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3. 회장의 자격-11- >
술집으로 달려가는 도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태영을 만나면 이번엔 배빵이 아니라, 싸다구라도 날려버릴 기세였다.
'이 병신 새끼 진짜, 그렇게 알려줬는데 사람이 못 되네. 오늘은 진짜 본때를 보여주고 말겠어.'
[주, 주인님.]
'말리지 마. 체육과에서 선배가 후배 얼차려 주는 게 무슨 폭력이라고? 말로 해선 도저히 들어먹질 못하니,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수밖에.'
[잠시만요, 주인님. 태영군 때문에 일이 꼬여 열 받은 건 알겠지만 한 번만 더 고려해 보십시오.]
'뭘 고려하란 말이야?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데.'
도훈의 분노에 로시가 간곡히 청했다.
[태영군에게 걸린 미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요.]
씩씩거리며 달려가던 도훈이 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미션이라니?'
[설마 잊으셨습니까? 태영군에게 미션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요.]
'아니 여자도 아니고 무슨 남자한테 미션이…. 아아, 설마!'
[하아, 이런 빡대가리….]
'뭐라고 인마?'
[아닙니다. 혼잣말한다는 게, 흠흠. 아무튼, 주인님께서 워낙에 공사다망해 수행 중인 미션과 업적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워낙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을 벌이시니 말입니다.]
'근데 내용이 뭐였지? 젠장. 저번에 먹은 머리 좋아지는 열매는 언제쯤 효과가 발휘되는 거야? 포인트만 날리고 이거 순전 사기 아니야?'
[아이큐가 올라가는 기간은 분면 6개월 걸린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여전히 지능은 주인님이 초기에 정한 스텟 그대로고요.]
그랬다.
도훈은 최초 300이란 스텟을 나눌 때 키에 185, 대물에 18을 몰빵한 뒤 남은 것을 아이큐에 집어넣느라 100을 넘지 못한 두뇌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전생의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낮은 지능으로 인해 불필요한 고생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기억력 감퇴 또한 이로 인한 부작용 중 하나였다. 신체적 나이가 어린데도 깜빡깜빡하는 것이다.
'으음,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미션 내용 다시 알려줘 봐.'
[넵. 미션은 동정의 신께서 보낸 천상의 메시지였습니다. 태영군을 동정남에서 탈피시키게 되면 '동정남의 펜던트' 라는 아이템을 받는 보상이고요.]
'동정남의 펜던트? 아아, 그런게 있었지?'
도훈은 기억이 슬슬 되살아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남의 펜던트는 마력을 증폭시키는 전설급 아이템입니다. 스킬의 위력과 범위가 증가하기 때문에 보유한 스킬의 전반적인 향상을 꾀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이제 기억났어. 근데 왜 마법 아이템을 주는 거지?'
[남자가 25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는 국룰을….]
'아, 이해했어. 맞아. 제약조건이 좀 빡세게 걸렸던 것 같은데?'
[태영군과 맺게 되는 인연의 대상은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새로운 인물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만약 주인님의 손을 미리 거치거나 금전, 약물 등으로 포섭할 경우 신들의 과제는 자동으로 종료되며 주인님의 대물은 동정 상태로 돌아가는 패널티를 받습니다.]
'도, 동정이라고?'
[이제껏 경험치 잔뜩 먹였던 대물이 완전히 초기화되는 것이죠. 귀두의 민감도가 동정 상태로 떨어지는, 좆병신 저주만큼 위태로운 패널티랄까요?]
'이런 젠장. 기한이 있었던가?'
[패널티가 큰 만큼 기한은 별도로 없는 미션입니다. 태영군에게 갑자기 변고만 생기지만 않는다면요.]
'변고라면?'
[뭐, 군대에서 다쳐 고자가 된다든가 하는….]
'으음….'
까먹고 있던 미션을 떠올린 도훈이 잠시 이동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태영에에 걸린 미션.
그를 동정에서 탈피시키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게 된다. 마침 술자리에는 도훈조차 처음보는 희주의 날라리 친구들이 함께 모여 있다. 우연찮게 미션 조건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도훈은 오늘따라 미션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하아-. 근데 이 새끼를 응징하기도 모자랄 판에 동정을 떼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벌을 줄 사람에게 상을 주는 꼴이잖아?'
문제는 도훈이 느끼는 심리적인 반발심이었다.
속담처럼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추태를 부린 태영이 그토록 마지않던 동정을 떼어주는 일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 자괴감을 들게 했다.
'아무리 미션이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합리적 판단, 냉철한 계산. 어제의 적이라도 내게 필요하면 오늘의 동지가 된다는 게 주인님 컨셉 아닙니까? 한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차려진 밥상을 뒤엎겠다고요? 주인님, 제발 대국적으로 보십시오.]
로시의 팩트폭행에 도훈이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만큼 도훈이 지금 보이는 태도는 이제껏 미션을 수행하면서 보인 그것과는 달랐다.
도훈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로시가 계속 설득했다.
[더구나 딱히 시간제한이 없다지만, 태영군이 다음 주면 입대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오늘을 넘기면 앞으로 태영군이 제대하는 순간까지 다시 기회를 잡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다 혹시나 태영군이 군대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으음. 너무 보채지 마. 고민 중이니까.'
도훈과 한번 엮인 여자는 절대 안 된다는 룰. 돈이나 회유를 통해 불가한 상황. 미션이 성립되기도 어렵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오늘 밤 모인 여자들이 희주 못지않은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라는 사실이었다.
이 기막힌 조합이 앞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야말로 입대하기 전 하늘이 내린 마지막 기회랄까?
'제길! 아마루 내가 미션의 노예라지만….'
[주인님….]
도훈이 자조적으로 소리쳤다.
"한다고! 하면 될 거 아니야! 아오. 진짜!"
도훈이 본노의 포효로 울분을 달랜 후 술집으로 돌아갔다.
***
성수가 핸드폰을 쥔 채, 초조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제발, 도훈아. 서둘러주라.'
테이블로 돌아온 후 희주친구 현아의 추파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애인이 있는 성수의 처지에선 1분 1초도 함께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자리로 변하고 말았다.
'여기 앉아있는 것만으로 여친에게 면목이 없단 말이야.'
성수의 인내가 한계에 달할 무렵.
거짓말처럼 도훈이 재등장했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어, 이쪽 분들이 희주 친구들이시구나? 반가워요."
난데없이 나타난 도훈은 굉장히 말끔하게 변해있었다. 피부는 물광이 나는 것처럼 반짝였고, 헤이스타일 또한 공을 들인 것처럼 스타일리쉬했다.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도훈이 급하게 아이템으로 교정을 한 것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진짜로 오셨네요."
오늘따라 유독 잘 생겨 보이는 도훈의 모습에 자유분방 날뛰던 희주친구들이 한순간에 바짝 긴장했다. 미남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었다.
첫인상을 강렬히 심는데 성공한 도훈은,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합석하면서 느끼한 멘트를 남겼다.
"이렇게 미인분들이 계신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그랬네요."
"어머, 별말씀을 다."
"오빠도 잘 생기셨어요!"
잘생긴 도훈의 등장은 꿩 대신 닭을 쫓던 소연과 현아를 안구정화 시켰다.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고 생각했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오징어가 된 것이었다.
'와, 희주가 허튼 소리 한게 아니었네.'
'대박. 완전 찐이야. 찐인싸 오빠가 있었어.'
얼굴을 따지는 소연도, 몸을 더 중시하는 현아도 모두 시선을 뺏겼다. 성수와는 다른 의미로 도훈은 건장한 체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체형만 놓고 보면 도훈 쪽이 훨씬 이상형에 가까웠다.
잠시 인사말이 오가는 사이 타이밍 좋게 성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성수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어, 나 여친 전화왔다. 잠깐만 실례."
성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구석에서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
"미안한데, 여친이 저녁에 잠깐 보자고 하네."
"아, 형 벌써 가시게요?"
"어. 그렇게 됐다. 어차피 도훈이도 왔으니까. 내가 빠지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자기가 빠져야 남녀 숫자가 균형이 맞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다들 아쉬워했지만, 성수를 노리고 있던 현아는 그가 떠난다는 말에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쳇.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여친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오빠라 내심 답답했는데….'
실은 현아가 성수를 빠르게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뒤늦게 등장한 도훈이 그 못지않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대체 자원이 생긴 이상 굳이 성수에 목맬 필요가 없었다.
성수가 나가는 길에 도훈을 잠시 불렀다.
"가는 길에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자. 도훈이 잠깐 나와봐."
성수가 도훈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오더니 그의 손에 현금 10만원을 쥐어주었다. 도훈이 놀라며 물었다.
"형, 이건 왜요?"
"받아 인마. 2차는 내가 쏜다고 했잖아. 혹시나 여기서 더 나오면 니가 좀 보태고."
"에이, 괜찮아요. 여긴 그냥 제가 살게요."
"어허, 받으래도. 안 받아? 내 손 부끄럽게 할래?"
성수가 하도 강권하는 바람에 도훈이 마지못해 10만원을 받았다. 돈은 넘치게 많았지만, 지금 타임에 받는 게 선배로서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 같았다.
성수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아영이는 잘 보냈어?"
"네. 차 마시고 택시 태워 보냈어요."
"잘했다."
"저도 집에 들어가려다 형이 다시 불러서 돌아온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성수가 자초지종을 빠르게 설명했다.
태영의 진상 짓으로 희주가 난처한 처지가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미안하다. 너까지 끌어들여서."
"아니에요. 잘 부르셨어요. 제가 안 돌아왔으면 희주만 이상하게 될 뻔했어요. 친구들 불러준 것도 미안한데."
"그러니까. 아씨, 그나저나 태영이 그 새끼 나중에 술 깨면 한 소리 해야겠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눈치가 그렇게 없을 수가 있지? 그냥 닥치고 있으면 잘 될 것 같더만…."
"원래 애가 좀 생각이 없잖아요. 형이 이해해요."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머리가 없는 거 같아. 여휴, 군대 가서도 저러면 진짜 고문관 될 텐데. 큰일이네."
안 봐도 비디오였기 때문에 도훈도 속으로 동의했다.
"암튼, 나중에 제가 알아듣게 잘 말해둘게요. 그래도 곧 군대 가는데 너무 뭐라고 하기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아니 됐고. 암튼 너한테 괜히 미안하다. 짐을 떠맡긴 것 같아서."
"그런 날도 있는 거죠."
"아참, 도훈아."
떠나기 전 성수가 뭔가 퍼뜩 떠올랐는지 도훈에게 말했다.
"그 희주 친구들 말인데…."
말을 꺼내던 성수가 갑자기 머뭇거려싿.
'가만. 그냥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도훈이도 한 번쯤 재미라도 보는 게 좋지 않겟어?'
성수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진 현아에 대해 경고를 남기려다 생각을 고쳤다. 따지고 보면 도훈도 여자 없기는 매한가진데, 이 기회에 재미 좀 보라는 뜻에서였다.
'맞아. 나는 여친 있으니 그렇지만, 어차피 도훈이는 솔론데 뭐 어때? 딱 보니까 삘 받으면 원 나잇도 가능하겠더만. 저 고자 새끼도 한 번씩 기름칠할 때는 있어야지.'
도훈이 인기는 많아도 여자 경험이 없다고 오해한 성수는 중간에 생각을 고쳐먹고 현아에 대한 언급을 않기로 했다. 괜히 경고했다가 도훈이 경계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희주 친구들 뭐요?"'
"아, 아니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아하, 난 또. 딱히 모르겠던데요?"
"인마. 그만하면 훌륭하지. 니가 눈이 너무 높은거얀 마."
"아니 뭐 안 예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어차피 뭐 저랑 상관도 없는 애들인데요. 우선이랑 태영이 소개해주려고 부른 거고요."
"어허, 여자 앞에서 선후배고 의리고 없는거야. 암튼, 잘 해봐라."
"뭔 소리예요. 갑자기?"
성수는 거기까지만 힌트를 주기로 했따. 대강 돌아가는 눈치를 보니, 도훈이 가만히 있어도 현아와 소연이 알아서 엉겨 붙을 분위기였다.
"야, 나 또 전화 온다. 저기 서 있는 택시 잡고 갈 테니까 재밌게 놀다가."
성수가 도망치듯 택시로 달려가자 도훈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형! 조심히 가요."
"알았어! 인마."
떠나는 택시를 보며 도훈이 피식 웃었다.
[마지막에 성수 군의 태도가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경고를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말을 바꾸던데요.]
'안 들어도 대충은 알 것 같아.'
[흐음, 근데 어차피 주인님도 미션 때문에 태영군을 밀어줘야 하니 어차피 성수 군과 똑같은 상황 아닐까요?]
'다른데?'
[다르다뇨?]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여자는 둘이잖아.'
[네? 아니 지금 그 말씀은….]
'태영이 챙겨줘도 하나가 남는다는 소리지.'
[그럼 우선군은요?]
'어허. 성수 얘기 못 들었어? 여자 앞에서 선후배고 의리고 없다잖아.'
[아, 아니 주인님. 우선 군도 동정입니다. 이대론 마법사가 되버린다고요.]
'자기 밥그릇은 원래 자기가 챙기는 거야. 뷔페 깔아줬으면 알아서 떠먹을 줄도 알아야지.'
[역시, 천하의 난봉꾼.]
'됐고.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태영이 오늘 밤 밀어주려면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이니.'
도훈이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복귀하자마자 겜창 소연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빠,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응?"
"심심한데 우리 게임이나 할래요?"
< 1073. 회장의 자격-11-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