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2. 회장의 자격-10- >
도훈과 통화를 마친 성수가 급히 돌아섰다.
그때 그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한 상대는 성수와 몸을 부딪히더니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자빠지고 말았다.
쿵!
출돌은 미미했지만, 성수의 덩치가 워낙 헤비급이라 약간의 충돌에도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아이코!"
성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뒤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어라? 넌 희주 친구아냐?"
놀랍게도 성수가 부딪혀 쓰러진 사람은 희주친구 현아였다. 집보다 클럽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클럽 죽순이. 현아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많이 아픈지 주저앉은 채로 훌쩍거렸다.
"아잉, 몰래 놀래 키려고 했는데 갑자기 돌아서시면 어떻게 해요?"
"미, 미안. 누가 오는 줄 몰랐어."
성수가 재빨리 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 큰 처녀가 길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모습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힝! 궁뎅이 아파 죽겠네."
잔뜩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린 현아가 성수의 두툼한 손을 붙잡았다. 그녀를 단숨에 일으키려던 성수는 불쑥 그녀의 다리가 쩍 벌어진 모습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치마를 입은 채 가랑이를 벌리는 바람에 팬티가 훤히 내다보였던 것이다.
'이크, 저게 뭐야. 다 큰 처녀가 칠칠맞게 시리.'
성수는 얼결에 벌어진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는 현아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넘어진 것은 우연이지만, 일부러 치마를 입은 채 다리를 벌리며 팬티를 보여준 것이었다.
현아는 손을 마주잡으면서 고개를 돌리는 성수의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덩치는 산만한데 은근 하는 짓이 귀엽단 말이야? 딱 내 스타일인데.'
현아는 처음 화장실에 모였을 때부터 성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본래부터 곰처럼 듬직한 남자를 선호하는 취향. 성수는 비록 생긴 건 투박하지만 등빨이 워낙에 좋은 보기드문 거구였고, 덩치 큰 남자를 선호하는 현아의 입맛에 쏙 들어 맞았다.
"그리고 저 현아에요.'
"응?"
현아가 치마의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털면서 대답했다.
"희주 친구 아니고 현아라고요."
"아, 알지. 현아."
"제 이름 벌써 외우셨어요?"
"어. 아까 소개할 때."
"피, 난 또 저한테 관심도 없는 줄?"
끼를 부리는 듯한 현아의 태도에 성수가 살짝 당황했다.
'뭐, 뭐지? 난 분명 여자친구 있다고 말했는데….'
시쳇말로 씹선비에 가까운 정조관념을 가진 성수에겐 바람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자신은 처음부터 애인이 있다는 걸 밝혔으니 상대가 이성적으로 다가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희주의 친구들은 상대가 마음만 들면 유부남 할아버지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류였다.
소위 골키퍼 있으면 골 못 넣냐는 저돌적인 스트라이커 타입, 그리고 이제까지의 경험상 애인이 있고 말고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놈들이 더하면 더했지.
"근데 뭐하러 나왔어?"
성수가 민망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오빠 따라 나왔죠."
"나, 나를?"
갈수록 점입가경인 현아의 태도에 성수는 점점 혼란스러웠다. 그만큼 현아의 답변이 노골적었던 것. 성수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현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빠한테 담배 빌리러 나왔다고요. 방금 무슨 생각하신 건데요?"
"아, 아 담배?"
잘못 넘겨짚었다는 생각에 성수가 민망한 얼굴로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주었다.
"근데 이거 좀 독한데 괜찮겠어? 8미리 짜린데?"
"상관없어요."
현아는 거침없이 담배를 받더니 그대로 성수를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지나치게 들이대는 느낌에 성수가 움찔 물러서자 현아가 담배를 깨문 채 소리쳤다.
"불이요."
"아, 아 내 정신 좀 봐."
성수가 후다닥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도 생소하거니와, 불까지 붙여달라는 여자는 오랜만이었에 성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희주 친구들이 제법 논다고 하더니 담배도 곧잘 피우는 구나.'
그는 어려서부터 엄하게 운동을 배워서 그런지 씹선비 기질이 다분했다. 특히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행동을 잘 이해하질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직속 후배도 아니고, 희주가 어렵게 호출한 친구였기에 별 소리 없이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후-. 세긴 세네요. 8미리는. 센 남자들은 다 이렇게 독한 거 피나?"
"어? 그게 무슨…."
"오빠 쎄잖아요."
자꾸 모호하게 말하는 현아의 화법에 성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뭐가 세다는 거지? 당연히 힘이 세다는 소리겠지?'
"아니 꼭 뭐 그거랑은 상관없는데…."
"후훗. 저 봐, 자기 세다는 건 부인하지 않는 거."
"응?"
난데없이 말을 놓은 현아의 태도에 성수가 당황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 까진 그래도 기호식품이거니 이해를 했는데, 연장자임을 뻔히 알면서 말을 함부로 놓는 것은 씹선비인 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근데 이 꼬맹이가 나를 언제 밨다고 자꾸….'
성수가 점점 스팀이 올라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현아가 화제를 바꿨다.
"아, 근데 오빠. 도훈 오빠란 사람 정말로 잘생겼어요?"
'얼씨구? 이젠 또 존댓말이네?'
따끔하게 한 소리 하려던 성수는 다시 존댓말로 바뀐 현아의 말투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기가 막히게 선을 넘지 않으면서 신경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도훈이? 응, 잘 생겼지."
"아항. 난 근데 잘 생긴 남자보다 힘 좋은 남자가 더 좋더라고요. 저기 안에 희주랑 소연이랑 다르게요."
"그래?"
또 다시 성수를 의식하는 발언.
성수는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는 현아가 부담스러워졌다. 자신은 엄연히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었고, 괜히 오해받을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아가 담배를 다 태워가는 기색을 보이자 곧바로 말했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
"잠깐만요."
"응?"
"한대만 더 주실래요?"
"방금 폈잖아?"
"저 원래 줄 담배 피워서요."
"아…."
담배는 몸에 해로우니 조금만 피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본인이 흡연자인 입장에서 충고가 먹힐 리 없었다. 성수가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현아가 투덜거렸다.
"좀 있다 편의점 들르면 한 갑 사드릴게요. 됐죠?"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마치 담배 주기가 아까워 안 주는 것처럼 몰아가는 통에 성수가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현아가 말했다.
"오빠가 물어요."
"응?"
"물어보라고요."
성수는 현아가 혼자 피우기 뻘줌하니 같이 한 대 피우고 들어가자는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현아가 성수에게 바짝 다가오더니 끝만 남은 담배를 서로 맞부딪히는 게 아닌가?
고작 10Cm 거리로 얼굴을 맞대는 통에 성수가 까무러치게 놀라 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현 여친을 사귄 후로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여자는 현아가 처음이었다.
현아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소리쳤다.
"음음!"
불이 옮겨 붙도록 빨라는 의미.
성수가 다급히 담배를 빨아들여 불씨를 옮겼다.
'뭐지 이건? 굳이 라이터 놔두고….'
현아의 수작에 성수가 정신을 못 차리는데 현아가 먼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더닌 성수가 물고 있던 담배를 빼앗았다.
"어? 지금 무슨…."
"왜요? 저 피울라고 불붙인 건데요?"
"아니 그건 내가 빨던 건!"
성수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이미 현아는 침이 축축하게 묻은 필터를 입에 쏙 밀어 넣은 채였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하얀 담배 필터가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선정적이라 성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게 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간접 키스잖아?'
당황하는 성수의 모습을 보고 현아가 귀엽다는 듯 생글거렸다.
"흐응, 순진한 척하는 건지, 진짜로 순진한 건지."
또 다시 반말.
당황하던 성수가 도저히 못 참고 발끈하려던 찰나.
갑자기 그의 주머니에 담긴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
성수는 할 말이 많았지만 희주를 봐서 화를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차라리 통화를 핑계로 현아와 멀어지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어, 도훈아. 어디야?"
-형. 저 다시 그쪽으로 가고 있거든요? 별일 없죠?
'별일이 없긴. 처음보는 여자애가 막 들이대는 중인데… .'
성수는 할 말은 많았지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또한 현아가 바로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잇을까봐 구체적인 설명도 할 수 없었다.
"별일은 무슨. 언제쯤 와?"
-멀지 않은 곳이에요. 대충 5분?
"그래. 얼른 와. 보고 싶다야."
성수는 자신을 희롱하는 듯한 현아의 태도에 놀라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도훈이 돌아오면 남녀 쪽수도 안 맞으니 자기가 물러서도 될 것 같았다.
'도훈이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난 수험생이라고. 희주 친구들 위험해서 안 되겠어. 여자친구한테도 죄책감들고. 차라리 솔로인 도훈이 상대하는 게 낫지.'
성수는 도훈이 얼른 돌아오기만 고대하며 다시 술자리로 복귀했다.
***
-그래. 얼른 와. 보고 싶다야.
'응? 저 곰탱이가 왜 저러지?'
평소 오글거리는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성수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도훈의 귀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통화를 끝낸 도훈이 다시 아영을 찾았다.
"다 골랐어?"
"음…. 글쎄요….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어서."
아영은 무척 진지한 얼굴로 가판에 진열된 목록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나와 안내했다.
"긴 걸로 원하시나요? 짧은 걸로 원하시나요?"
"네?"
"아니, 런닝타임이요."
DVD방 알바는 영화를 추천하기 앞서 시간부터 물었다. 대충 늦은 시각 술에 취해 들르는 커플들이란, 어차피 목적이 뻔했다.
모텔을 가자니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가만 있자니 몸이 달아 으슥한 곳을 찾는 것이다. 애초에 영화를 볼 생각은 없으니 적당히 시간만 맞춰주면 그만이었다.
"긴 거 보실거면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어떠낙요? 플레이타임 3시간 3분 짜린데…."
알바의 제안에 아영이 곧바로 거부의사를 밝혔다.
"저 판타지 영화 안보는데요?"
"아…, 네. 넵."
무안할 정도로 잘라말하는 아영의 태도에 알바가 머쓱함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씹빠, 가시나 오지게 이쁘네. 남자 존나 부럽다. 안에서 떡주무르듯 주무르겠지? 근데 뭘 또 굳이 영화를 고르는 척하고 있어? 어차피 물고 빨고 지지고 박느라 영화 따윈 안중에도 없을 거면서….'
알바는 DVD방 안에서 젊은 커플이 할 일은 뻔했으므로, 아영의 태도를 속으로 비웃었다. 간혹 보면 여자 손님중에서 진짜로 영화를 보러 왔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행동하는 부류가 있었던 것.
물론 그런 손님들이 나가고 난 방에는 늘 찢어진 스카킹과 쓰고 남은 콘돔이 발견되기 일수였다.
'하여간 고상한 척은 다 떨어요. 어차피 알만한 선수들끼리.'
알바가 계속 속으로 궁시렁 거리는데 아영이 도훈을 보고 말했다.
"그냥 오빠 먼저 가요. 영화는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아니, 그래도…."
"어차피 같이 볼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지 않아요?"
"그런가?"
지금으로부터 10여분 전.
도훈은 떠나가는 아영을 붙잡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에 가지마."
은연중 붙잡아 주길 바랬던 아영이 놀라서 도훈을 쳐다보았다.
"가지말라니 무슨 뜻이에요?"
"우리 아직 얘기 안끝났잖아. 기다려줘. 다시 돌아올테니."
아영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붙잡는 도훈의 태도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캠프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데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아싸기질이 충만하다해도 자신이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 마저 무시당하고 싶진 않았다.
의도치않게 도훈으로선 밀당을 해버린 셈이었는데 갑자기 적극적으로 바뀐 태도에 아영이 살짝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그녀의 청개구리 기질은 마음과 달리 또 반대로 나왔다.
"제가 기다려야할 이유가 있나요? 먼저 만나자고 한것도 오빠가 중간에 다른 약속을 잡은것도 오빠잖아요."
이는 불만의 표출이라기보다 도훈의 해명을 바라는 물음이었다. 아영으로서도 기다릴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도훈이 이를 간파하고 대답했다.
"일단 지금 불려가는건 내 자유의지가 아니야. 학과 회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가는거지."
"그리고요?"
"오늘밤 너에게 할 얘기가 남았기 때문이야."
"지금하세요."
"그렇게 짧게 말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그래."
"흠."
"그러니 기다려줘. 꼭 다시올게."
아영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실상 그녀도 이대로 헤어지는게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던 야구마저 뿌리치고 도훈을 보러왔다. 그와 어떤식으로든 결판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흠. 얼마나 걸릴것 같은데요? 혼자 심심하게 앉이있긴 싫은데."
"너 혹시 영화 좋아하니?>"
그렇게 아영을 데려다 주기위해 DVD방에 온 것이었다.
도훈을 먼저 보내며 아영이 당부했다.
"영화 끝날때까지만이엥. 만약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면."
"걱정마. 금방 돌아올테니."
도훈은 아영을 DVD방에 짱박은 뒤 급히 첫번째 술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태영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말로 가르칠 수 있는게 아니었다.
< 1072. 회장의 자격-10- > 끝.
ⓒ 성난불기둥
작가의 말
어제 늦어서 오늘은 조금 일찍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