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6. 회장의 자격-4- >
"뭐 인마?"
도훈이 울컥했지만, 로시의 말에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방금 전 아영과의 통화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희주랑 통화할 때만 해도 넘치던 박력이, 아영의 차가운 말투를 듣는 순간 한순간에 사라진 탓이었다.
'하여간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단 말이지?'
이는 아영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분명 캐프 때만 해도 제대로 한방 먹였다. 생각했는데, 막상 술자리에 불러내려니 호락호락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를 거의 무시하는 식으로 내쳐놓고, 이제와 아쉬운 소리를 하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민망했다.
'으음, 아직 공략이 안 되었다는게 문제로군.'
도훈은 아영이 불편한 이유를 거기서 찾았다.
[공략이라뇨?]
'제아무리 도도한 여자라도 육봉침 한 방 딱 놓고 나면 나긋나긋해지는 게 있단 말이지. 그게 섹스가 가진 힘이고.'
[근데요?]
'그런데 아직도 아직도 아영이를 못 먹었잖아. 캠프때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 막상 먼저 만나자고 숙이고 들어가려니 영 면이 안 서더란 말이지.'
[쯧쯧, 주인님은 확실히 아직 전생의 때가 덜 빠진 것 같군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전생의 찐따 시절 말입니다.]
'찐따라고? 내가 어딜봐서?'
도훈이 버럭했다.
[아니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찐따까진 아니지. 나도 나름 잘나갔다고. 키가 좀 작고, 어? 좆도 좀 작았지만….'
[그게 좀 작은 겁니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전생에도 예쁜 여자들 앞에 서면 주눅이 들지 않으셨나요?]
'음.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과거의 이정우 시절 그는 평범보다 못한 사내였다. 머리가 워낙 좋아 공부는 곧잘 했지만, 왜소한 체격과 그보다 더 왜소한 양물로 인해 여자 앞에선 늘 자신감이 없었다. 그나마 돈이라도 잘 벌어서 억지로 밸런스를 맞춘 것이었다.
[지금에야 키 크고 멋진 이도훈으로 거듭나다 보니 여자들이 대놓고 주인님을 무시한적은 없었죠. 오히려 호감을 드러냈으면 모를까.]
'그렇지.'
[하지만 아영 양은 약간 독특하잖습니까? 아싸 감성이랄까?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는 타입이니까요.]
'그러니까, 로시 네 말은 아영이 전생에 도도한 미인들처럼 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내가 기를 못 펴고 있다는 소리야? 트라우마처럼?'
[캠프 때는 무시 전략으로 일관해 상관없었지만, 막상 먼저 다가가려니 주저하게 되는 거죠. 솔직히 주인님은 환생 후 너무 쉽게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으니까요. 고생한적도 거의 없지 않습니까?]
로시의 팩트폭행이 뼈를 때렸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희주는 아영 못지 않은 미인이다. 취향에 따라 갈릴 뿐 외모에선 둘의 우위를 가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희주를 막대하는 것처럼 아영에겐 그럴 수 없었다.
로시는 그 이유로 아영의 냉랭한 태도를 꼬집은 것이었다.
[아영양은 절대 사근사근한 타입이 아닙니다. 뭐랄까, 전형적인 차도년의 성정을 지니고 있죠. 심지어 남자를 보는 눈도 특이하기 때문에 주인님의 우월한 외모나 키 같은 데 혹하지도 않고요.]
'듣고 있으니까 점점 도전정신이 솟구치는데? 감히 나를 우습게 봤다는 거잖아?'
[우습게 보는 것까진 아닌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온다고 했으니까요.]
'하긴? 걔 완전 광팬이잖아. 캠프가서도 혼자서 핸드폰으로 계속 시청할 정도로.'
[그렇게 좋아하는 야구를 뒤로하고 주인님이 나오라는 소리에 군말 없이 나온다는 걸 보면 주인님에 대한 호감은 여전히 높다는 걸 반증합니다.]
'흐음, 그럼 오늘 밤 역시 각인가?'
[오늘 밤요? 우선군과 태영군이 보고 싶다 해서 부르는 거 아니었습니까?]
'부르기야 걔들 때문이지만, 따먹는 건 내 자윤데? 여기가 무슨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허어, 너무 욕심쟁이십니다, 주인님은.]
'아까도 말했지만 난 내 여자 남한테 돌릴 생각 눈꼽만큼도 없어.'
[아영 양은 아직 주인님의 여자가 아닌데요?]
'어차피 내 여자가 될거야. 두고 보라고.'
도훈이 각오를 다지며 다시 술집으로 복귀했다.
***
"야, 어떻게 됐어?"
통화를 마치고 온 도훈의 얼굴이 심상치 않자, 성수가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아영 때문에 도훈의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던 것.
"역시 무리죠? 하긴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군대 간다고 느닷없이 부르면…."
"희주는 뭐래요? 희주는 온데요?"
도훈은 이내 찝찝한 감정을 털어버리고 씩 웃었다. 아영과의 일은, 만나면 절로 해결될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당연히 둘 다 오지. 회장이 부르는데."
"여어, 이도훈이! 좀 하는데?"
"와, 아영이도 온다고요?"
"형 진짜 대박이다."
한껏 후배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던 도훈이 다시 겸손하게 말했다. 굳이 못난 후배들 앞에서 여성편력을 자랑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 희주가 밖에서 놀고 있었나 보더라고. 심심한데 잘 됐다고 곧장 이곳으로 온 다네."
"역시 희주!"
"희주가 또 술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잖아."
"아영이는 뭐. 일단 대충 핑계대고 불렀어. 근데 이런 분위긴 줄 알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도훈이 족발집을 장악한 체육과 남학생들을 보고 말했다.
처음엔 분명 군대 가는 동기를 위로하는 겸 송별의 자리였지만, 어느새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두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성수 역시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흐음, 확실히 여긴 좀 분위기가 아닌듯. 얼른 자리 파해야 겠다. 도훈아. 이쯤에서 애들 해산시키자."
"바로요?"
"어. 여자애들 오기 전에 파장해야지. 개떼같이 족발 뜯고 있는데,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냐. 안 그래도 남자들밖에 없어서 부담스러울 텐데."
"근데 갑자기 끝낸다고 하면…. 애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죠?"
도훈이 망설이자, 이번엔 성수가 앞장섰다. 후배들 불러내라고 시킨 것이 적잖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이건 나한테 맡겨."
성수가 테이블에서 육중한 몸을 일으키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자자, 주목."
하지만 워낙 왁자지껄한 분위기라 절반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성수가 다시 크게 한 번 소리쳤다.
"체육과, 주목!"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그의 목청에 다들 화들짝 놀라 성수를 주목했다. 은퇴(?)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체육과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다들 배불리 먹었냐?"
"넵!"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야, 이제 아니잖아."
"감사합니다. 전임 부회장님!"
"그래. 배불리 먹었으면 다행이다. 오늘 송별회는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한다."
"벌써요?"
"아직 술도 남았는데?"
"에이, 오늘 밤 끝까지 달려야죠."
남학생들은 기왕 시작된 술자리를 끝내기가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방학 중이라 내일에 대한 부담도 없었고, 간만에 송별회 핑계로 여럿이 모이다 보니 밤을 지새울 분위기였다. 성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우선과 태영을 팔았다.
"더 놀고 싶은 사람은 니들끼리 알아서 노시고요, 우선이랑 태영이 내가 좋은 데 데려갈려고 그래."
"좋은데요?"
"좋은데라면?"
"오, 설마!"
"오오, 드디어!"
"인마. 너무 구체적으론 말하지 말고. 여기 우리끼리 있는 것도 아닌데."
"네, 넵!"
좋은 곳을 데려간다는 성수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그들은 우선과 태영에 대한 예의는 이미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했다. 더 남아있겠다는 학생들도 자기들끼리 2차를 가거나, 아니면 피씨방 갈 생각밖에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위하여 한번 외치고 끝내자."
"위하여!"
누구를 위하는지 모를 건배를 끝으로 송별회가 끝이 났다.
후배들을 모조리 쫓아낸 성수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봤냐? 이 정도는 되어야 감투를 쓰는 거라고."
"대단하시네요, 형."
우선이 살짝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아니 형, 근데 좋은데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그냥 1학년 후배들 만나는 구만."
태영도 거들었다.
"맞아요. 솔직히 소개팅 같은 것도 아닌데."
"이 새끼들이 불쌍해서 여자애들이랑 술 마시게 해줬더만,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네? 양심은 있는 거지?"
그때 소개팅 이야기를 들은 도훈이 뭔가를 떠올렸다.
"아, 그래. 진짜 소개팅 해?"
"네?"
"지금요?"
"아니 소개팅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긴 한데…."
"뭔데요?"
"도훈이 너 무슨 건 수 있냐?"
도훈이 말했다.
"희주 있잖아요."
"희주?"
"그냥 놀자고 부르는 거 아니었어요?"
"희주가 예쁘긴 하지만…. 저도 군대가는 입장에서 그건 좀…."
"뭔 소리야 인마. 김칫국 마시지 말고. 희주 술 친구들 많잖아. 희주가 여기 동기들보다 밖에 애들하고 훨씬 잘 어울리는 건 알지?"
"아! 희주 친구!"
희주 친구라는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유상종이라고 잘 노는 희주 친구들은 또 얼마나 잘 놀 것인가?
희주나 아영이나 내심 학과 후배고 동기다 보니 특별한 썸씽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반면, 외부인이라면 또 입장이 달랐다.
"와, 도훈이형 진짜!"
"물론 희주가 동의해야지. 희주 친구들도 동의해야 하고."
"근데 아영이는 어떻게 해요?"
"아영이는 뭐…."
[무슨 생각으로 말씀하신 겁니까?]
'모르겠어? 희주랑 희주 친구들 세트로 묶어서 떨어내야 아영이랑 독대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럼 희주양은요? 주인님만 보고 달려오고 있을 텐데요?]
'어쩔 수 없지. 오늘은 나를 위해 희생하는 수밖에.'
[와, 인성 진짜. 와!]
'나도 희주한테 잘 해준 거 많아. 걔가 누구덕에 용됐는데? 희주도 날 위해 한 번쯤은 도와줄 수 있지.'
마침 그 얘기를 하는데 도훈의 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희주였다. 정말로 전화를 한 지 30분도 안 돼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도훈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희주니?"
-허억, 허억, 오빠 아직 30분 안 됐죠? 저 거의 다 왔어요. 곧 택시에서 내려요.
도훈은 자신이 희주랑 통화하고 있다는 걸 주지 시킨 후 맥락에 안 맞게 쌩뚱맞은 소리를 했다.
"뭐라고? 족발집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고? 잠깐만 내가 나가 볼게."
"희주 다 왔데요?"
"제가 마중 나갈까요?"
도훈이 잠시 수화기를 떼고 말했다.
"아니. 그냥 내가 나갈게. 나 때문에 와줬는데 예의가 아니지. 근처인 것 같으니 금방 데려 올 거야. 너희들은 2차 어디로 갈지 정하고 있어."
도훈이 양해를 구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오빠? 무슨 소리에요? 저 거기 어딘지 아는데? 지금 내려요.
"잠깐만. 이쪽으로 오지마. 내가 거기로 갈게."
도훈이 택시에서 내리는 희주를 발견하고 후다닥 그녀에게 달려갔다. 희주가 도훈을 발견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옵빠!!"
"어, 나도 반갑다. 잠깐 들어가기 전에 얘기 할 게 있어서."
"누구랑 같이 있는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도훈은 희주를 어깨동무하더니 골목으로 끌고 갔다. 희주는 도훈의 적극적인 스킨십에 그저 좋다고 헤벌쭉 웃었다.
"아잉,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아니 잠깐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해."
골목길에 접어든 도훈이 그제야 눈치를 살피며 희주에게 말했다.
"뭐야? 너 근데 집에서 나온 거 맞아?"
"네. 왜요?"
"아니 의상이…."
희주는 놀랍게도 호피 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상의는 배꼽과 허리가 훤히 비치는 크롭 반팔 형태의 크롭 블라우스. 몸매를 과감히 드러낸 의상에 도훈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무슨 클럽 나가는 줄?"
"헤헤. 오빠 본다니까 특별히 입은 거죠. 이번에 샀는데 괜찮아요?"
"예쁘다. 몸매가 좋으니까 뭘 입도 예쁘네."
"아이참, 오빠도. 근데 아깐 왜 그런 거예요?"
"뭐?"
"통화할 때요. 완전 상남잔 줄 알았네."
"아. 그게…."
도훈이 사정을 말했다. 군대가는 후배들 앞에서 가오를 잡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태영이요?"
"어. 태영이랑 우선이도."
"아…. 그 술자리였구나. 안 그래도 남자애들이 송별회 어쩌고 하던데."
"그래서 특별히 널 불렀지."
"저는 왜요?"
"혹시 주변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 많지 않아? 아니면 공짜술 먹고 싶다거나."
"…예?"
희주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실은…."
도훈은 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희주가 모처럼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난 또 오빠랑 둘이 노는 건줄 알고 왔더니…."
"미안. 나도 그러고야 싶지. 나라고 남자애들하고 노는 게 좋겠니. 희주 너랑 단둘이 놀고 말지."
"힝."
"그게 아니라 애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아니, 뭐 오늘 책임져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술자리만 만들어 주라는 거지. 잘된건 말건 지들 소관이고."
"흐음…."
"힘들까? 희주야."
희주는 도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도훈을 보고 첫눈에 반해 꼬리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원나잇을 밥먹 듯 하는 그녀의 친구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아…, 내 친구들한테 오빠 보여주기 싫은데…."
"왜?"
"그냥 그런게 있어요. …진짜로 불러요?"
"일단 의사만 물어봐. 어차피 당장 못 올 거 아냐."
"술 사준다하고 하면 한 시간이면 올걸요?"
"음, 그럼 어차피 좀 있다 아영이도 잠깐 들르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만 시간 때우자."
아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희주가 언짢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영이가 여기로 온다고요?"
< 1066. 회장의 자격-4- > 끝.
ⓒ 성난불기둥