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087화 (1,054/2,000)

< 1070. 회장의 자격-8- >

희주가 사정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듣던 소연이 못 믿겠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 인싸 오빠가 같이 잇따가 잠시 자릴 비운 거라고? 설마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내가 왜 당장 들킬 거짓말을 하겠어? 정 못 믿겠음 다른 사람들한테 직접 물어보던가."

희주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자 시종일관 그녀를 몰아붙이던 두 사람도 잠시 비난을 멈추었다. 이번엔 현아가 물었다.

"그럼 그 오빤 대체 언제 돌아오는데?"

"아까 말한 대로 그 동기만 돌려보내고 바로 올 거야."

"그냥 같이 부르지 그랬어?"

"맞아. 우린 상관없는데."

두 사람은 원래부터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처음 만나는 자리에 술이 없으면 어색하게 느낄 정도였다. 희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낯가림이 너무 심한 애라 어쩔 수 없었어. 사실 우리 과 안에서도 왕따거든. 너희들 때문이 아니라 그 애 성격 때문이라고."

"왕따?"

"헐. 너네과 왕따는 희주 너 아니었어?"

"뭐! 이년들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나랑 싸우자는 거야?"

참고 참던 희주가 마침내 폭발하자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꺄르르 웃었다.

"꺄하하하! 이제 좀 희주 같네."

"그러게 왜 그렇게 점잔을 떨고 있어 너답지 않게."

"맞아. 그냥 평소처럼 해. 우리가 더 어색하단 말야."

희주는 그제야 친구들이 자신을 놀린 것을 깨달았다.

"아니, 여기 우리끼리 있는 게 아니잖아. 밖에 저 사람들은 내가 대학생활 동안 계속 마주치는 사람들이라고. 내 입장 좀 생각해줘."

"알았어, 이년아."

"진짜, 아까 내숭 떠는 거 보고 토 쏠릴 뻔."

두 사람은 말은 재수 없게 했지만, 내침 친구의 처지를 생각해 적당히 자제할 것을 마음 먹었다. 평소 술자리에서 노는 것처럼 놀았다간 희주의 평판마저 깎아 먹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암튼, 너무 심하게만 하지 말아줘. 다들 순진해 빠진 사람들이니까."

"말 안 해도 그래 보이데."

"혹시 아까 그 머리 짧은 오빠 동정이야?"

"우선 오빠?"

"어. 곧 군대 간다는."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딱 보니까 바로 알겠던데?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더라고. 부끄러워서."

"왜? 동정이면 기념으로 한 번 대주게, 안소연?"

"뭐래? 미쳤니? 동정을 먹느니 바람둥이한테 한 번 대주고 말지."

"야야, 딱 봐도 한 놈도 그럴 사람 없어 보이더라. 어쩜 저렇게 찐따들만 모아 놨던지. 그나마 그 부회장 오빠라는 사람이면 모를까."

성수의 이름이 언급되자 희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돼! 성수 오빠는!"

"깜짝이야? 왜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성수 선배는 여친 있단 말이야."

"우리가 뭐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니?"

"나 저번 달 나이트에서 만난 새끼 알고보니까 애까지 있는 유부남이었잖아."

"어쩐지 나이 속일 때부터 그럴 것 같더라니."

"유부남도 신경 안쓰는데 애인 따위가 뭔 상관?"

희주는 망나니같은 친구들을 괜히 불렀다며 속으로 후회했다.

'어후, 이년들을 부른 내가 미친년이지.'

"암튼 그 오빠는 안 돼. 진짜 건드리지 마. 건드려도 넘어가지도 않겠지만.'

"대줘서 안 먹는 새끼를 내가 본적이 없네요, 이 사람아."

"희주, 너 진짜 이상하다? 혹시 그 오빠가 니 섹파…."

"야! 뒤질래 진짜?"

희주가 진심으로 발끈하자 농담을 건네던 소연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셋 다 막장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희주는 여기에 고등학교 일진 출신이라는 배경까지 있었다. 진짜 싸움으로 번지면 두 사람은 희주의 깜냥이 안 되었다.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왜 그렇게 정색해?"

"그래, 희주야. 화 풀어. 원래 이년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잖아. 하여간 골빈 년 같으니."

"뭐래? 내가 너만 하겠니? 피임도 제대로 못 해서 저번 달 응급피임약 처먹은 년이!"

"야!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갑자기 또 두 사람이 옥신각신 다투자 희주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 셋이 모여있으면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아는 사람들 앞에서 이 꼴을 보여주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어휴, 미치겠네 진짜.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군대 갈 사람들인데, 소문이 얼마나 날려고.'

희주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친구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들 진짜 내 생각 조금이라도 한다면 밖에 나가서 이러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았어, 이년아. 진짜 같은 말 몇 번씩 하는 거야?"

"근데 그 훈남 오빠는 언제 돌아온데?"

"몰라. 연락 오겠지."

"내가 그 오빠 올때까지만 참는다."

"맞어. 희주가 잘생겼다고 했으니 꼭 얼굴 보고 가야지."

희주는 도훈을 고대하는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도훈을 이들과 만나게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

"그래서, 너는 앞으로 나랑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건데?"

"……."

나는 물음과 동시에 아영의 속마음을 엿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말수가 없다고 속내를 숨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답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고?'

[스킬을 쓰실 생각입니까?]

'계속 저렇게 나온다면.'

그때 침묵하고 있던 아영이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엔 오빠가 먼저 대답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네."

"난 이미 말했잖아. 너랑 잘 지내고 싶다고."

"잘 지낸다는 게 무슨 뜻이죠?"

아영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대답 여하에 따라 반응을 달리하겠다는 태도였다.

'지금이군. 이쯤에서 마음의 소리 가자.'

[넵, 주인님.]

아영은 모르고 있겠지만 나에겐 상대의 속마음을 엿들을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도 않는 건 아니니까.

{설마 나도 다른 여자애들처럼 따먹을 생각일까}

'빙고.'

[거의 치트키군요 이건.]

{그렇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아영의 속마음을 듣고 있는데 의식의 흐름이 뭔가 이상했다.

{…하아, 모르겠어. 바람둥이 같아서 너무 싫은데…, 자꾸 생각나고….}

'어랍쇼?'

[분위기 살짝 미묘한데요?]

'이거 그린라이튼가?'

[좀 더 들어보시죠.]

"왜 대답이 없어요?"

"나도 생각 중이야."

{그때 그걸 봤으면 안 됐었는데…. 그 장면을 본 뒤로 도훈 오빠의… 크고 굵직한 그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아아, 그게…, 그게 내 뒤로 들어오면 어떤 느낌이….}

'그랬군.'

[뭐가 말입니까?]

'아영이는 지금 딜레마에 빠져있어.'

[딜레마라니요?]

'내가 정말로 얄미운데 본능적인 끌림 때문에 뿌리치지 못하는 거라고.'

[그건 완전 상방된 감정 아닙니까?]

'그러니까 딜레마지. 머리는 거부하고, 몸은 원하는.'

[몸이 원한다고요? 전혀 그런 내색은 안 보이던데요?]

'그게 아영이의 특성이니까.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숨기잖아. 하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지만.'

[그러니까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영이가 오늘 왜 나온 것 같아?'

[회장의 호출?]

'그거야 허울좋은 명분이지. 회장이고 지랄이고, 지도 교수가 불러도 나올까 말까할텐데.'

[이미 그때부터 갈등이 벌어진 거군요.]

'그렇지. 좋아하는 야구시청도 중단하고 뛰쳐나올 만큼, 몸이 나에게 달아있는 거야.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쓰레기니까. 저런 쓰레기에게 끌리는 자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

[그래서 딜레마군요. 그럼 해법은 뭡니까?]

'본능이 이기게 만들어 줘야지.'

"하아, 대답하기 싫은면 관두…."

"박아영."

"네?"

"박아."

"…예?"

"영."

"뭐 하시는 거에요 지금?"

아영이 짐짓 화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마음의 소리로 나에게 속내를 모두 까발린 상태다. 이쯤 되면, 남은건 풀악셀 뿐.

"늘 생각했어. 넌 이름부터 참 야하다고."

"뭐라고요?"

"아니 그렇잖아. 박아영이라니. 대체 뭘 박으라는 건데?"

나의 희롱에 변화 없던 아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 지금 저한테…."

"어, 성희롱했어."

"아니 무슨 이런 저질 같은!"

"왜? 이런 사람인 줄 알고 있던  거 아니야?"

"오빤 제가 우스워요?"

"아니? 예쁜데."

"……."

아영이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친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콧바람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 뿜어 나왔다.

아영의 몸의 열을 식히려는 지 혼자 맥주잔을 들다 옆에 있던 소주를 보고는 갑자기 폭탄주를 말기 시작했다.

콸콸콸-

맥주의 양에 비해 너무 많은 소주가 희석된 폭탄주를 아영이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꿀렁거리는 목젖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쾅-!

원샷을 때린 아영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질이에요. 최악, 최저!"

"아니?"

"발뺌하시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저질일 거라고."

"무, 무슨!"

"좋아. 박아영. 내 본심을 알려줄까? 나는 여자랑 사이좋게 지내는 방식이 무척 심플해."

"……."

"막자. 네가 생각하는 그거야."

"……."

"원하면 너도 얼마든지."

"선배는 미쳤어요."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뭐라고요?"

"박아영. 너는 내가 그런 사람인 걸 캠프 첫날 밤에 알았어. 맞지?"

"……."

"그리고 둘째 날 밤에는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지."

"……."

"모든 진실을 알면서도 왜 침묵했을까?

"그건……."

"그래서 난 생각했지. 아영이가 내 비밀을 지켜줄 생각이구나."

"제가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러면 나도 아영이에게 선물을 줘야 할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제, 제 말 지금 안 듣고 있는 거예요?"

"해서 아영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어. 그게 무엇이든."

말을 마치자 아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홧김에 들어킨 폭탄주가 곧바로 효력을 발휘하는지 아영의 피부가 점점 빨갛게 변해갔다. 이만엔 살짝 땀이 맺히고, 눈동자도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 손끝으로 툭 밀기만 해도 그녀는 폭주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해. 박아영,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

"괜찮아. 뭐든."

"……."

"네가 내 비밀을 감춰준 것처럼, 너의 비밀도 내가 지켜줄게."

"저는…."

마침내 아영이 조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렸다.

***

"꺄하하하, 이 오빠 겁나 웃겨!"

현아가 박장대소를 하며 허리를 젖혔다. 보낼부터 웃음이 헤픈 그녀는 술이 들어가자 처음의 불만도 잊고 마음껏 술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동정인 우선을 놀리는 게 재밌는지 교묘한 섹드립을 치며 그를 자극하면서 놀라는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오빠도 자전거 좋아해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체힘이 좋다는데?"

"아앗, 허, 허벅지는 좀…."

"어머, 허벅지 두꺼운 것 봐. 오빠 여친 될 사람은 진짜 좋겠당!"

희주는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성수와 눈이 마주쳤다. 성수 역시 알아서 분위기를 띄우는 희주의 친구들이 마음에 쏙 드는지 테이블 밑으로 몰래 따봉을 날렸다.

'희주야. 오늘 너의 활약은 절대 잊지 않을 게.'

희주도 속으로 생각했다.

'휴-. 다행이다. 술 게임으로 빨리 취하게 해서 그런지 벌써 맛탱이 가기 시작했구나.'

예상했던 대로 처음엔 불만이 팽배하던 친구들은 소맥 폭탄주를 몇 잔 걸치고 나더니 평소보다 훨씬 업된 상태로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희주는 경험상 이 정도로 술이 올라오면 친구들이 더는 남자의 외모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제부턴 술자리에 끝까지 남은 사람 중 아무라도 그녀들을 모텔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도훈 오빠는 왜 연락이 없지? 시간 얼추 된 것 같은데….'

희주가 몰래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대화에 혼자 끼지 못하고 있던 태영이 불쑥 물었다.

"뭐 보는데? 또?"

"어? 아니야. 아무것도."

"남자친구 연락이도 기다리는 거야?"

"남친?"

"어머, 희주 너 우리 몰래 남친도 사겼어?"

"꺄아, 얘가 원래 우리랑 주말마다 클럽가고 놀았거든요. 근데 몇 달 전부터 싹 끊더라니….'

갑자기 시선이 자기 쪽으로 쏠리자 희주가 급격히 당황했다.

태영의 그 촉새 같은 입이 문제였다.

'아씨, 저 모지리 같은 게!'

실은 태영은 태영대로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분명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과 우선이었는데, 희주의 친구라고 온 두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에겐 말도 걸지 않고 성수와 우선에게만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성수는 처음부터 별 생각 없었기 때문에 희주 친구들과 편하게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은 완전히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남녀 짝수가 맞았기 땜누에 희주가 태영을 케어 해주면 별일이 없었겠지만, 친구들이 말 실수 할까 신경쓰면서 도훈의 연락을 기다리던 희주에겐 태영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 결과 모든 게 마음에 안 든 태영이 갑자기 깽판을 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가 남자친구가 어딨다고."

"아닌데? 분명 무슨 오빠라는 사람이던데?"

태영이 몰래 발신자까지 봤는지 입을 터는 바람에 희주가 더욱 궁지에 몰렸다.

'아오! 저 병신 새끼를 진짜.'

그때 옆에 있던 현아가 뭔가 떠올랐는지 좌중을 향해 물었다.

"맞다. 근데 그 잘생긴 오빠라는 사람은 언제 와요?"

이제껏 모든 노력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

< 1070. 회장의 자격-8- > 끝.

ⓒ 성난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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