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8. 회장의 자격-6- >
"형, 저 아영이 전화 왔는데 받고 들어갈게요."
"어, 그래. 적당히 잘 돌려 말해줘. 쪽수 안 맞아서 올 필요 없다고 하진 말고. 안 그래도 학과 생활 별로 미련 없어 보이는 애라서 괜히 상처받을지도 몰라."
"네, 형."
성수가 들어가자 도훈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어, 아영아."
-어디세요?
"넌 어딘데?"
-지하철 탔어요. 대충 10분 정도 남은 것 같아요.
'1, 10분?'
생각보다 너무 빠른 속도였다. 빨리 튀어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희주와 별 차이도 안 나게 달려오고 있던 것이다.
[이거 잘하면 두 사람 마주치겠는데요?]
'아 씨, 이게 아닌데.'
-오빠?
당황한 도훈이 말이 없자 아영이 다시 물었다.
"어, 아니 잠시만. 내가 전화기 배터리가 없어서. 충전하고 다시 연락할게."
-아니 어딘지는 알려 주셔야…
뚝.
도훈이 급하게 전화를 끊더니 아예 폰 전원을 꺼버렸다.
[주인님. 지금 사람 불러놓고 뭐 하시는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영이랑 희주가 부딪히는 순간 모든 게 꼬인다고. 거기에 희주 친구들까지 엮이면 진짜 개판 오분 전이 되버릴 거야.'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리면 아영 양은 어쩌고요?]
'적당히 정리되면 다시 연락해야지.'
[하아…. 주인님도 참.]
'난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냐.'
통화를 마친 도훈이 다시 자리도 돌아갔다. 어느새 희주가 신이나서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우선 오빠, 군대 가서 몸 건강히 돌아오세요! 태영이 너도!"
희주의 등장에 우선이나 태영은 입꼬리가 귀밑까지 걸려있었다. 칙칙한 남자들과 술을 마시다, 예쁘게 차려입은 희주와 잔을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고맙다, 희주야."
"나 꼭 잊지 맞아줘. 너희들 3학년 때 돌아올 테니까."
'역시 술자리엔 여자가 끼어야 술맛이 나는구나.'
도훈이 희주의 활약에 안심하며 그녀 옆에 자릴 잡았다.
"도훈 오빠도 한 잔 따라드릴까요?"
"어, 고마워."
희주가 윙크를 하며 도훈의 술잔을 가득 채웠다.
마치 나중에 있을 둘만의 시간을 고대한다는 듯이.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도훈도 살짝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희주가 너무 기대하는 것 같은데….'
[기대할 만하죠. 주인님 때문에 친구들까지 섭외했는데요. 당연히 보상을 바라지 않을까요?]
'하아, 근데 아영이도 오고 있고, 진퇴양난이네 진짜.'
성수 역시 그 부분이 걱정되는지 슬쩍 물었다.
"희주 친구들 30분이면 이쪽으로 온다고 하네?"
"그렇게 빨리요?"
"어, 외출해 있었나 봐."
희주가 보충 설명했다.
"지들끼리 술 마시러 나오는 길이었데요. 공짜로 사준다니까 곧장 이쪽으로 온다는데 요?"
도훈은 점점 압박을 느꼈다.
아영은 10분 후 도착.
희주의 친구들은 30분 뒤 도착이었다.
'젠장. 희주만 아니면 어떻게든 몸을 빼겠는데.'
도훈이 전전긍긍하는 표정을 보이자 낌새를 눈치챈 성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맞다. 아까 아영이도 온다지 않았어?"
태양도 아차 싶었는지 갑자기 제 이마를 쳤다.
"헉! 아영이 오기로 했죠?"
우선도 돌아가는 낌새가 아영이 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을 감지했는지 태영을 나무랐다.
"야, 너가 불러달래서 도훈이 형이 억지로 부른 거잖아. 니가 책임져 인마."
"아니 저는…."
"도훈아, 아영이 어디쯤 왔다던?"
"거의 다 온 것 같은데요."
"난감하네. 우리야 그렇다 쳐도 희주 친구들하곤 서먹서먹할텐데…."
성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냥 도훈이 네가 마중 나가서 적당히 돌려 보내는 게 좋겠다. 지금 이 자리는 아영이 성격에 너무 불편할 것 같아."
태영도 호응했다. 이미 그녀와의 앙금을 푸고 가자는 계획은 잘 논다는 희주 친구들에 말려 깔그리 삭제된 상태였다.
"제 생각에도 그게 좋겠어요. 불렀는데 그냥 가라고 하긴 그러니까…."
분위기가 이렇게 되자 우선도 동조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전부 다 도훈에게 떠넘기는 분위기.
하지만 의외인 것은 희주 역시 같은 의견을 냈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저희과끼리만 마시면 몰라도 제 친구들까지 오는데, 오빠가 잘 얘기하고 오세요."
'오잉?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희주까지? 희주는 반발할 줄 알았는데?'
[혹시 그거 아닐까요?]
'무슨?'
[희주양이 친구들과 주인님을 못 만나게 하려는.]
'아아!'
[아까 보니까 희주양이 의외로 질투가 많더라고요. 특히 자기 친구들을 잘 못 믿는 것 같고.]
'하긴 워낙 잘 노는 애들이라고 했지?'
[그럴 바에야, 주인님을 일단 피신시켜 놓고 나중에 따로 볼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희주까지 저렇게 말한다면야 나로선 땡큐지.'
도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괜히 아영이까지 왔다가 민망해지는 것보다는."
"그러니까. 얼른 가봐. 뭐하면 차라도 한 잔 사주고."
"네. 다시 연락할게요."
성수가 등 떠밀며 도훈을 내보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폰을 켜자 그 사이 희주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양희주 : 오빠,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죠? 저도 그때 핑계 대고 나올게요. 다시 연락 드릴게요.
도훈은 일단 문자를 읽고 답변을 남기지 않았다. 그보다 급한 건 족발집 부근에 도착해 있는 아영을 찾는 일이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도훈이 잽싸게 뛰어갔다.
다행히 아영이 족발집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짙은 흑발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멀리서 보아도 눈에 확 띄었다.
'와…. 아영이가 예쁘긴 예쁘네.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들어오네.'
물 빠진 청바지에 무지 흰 반팔 티, 후드 달린 조끼를 걸친 캐쥬얼한 차림이었음에도 비율이 너무 좋아 모델처럼 보였다.
"박아영!"
도훈이 멀리서부터 아영의 이름을 불렀다. 서성거리던 그녀가 도훈을 향해 돌아보는데, 화장을 옅게 한 얼굴에서 빛이 났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영은 이내 특유의 무표정으로 도훈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미안. 갑자기 폰에 배터리가 나가 가지고. 많이 기다렸니?"
"아뇨. 방금 왔어요. 족발집이라고 말한 게 기억나서."
다행히 아영은 제대로 길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긴 지하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족발집이니만큼 가장 먼저 둘러볼 장소긴 했다.
"다행이네. 길이 엇갈리지 않아서."
"……."
아영은 예상대로 별말이 없었다. 어째서 도훈의 부름에 응답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태도는 어찌보면 귀찮은 것 같기도 하고 흥미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흐음, 너무 조용해서 부담스럽네. 차라리 희주처럼 신나게 떠들었으면 좋겠는데.'
[주인님이 저런 타입의 여성에게 약한 것이 확실하군요.]
'저런 타입이라니?'
[미인인데 말수가 없고 주인님께서 먼저 호감을 표시하지 않는 경우요.]
'어떤 여자든 공략해내야 카사노바지. 어떻게든 해 보이겠어.'
"같이 술 한잔 할래?"
"다른 사람하고 같이 있다가 오신 거 아니에요?"
과연 눈치가 빨랐다. 도훈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거긴 끝났어."
"누구랑 있었는데요?"
"어, 태영이랑 우선이. 알지? 다음 주 군대 가는 애들."
"아…. 네."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 보려고 만났어. 태영이가 너한테 미안한 게 있었나 보더라."
"저한테요?"
"어, 사실 널 불러 달라는 사람이 태영이었거든."
"……."
아영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도훈이 곧바로 눈치를 채고 말을 바꿨다.
"근데 실은 내가 더 보고 싶어서 불렀지."
"…저를요?"
"우리 사이에 좀 더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아영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전 오빠랑 별로 할 얘기 없는데."
"정말?"
"네."
"정말로?"
"네."
"근데 왜 나왔어?"
"……."
"그 말 하려고 나온 건 아닐거 아냐."
"…회장이 불렀으니까요."
아영이 궁색하게 대답했다.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집행부라서 회장의 부름에 응답했다는 태도였다.
"그래? 잘됐네."
"뭐가요?"
"그럼 같이 술 마시자."
"……."
"회장이 마시자는데 설마 거부하는 건 아니지?"
도훈이 아영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아영은 주저하는 듯 했으나 도훈이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갔다. 도훈은 일부러 일행들이 향한 맥주 집과는 반대방향을 택했다.
술집에 도착할 때쯤 아영이 조그맣게 말했다.
"아, 아파요."
"어?"
"손…."
"아, 미안. 내가 너무 꽉 잡았나?"
그제야 손을 뺀 아영은 두 볼이 약간 빨개져 있었다. 도훈이 간판을 보더니 말했다.
"할아버지 맥주? 가게 이름 좋네. 들어가자."
"……."
"이건 회장 요청이야."
"흠."
아영이 마지못해 가게로 들어갔다. 평일 저녁인데도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시원한 맥주로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었다. 일부러 구석에 자리를 잡은 도훈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은 아영을 향해 물었다.
"뭐 마실래?"
"알아서 시켜주세요. 어차피 오빠 마음대로 할 거잖아요."
"삐졌어?"
"……."
아영은 심통이 난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딘가 모르게 도훈에게 불만이 잔뜩 쌓인 것 같았다.
'하여간 까탈스럽긴.'
[아영 양의 반응은 확실히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군요.]
'통통 튕기니까 더 따먹고 싶어지잖아.'
[절대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술 마시면서 한번 떠보면 되지.'
도훈은 소주와 맥주를 같이 시켰다. 이미 저녁으로 족발을 먹은 상태기 때문에 안주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마른 안주와 땅콩이었다.
"태영이 때문에 부른거라고요?"
아영은 꿍해 있던 이유가 그것이었는지 다짜고짜 물었다.
"아니. 태영이가 사과하려고 불렀으면 좋겠다 했는데, 나도 할 말 있어서 불렀다고."
"어쨌든 태영이가 먼저 말 꺼낸 거잖아요."
"내가 후배 말에 휘둘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
아영이 오빠 저 신경 안 쓴다지 않았어요?"
"그랬었지."
"근데 왜 저를…."
"생각해 보니까 신경이 쓰이더라고."
"……."
"그냥. 솔직히 말하면 계속 무시할 생각도 있었어. 근데 앞으로 1년간 집행부 하다보면 계속 얼굴 마주쳐야 하는데, 무작정 불편하게 지낼 순 없는 거잖아."
"그래서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거지."
그때 마침 맥주가 나왔다. 컵을 미리 냉동실에 얼려놓았는지, 겉면에 살얼음이 느껴졌다. 보기만해도 군침이 도는 시원한 맥주였다.
"자, 술 나왔는데 한 잔 할까?"
아영이 별다른 대답없이 잔을 부딪혔다.
유난히 큰 검은 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캬-. 시원하네! 역시 여름엔 맥주가 최고지."
"……."
"참, 너 술 잘 마신댔지?"
"적당히요."
"풉-. 긴장 좀 풀어."
"네?"
"왜 그렇게 표정이 딱딱해? 누가 너 잡아먹는데?"
그 말에 아영이 반응했다.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훤히 아는데 제가 마음이 편하겠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데?"
도훈이 뻔뻔하게 되묻자 갑자기 아영이 맥주를 다시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찌나 술을 잘 마시는 지 벌써 500cc 잔의 절반을 없앤 아영이었다.
"그 날 다 봤어요."
"뭘?"
"계속 시치미 뗄 거에요? 저랑 눈 마주치셨잖아요."
도훈은 기억이 안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차에서…. 수정 선배랑."
"아, 아… 그거?"
"그거?"
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차에서 카섹스를 하다 들켜놓고서 저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이야.
"그래 했어."
"와… 진짜."
"근데 너는 왜 숨어서 훔쳐본 거야?"
"……."
"혹시 관음증?"
"뭐, 뭐라고요?"
쉽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던 아영이 발끈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술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가 오빠 변탠 줄 아세요?"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 그리고 막말로, 내가 누구랑 섹스하건 너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아영은 사귀지도 않는 사람하고 학과 행사에 참여해 몰래 섹스를 하는 행위가 정상적이냐고 물으려다 끝내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도훈의 바람기에 대해 열을 내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도훈이 그때 은근슬쩍 물었다.
"왜? 보고 있으니까 너도 하고 싶어졌어?"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영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세상에 이렇게 뻔뻔한 남자가 있을까? 아영이 화를 내려는데 도훈이 갑자기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난 솔직히 네 태도가 더 이상해."
"뭐요?"
"처음 효민이랑 들키고 나서. 나한테 왜 그랬어?"
"제, 제가 뭘요?"
"팬티를 증거로 들이밀지 않나. 협박을 하지 않나."
"제가 언제 협박을 해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오빠의 실체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요."
"하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
"수정이랑 하던 중에 너랑 딱 눈이 마주쳤잖아."
"……."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혹시 아영이도 나랑 하고 싶은가?"
"무, 무슨 말도 안되는!"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뚫어지게 보더라."
"당황해서 그런거에요!"
"지금도 당황했네?"
"오빤 정말 저질이군요. 이런 얘기 하려고 저 불렀어요?"
"아니. 조금은 서로 솔직해 지자고."
"뭘 더 솔직해지는데요?"
"그래서, 너는 앞으로 나랑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건데?"
< 1068. 회장의 자격-6- > 끝.
ⓒ 성난불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