아우르는 체육과 여학생들. 교직원인 조교 강민주와 손은주 교수. 그리고 각종 조모임이나 교생실습, 소개팅 등으로 만난 여자들이 있었다.

‘캠퍼스 관련 인물만 해도 얼추 스무명은 넘겠는데?’

[대체 대학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공부도 잘 했거든? 카사노바의 숙명이라고 해두자.’

대학 외의 인맥은 더 많았다.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학교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늘어났다고 하면 대학 밖에 만난 사람들은 미션이나 업적을 통해 스스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이 경우엔 1회성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아 헤아리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아, 이거 원 빡대가리라 너무 힘드네. 기억이 가물가물해 이젠.’

[매번 파트너가 바뀌는 실정이니 당연히 헛갈릴 수밖에요. 빡대가리가 아니라도 힘들겁니다.]

‘뭐지? 뭔가 기분 나쁜데.’

[기분탓입니다.]

‘우선 일적으로 만난 사람들부터….’

도훈으로 환생 후 첫 상대는 당시 알바하던 편의점 사장 허영자. 도훈을 유난히 아끼던 그녀는 후에 최초로 호감도 100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후 허영자의 딸 교대생 하린, 같은 알바생이던 전수연, 남자 알바생이던 김기춘이 여친 수아, 그리고 거기서 만난 나예림까지. 대부분의 만남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심지어 하린과 예림은 최근까지도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야, 이건 이런 식이면 도저히 정리가 곤란하겠는데. 편의점 알바 하나만으로 엮인 사람이 대체 몇이야?’

[그게 원래 주인님 특기지 않습니까?]

‘뭐?’

[새끼치기?]

‘야이 씨, 말 좀.’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으므로 반발할 수 없었다. 인연에 인연을 묶어 가능한 모든 여자들을 죄다 따먹고 다닌 것이다. 이게 비유하면 도훈이 여성 회원이 대부분인 요가학원 같은 곳을 등록한다면, 한 달 뒤엔 회원 전부와 잘 수 있는 정도였다. 한마디로 발정난 개였다.

‘안 되겠어. 오늘 내로 정리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이야. 언제 날 잡고 한 번 리스트 뽑아봐야지. 일단은 대충 얼버무리자.’

안소영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은 적당히 둘러댔다.

"몇 명 안돼요."

"설마 열 명도 넘어?"

"에이, 그래도 제가 스물 넷에 군대까지 다녀왔는데…."

"왜? 고등학교 때부터 쭉 사귀면 가능하지. 1년에 두 세명씩 갈아치우는 애들도 있잖아?"

물론 도훈은 1년에 두 세명이 아니라 하루에도 두 세명씩 따먹고 다니긴 했지만, 소영의 말을 부정했다. 굳이 여자 앞에서 스스로의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것은 미련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관대한 여자도 자기외에 다른 여자에 대해선 본능적인 적개심을 품기 마련이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실제로 사귄 애들은 많지도 않고.‘

소영이 말꼬리를 잡았다.

"사귄 애들은 아닌데, 할 건 다했다는 뜻으로 들리네?"

"음… 뭐. 그거야."

"와, 그럼 원나잇? 아님? 섹파?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소영이 혀를 끌끌찼다. 그녀는 SM에 집착하는 변태긴 했지만, 아무 남자나 닥치는 대로 만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죽은 전 남친을 빼고선 이후 만난 사람들은 손에 꼽았다.

실제로 도훈 역시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관계한 남자일 정도였다.

[의외로 보수적이군요, 이런 면에선.]

‘그러게. 어이가 없네. 캣우먼 타이즈에 채찍질하는 여자가 만남에는 보수적이라니. 아이러니하구만.’

[주인님은 외구에서 살다 온 여자들에게 유난히 문란한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가 잦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랬어?’

[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그건 안 좋은 고정관념입니다.]

‘하긴. 내가 좀 심하긴 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몸만 이십대지 실제 정신연령은 40대 꼰대인 걸.’

[평생 꼰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편견과 선입견을 거두고 나면 상대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오케이. 인정. 그건 내가 부족했다.’

로시의 조언을 듣고 나서 도훈은 소영을 달리 보았다.

따지고 보면 소영은 정말로 대단한 여자였다.

커리어만 보면 지금껏 만난 여자들 중에서 최상위.

부와 미모, 지성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비록 첫 남자를 잘못 사귀어 SM에 중독되고 말았지만, 그녀의 훌륭한 커리어에 비하면 한 점 티끌에 불과했다.

"그냥 평범한 수준인 것 같아요."

"근데 그렇게 섹스를 잘해?"

"예?"

"내가 그 질문을 왜 물어봤냐면 네가 나이답지 않게 너무 잘해서 그랬어. 경험이 정말 많은 것 같아서."

30대인 소영은 당연히 경험이 많았다.

단언컨대, 도훈은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펨돔을 해야 느끼는 그녀가, 일방적으로 도훈에게 두들겨 맞은(?) 셈인데도 절정을 느낀 것 역시 도훈의 뛰어난 섹스킬 때문이었다.

"음 뭐랄까…. 어느 정도는 타고 난 것 같아요."

"타고나다니?"

"섹스요. 원래부터 잘했어요."

"말도 안돼."

"왜 말이 안 돼요? 날 때부터 재능이 특출난 경우가 있잖아요. 10살도 안 됐는데 기가 막히게 그림을 잘 그린다던가, 가수 뺨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재활 분야니까 운동선수들 많이 보셨을 거 아니에요? 몸 쓰는 분야에서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 있던가요? 아니 재능이 부족한데 프로가 된 경우가 있었어요?"

도훈의 반박에 소영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섹스도 엄밀히 말하면 몸으로 하는 스포츠의 일종이니 재능을 타고났다는 말도 일리가 있네.’

소영은 팬티만 입은 도훈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외과의 계통에 근육과 인대를 주로 다루는 소영은 도훈의 몸을 본 순간 상위 1%임을 직감했다.

남들은 겉으로 드러난 매끈한 근육에만 집중한다면 소영은 마치 빼어난 육질을 가진 1등급 고기를 보는 것처럼 도훈의 몸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

‘대단해. 타고난 골격도 우수한데, 끊임없는 단련으로 온 몸을 근육으로 뒤덮었어. 특히 코어 근육 쪽은 거의 프로 스포츠 선수 급이야.’

소영은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는 몇 없는 미식축구 선수들의 재활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도훈의 몸은 마치 미식축구의 쿼터백처럼 날렵하면서도 단단했다. 인간계 최고라 불리는 미식축구선수에 육박하는 피지컬을 보유한 것이다.

‘하긴 저 몸매에, 저 물건이면.’

어마어마한 피지컬 중에서도 특히 남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동아시아계에선 돌연변이라 불릴 정도로 커다란 대물. 물론 외국에서 봤던 백형, 흑형 중에서도 도훈만한 사이즈는 있었지만, 도훈처럼 단단한 물건은 보기 드물었다.

‘저런 몸에 하물며 정력까지 받쳐주니…. 타고난 건 맞네.’

"흠 뭐. 틀린 말은 아니네. 하필 그런 재능으로 상하차 알바를 하고 있다니…."

"상하차 알바가 어때서요?"

"도훈이 네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분명 운동선수로 대성했을 거야. 거긴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운동을 시키거든. 그럼 대학도 장학금 받고 갈 수 있고. 한국이라 재능에 꽃을 피우지 못한 게 아쉽네."

"괜찮아요. 저는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게 몸 상해가면서? 그냥 앞바 관두고 지금부터라도 공부에 집중하는 게 어때?"

"공부요?"

소영은 도훈이 몸 쓰는 일만 해서 공부를 잘 할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1학기 단대 수석 장학금을 받은 도훈으로서는 그러한 선입견이 억울할 뿐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그런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네?"

"보다시피…. 난 돈은 충분하거든."

"잠깐만요. 근데 선생님이 절 왜 도와줘요?"

"보기 안타까워서. 재능을 그렇게 썩히는 게."

소영은 진심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이미 1억원 이상을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했는데, 지금도 한달에 몇 백씩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었다. 가난한 고학생인 도훈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도 그녀에겐 기부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뭐…. 자랑은 아닌데 보다시피 난 돈은 전혀 부족하지 않거든. 일종의 장학금이라고 생각해도 돼."

"근데 진짜 이렇게 돈이 많으신 거예요? 의사로 이렇게 벌 수 있나요?"

"아니. 의사로 번 거 아니야. 의사 월급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한다고."

"그럼요? 집이 원래부터 부자에요?"

"아니. 그것도 아닌데."

"네?"

"주식 했어."

"예, 예?"

"아버지가 미국에서 주식으로 크게 성공하셨어. 미국 시장은 확실히 변동성이 크더라고. 미국 건너가셔서 투자한 주식이 진짜로 대박이 났거든."

"아!"

‘세상에. 주식 부자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러게요. 근데 주식으로 그 정도로 벌 수 있는 거였습니까?]

‘가능하지. 부동산은 끽해야 2배 3배 먹는 거잖아. 진짜 30년 묵혀서 10배 먹거나. 근데 주식은 운만 좋으면 몇 달 만에 10배 100배도 먹거든.’

[배, 백배나요?]

‘어. 우리나라에선 대게 동전주나 작전주가 그렇지만, 미국은 진짜로 s&p 500 안에 대형주가 그 정도로 터질 수도 있어. 구글이나 아마존만 봐도 뭐….’

[정말로 대단하군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니까.’

소영은 쑥스럽게 말했다.

"그냥 운이 좋았어. 한때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주식이 완전히 곤두박질 친적이 있거든. 그때 아버지가 영끌로 배팅을 하셨지."

"승부사셨군요."

"응. 그 뒤로 주식시장이 회복되면서…. 암튼 그래. 어쩌다 보니 부자가 된 케이스랄까?"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그건 투자의 성공이죠."

"어쨌든 운이 따른 거야."

"근데 몇 배나 오른 건데요?"

"정확히 말하긴 곤란하고, 그냥 평생 돈을 벌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만…."

"그럼 누나도?"

"응, 아버지가 내 몫으로도 주식을 많이 사두셨거든. 주식으로 증여하는 게 세금이 싸다면서 일찍 주셨어."

"우와, 잠깐. 그럼 누나는 의사는 왜 하시는 거예요? 지금부터 평생 놀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건 아니지."

소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도훈아. 넌 지금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돈이 세상에 전부는 아니야. 네 말대로면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이 왜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회사를 계속 경영하겠니? 그냥 CEO에게 맡기고 은퇴하면 그만인 것을."

"아…."

"나에게 의사는 평생을 준비한 직업이야. 돈이 많은 것과 별개로 난 이쪽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일종의 명예욕이랄까?"

"그렇구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소영은 이제껏 만난 여자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괴물같은 커리어도 그렇지만, 인생관이나 포부가 한차원 높은 사람 같았다. 업적을 위해 해치우려던 도훈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있었다니….’

[어쩌면 전생의 주인님 이상인것 같은데요?]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재벌가 딸도 만나고, 알부자들도 만났지만 대부분 타고난 부를 물려 받았을 뿐인데 소영이는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 했잖아. 심지어 직업도 의사고.’

[주인님이 꿀리는 모습은 처음보는 군요.]

‘꿀린다기 보다 일종의 경외심이지. 남녀를 떠나서 대단한 사람이니까.’

[그 대단한 사람이 주인님께 호감을 보인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 하지만 또 그 여자위에 올라탄 것은 나라고 해둬.’

소영은 도훈의 미적거리는 태도에 아차 싶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소리를 스폰쯤으로 오해해 자존심을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 내가 실수를 했구나. 상하차 알바를 하면서도 열심히 사는 대학생인데.’

소영이 급히 덧붙였다.

"장학금이 좀 그러면 내가 돈버는 기술이라도 알려줄까?"

"돈버는 기술요?"

"응."

"뭘로요?"

"도훈이 너 나한테 주식 배워볼래?"

"주식이요?"

"아깐 운이 좋다고 했지만, 실은 아버지 밑에서 오랫동안 주식을 공부했어. 국제 재무설계 자격증도 딸 만큼. 어때? 살면서 꼭 필요한 기술 같은데."

흥미로운 제안에 도훈이 귀를 솔깃했다.

< 1104. 그해, 여름-19-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조금 늦었습니다.

주말간 연재됩니다.

1100화 이벤트도 주말쯤 종료하겠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