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92화 (1,059/2,000)

< 1075. 회장의 자격-13->

***

도훈이 어쩔 수 없이 술자리로 돌아간 시간.

DVD방에 홀로 남겨진 아영은 아직도 영화를 고르는 중이었다. 처음엔 이것저것 권유하던 카운터 알바도 나중엔 포기했는지 거의 방치한 상태였다.

"음… 이건 예전에 본 것 같고…. 이건 평이 별로고…."

아영은 몇 번인고 DVD 타이틀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서성거리기만 했다. 참다못한 알바가 툭 한마디 던졌다.

"손님, 오늘 영화 보시긴 할 거예요?"

"네?"

"아니, 남자분도 먼저 가버리고 그냥 안 보실 건가 해서요."

"……"

아영은 잠시 알바를 쳐다보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러닝타임 긴 그 영화 제목이 뭐였죠?"

"반지의 제왕요?"

"네, 그걸로 주세요."

"아…. 네. 12번 방입니다. 가서 계시면 틀어드릴게요."

알바른 룸으로 들어가는 아영을 쳐다보며 구시렁거렸다.

"뭐야 대체? 판타지 싫다더니. 30분을 뻐기다 결국 고른 게 다시 저거야?"

마치 아영보고 들으라는 말투였지만, 아영은 애써 못 들은척하며 룸안으로 입장했다. 리클라이너 소파가 설치된 방은 혼자 영화를 감상하긴엔 휑할 정도로 넓었다.

"…영화 끝날 때까지만이야. 딱 그때까지만 기다릴 거니까."

30분을 미적거리다 끝내 3시간 반짜리 영화를 고른 아영의 중얼거림. 그녀답지 않게 쓸쓸한 목소리였다.

***

'시간이 얼마 없으니 속전속결로 가야 해.'

[아영 양이 떠나기 전까지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인 거죠?]

'그렇지. 대충 영화 시간이 2시간 정도라고 잡으면 어떻게든 그 안에 끝내야 해. 자존심 강한 성격을 생각하면 회복 불가능까지 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 업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영군이 군대를 가버리면 최소 1년 반 동안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까요.]

'하필 두 개의 미션이 충돌해 버릴 줄이야.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있나?'

[주인님이 미션을 거리지 않고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때야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지. 하여간 태영이 이 새끼, 깽판 치는데는 뭔가 있다니까?'

'그때야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지. 하여간 태영이 이 새끼, 깽판 치는데는 뭔가 있다니까?'

[어쩌면 깽판이 아닐지도 모르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태영군이 진상을 부리지 않았다면, 동정남 아다 떼어주기 미션이 성립이나 되었을까요? 잘 생각해보면 태영군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최종적으로 늘 덕본 것은 주인님이셨습니다.]

도훈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태영이 찐따같은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킬때마다, 수습을 하면서 이득을 챙긴 사람은 바로 본인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스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다시 보니 선녀같은 녀석이었나?'

[어쨌든 이번에는 주인님이 서포트 해주는 것이니까요.]

'그래. 빚잔치 한 번 해야지. 태영이가 살아야 나도 사는 거니까.'

"무슨 남자들끼리 화장실을 그렇게 오래 다녀와요?"

"어머, 둘이 설마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죠?"

"어우, 야~."

살짝 술이 된 희주의 친구들은 도훈과 태영을 놀렸다. 농담으로 던진 게이 드립에 태영이 발끈했다.

"뭔 소리야? 난 여자 좋아하는데!"

"응, 안물안궁."

"누가 자기한테 물었나?"

이미 소연과 현아는 태영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반발을 가볍게 일축했다. 무시받은 태영이 또 다시 급발진을 하려고 하자 도훈이 몰래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참아.'

눈빛으로 제지하는 도훈의 사인에 태영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태영은 도훈이 화장실에서 해준 얘기를 다시 되새겼다.

-오늘 밤 무조건 한 명은 모텔 데려가게 해줄게.

-정말요? 형, 솔직히 전 자신 없어요. 제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희주 친구들은 절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는 건 안다고요. 저 따윈 안중에도 없는거 같아요.

-미련하긴. 꼭 원나잇이란 게 서로 눈이 맞아야 성공하는 거 같아?

-그럼요?

-쟤들은 어차피 하룻밤 즐길 남자를 고르는 거라고. 다들 친구들이다 보니까 어차피 마지막엔 양보할 수밖에 없는 거야.

-양보요?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어? 다른 친구들이 짝 맞춰 모텔 가는데 혼자 쓸쓸하게 집으로 택시 타고 갈 것 같아?

-아….

-지금 딱 3 vs 3 이잖아. 누가 됐건 결국 한 명은 니 몫이라는 소리지.

-저, 정말이요?

-물론 희주는 예외지. 어찌됐건 우리랑 같은 과니까 최대한 뒷탈 없게 할거란 말이야.

-희주말고 둘 중에 한 명을 노리란 말이죠?

-아니. 노린다고 되겠냐? 그냥 마지막 한 명이 누가 됐건 넌 선택 당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근데 다들 형한테만 관심을 보이는데, 과연 저를 선택해 줄까요?

-그래서 내가 방금 말했잖아. 희주는 무조건 발 뺄 상황이니까, 내가 희주랑 같이 빠져버리면 나머지 둘은 어쩔 수 없이 너랑 우선이 중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거지.

-아아! 형, 그럼 전 뭘 해야 하나요?

-하지마.

-네? 아니, 그래도 좀이라도 여자들한테 잘 보여야….

-아니, 하지마. 넌 아무것도 하지마. 뭘 하려고 할수록 마이너스니까 그냥 숨만 쉬고 있어. 끝까지 버티면, 무조건 오늘 밤 모텔 입성한다.

-혀, 형….

-내 말만 믿어.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형. 형이 시키는대로 다 할게요.

'도훈이 형이 아무것도 하지 말랬으니 닥치고 있어야 겠다.'

도훈의 조언을 떠올린 태영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면서 도훈이 어떻게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래. 도훈이 형 말이 옳아. 하면 할수록 감점이 된다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현명한 방법일지도 몰라.'

도훈은 그야말로 능수능란했다. 처음 보는 여자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막힘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별것도 아닌 얘기에도 여자들이 빵빵 터졌다는 사실이었다.

"쟤들이 저렇게 웃음이 헤펐나?'

태영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분명 도훈이 없을 때와 비교하면 반응이 전혀 달랐다. 그는 곰곰히 분석했고, 이윽고 한 가지 가설을 수립했다.

'얼굴 차이다.'

태영이 볼 때 그것은 잘생긴 얼굴이 주는 호감도의 차이였다. 같은 농담을 하더라도 잘생긴 사람이 하면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미남이 가진 특권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잘생긴 게 장땡이었어. 못 생긴 놈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걸 잘 생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거야.'

잘생김의 차이는 자신감의 차이로 벌어졌고, 자신감을 보이는 남자는 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보는 여자라고, 얼굴이 예쁘다고, 몸매가 좋다고, 그래서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저런 미인이 나를 좋아 해줄리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개가 축 처지고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자신감 없는 남자를 좋아해 줄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

태영은 그제야 도훈과 자신의 차이를 깨달은 것이었다.

얼굴의 차이보다, 바로 얼굴로 인해 비롯된 자신감의 차이.

그 격차가 훨씬 호감도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게다가 도훈이 형의 화술. 적당히 받아칠 건 받아치고, 당해줄 땐 또 과감하게 맞아주자나.'

태영은 평소 도훈의 대화를 대충 듣기만 하다가, 여자와 핑퐁을 주고받는 교묘한 솜씨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쉽게 말해 대화를 가지고 놀았다.

밀어붙일 땐 선을 넘는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하지만 또 망가질 땐 주저없이 스스로를 내려놓았다. 나중에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여자들이 빵빵터지느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랬구나! 저게 픽업 아티스트에게 전수 받은 도훈이 형의 화술이었어!'

도훈은 단지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었다. 자신감의 근원에는 어떤 여자와도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뛰어난 화술도 한 몫했다.

게다가 자연스러운 스킨쉽.

도훈은 대화 중에도 옆자리에 앉은 현아를 은근슬쩍 터치하면서도 친밀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러웠으며, 옆에서 보는 사람도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은밀했다.

하지만 완벽한 전지적 관찰자로 변한 태영에게는 도훈의 일거수 일투족이 훤히 보였다.

'형은 진짜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아티스트야.'

태영은 뒤늦게 자신의 곁에 어마어마한 카사노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알고느 있었지만, 그에게서 배울 생각을 못하고 늘 불평 불만을 늘어놓기만 했다는 사실도.

'이럴 수가. 나는 어째서 도훈이형이랑 어울려 다니면서도 이런 것을 배울 생각을 못 했을까?'

군대에게 가기 불과 며칠 남겨놓고 태영은 마침내 자신의 곁에 어마어마한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금만 더 욕심을 비우고, 언행을 신중히 하고, 게임에 빠지기 보다 운동과 자기관리로 스스로를 가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일었다.

'아아, 후회는 왜 늘 이렇게 마지막에 찾아오는 걸까.'

태영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제야 제대로 된 사부를 찾았느넫, 앞으로 군대 전역할 때까지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이었다.

태영이 다시 우울감에 표정이 어두워지자 돟누이 슬쩍 눈치를 줬다. 폰을 확인해 보라는 사인이었다.

-이도훈 : 얼굴 펴. 초상집 왔냐? 입 다물고 있으랬지, 누구 구석에 찌그러져서 우울해 있으래?

도훈의 문자에 태영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또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경고를 받은 태여이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아니야. 이러면 안 돼. 도훈이 형이 나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잖아.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태영은 우울감을 떨쳐버리고 최대한 기분 좋은 생각을 유지했다. 대화에서 소외되어 있었지만, 경청하는 자세를 보이며 함께 즐기고 있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답지 않은 태영의 태도에 희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태여. 뭐냐? 갑자기 말도 없고."

"어? 아니야. 그냥 재밌게 듣고 있는데."

"그래?"

희주는 태영이 아까부터 잠잠한 것이 이상했다.

'희안한 이링네. 태영이가 저렇게 진중한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희주가 보기엔 뭔가 이상했다. 도훈은 오늘따라 유난히 활달하게 분위기를 주도했고, 이상하리만치 태영은 침묵하고 있었다. 물론 그 덕에 친구들은 대만족하는 중이었고, 본인도 태영의 폭탄 발언이 터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녀의 우려대로 친구들이 도훈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과거 자주 어울렸던 경험에 따르면 친구들은 이미 도훈이 손만 잡아도 모텔로 따라갈 정도로 강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의 목표가 똑같다 보니 서로 견제하며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릴 뿐이었다.

'에휴, 내가 미쳤지. 하필 소연이랑 현아를 불러들여 도훈 오빠를 보여주다니.'

희주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원나잇을 서슴없이 하는 친구들 앞에 저렇게 매력적인 도훈을 소개 시켰으니, 당연히 그녀들이 도훈을 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스스로가 불행의 씨앗을 뿌린 셈이었다.

'하아. 진짜 의절할 생각하고 딱 잘라 말해버릴까?'

희주는 이대로 가다간 오늘 밤 도훈과 단둘이 보내기는커녕,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머리채 잡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현아가 슬쩍 사인을 보냈다.

"아아, 술을 너무 마셨나. 저는 화장실 좀."

"같이 가. 희주 넌 안 갈래?"

눈치를 보니 적당히 여자들끼리 작전회의를 통해 갈라치기를 하자는 소리였다. 셋은 뭉쳐 다니며 남자를 만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대번에 사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자."

여자들이 화장실로 사라진 사이 도훈이 태영을 보며 말했다.

"잘했다, 태영아. 잘 참았어."

"네, 형."

중간에 낀 우선이 영문을 모르고 물었다.

"뭘 잘해요?"

"어, 아니야. 태영이랑 아까 뭐 좀 얘기를 하느라고."

"그나저나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다른데 가자고 꼬실까요?"

아까 족발집에 이어 맥주 집까지 연이어 술을 마셨기 때문에 다들 상당히 술이 된 상황이었다. 우선은 모솔답게 노래방 같은 곳에 가서 술을 깨면 어쩌나 하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도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쟤들 안 갈걸."

"네? 왜요?"

"아마 화장실에서 나오면 다들 집에 간다고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이에요?"

우선은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자기가 볼 땐 성수가 있을 때보다 분위기가 훨씬 달아올랐고, 오늘 밤새 놀 것처럼 텐션이 올라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피식 웃으며 예언했다.

"두고 봐. 아마 그렇게 될 거니까."

***

"몇 시야 지금?"

"12시 넘었는데?"

"어떡할래?"

"뭘 어떡해?"

"어차피 더 놀아봐야 시간 낭비 같은 데 적당히 파트너 나눠서 찢어지는게 낫지 않아?"

"하긴. 다들 같은 과 선후배라 그런지 은근 서로 눈치 보더라. 이래선 어차피 찐하게 놀긴 힘들 테니."

서로 화장을 고치며 대화하던 두 사람이 막 화장실에서 나온 희주를 향해 물었다.

"양희주. 소연이가 슬슬 갈라지자는데? 넌 어떻게 할 거야?"

< 1075. 회장의 자격-13-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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