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8. 회장의 자격-16- >
함께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현아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맨 처음 기사에게 목적지만 말하고는 이동하는 동안 차창을 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동행한 우선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집이 엄하다고 하던데 원나잇이 가능은 한 걸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지?'[
"저…."
"네?"
"오, 오늘 즐거웠습니다."
여자 경험이 없는 우선이 병신처럼 지껄였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의 무뚝뚝뚝한 표정과 말투에 멍하니 있던 현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풉. 뭐예요, 대체. 그 말투는."
"예?"
"아니 무슨 생전 처음 소개팅 나온 사람처럼."
"아, 아니 그래도 오늘 초면이니까…."
"저보다 오빠 맞죠?"
"네. 스물 한살입니다."
"오빠 여자 안 사겨봤죠?"
우선은 모쏠 아다를 밝히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강직한 그의 성격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네."
"어머, 진짜로요?"
"네. 아직…."
"그럼 숫…."
"그, 그렇습니다."
우선의 얼굴이 빨개지자 현아가 호탕하게 웃었다.
"푸합! 말도 안 돼!"
"왜, 왜요?"
"아니 무슨 스물 한살이나 먹어가지고 아직도."
우선시 수치심에 귀밑까지 빨개졌다. 하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도후늘 차지하지 못해 빈정 상해 있던 현아는 숫총각이라는 우선의 말에 부쩍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닳고 닳은 여성이다 보니 우선의 순진함에 끌린 것이다. 이제껏 만났던 남자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오빠, 곧 군대 간다지 않았어요?"
"네."
"에이, 그냥 말 편하게 해요. 사람 불편하게."
"그, 그걸까…요?"
"아니, 말 놓으라고."
우선이 답답했는지 현아가 대뜸 말을 놓았다.
"노, 놓으라고는 반말인데?"
"응, 그냥 반말 할 게. 한 살 차이 가지고 뭘."
"아, 아니 그게… 난 희주 선밴데 그럼 족보가…."
예의범절과 기수를 엄격히 따지는 우선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발랑까진 현아가 반말을 툭툭 내뱉는 모습이 얄밉다기보단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풉-. 오빠 오빠 너무 고지식하시네."
"내가 좀…."
"어디 그래 가지고 여친이나 사귀겠어?"
"아니 그건…."
현아는 우물쭈물하는 우선을 놀리는 게 재밌었는지 계속 농을 걸었다.
"왜 나 골랐어, 오빠는?"
"응?"
"아니 소연이도 있었잖아. 솔직히 소연이가 가슴은 더 빵빵한데. 걔 씨컵이야."
"어, 어?"
노골적인 표현에 우선이 몸 둘 바를 모르고 눈알을 어지럽게 굴렸다. 자꾸 택시기사가 빽미러로 힐끔거리며 대화를 엿듣는 것 같아 민망함에 답을 할 수 없었다.
"아, 아니 나는…."
"왜? 내가 더 마음에 들었어? 하긴 내가 더 예쁘긴 하지."
우선은 고개만 끄덕였다.
"흐음, 다행이네. 실은 나도 태영이 걔 보단 오빠가 낫더라."
"아…."
"설마 아단 줄은 몰랐지만."
"아, 아니 현아야…."
택시 기사를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현아가 아무 말이나 내뱉는 통에 우선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단둘이 있어도 민망할 얘기를 제3자가 듣고 있는 와중에 하려니 그의 성격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풉. 진짜 엄청 부끄러움 많네. 에잇, 기분이다. 기사님. 저기 저쪽에 세워 주세요."
"풍납동으로 계속 안 가시고요?"
"네. 그냥 세워주세요. 들를데가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갑자기 차를 세운다는 말에 우선이 당황하며 물었다.
"지, 집으로 바로 안 가? 부모님이 기다리실…."
"오빠 불쌍해서 내가 적선 좀 해주려고. 왜? 그냥 나 집으로 갈까? 다시 차 돌려?"
우선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텔 간판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설마하니 생애 첫 경험을 학과 여후배의 친구랑 하게 될 줄이야. 그것도 입대 며칠 앞두고.
우선이 용기를 내 현아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주, 주면 땡큐지."
"푸하하하! 뭐래, 이 오빠. 골때린다 진짜."
도중에 택시에 내린 두 사람은 근처 모텔로 직행했다.
***
"에이, 씨바 진짜."
한편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던 택시 안에서는 소연이 아까부터 계속 짜증을 내고 있었다. 태영은 눈치를 보며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었다.
"좆 같네 진짜."
"……."
비좁은 뒷좌석에서 태영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소연은 멀뚱히 앉아있는 태영을 향해 따지듯 말했다.
"안 바래다줘도 되니까 그냥 중간에 내려도 돼. 나 혼자 갈게."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선언.
태영은 움찔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그래도 늦은 시간이니까."
"솔직히 말할게. 너 별로 마음에 안들어."
"음…."
"나 좀 재수 없지? 맞아. 희주 동기라길래 예의 차릴까도 생각했는데 아닌 건 아닌 거잖아?"
소연의 건방진 말에 태영은 속으로 울컥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바래준다고 함께 탄 사람에게 할 소리가 잇고 못 할 소리가 있었다. 이건 태영을 좆으로 보지 않는 이상 나올 수가 없는 개무시 발언.
평소처럼 내키는 대로 확 질러버리고 싶었지만, 그 순간 태영은 오늘 도훈이 해준 충고를 떠올려싿.
-형, 근데 여자애가 절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떡해요?
-참아, 새끼야.
-네?
-참으라고. 니가 왜 여자애들이랑 잘 안 되는지 생각해 봤어?
-왜요?
-눈은 높은데 실력이 못 쫓아가니까. 욕심은 이만큼인데, 현실은 시궁창인 걸 인정하지 않잖아.
-아….
-그럼 방법은 두 가지 뿐이야.
-뭔데요?
-욕심을 줄이거나
-네.
-아님 자존심을 접어.
-자, 자존심을요?
-자존심이 밥먹여 주던?
-아, 아니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가오같은 소리하고 있네. 니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냐? 일단 스타트를 끊어야 경험치를 먹을 거 아냐. 그렇게 조금씩 경험이 쌓이다보면 언젠간 니가 원하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겠지. 태영이 네 문제는, 꿈은 큰데 그에 반해 노력을 안한다는 거야.
-노, 노력은 저도….
-아니. 노력은 니 입으로 터는 게 아니야. 결과로 증명하는 거지. 오늘 밤 여자랑 자고 싶어? 그럼 자존심 같은 건 갖다 버리라라고.
-아…
-명심해. 너를 맞춰. 한없이. 그러면 기회는 온다.
'자존심을…. 접으라고 했겠다, 도훈이형이.'
"…알았어."
"응?"
발끈할 줄 알았던 태영이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자 소연도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실은 일부러 싫은 소릴 해서 그를 떨쳐낼 생각이었지만, 본인이 말해놓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집까지 따라오라고 하고 희망고문 하는 편이 더 나쁘다는 생각에 애써 악역을 자처한 것이었다.
"나도 안다고. 네가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너 도훈이 형 마음에 들어 했잖아."
"잘 아네."
"난 도훈이 형처럼 잘생기지도 않았고, 솔직히 매력도 없어. 그래도 집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는데 그냥 보내는 건 아닌 거 같아."
"……."
"너가 나 마음에 안 들어도, 난 너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그러니까 그냥 집까지 바래다 줄게."
"참나…."
태영의 허심탄회한 말에 소연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술자리에서 눈치 없이 진상을 피우던 그가 아니었다. 어쩐지 어딘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희하한 애네. 싫다는 데도 굳이….'
"알았어 그럼. 바래다주던가 말던가."
소연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태영은 목적지를 향해가는 택시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휴-. 도훈이형. 저는 끝까지 안 될 놈인가 봐요. 하기야 하루아침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아다를 탈출할 거였음, 지금까지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겠죠. 오늘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쓰라린 마음을 추스렸다.
하지만 도훈의 조언대로 자존심을 굽히자 자신을 보는 소연의 시선이 어딘가 나긋나긋해진 것 같았다.
"2만원입니다."
기사가 택시비를 말하자 태영이 서둘러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그 모습을 보던 소연이 따졌다.
"니가 왜 내 택시비를 내?"
"그냥."
"아저씨 호구세요? 누가 이러면 감동할 줄 아니?"
"그냥 낸 거라고."
"참나…."
택시에서 내린 소연은 함께 내린 태영을 보고 한참 팔짱을 끼고 쳐다보았다.
'하-. 이 새끼 진짜 마음 불편하게 만드네. 괜히 심한말 했나?'
소연은 자신의 막말을 다 받아주고, 택시비까지 대신 내준 태영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희주에게 듣기론 군대 간다고 하자, 작년에 군대를 간 친오빠가 생각나 괜히 더 안쓰러웠다.
"집이 어느 쪽이야?"
"우리 집은 왜?"
"아니 밤길 어둡대서 집까지 바래다 주려고."
"지랄, 매너좋은 척은. 야, 나한테 잘 보여도 국물도 없어."
"알아. 너 나 싫다고 했잖아."
"그리고 너 곧 군대 간다며? 어차피 떠날거면서 뭐하러 나한테 잘해주니?"
"말했잖아. 너는 나 별로라고 생각해도, 난 너 마음에 들었다고. 그래서."
"……."
태영의 바보같은 모습에 소연이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하차지점에서 얼마 안 가 그녀가 말했다.
"다왔어. 여기야."
"아…. 그럼 난 이만."
태영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소연이 소리쳤다.
"야, 정태영."
태영이 뒤를 돌았다.
"응?"
소연이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배, 배고프면 우리집에서 라면이라도 먹고 가던가."
"라면?"
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마음을 접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인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에이씨, 싫음 말고."
"……."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태영을 향해 소연이 이번엔 귀까지 빨개져 말했다.
"나 자취한다고. 집에 혼자 살아."
"아!"
"어어구, 씨 됐다. 줘도 못 먹네 진짜. 싫음 마."
소연이 홱 돌아서자 그제야 말귀를 알아 챈 태영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라, 라면! 라면 좋아해!"
***
확실히 희주가 달라졌다.
어딘가 부족해 보이던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이상적인 위치로 제자리를 잡으면서 미모가 물이 올랐다.
특히 러시안 쿼터라는 혈통 때문인지 유난히 피부가 하얗고 눈동자 색이 진녹색을 띄었다. 그 덕에 노랗게 탈색한 긴 머리가 인형처럼 잘 어울렸다.
마치 단백질 인형처럼.
"헤. 절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이뻐서."
"어멋, 제가요?
"그레거. 다시 보니 선녀네. 우리 희주."
"요새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물 올랐다고."
"어디 물이 올랐을까나?"
"한 번 확인해 보실래요?"
"풉-. 그나저나 우선이랑 태영이는 잘 하겠지?"
"에이, 걱정 마시라니까. ㅐㄴ 친구들이 남잘 얼마나 밝히는 데."
"진짜?"
희주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흉보는 것 같아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걔들 남자 얼굴 전혀 안 따져요."
"그래? 아깐 나만 쳐다보는 것 같던데?"
"그거야 오빠가 사기캐니까 그렇죠."
"사기캐라니?"
"얼굴, 몸매, 지성…. 그리고 요거까지 겸비한 사기캐릭터요."
희주가 장난스럽게 바지 위를 쿡쿡 찔렀다.
"어쭈, 이거 성희롱인데."
"아앙, 죄송해요. 오빨 희롱했으니 혼구녕 나야 할 것 같아요. 얼른 저 혼구녕 내주세요."
희주가 자꾸 팔짱을 끼우며 나를 골목으로 이끌었다.
딱 보니 모텔촌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흐음, 잠깐만 지금 몇 시나 됐지?'
[왜 그러시죠?]
'아니 아영이 DVD방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나 싶어서.'
[거기서 출발하신지 대충 1시간 반쯤 되어갑니다.]
'하아. 큰일이네 영화 길어봐야 2시간일텐데.'
[30분 안에 속전 속결이 가능하시겠습니까?]
'불가능이지. 방 잡고 씻고 옷 벗는데 30분인데. 그렇다고 저렇게 기대하는 희주를 두고 갈 수도 없고.'
시간 계산 실패였다.
최대한 빠르게 태영을 보내야 했으나 술 마시면서 분위기를 만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아앙, 얼른 가요. 왜 그렇게 굼떠요."
희주가 계속 모텔로 나를 끌고 갔으나 나는 DVD방엣서 기다릴 아영이 걱정되어 쉽사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밤 희주와 아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몰랐다.
'좆됐네 진짜. 분신술을 쓸 수도 업속.'
[태영군 미션에 집중하느라 스케줄이 꼬여 버렸군요. 이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래대로면 미션이 걸린 아영이를 보러가는 게 맞지.'
[그렇죠. 희주양은 딱히 걸린 게 없으니까요.]
'근데 그럼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단 말이지.'
[뭐가요]
'아니. 밤중에 술 마시라고 나오라고 해놓고, 목적 달성했으니 팽하는 거잖아. 희주는 나 때문에 자기 친구들까지 불러줬는데.'
[아….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냉정히 말해서 희주 양은 주인님이 버리고 가도 납득할 겁니다. 호감도가 다소 떨어질 수 있겠지만, 이미 주인님에게 종속된 상태니까요. 하지만 아영양은 아직이고요.]
'이미 잡은 고기니까 신경쓰지 말자?'
[그게 최선이라는 거죠.]
'아,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주인님. 냉정하셔야 합니다. 미션이 걸린 일입니다.]
'잠깐만. 혹시나 아영이 아직 영화를 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아?'
[네?]
'무슨 영화를 골랐는지 모르니까. 일단 연락이나 해보자.'
나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고 잠시 아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물론 희주에겐 태영이랑 우선이 근황이 궁금해 물어본다는 핑계였다.
-이도훈 : 1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어?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왔다.
-박아영 : 네, 영화 아직 남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이쓰.
하늘이 돕는구나!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을 것 같다.
< 1078. 회장의 자격-16-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우선과 태영의 씬을 스킵하시겠습니까?
독자님의 의견대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