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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93화 (1,060/2,000)

< 1076. 회장의 자격-14- >

희주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불과 몇 달 전, 희주가 아무 남자나 마구 만나던 시절에도 이런 경험이 몇차례 있었다.

다만 희주는 대체로 의르를 택하는 편이었다. 어차피 하룻밤 즐길 남자를 택하기 위해, 굳이 오래 볼 친구들과 척을 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는 기대감은 그야말로 신기루와 같은 것. 섹스가 끝난 후 아침, 어딘지도 모를 모텔에서 눈을 뜨고 마주한 남자들은 대체로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대부분 술자리 게임이라던가, 으슥한 노래방에서, 혹은 1차로 클럽에서 부비부비를 통한 사전 교감으로 어느 정도 커플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측에서도 대부분 원나잇을 노리고 애프터를 신청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과 양보를 통해 서로 경쟁하지 않고 미리 낙점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남자들 수준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라면 얘기가 달랐다. 우선과 태영이 도훈에 비해 너무나 후달린 것이었다.

보통 외모가 앞서면 성격이 별로던가, 성격이 별로면 돈이라도 많든가 각각의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거늘 도훈과 나머지 두 사람은 비교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현격한 격차를 보였다. 당연히 인지상정으로 두 사람 모두 도훈을 1순위로 생각했고, 희주 역시 도훈의 섹파였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소연이었다.

"양희주. 넌 어차피 과 선배니까, 좀 그렇지?"

"뭐가?"

"아니, 네 말대로 두고두고 오래 볼 사람인데, 니가 이러고 다니는 거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이러고' 라는 말투엔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술자리에 삘 받으면 남자랑 모텔로 직행하는 쉬운 여자라는.

소연은 희주가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모습과, 자신들을 만날 때 모습이 다르다는 걸 알고는 교묘하게 그녀를 압박한 것이었다. 현아도 이에 동조했다.

"그렇네. 희주는 어차피 오늘은 힘들겠네. 다들 아는 사람들이니."

"일단 그럼 희주 빼고 생각하자. 난 도훈 오빠 마음에 들어."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두 사람은 희주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야, 내가 저번에 폭탄 처리했던 거 기억나지?"

"뭔 소리야 갑자기?"

"저번 주 클럽에서! 너가 그 잘생긴 오빠 마음에 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독박 썼잖아. 그 얼굴 까마잡잡한 애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이번에는 현아 네가 양보할 차례야."

지난 주 빚을 갚으라는 요구에 현아가 발끈했다.

"그건 아니지. 솔직히 그 오빠가 내가 더 마음에 든다고 나를 찍은 건데 그게 무슨 양보니?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저번 달에 내가 양보한 건 기억도 안 나는가 보지?"

"뭐라고?"

"갑자기 모른 척? 나이트에서 룸에 갔을 때 그 돈 많은 오빠들 말이야. 그때 니가 안경 쓴 오빠 네 타입이라고 해서 너한테 넘겼잖아. 지도 다음 날 고맙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야, 지금 언제적 얘기를 꺼내는 거야?"

"니가 먼저 시작했거든."

"하- 저번 달이랑 지난 주랑 같아?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올 봄에 헌팅 포차 기억 안나?"

두 사람은 이제껏 자신이 친구에게 희생한 과거를 하나씩 꺼내며 누가 도훈을 차지할 것인지 옥신각신 다투었다. 희주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이대로 두었다간 또 저번처럼 머리채 잡고 싸울까 봐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잠깐만. 둘 다 그만해."

"소연이 저년이 먼저 지랄했다고."

"웃기고 있네. 욕심부린 게 누군데 그래?"

"욕심? 너는 아냐? 너도 솔직히 도훈 오빠가 마음에 드니까 나보고 양보하라고 한 거잖아?"

"나머지 둘이 쉣더 퍽인데 어쩌라는 거야?"

"그럼 그 퍽을 나보고 맡으라고? 와, 진짜 양심 어디?"

두 사람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자 희주가 강하게 한 마디 던졌다.

"야, 제발 좀 안 닥칠래? 나 성질 더러운 거 보여줘?"

"희, 희주야."

"으, 음. 알았어."

희주가 두 사람을 조용히 시킨 뒤 말했다.

"그래. 솔직히 나는 오늘 낄 자리가 아니긴 해. 근데 너희들 뭔가 착각하는 게 있어."

"뭘?"

"무슨 착각?"

"도훈 오빠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야."

'푸하하!"

"갑자기 왜 이래, 선수끼리?"

희주의 발언에 두 사람이 폭소리를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희주의 지론은, 여자가 마음 먹으면 처음 보는 남자랑 자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떠벌이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희주는 그 말을 증명하듯, 한 때 원나잇을 밥먹듯 하고 다녔고 애인이 있는 남자라도 서슴없이 꼬셨던 것.

희주는 친구들의 반응에 아차 싶었지만, 기왕 내뱉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도훈 오빠가 원래 학과에서도 씹선비로 유명하단 말이지."

"씹선비라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그 오빠 원래 말은 번지르르해. 근데 엄청 보수적이라서 여자 후배들이랑은 스킨쉽도 잘 안 하려고 하고…."

"아니던데? 아까 내 무릎에 은근슬쩍 손 올리던데? 못 봤어?"

"그건 학교니까 이미지 관리한 거지. 희주 너도 그렇잖아. 나도 어디가서 섹파있다고 자랑하고 다니니? 말도 안되는 소릴."

두 사람은 콧방귀를 끼며 희주를 무시했다.

실제로 술자리에서 도훈은 굉장히 잘 노는 인싸 오빠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당연히 두 사람은 오늘 밤 마음만 먹으면 도훈과 원나잇을 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희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이제 어떡하지? 설득이 전혀 안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도훈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밝힐 수도 없고….'

희주는 도훈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누구에게도 자신과 비밀친구인 관계를 발설하지 않는 게 그 조건이었다. 친구들에게 그와 섹파임을 밝혔다가 혹시라도 친구들이 확인차 도훈에게 묻는 순간, 도훈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을 의절할 것이 두려웠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희주는 그 불안감이 너무 커서 차마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이는 도훈이 그녀에게 심어놓은 상식 개변 스킬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새겨진 세뇌가 무의식에 침투해 그녀의 돌출행동을 미연에 차단한 것이다.

'어쩌지…. 이대로는….'

희주는 사실을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아무튼 이대로는 결론이 안 날 거 아냐. 둘 다 양보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이번에는 절대 못 해. 아니 안 해."

"지금 누가 할 소릴?"

"그럼 대놓고 물어보자."

"누구한테?"

"도훈 오빠한테?"

"그래. 그냥 대놓고 물어보면 되잖아. 그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도훈 오빠랑 맺어지면 되지."

"흐음."

"아, 이거 후달리는데."

돟누은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누구에게도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도훈의 선택에 맡길 경우 자신이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에 빠졌다. 확률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희주는 망설이는 두 사람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만약 선택을 못 받은 사람은 우선 오빠랑 태영이 중에 책임지는 걸로."

"채, 책임이라니?"

"우리가 왜 그래야 해?"

도훈에게 선택을 못 받은 것도 억울한데 모쏠 아다 새끼를 책임지라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패널티였다. 차라리 그냥 집으로 갔으면 갓지, 도훈 거르고 우선이나 태영은 벨붕 수준의 조건이었다.

희주는 말려드는 친구들을 보며 계속 도발했다.

"왜? 둘 다 선택받을 자신은 없나 보지?"

"자, 자신은 무슨? 당연히 오빠가 날 고르겠지."

"웃기시네. 아까 나랑 통했거든?"

두 사람이 눈에 쌍심지를 키며 으르렁거리자 희주는 자신의 격장지계가 먹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좋아, 조금만 더 부추기면 되겠는데.'

"이제까지 우리 룰이 그랬잖아. 설마 까먹은 거야?"

"아, 아니 그건…. 괜히 한 사람이 파토 내서 분위기 망칠까 봐 어쩔 수 없이 책임진 거지."

"맞아.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고."

"도훈 오빠한테 거절 당할까봐 겁나는 건 아니고?"

희주가 계속 이죽거리자 소연과 현아도 슬슬 오기가 치솟았다.

"아니거든?"

"우릴 대체 뭘로 보고?"

"그럼 해. 너희들 말대로 난 우리과 동기랑 선배들이라서 오늘은 끝까지 책임 못 져. 하지만 너희들은 어차피 상관없잖아.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흠…."

희주는 두 사람이 자신을 배제시킨 논리를 역이용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둘 다 따질 수 없었다.

"진짜 도훈 오빠한테 거절당하면 나머지 두 사람 중 하나를 책임지자고?"

"아…. 태영이 걔는 진짜 아닌 것 같던데."

"왜? 게임 좋아하는 거 보니까 소연이 너랑 찰떡궁합이겠더만."

"장난해? 원나잇 상대 고르는 데 게임이 뭔 상관이야?"

"넌 린의지 할 때 겜에서 친한 오빠들하고 자주 잤잖아? 지 입으로 다 말해 놓고선."

"아니 그건 경우가 다르지. 같은 길드에 있으니까 친해져서 그런거고, 쟤는 나랑 하는 게임도 다른데."

"왜? 아까 너랑 같이 듀오 하자더만. 한번 대주면 잘 해줄지 아니?"

"이 년이 진짜 터진 입이라고 막말을!"

두 사람의 감정이 격앙되자 희주가 적당히 타이밍에 개입했다.

"야. 그럼 둘 다 공평하게 해."

"뭘?"

"어떻게?"

"도훈 오빠가 거절하면 무조건 나머진 태영이랑 자는 걸로."

"나, 나까지? 내가 왜?"

"그럼 너도 싫은 걸 왜 소연이한테 강요해?"

"맞아. 그러고 보니까 존나 치사하네. 나는 할게. 도훈 오빠한테 까이면 태영이랑. 넌 못하겠다는 거지?"

소연까지 압박해 들어오자 현아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사실 세사람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키를 잡은 희주의 입장에선 여론을 조성하기 너무 수월했다. 어느 한쪽을 편들면 자연스럽게 2 vs 1 과반을 유도해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다. 희주의 줄타기로 인해 두 사람은 결국 다음과 같은 조건에 동의하고 말았다.

"분명히 둘 다 동의한거야? 나중에 딴 소리하기 없기."

"난 무조건 콜이야."

"웃기시네. 끝까지 가보자 그럼.'

물론 희주는 이 와중에 몰래 도훈에게 문자를 남기고 있었다.

-양희주 : 오빠, 내 친구들이 오늘 오빠랑 자자고 물어볼 거에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죠?

***

"애들 안나오는데요?"

"기다리는 김에 담배나 태우고 올란다."

도훈이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나가자 우선이 뒤따랐다.

"같이 가요, 형."

"왜? 넌 담배도 안 태우잖아."

"그래도요. 혼자 피우시면 심심하니까."

혼자 남게 된 태영도 따라나섰다.

"형, 그럼 저도."

"아니야. 테이블 싹 비우면 여자애들 가방은 어떡해?"

화장실에 간 여자들은 각자 가방을 자리에 놓아 둔 상태였다. 괜히 도난이라도 당했다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

"우선이랑 잠깐 얘기하고 올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 네, 형."

오늘따라 고분고분해진 태영을 뒤로하고 도훈과 우선이 가게 밖으로 잠시 나왔다. 도훈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우선이 물었다.

"형, 근데 오늘 좀 달라보이던데요."

"나?"

"네…. 원래 그렇게 여자들 앞에서 말을 잘하셨어요?"

"그런가?"

우선은 도훈은 잘생겼지만 여자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순진한 선배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아이돌 지망생들과 술자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의 도훈과 비교하면 오늘은 완전히 분위기를 주도했다.

"암튼 우선이 너도 군대가는 데 좋은 추억하나 만들어야지."

"추, 추억이라뇨?"

모쏠 아다 우선이 도훈의 말뜻을 단번에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희주 친구들 말이야. 괜찮지 않아?"

"괘, 괜찮죠. 되게 예쁘던데요. 잘 놀고."

"만약 둘 중 한명과 오늘 밤 끝까지 갈 수 있다면 어떡할래?'

돟누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우선에게 물었다.

우선은 갑작스러운 도훈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도, 도훈이형이 이런 질문을…. 엄청 순진한 사람으로 봤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우선 군은 주인님의 그런 면모를 처음 볼 텐데요.]

'상관없어. 어차피 군대가면 한 동안 못 볼 사람이니까.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희주 눈치도 있고 내가 욕심내는 것보다 우선이한테 양보하는 게 맞는거 같아서.'

[와…. 우선군은 태영군 덕분에 얻어걸린 셈이군요.]

'그렇지. 사실 따지고 보면 우선이 더 억울한 셈이야. 내가 안 돌아왔으면 희주 친구들이 누굴 골랐겠어?'

[태영군을 제외하면 성수군이나 우선군이었겠군요.]

'그렇지. 그러니 우선이도 자기 몫을 받아야 맞는 거야.'

"끄, 끝까지라는 게."

도훈이 음탕한 동작으로 손바닥 위에 주먹을 탁탁 내리쳤다.

"뭐긴 뭐야. 이거지."

"혀, 형!"

"짜식아. 쑥맥인 척 그만하고, 어떨건지부터 말해."

"저, 저야…."

기대도 않던 우선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처음 보는 여자랑 원나잇이라니.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잘생긴 도훈 옆에 붙어 있으니 이런 횡재수가 생기는 것이었다.

"주, 주면 감사하죠."

"그치?"

"근데 걔들이 정말 그럴까요?"

"내가 보니까 오늘 견적 나올 것 같더라. 그러니까 여자애들 나오면 2차 얘기같은 거 하지말고 적당히 눈치봐서 갈라져."

그때 도훈에게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양희주 : 오빠, 내 친구들이 오늘 오빠랑 자자고 물어볼 거에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죠?

희주의 문자를 확인한 도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선아."

"네?"

"준비해라."

< 1076. 회장의 자격-14-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다음편은 번외로 모쏠아다 특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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