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9. 회장의 자격-7- >
희주는 늘 친구가 많았다.
얼굴은 말광량이 삐삐처럼 못났지만, 몸매 하나는 누구나 엄지를 치켜들만큼 빼어났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 역시 하나 같이 미인이었다.
하지만 끼리끼리 논다던가?
희주는 태생적으로 고리타분한 사람과는 궁합이 맞질 않았다. 학창 시절부터 생리통이 심하다며 학교를 땡땡이치고 동네 양아치 오빠들과 어울릴만큼 자유분방했던 희주는, 딱 그녀만큼 잘 노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렸다. 따라서 그녀가 절친으로 여기는 두 친구 역시 희주 못지않게 과거가 화려했다.
게임에 미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 가출팸 생활을 했던 겜창 폐인 안소연, 일주일 중 하루만 빼고 매일 클럽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는 클럽 죽순이 정현아. 두 사람 다 희주처럼 놀기 좋아하고 남자를 밝히는 편이었다.
소연과 현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밤거리를 배회하던 중 모처럼 희주의 연락을 받았다.
-뭐해, 현아?
"뭐하긴 이년아, 공짜 술 얻어 먹으려고 부킹 포차 가는길이다. 너 근데 진짜 오랜만에 연락한다? 살아는 계셨네?"
전화를 받자마자 클럽 죽순이 현아가 희주를 쏘아붙였다. 몇 달 전까지 해도 자신들과 주말마다 어울리던 희주가 근래 들어 연락이 뜸한 것을 꼬집었다.
-혹시 소연이도 옆에 같이 있어?
"왜? 너도 끼려고? 흐흐, 한창 재미 보던 남자랑은 이제 쫑났나 보지?"
-야. 의리없는 년, 그냥 껴 주지마. 요새 얼굴 예뻐졌다고 친구들 안면몰수하고 연락 쌩까는 것 봐. 인성 싹 드러났죠, 양희주?"
통화를 듣고 있던 소연이 희주보고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두 사람은 사실 희주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었다. 희주가 최근 괜찮은 남자를 사귄 뒤 날라리인 친구들이 부끄러워 자신들과 거리를 둔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희주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간만에 연락해서 미안. 근데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니가 남자 없이 잠이나 자는 애니?"
"흐흐, 남자가 하나로도 모자랄걸?"
"뭐야, 그럼 쓰리 썸?"
간만에 희주가 먼저 연락해서인지 두 사람이 신이 나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말은 싸가지 없게 해도 몇 년을 같이 어울렸던 절친이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흘린 희주가 용건을 전달했다.
-그게 아니라, 너희들 공짜 술 얻어먹고 싶음 이쪽으로 올래?
"공짜 술이라고?"
-왜? 부킹 성사됐는데 쪽수 모자라?"
-아니 그게 아니고….
희주가 짧게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소연이 현아의 전화기를 뺏어들더니 어처구니 없다는 듯 따져물었다.
"야, 얘기 들어보니까 공짜 술이 공짜 술이 아닌 것 같네? 거기가서 너네 동기들 술 시중이나 들라는 거야?"
-술 시중은 무슨 술 시중이야. 그냥 같이 놀자는 거지.
"그게 그 소리지, 계집애야. 우리 눈 높은 거 몰라? 너가 저번에 그랬잖아. 너네 과에 맘에 드는 남자 한 놈도 없다고."
"맞아 맞아. 희주 눈에 성에 안 찰 정도면 대체 얼마나 오징어 소굴인거야? 희주 눈 신발에 붙어 있는데."
"크크크, 야 희주 다 들어."
"귀있으면 들으라지 뭐."
평소 같으면 희주 역시 성격대로 맞받아쳤겠지만, 당장 아쉬운 건 본인이었기 때문에 계속 저자세를 유지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야, 그리고 너희들 어차피 공짜술 먹을 생각이었다면서? 끝까지 책임지라는 소리는 아니라 잠깐 목이나 축이다 가라는 건데….
그때 소연이 뭔가 생각난 듯 소리쳤다.
"맞다! 너네 과에 인싸 선배 하나 있다지 않았니?"
"인싸 선배?"
"왜, 그때 희주가 그랬잖아. 오징어 떼 가운데 훈남 오빠 하나 껴 있다고."
"맞다맞다. 그 오빠 희주가 자빠뜨린다고 그랬는데?"
"양희주, 혹시 그 오빠도 거기 있니?"
희주는 친구들이 말하는 사람이 도훈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와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되기 전 지나가는 말로 체유고가 남자들을 품평하다 딱 한 명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다는 얘기를 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와 비밀스러운 섹파가 된 후 희주는 더 이상 도훈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의 관계는 친구들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게….
"있네, 있어!"
"오, 그럼 당장 가야지."
"희주가 따먹기전에 우리도 맛 좀 볼까?"
"그거 좋은 생각인데?"
희주는 도훈을 두고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친구들을 패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 점 때문에 친구들을 부르기 싫었던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는 소연과 현아였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둘 다 뱉은 말을 능히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 술자리에서 함께 어울려 놀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머리채까지 잡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도훈이 자리에 없다고 하면 아예 오지도 않을까 걱정한 희주는 어쩔 수 없이 작전을 변경했다.
'그래, 지금 같이 있으니까 잇다고 해도 거짓말 한 건 아니지. 친구들 오기 전에 도훈 오빠를 먼저 빼돌리면 되는 거니까.'
희주는 친구들이 막상 술자리에 오면 도훈이 있건 말건 안면 싹 바꾸고 신나게 놀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원래부터 텐션이 높은 친구들이었고, 술에 취하면 딱히 평소 말하는 것과 달리 남자의 외모 같은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 같이 있어.
"그럼 갈게. 인싸 오빠, 구경이나 해보자."
"어디야? 우리 지금 나와 있어. 택시 타면 30분이면 갈 거야."
-어,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냐면….
희주는 화장실에서 통화를 마친 후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소연과 현아는 발랑 까진 것과 달리 상당한 미인들이었다. 특히 노출이 심한 옷도 보란 듯이 즐겨입었기 때문에 희주도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어휴, 미친년들 진짜.'
희주는 누구보다 친구들을 잘 알았다. 이미 중학 시절 때 아다를 뗀 두 사람은 섹스에 관해선 자신 이상으로 관대했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이도 술 먹고 삘이 통하면 원나잇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취하면 딱히 남자를 가리진 않는 잡식성으로 돌변하는 두 사람이었다.
-야, 얼굴이 무슨 소용이야? 취하면 어차피 다 잘생겨 보이는데. 남자가 좆질만 잘하면 되지.
-맞어, 크고 오래가면 더 좋고.
언젠가 자기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두 사람이 했던 얘기를 떠올린 희주가 주먹을 굳게 쥐었다.
'위험해. 도훈 오빠랑은 절대 못 만나게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자리로 돌아와 있는데, 잠시 후 밖에서 도훈이 돌아왔다. 그녀의 친구들이 합석할 계획임을 알리자, 곧 도착한다는 아영의 거취가 문제가 되었다.
희주는 이를 좋은 기회로 삼고 도훈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네요. 저희과 끼리만 마시면 몰라도 제 친구들까지 오는데, 오빠가 잘 얘기하고 오세요."
도훈이 알겠다며 가게를 떠나자 그제야 희주는 안도하며 문자를 남겼다.
-양희주 : 오빠,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죠? 저도 그때 핑계대고 나올게요. 다시 연락 드릴게요.
몰래 도훈에게 문자를 보내는데 눈치없이 태영이 희주에게 물었다.
"지금 누구한테 문자보내?"
"어?"
"친구들 오고 있데?"
"아…. 어, 어. 금방 올 거야."
희주가 보니 태영은 기대에 잔뜩 부푼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희주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어휴, 내 친구들이 아무리 식성이 좋아도 너는 좀 힘들겠다, 태영아.'
희주는 동기인 태영은 낮게 평가했다. 오히려 말투는 딱딱하지만 우직해 보이는 우선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오히려 우선 오빠는 잘하면 가능하려나?'
물론 친구들이 얌체처럼 술만 얻어먹고 쏙 도망갈지, 계속 그들과 놀지는 본인들 자유였다. 희주는 친구들을 소개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도훈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성사 될리도 없는 만남이었다.
"근데 희주 너 요새 연애하니?"
홍일점인 희주를 배려하기 위해 성수가 말을 걸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
"아니, 요즘들어 많이 예뻐진 것 같아서. 원래 여자들은 남자 사귀면 예뻐진다잖아."
"어머, 선배도 참. 제가 남자가 어딨다고요?"
희주가 입을 가리며 웃으며 성수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내심 속으로는 예쁘다는 칭찬이 듣기 좋았다. 성수의 말마따나 요새 희주는 예뻐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자신이 봐도 어딘가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는데, 정작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정말로 도훈 오빠 마법 때문인가?'
도훈은 일전에 자신의 얼굴에 정액을 뿌리면서 그 얘기를 했었다. 단백질로 구성된 정액을 얼굴에 바르면 콜라겐 효과처럼 피부가 좋아진다나?
물론 당시엔 근거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실제로 피부가 고와지고 얼굴이 점점 예뻐지면서 희주도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실을 얼싸를 당한 게 그가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다른 남자들 정액은 아무효과 없었는데…. 도훈 오빠 정액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모양이야.'
희주는 오늘 밤 이루어질 도훈과의 뜨거운 밤을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와의 섹스는 늘 까무러치게 좋았다. 처음엔 가벼운 섹파 정도로 여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섹스가 너무나 시시하게 느껴졌다.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다른 남자로는 도저히 만족을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아…. 도훈 오빠 생각하니까 또….'
이는 늘 섹파를 두고, 남자를 바꾸던 희주로서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가 한 남자에 이렇게 빠져들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어, 희주 그거 마시고 취했어?"
"얼굴 빨개졌네?"
"아, 아니에요."
희주가 손바닥으로 두 볼을 감쌌다. 고작 술 한잔에 취할리 없었다. 도훈과의 섹스를 떠올리는 것으로 몸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하아. 나도 중증이네 진짜.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희주가 스스로의 변화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가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등장했다.
늘씬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묘령의 여인 둘이 희주를 발견하더니 손을 높이 들고 반갑게 인사했다.
"야! 양희주!"
"꺄아, 계집애, 살아 있었니? 연락 안돼서 죽은 줄?"
두 사람은 희주 이상으로 활달한 성격이었으므로 처음보는 남자들 앞에서도 아랑곳 않고 희주를 격하게 반겼다. 희주는 학과 선배인 성수가 함께 있는 자리였으므로 최대한 절제하며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인사해. 우리과 부회장님. 아니 전임 부회장 오빠. 그리고 이쪽은 다음 주 군대 갈 선배랑 동기.
"안녕하세요!"
"처음 뵙겟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도 환한 표정으로 태영과 우선에게 인사했다. 희주 못지 않은 엄청난 미인들의 등장에 우선이 바짝 얼어 붙었다.
'억, 뭐, 뭐야 얘들은.'
그도 그럴 것이 눈을 어디에 둘지도 모를 만큼 의상에서부터 압도 당했던 것이다.
겜창 폐인 안소연은 얇은 끈나시에, 갈기갈기 찢어져 팬티까지 희미하게 보이는 청 한팬츠를 입고 있었고, 클럽 죽순이 정현아는 브라가 훤히 비치는 시스루 룩에 짧은 치마를 입고 나온 것이었다.
대학에선 이런 과감한 의상의 여학생을 보지 못했던 우선은 문화충격과 더불어 민망함에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다. 반면에 태영은 아예 뚫어져라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와, 씹 대박! 빈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예쁘잖아?'
여자들은 흔히 자기 친구에 대해서 후한 평가를 내린다고 알고 있던 태영은 희주가 자기 못지않은 미인이라고 했을 때도 속으로 긴가민가했다. 학기 초의 희주면 모를까, 지금의 희주면 길 가는 남자들 열에 아홉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볼 만큼 예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주의 친구들이 막상 모습을 드러내자 태영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릴 만큼 놀라고 말았다.
'이 정도일 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꼬셔야지.'
"저기요, 여기 술잔 두 개만 더 가져다 주세요."
미인의 등장에 정신 못 차리는 후배들과 달리 성수가 잔을 챙겼다.
"이쪽에 앉으세요."
"희주 선배님이라면서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희가 훨씬 어린데요."
"아이고, 그래도 초면인데."
성수가 두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숟가락 젓가락도 챙기는 사이 소연과 현아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잠시 손 좀 씻고 올게요."
"희주야 너도 같이 화장실 갈래?"
마치 안 따라오면 죽여버리겠다는 듯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대는 통에 희주가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여자 화장실 문을 닫는 순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야, 양희주. 너 우리랑 장난하니?"
"저 오빠가 니가 말한 인싸라고? 와, 인싸 다 죽었네. 전국 인싸들 다 죽이고나면 저 오빠가 인싸가 될지도 모르지?"
"야, 그러면 대한민국 망해. 사내 새끼들 다 죽어서."
신랄한 비난에 희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에게 간청했다.
"미안. 사정이 좀 있어."
"사정? 무슨 사정?"
"그냥 가려던 부킹 포차나 갈 걸 이게 뭐니 희주야? 너 우리 엿먹일라고 불렀니? 우리가 너한테 서운하게 한 거 있어? 진짜로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 못했어."
두 사람이 하도 따지는 통에 희주는 몸둘바를 몰랐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기대를 잔뜩하고 온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던 탓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 1069. 회장의 자격-7-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