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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113화 (1,080/2,000)

< 1096. 그해, 여름-11- >

"응, 당연하지."

미나는 통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회원들을 향해 운동을 마무리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필라테스 운동은 규격화된 루틴이 존재했고, 다행히 PT의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에 회원들은 눈치껏 스트레칭에 들어갔다.

미나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출국 날짜는 전에 말한 그대로야. 출국수속 밟아야 하니까 비행기 출발 3시간 전까진 공항 도착해야 하고."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일찍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일이다. 이에 미나는 대략 한 달 전 이미 도훈에게 여권 번호를 전달받아 왕복 예약 티켓팅을 마친 상태였다.

-네, 제가 혹시 더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요?

"음, 숙소랑 차량 렌트도 시간나는 김에 다 해놨어. 싸이판 도착시간이 늦은 저녁이라서 공항에서 바로 호텔까지 픽업 서비스받기로 했고…. 또 뭐있지? 가서 할 체험 프로그램도 한국서 미리 예약하면 저렴하더라고. 그것도 날짜별로 하나씩 신청해 놨지."

도훈이 내용을 듣고 있자니 따로 준비할 게 하나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준비가 마무리된 상태였다. 도훈은 그저 몸만 가도 충분한 정도랄까?

-그걸 다 혼자하셨어요? 저랑 같이 하셔도 되는데….

"에이, 뭘 또. 너 바쁜 것 같아서 틈틈이 짬나는 대로 했지. 참, 환전도 다 끝냈어. 혹시 몰라 도훈이 너 쓸 것까지 넉넉하게 했으니까 별도로 환전은 안 해도 돼."

-그럼 모두 얼마나 들었어요? 제 몫은 드릴게요.

"괜찮아. 그냥 내가 내도 돼."

미나가 한사코 거절했지만, 도훈은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팽팽히 맞섰다.

-이러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서요.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제 몫은 제가 내겠다고.

"아이참,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같이 가는 여행인데 신세 지기 싫어서요. 준비도 누나 혼자 다 하고, 돈도 누나가 다 대면 저는 진짜로 몸만 가는 거잖아요.

도훈의 어른스러운 대답에 미나가 흡족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나에게 싸이판 여행 경비는 크게 부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한 달 월급을 고스란히 꼬라박을 만큼 큰돈이겠지만, 이미 미나는 평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헬스 트레이너를 할 적에도 수많은 개인 회원을 거느리며 상당한 수입을 자랑했지만, 잘 나가는 필라테스 학원의 원장이 된 지금은 그때보다 두 배이상 너끈히 벌었다.

특히 최근 들어 SNS를 통해 학원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부쩍 수강생이 늘어난 상황. 강사도 2명이나 더 선발해 여름 휴가 중에도 시간표가 풀로 찰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해."

-예?

"도훈이 넌 몸만 오라고.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무슨 소린 줄 알지?"

-아니, 누나….

갑작스러운 색드립에 도훈이 난처해지자 미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대신 니가 몸으로 하는 건 다 해야지. 캐리어도 끌고, 차도 운전하고, 위험한 상황 되면 나 지켜주고. 혹시 아니? 외국 가서 무서운 사람들이라도 만날지? 여자끼리 가면 얼마나 겁나는데. 그래도 도훈이 너랑 같이 가니까 그런 걱정 없이 안심하고 맘 편히 다닐 수 있잖아. 그걸로 넌 충분히 네 몫 하는 거야."

미나가 몸뚱이만 가는 도훈의 의의를 열심히 설명했지만, 도훈도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러면 제가 너무 불편해요. 제 비행비 값이라도 내게 해주세요.

"흠. 정 그렇다면…. 알았어, 지금은 잘 기억 안 나니까 나중에 찾아보고 깨톡 보내줄게"

-네, 누나. 그럼 출발 전까지는 제가 따로 준비할 건 없는 거죠?

"개인 짐만 잘 챙겨. 수하물 신청되어 있으니까 큰 사이즈도 상관없고."

-전 여행 갈 때 짐 크게 안싸는 편이라서요. 기내반입용 하나 들고 갈게요.

"그래. 또 혹시 모르니까 출국 이틀 전에는 만나서 같이 최종으로 점검해 보자. 여행 코스도 확인해야 하고."

-이틀 전이면 이번 주 금요일요?

"응. 시간 비워놔. 아니다. 너 방학이지? 무조건 미워. 알았지?"

-알았어요 누나. 깨톡 꼭 보내요. 안 보내면 저 화낼 거니까.

"응, 응! 그때 봐."

통화를 끝낸 미나는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폰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 속에 도훈이 들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쩜….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이렇게나 듬직할까? 보통 애들이라면 공짜로 해외여행 보내준다면 얼씨구나 할 텐데 자기 몫은 내겠다네.'

미나는 도훈이 무척 기특했다. 실은 몇 푼 되는 돈보다는, 신세 지지 않으려는 그의 책임감 있는 태도에 더 감동했다.

사람이 어느 순간 잘 나가게 되면 주위에 축하와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시기와 질투를 넘어 추접하게 빌붙으려는 사람이 파리처럼 꼬이는 게 다반사.

그때마다 미나는 싫은 소릴 못해 애써 웃어넘겼지만, 속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하던 중이었다. 못 나갈 땐 안중에도 없다가, 잘나가니까 친한척하는 사람만큼 가증스러운 게 없었다.

그런데 겨우 대학생에 불과한 도훈이 끝끝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자기 몫을 내겠다고 하자, 오히려 더욱 퍼주고 싶은 마음만 강해지는 것이었다.

'후훗-. 나중에 돈 받으면 두 배로 더 비싼 선물 해줘야지. 도훈이 애가 나이답지 않게 속이 참 깊단 말이지?'

미나는 이미 도훈에게 홀딱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이든 도훈에게 잘해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깐 도훈을 짐꾼처럼 부린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어차피 자신이 다 할 생각이었다.

'도훈이는 내가 우쭈쭈 업어 키울 거야.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남자니까.'

미나는 도훈과의 오붓한 여행을 생각하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뭐가?'

[미나 양이 주인님을 저토록 끔찍이 아끼니 말입니다.]

'어쩔 수 있나. 알아서 퍼준다는데.'

[그만큼 주인님께 푹 빠진 거겠죠.]

'뭐, 마성의 매력 때문이겠지. 그나저나 여행 준비는 따로 할 게 없다니 가서 할 업적이나 점검해 보자. 싸이판에 가서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업적이 뭐가 있지?'

[우선 진행중인 백마, 흑마 업적이 있습니다. 이제 슬슬 정리하실 때도 된거 같군요.]

'외국이니 예쁜 흑마도 분명 있겠지?'

[그렇게 자꾸 까다롭게 구시니 성사가 안 되는 겁니다.]

'왜? 나도 취향이란게 있다고. 아무리 업적이 걸렸어도 저번 비치발리볼 대회장서 본 것 같은 흑마는 절대로 사양이야.'

[허어, 이리 간절함이 없어서야.]

'진짜 농담 않고 앞에 서면 잦이도 안 설 듯. 불가.'

[그 모순마저 이겨내는 게 카사노바의 숙명이란 말입니다!]

'됐고, 다른 업적은? 외국인 관련 업적 하나 더 있지 않아? 무슨 도가니탕인가 뭔가 하는.'

[인종의 도가니탕 업적 말씀이시군요. 현재 일본인 교환학생 료코양을 통해 류큐인이, 모텔 크리스티나를 통해 슬라브인까지 달성된 상태입니다.]

'그럼 남은 나머지 인종은?'

[라틴 계열입니다.]

'쌈바의 여인?'

[아니, 아재….]

'여튼 이건 적당한 대상만 생기면 무조건 도전하는 걸로.'

[네. 외국 나가는 김에 염두해 둘 만한 업적들입니다.]

'그외 또 가능한 건?'

[그 밖에는 대부분 일상적인 업적입니다. 한국이든 싸이판이든 나라에 상관없이 도전할 수 있는 업적이죠. 아, 하나가 더 있긴 한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뭔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라는 업적입니다.]

'어째 업적 명부터 심상치 않은데? 설명해봐.'

[다른 대물과 정면으로 정력 승부를 벌이는 업적이랄까? 하지만 조건이 몹시 까다롭기 때문에 성사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건데?'

[일단 20Cm 이상의 자연산 대물남을 찾으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국내보다는 외국에선 찾을 확률이 높겠죠?]

'20Cm면 나보다 크잖아? 그리고?'

[그다음 하룻밤 동안 정력 대결을 펼치는 겁니다. 동시에 스타트를 해 끝날 때까지 누가 더 많은 정액을 분출하느냐로 승부가 판가름 납니다.]

'아니, 그건 완전 또라이 짓인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걸 과연 도전하라고 만든 업적인지….]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딜을 걸어서 누가 더 많이 싸냐로 한 판 붙으라는 소리지?'

[네. 관계 시간 및 횟수, 그리고 사정량은 업적 대상이 지정되는 순간 자동으로 카운트됩니다.]

'저번에 그 지스팟 업적 같은 거군.'

[네, 똑같습니다. 다만 그땐 여성의 분수 분출량을 기준으로 했다면, 이번엔 주인님의 정액을 기준한다는 것이죠.]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조건을 조성하는 것 자체가 몹시 까다롭겠어. 외국산 대물을 찾는 것도 힘들지만, 찾아서 한판 붙자고 설득하는 건 진짜….'

[그래서 말씀을 안 드리려고 했습니다.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무척 어려울 것 같아서요.]

'오케이, 일단 알고만 있을 게.'

[그 밖의 업적들은 상황을 봐서 유동적으로 결정하셔야 합니다. 여행 코스에 따라, 그리고 호텔에 같이 머무르는 손님에 따라 업적이 가능한 경우에 즉각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고.'

싸이판 여행 계획을 대강 마무리한 도훈은, 이번엔 출국 전까지 달성 가능한 업적을 살폈다.

아직 출굴까지 6일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재수만 좋으면 두어개쯤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망 좋은 집' 업적을 순식간에 해치우자 불쑥 욕심이 난 것이었다.

'맞다. 그때 그 여의사. 지금쯤 돌아왔으려나?'

[세미나 참가로 출장 갔다는 의사요?]

'어.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도훈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의사가 근무 중인지 물었다.

-네, 오늘 예약 가능하세요.

다행히 오늘은 병원에 있다는 희소식이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했다.

'단순히 검진만 받아서는 꼬실 방법이 없어. 일하는 중에 환자랑 섹스하는 미친 의사가 어딨겠어?'

이에 작전을 바꾼 도훈이 다시 물었다.

"저, 제가 오늘 사정이 있어서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 그런데 마지막 진료시간이 언제에요?"

-마지막 시간요? 최소한 5시 반 전에는 오셔야 해요. 6시엔 진료가 마감이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예약해 주세요."

도훈이 병원 예약을 마치자 로시가 물었다 .

[5시 반이면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은데요?]

'기다려야지. 그리고 저번에도 느꼈지만, 병원 안에서 작업을 치는건 불가능하겠더라고.'

[그럼요?]

'마지막 진료를 마치고 퇴근할 때 우연히 밖에서 만나는 걸로 할 거야.'

[오, 용의 주도 하신데요?]

'근데 한가지 문제가 있어.'

[어떤 문제요?]

'박지애. 그 젖소.'

[앗, 그러고 보니 그 병원에 박지애양이 근무하고 있겠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님이 방문한다는 걸 알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오늘 비번이길 바래야지.'

[그건 너무 요행인데요. 그렇다고 연락해서 물어보면 더 이상하고요.]

'아니어도 방법은 있어. 나에겐 정체불명의 모자가 있으니까.'

[아하, 아예 지애양은 스킵하실 생각이군요.]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자기 병원 여의사 따먹을 테니까 협조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으니.'

[음, 그건 좀….]

'일단 점심 먹고 슬슬 준비해야겠다.'

도훈은 여의사를 공략할 계획을 세운 뒤 느즈막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정체불명의 모자 아이템을 쓰고 튼튼병원 재활의학과에 도착한 도훈은 진료대기실에 앉아 박지애를 찾았다.

'윽, 진짜로 있네.'

지애는 예상대로 근무 중이었다. 간호복을 입은 그녀를 보자 입맛을 다셨다.

'캬, 간만에 지애 빨통 보고 싶네.'

[주인님. 업적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알지. 지금 지애가 나 못 알아보는 것 같지?'

[네. 그래 보이네요.]

정체불명의 모자는 근거리에선 상대가 자신의 얼굴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어주는 기능이 있었다. 그 증거로 지애가 가까이 지나치는데도 도훈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지애한테 안 들키고 작업할 수 있겠어.'

도훈은 대기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마감 시간이 끝날 무렵에 예약을 잡았다. 그의 이름이 모니터의 맨 하단에 자리했다.

무료한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불렸다.

"이도훈, 환자분."

도훈이 대답없이 진료실로 향하는데 주변에 있던 지애가 익숙한 이름이 들리는지 귀를 쫑긋하며 도훈쪽을 쳐다보았다.

지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도훈이랑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네? 아, 이름 들으니까 괜히 또 보고 싶네.'

지애는 모자를 쓴 도훈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재화의학과 전공의 안소영이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도훈이 모자를 벗으며 잘생긴 얼굴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아…. 저번에 오셨던 분?"

소영이 도훈을 기억하자 도훈이 놀라서 물었다.

"어? 저 기억하세요?"

"아…. 여기 차트에 떠 있길래요."

소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지만, 실은 그의 얼굴을 보고 대번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기억난다. 그때 잘생긴 학생. 일전에 바빠서 그냥 보냈는데, 오늘은 얘기나 해볼까?'

마침 마지막 진료다 보니 소영이 사심을 드러냈다.

"그래,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 1096. 그해, 여름-11-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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