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7. 회장의 자격-15- >
다시 모두가 모인 술자리.
희주의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이 슬슬 분위기를 잡았다.
"계산 방금 끝내고 왔어."
"오빠가요?"
"어머, 오빠! 너무 멋져요."
"아니, 실은 내가 아니고 먼저 간 성수 형이 미안하다고 아까 돈 주고 갔거든. 성수형이 쏜 거나 마찬가지야."
도훈의 설명에 태영과 우선이 감동했다.
"역시 전 부회장님!"
"크흑, 잊지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계산도 끝냈으니 이제 슬슬 나가볼까?"
"근데 어디로 가요?"
2차로 넘어갈지 여기서 쫑낼지를 결정하는 시간.
다들 나름의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상태라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전 아쉽지만 이쯤에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집이 좀 엄한 편이라…."
현아가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그 말을 들은 희주와 소연이 속으로 빵 터졌다.
'미친년. 고딩 때부터 집에서 내놓은 년이 집이 엄하기는 개뿔.'
'저녁에 나오면 아침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면서….'
하지만 서로 입을 맞춘 게 있었으므로 겨우 웃음을 참고 동조했다.
"현아 집에 갈 거야? 그럼 나도 들어가 봐야겠는데."
"소연이 너도?"
"응. 집 방향이 서로 달라서 혼자 가려면 무서워서."
"아, 그럼 여기서 해산이네."
이미 사전에 화장실에서 짜고 맞춘 멘트였다.
희주가 이에 남자들을 향해 물었다.
"친구들 이만 들어가 본다는 데 혹시 집 방향 같은 사람끼리 서로 맞출까요? 택시비도 아낄 겸."
희주가 깔아놓은 판.
현아가 곧바로 도훈을 찔렀다.
"오빠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가세요?"
"응? 나?"
도훈은 희주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게 있었으므로 대답을 유보했다.
"난 사실 집이 가까워서 걸어가도 돼. 일단 태영이랑 우선이부터 말해봐."
"전 신창동요."
"난 가람 사거리."
"음, 다들 너무 제각각인데."
귀가 루트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훈이 유보해 버리는 바람에 그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던 희주의 친구들이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한 것이다. 만약 반댓방향을 먼저 말했다가 도훈과 엇갈리면 선택도 못 받고 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희주가 제안을 했다.
"에이, 다들 너무 다르네. 그냥 남자들이 한 명씩 에스코트 해주는 건 어때요? 매너있게."
"에스코트라고?"
"여자들 집 방향이 서로 반대편이니까, 그냥 남자들이 바래다주자는 말이죠. 좀 돌아가더라도. 다들 그 정돈 해줄 수 있죠?"
"맞아요. 저희 집 들어가는 골목이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두워요."
"지금 시간엔 혼자 택시타는 것도 괜히 겁나더라고요."
소연과 현아의 맞장구에 자연스럽게 남자들에게 선택권이 넘겨졌다. 즉, 집까지 바래다줄 여자를 남자가 고르게 된 입장이 된 것이다.
말이 바래다주는 거지 실상 단둘이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갈지는 완전한 자유. 일단 찢어지고 나면 뒷일은 알아서 하자는 식이었다. 여자들의 의도를 눈치 챈 우선이 갑작스러운 제안에 침을 꿀꺽 삼켰다.
'세, 세상에…. 진짜로 도훈이형 말한 그대로잖아?'
도훈은 아까 여자들이 2차를 가지 않고 흩어질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럼 오늘 밤 원나잇을 할 수 있을거라는 말도 설마.'
모솔 아다인 우선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누구든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0년 넘는 솔로 인생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태영 역시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고 어느 정도 물밑 작업이 진행되었음을 직감했다.
'역시 도훈이 형 말이 옳았어.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결국 마지막엔 커플끼리 찢어질 수밖에 없다더니…. 크흑, 사부 오늘의 가르침 결코 잊이 않겠습니다!'
희주가 도훈을 보고 눈빛으로 사인을 주며 물었다.
"장유유서라니까, 오빠부터 고르세요. 서연이랑 현아 중에 누굴 바래다 주고 싶으신지."
희주의 완벽한 판짜기였다.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에스코트를 유도해 낸 다음 도훈에게 최초 선택권을 넘긴 것이다. 만약 도훈이 둘 중 누군가에 마음이 있다면 고르기만 하면 끝나는 게임. 그러면서 자신은 선택지에서 빼는 치밀함도 보였다. 뒷말이 안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훈이 소연과 희주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럼 나는…."
성은을 기다리듯 두 여자가 바짝 긴장한 채 도훈의 입술만 주시했다.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을 보는 것마냥 흥미진진한 선택이었다.
***
"하아…하아… 오, 오빠앙, 이러려고 나 여기 데리고 왔어?"
"딱딱하게 말하지 마. 니가 날 딱딱하게 만들었으니까."
혼자 영화를 감상하던 아영은 옆방에서 들리는 생생한 사운드에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휴, 엿 같은 방음 시설!'
영화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방은, 얇은 칸막이 하나만 쳐놨는지 옆방의 소리가 고스란히 벽을 타고 울렸다. 처음엔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나중에 흥분했는지 아주 주변에 광고를 해대듯 노골적인 신음을 흘리는 두 사람이었다.
"하아… 하아… 오, 오빠아아…."
"이, 입으로 해줘."
"아앙…. 민망하게…. 영화 안 볼 거야?"
"너도 영화 볼 생각 처음부터 없었잖아."
아영은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얇은 판을 두고 서로 물고 빠는 통에 졸지에 남의 섹스를 관음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저럴 거면 차라리 모텔을 가던가…. 진짜.'
아영은 괜스레 치밀어오르는 심술에 짜증을 터뜨렸다.
다른 커플은 신나게 옆에서 떡을 치는 데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DVD방에 영화를 보는 처지가 갑자기 서글퍼진 것이었다.
'어휴, 내가 미쳤지…. 그냥 집으로 갈 걸 그랬나?'
불쑥 후회가 치밀었다. 도훈이 아까 붙잡지만 않았어도, 지금은 침대에 누워 야구 하이라이트 클립 영상을 보던가 기사를 읽고 있을 것이다.
'아니야…. 결국엔 내가 선택한 거니까.''
도훈이 강제로 그녀를 납치해 DVD 방에 가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겐 분명 선택권이 있었고, 스스로 도훈을 기다리는 결정을 내린 것 뿐이었다.
도대체 왜?
아영은 왜 자신이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를 생각했다.
'…솔직히 오빠가 붙잡아 주길 바랬으니까.'
아영은 기본적으로 청개구리 같은 특성이 있었다.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 틱틱거리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좀 더 솔직해져도 되는데, 괜스레 지고 들어가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미성숙한 인격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게 잘 안됐다.
'오빠가 돌아오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아영은 떡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한 옆방을 상상했다. DVD방은 꽉 막힌 공간에 유일한 출입구도 유리창 하나 없이 완벽한 밀실이었다.
이곳에선 누가 떡을 치건 말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말이 DVD방이지 사실상 모텔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아…. 진짜로 오빠가 나를….'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과, 아영의 상상력이 결합되자 불쑥 야한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특히 도훈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자신을 기다리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진 상황에서 아영은 몇시간 뒤에 있을 그와의 섹스로 기대감에 부풀었다.
'분명 도훈 오빠가 나를 따먹을 거야.'
굵직한 도훈의 대물을 떠올리자 아영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배란일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유독 야한 생각이 심하게 드는 최근이었다.
야구를 보고 있다가 도훈의 호출에 곧바로 응답한 것도 어쩌면 이런 기대를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머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몸은 강하게 원하는 것이다.
스크린 불빛 속에서 아영이 조심스럽게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옷 위로 슬쩍 팬티를 만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저, 젖었어….'
팬티에 닿는 음부의 촉감이 축축했다. 도훈에게 박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말도 안돼. 내가 어떻게 그런 바람둥이 때문에….'
아영은 도훈을 극혐했다.
아니 극혐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나쁜 놈이라고. 잘생긴 얼굴만 믿고, 학과 여학우들을 몰래 따먹고 다니는 천하의 쓰레기라고. 그러니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막상 몸은 정반대였다.
그녀의 몸은 그를 맹렬히 원하고 있었다.
거대한 대물이 자신을 실컷 유린해 주었으면, 자신도 캠프에서 따먹힌 효민이나 수정 선배처럼 개처럼 따먹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멋대로인 자신을 도훈이 마음대로 휘두르게 냅두고 싶었다. 그의 육노예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아, 안 돼."
의식의 흐름을 이어가던 아영이 그릇된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세상에 육노예를 자처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단 말인가.
"…미쳤어. 섹스 생각에 돌아버린 거야."
아영은 후끈 달아오른 자신을 애써 자제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그만하려고 해도, 옆방에서 쿵쿵거리며 벽을 찧는 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성욕이 폭발하고 말았다.
아마도 누군가의 몸이 벽에 밀착되어 진동을 울리는 모양인데, 그것이 너무 규칙적이라 자기도 모르게 장면이 연상되었다.
"하앙… 오, 오빠. 옆에 다 들리겠어."
"뭔 상관이야. 어차피 여기 다 섹스하러 오는 곳인데."
아영은 그 말에 이성의 끈이 툭 끊어져 버렸다.
어차피 섹스하러 오는 곳.
당장 도훈이 룸 안으로 들어온다면,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아영은 잠긴 문고리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하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몸을 달래지 않고선 도저히 못 버틸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이젠 몰라."
아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젖은 둔덕을 스스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도훈의 굵직한 대물이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며 벌어진 보짓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셔댔다. 브라위로 터질 듯 가슴을 주무르자 입에서 단내가 쏟아졌다.
"하아…. 얼른… 얼른 와서 멋대로 해버리란 말이야."
아영의 기다림이 길어지고 있었다.
***
"에에?"
"누구라고요"
소연과 현아가 잘못들었다는 듯 다시 물었다.
도훈이 또박또박 말했다.
"희주. 난 희주 데려다줄게."
"오, 오빠 저는 혼자가도 괜찮은데…."
희주가 난처한 척 연기했다. 애초 선택지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던 자신을 도훈이 고르자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 따졌다.
"희주는 혼자 간다는데요?"
"아니 저희가 집이 훨씬 먼데…."
말그대로 똥씹은 표정.
A와 B중에 고르라고 했더니 C를 택한 도훈의 결정으로 희주의 친구들은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이게 뭐야? 이럼 승부는 어떻게 되는 건데?'
'하-. 이건 예상도 못 했는데….'
두 사람은 도훈이 희주를 바래다 준다고 대답할거라곤 예상도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너무 싫은 티를 냈다간 옆에 있는 우선과 태영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아씨, 오늘 완전 텃네.'
'아니야. 차리리 잘 됐어. 둘 중 한명을 골랐으면 오히려 의가 상했을지도 몰라.'
도훈이 둘 중 누굴 골랐던 한쪽은 희극, 나머진 비극이었다.
차라리 제 3자인 희주를 고른 것이 나중을 생각했을 땐 현명한 결정일지도 몰랐다.
"오빠가 굳이 그렇다면야…."
희주가 선택을 받아들이자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로 우선에게 지명권이 넘어갔다. 태영은 자신이 먼저 고르고 싶었지만, 선배에게 양보한 것이다.
도훈이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태영이가 그래도 오늘 마음을 단단히 먹었네.'
[주인님의 가르침이 통한 걸까요?]
'주제넘게 욕심 내봐야, 오히려 안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거겠지. 조금만 일찍 깨우쳤어도 군대 가기전에 여친 하나는 만들었을 텐데.'
[군대 가서 정말로 개과천선해서 올 줄 압니까? 스스로를 돌아본다면요.]
'그러면야 좋겠지만 그땐 나도 졸업반일테니.'
"어, 제가 그럼 현아 데려다 줄게요."
"아…네."
우선이 클럽 죽순이 현아를 고르자, 자연스레 겜창 소연은 태영이 맡게 되었다. 전혀 의도치 않은 결과였지만, 이미 결정된 이상 진상을 피우거나 뒷말을 내뱉은 사람은 없었다.
희주 친구들은 이러한 일은 너무나 자주 겪었고, 사전에 암묵적인 합의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우선과 태영 역시 사전에 도훈의 언질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 결정된 거 같으니 이만 가볼까?"
일행은 술집을 나와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마침 기다리는 택시가 있었다.
"현아가 제일 집이 머니까 우선이 네가 먼저 출발해라."
"아, 그럴까요?"
우선이 현아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그는 보조석 창문을 열더니 도훈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형,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늘 감사합니다."
"취했냐? 얼른 들어가인마."
우선의 과도한 감사표시에 도훈이 멋쩍게 우선을 태워 보냈다. 잠시후 두번째로 택시가 도착하자 이번엔 도훈이 태영의 어깨를 두드리는 척 그에게 귓속말했다.
"태영아. 오늘 수고했다."
"형 고마워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이것만 기억해. 좌삼삼 우삼삼이야."
"예?"
"얼른 가 인마."
졸지에 태영과 짝이 된 소연은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으나, 이내 포기한 듯 태영과 택시를 함께 타고 떠났다.
친구들을 먼저 보낸 희주가 도훈에게 와락 팔짱을 끼며 말했다.
"결국 저희 둘만 남았네요. 히히."
"문자 받고 시킨대로 했는데, 괜찮은 거지? 네 친구들."
희주가 걱정말라면서 말했다.
"에휴, 쟤들 완전 꾼이에요. 우선 오빠나 태영이 오늘 밤 죽어 날걸요?"
"그 정도였어?"
"뭐야. 지금 아쉬워하는 거예요?"
희주가 삐진 척 토라졌다. 도훈은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어느덧 희주가 눈에 띄게 예뻐져 있던 것이다.
'와…. 얘가 언제 이렇게 변했지?'
< 1077. 회장의 자격-15-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