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4. 회장의 자격-12 >
다시 돌아온 술자리에서 게임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는 소연이 주도한 것으로 컴퓨터 게임뿐 아니라 폰 게임, 보드게임 등 게임이란 게임은 닥치는 대로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 때문이었다.
"갑자기 웬 게임? 난 이제 막 와서 서로 이름도 잘 모르는데…."
"하면서 친해지면 되죠, 히히. 전 소연이라고 해요."
'소연?'
[얼마 전에 만난 스폰녀랑 동명이인 아닌가요?]
'그렇네. 조소연하곤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김변의 스폰녀였던 조소연은 S급 와꾸였다. 섹스도 무지 밝히고, 돈에 집착하는 특성이 있었다.
하지만 희주 친구 소연은 얼굴이 예쁘긴 한데 어딘가 천박한 느낌이 있었다. 화장도 너무 진하고, 옷차림 역시 섹시함을 넘어 술집 여자 같았다. 한마디로 싼티가 흘렀다.
하필 이름까지 같으니 더 비교가 되면서 도훈은 소연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따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잘 됐네. 쟤를 태영이 밀어주면 되겠어.'
"야. 치사하게 너만 소개하니? 오빠, 저 현아요."
"아하, 둘 다 이름 예쁘네. 내 이름은 알지?"
"네."
"도훈 오빠 맞죠?"
희주 친구들은 스스로를 소개하며 연신 생글거렸다. 오늘 술자리에서 최고로 밝은 표정이었다. 물론 그럴수록 희주의 초조함은 더해갔다. 그녀가 몰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 둘 다 오빠 보자마자 헤벌쭉 해져가지고는….'
희주는 도훈의 재등장이후 유이랗게 기분이 다운된 사람이었다. 특히 도훈이 아까보다 더 잘생겨져서 돌아오자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오빠는 오늘따라 왜케 잘생겨 보이는 거야? 힝, 불안하게.'
아이템으로 꾸민 도훈은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미남으로 변해있었다. 타고난 원판에 세련된 스타일링까지 더해지니 옆에 있던 오징어 둘과 너무나 대비되었다. 아니 어쩌면, 우선과 태영이라는 평범남들의 존재가 도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걸지도 몰랐다.
들러리로 격하된 우선이 말했다.
"근데 무슨 게임? 소연이 너 게임 많이 알아?"
"네. 저 게임 엄청 좋아하거든요."
"얘, 완전 게임 폐인이잖아요."
"아아, 내가 언제?"
현아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떠들었다. 사실상 도훈을 두고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 상대를 교묘히 깎아내리며 매력을 떨어뜨리는 여자들 특유의 간접 공격이었다.
그때 도훈이 뭔가를 떠올렸다.
'가만. 게임 좋아한다고? 태영이랑 취미가 비슷한데'
도훈은 울며 겨자먹기로 태영을 밀어 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떡밥이 도는 순간 곧바로 태영에게 토스했다.
"소연이 게임 좋아하나 보네. 저기 태영이도 엄청 게임 잘하는데, 맞지?"
태영은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다가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도훈이 형은 괜히 쓸데없는 소릴…."
딴에는 겸손한 척 위장하는 멘트였지만, 도훈의 심기를 건드렸다.
'쓸데없는? 하-. 이 새끼 진짜 확 죽여 버릴까?'
[생각없이 내뱉는 건 여전하군요. 후배가 선배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참자. 오늘은 내가 부처가 되는 수밖에, 오, 주여. 저 개새끼의 죄를 사하소서.
[무신론자인 주인님이 한 번에 두 가지 신을 찾으실 정도라니….]
도훈은 태영의 거슬리는 말투를 애써 무시하고 계속 그를 밀어주었다.
"너 게임 엄청 잘하잖아. 우리 과에서도 그 뭐지, 룰인가 뭔가 게임 티어 제일 높고. 다이아였나?"
도훈이 의도적으로 계속 태영을 띄우자 태영의 어깨가 잔뜩 올라갔다. 그러면서 무심한듯 툭 내뱉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마스터요. 다이아 위에."
"아아, 그랬어?"
태영의 티어가 생각보다 높은 자리였는지 듣고 있던 소연이 관심을 보였다.
"어? 너 진짜 룰 마스터라고?"
"어."
"와, 나 이제 겨우 플래티넘인데."
"그래? 포지션 뭔데?"
"서폿."
"혜지니?"
"응?"
"아니야. 나중에 같이 듀오 뛰면서 티어나 올려줄까?"
"나야 좋지."
도훈의 토스를 겨우 받아먹은 태영은 잘 하는 가 싶더니 갑자기 급발진을 시작했다.
"사실 내가 좀만 더 집중하면 그랜드마스터까지 갈 수 있는 실력이거든. 형, 그거 알아요? 그마 부터는 프로에서 제의도 가끔 온다는 거. 근데 내가 바쁘다 보니 아직 그마는 못 찍었네."
도훈은 태영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재수 없는 태도라는 것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태영의 과시에 관심을 보이던 소연도 떫은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눈치라곤 없는 태영은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주인공이 된것 같은 기분에 계속 신이 나 떠들었다.
"맞다, 나 배틀 제로도 마스터야. 그건 솔직히 짬날 때만 살짝살짝 한거 거든? 근데 어느새 과에서 1등이더라고."
멈추지 않는 자랑에 도훈이 똥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오, 병신아. 1절만 해라, 제발. 뇌절 하지 말고.'
"그리고 또 뭐더라? 하트스톤? 그것도…"
태영의 자랑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처음엔 집중해 들어주던 이들도 학을 뗄 만큼 지겨운 자기과시였다. 어지나 자랑할 게 없었는지 오늘 처음 보는 여자들 앞에서 자기가 게임 폐인임을 내세우는 행동이었다. 도훈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이시여, 저 병신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정말 노답이네요. 태영군은.]
'옆에서 띄워주면 적당히 우쭐하고 말아야지, 저렇게 눈치 없게 신나게 떠들어대니 옆에 사람이 당연히 싫어하지.'
[분위기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얼른 태영군 입을 막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저러다 본전도 못 찾겠는데요.]
'미션만 없었으면 미싱으로 입을 박아버리고 싶다, 안그래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오늘밤 태영군을 어떻게든 밀어주는 게 핵심과제라는 걸요.]
도훈은 괜히 미션을 수락했다는 생각과 함께 태영을 말리려 했으나 다행히도 잠자코 듣고 있던 우선이 먼저 나섰다. 다른 사람은 관심도 없는 주제로 쉼없이 떠드는 태도가 아니꼬왔던 탓이다.
"얀마. 거 적당히 자랑 잘하고 술이나 마시자."
우선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태영의 자랑질이 지겨웠던 여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도훈은 한시름 돌리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저 새낀 내가 문전까지 택배 크로스로 올려줘도 그 자리에서 대기권 돌파 슛 때리는 개발싸개같은 놈이니까. 어디 데려가서 교육 좀 시켜야 겠다.'
[교육이라뇨?]
'오늘 밤 아다 떼고 싶으면 제발 좀 닥치라고 말이지.'
[아….]
"근데 도훈 오빠도 적응해야 하니까 일단 술이나 돌리자."
"그래, 나중에 정 할 거 없음 하던가."
태영의 급발진 탓에 다들 게임에 흥미가 식어버렸다. 도훈은 적당히 기회를 엿보다가 태영이 화장실을 가는 틈을 타 뒤따라 일어섰다.
"나도 잠시 실례."
도훈이 남자 화장실을 따라 들어가자 소변을 보고 있던 태영이 깜짝 놀라 인사했다.
"엇, 형 오셨어요."
"어, 그래."
태영의 바로 옆에서 보란 듯이 대물을 꺼낸 도훈이 힘차에 오줌빨을 뿜었다. 옆눈질로 도훈이 대물을 힐끔거리던 태영이 속으로 생각했다.
"와씨…. 도훈은 형이 진짜 사기캐구나.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큰데, 잦이도 존나 크네. 저러니 여자들이 좋아하겠지.'
도훈과 비교할수록 태영은 괴로울 뿐이었다.
이길 수 없는 적과 마주한 느낌이랄까?
군대를 가서 그를 롤 모델 삼아 재도약하기로 결심했지만, 물건 사이즈 만큼은 평생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뭐. 나 까짓게 무슨 수로 술자리에서 여자를 꼬시겠어? 어차피 다들 날 좋아해주지도 않는데. 난 생긴 것에서 이미 탈락이라고.'
그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한 시간 넘게 앉아잇던 술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희주는 애초에 비빌 깜냥이 안 되었고, 만만하게 생각했던 현아나 소연마저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는 특히 도훈의 재등장 이후 뚜렷해졌는데, 이제껏 심드렁하게 농담 따먹기나 하던 그녀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부쩍 말이 많아진 것이었다.
질투심을 느끼려야 느낄 수조차 없는 초격차였다.
'그냥 술이나 적당히 마시다 집에서 겜이나 실컷하고 자야겠다. 군대 가면 어차피 하지도 못 할테니까.'
태영이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 씁쓸하게 있는데,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도훈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태영아."
"네, 형."
"너 희주 친구들 마음에 드냐?"
"예?"
도훈이 오늘따라 이상했다. 평손엔 여자 얘기는 먼저 꺼내지도 않던 그가 웬일로 여자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대답해봐. 누가 더 마음에 드는데?"
"아, 아니 저는…."
"혹시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손을 다 씻은 도훈이 물기를 탁탁 털면서 태영을 쳐다보았다.
"대답이나 해."
"뭐, 뭐를요?"
도훈의 눈빛이 달라진 걸 느낀 태영이 바짝 긴장했다. 평소처럼 자상하고 매너좋은 선배가 아니라 음모를 획책하는 모사꾼 같은 눈빛이었다. 그가 아는 도훈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누구든 오늘밤 모텔 데려가도 상관없냐고."
"혀, 형…."
도훈은 일부러 평소보다 훨씬 멘트를 세게 쳤다.
포장해 말하면 태영이 알아듣지 못할 것을 우려해 그냥 직설적으로 내뱉기로 한 것이다. 또한 그가 자신을 픽업 아티스트라고 착각하고 있고, 낼 모레면 군대로 떠날 사람이기 때문에 뒤탈을 걱정하지 않는 점도 있었다.
카사노바의 본색을 드러낸 도훈이 계속 태영을 밀어붙였다.
"왜? 별로 생각 없어?"
"아, 아니요. 근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
"정태영. 너 사실대로 말해."
"뭐, 뭐를요?"
"너 아직 아다지?"
"예!?"
태영이 화들짝 놀랐다.
도훈의 집요한 눈길을 쳐다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가 아는 도훈은 이런 곤란한 질문은 절대 꺼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진지했다.
"무, 무슨 소리세요 갑자기. 저번에 새터가서 말씀드렸듯이."
"너 나한테 솔직하게 대답 안 하면 진짜 국물도 없다. 똑바로 대답해."
"……"
변명을 생각하던 태영이 도훈의 박력 있는 태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늘 어디가서 여자경험이 있다는 식으로 자랑을 해왔다. 그런데 이제와 도훈이 뭔가를 아는 것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도훈이 재차 압박했다.
"나한테 쪽팔릴 거 하나도 없으니까 솔직하게만 말하라고. 너 진짜로 여자랑 해본 적 있어 없어?"
"…어, 없어요."
"근데 왜 저번에 거짓말했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그, 그게…. 경험 없다고 하면 괜히 무시 받을까 봐."
"하- 이 새끼 진짜."
도훈이 한심하다는 듯 그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쓰다듬는다기보다는 손바닥에 힘을 주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수준이었다.
"태영아, 태영아, 이 자식아."
"형…."
태영은 도훈이 취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오늘따라 그가 무서웠다. 일전에 캠프에서 배빵을 맞은 뒤로 그가 손만 대도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오, 이 새끼 진짜. 너 아다로 군대 가서 대체 얼마나 괄시 받을라고 그러냐."
격하게 태영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도훈이 안타까움을 가득 담다 소리쳤다.
"너 오늘 내가 아다 데게 도와줄 테니 형이 시킨대로 할 수 있겠냐?"
"형."
갑작스러운 제안에 태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훈
그가 누구인가?
군대에서 전설적인 픽업 아티스트를 만나, 카사노바로 변신에 성공한 살아있는 레전드 아니던가? 사실이야 어찌됐던 태영이 알고 있는 이도훈의 실체는 그것이었고, 따라서 그의 제안이 솔깃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군대로 떠나는 자신을 위한 도훈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절정의 고수가 우연히 후지기수에게 비법을 전달하는 그런.
"지, 진짜요? 혀, 형만 믿고 가라고요?"
"그래 자식아."
'로시, 태영이 대놓고 돕는 것이 미션 룰에 위배 되는 거 아니지?'
[맞습니다. 회유나 협박 혹은 정신조작이나 약물 등은 오직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니까요. 그런데 주인님 정체를 이렇게 드러내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어차피 태영이는 나를 픽업 아티스트로 알고 있잖아. 게다가 낼 모래면 군대 가는 놈이 나에 대해 소물을 퍼뜨리면 얼마나 퍼뜨린다.고.]
[흐음. 그래도 태영군은 입이 너무 싼데….]
'이번에 아다 떼주고 호감도 바짝 올린 다음, 군대 들어가기 전에 정신조작으로 함구시키면 그만이야. 알아도 말못하게 제약을 걸어버리지 뭐.'
[아하, 그 방법이 있었군요.]
"너 그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도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태영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짧은 시간 화장실 안에서 태영은 눈을 크게 ?뜨고 도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겼다.
"알았지? 이대로만 하면 오늘 밤 너 모텔 간다."
"혀, 형…."
태영이 감동을 받았는지 눈시울을 밝혔다.
후배의 아다를 떼주기 위해 노력하는 선배라니.
진정한 후배 사라의 표상이 아닌가?
"형, 정말 형이 말한 대로 최선을 다해볼게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ㅋ"
"그래. 꼭 그래라."
'안 그럼 너는 진짜로 내 손에 뒤질 테니까.'
내키지 않는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도훈이 속으로 이를 바득 갈았다.
< 1074. 회장의 자격-12-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